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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미카 예언서 말씀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주님,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말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러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성공해서가 아니라 실패하고서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치고 통탄하는 데에 있다기보다,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서야 어떻게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원동력이요, 그를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롭게 탄생’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말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오늘 아버지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십니다.
사실,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나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는 그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어히 몰랐겠습니까?
훤히 알면서도,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아니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를 품고 믿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아름다운 장면의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그분의 희망을 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 있음은 바로 당신께서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일 것입니다.
제가 온갖 죄와 허물과 탓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저도, 결코 그분께서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고 믿고 계신 까닭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에서 온다기보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란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나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하여 ‘회개’는 단순한 죄책이나 자책이 아닌, 그분의 ‘사랑에로의 귀환’이요, ‘새로운 부르심과 소명에 대한 응답’이요, 그분께 대한 기쁨과 찬미와 탄성의 노래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러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내 맘대로 하고 샆어서>
오늘 복음은 자비로운 아버지와 두 아들의 얘기입니다.
이 복음을 오늘 저는 몇 가지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에서 자기 몫을 달라고 한 점입니다.
작은아들이 꼭 자기 몫을 챙겼어야 했나 하는 점입니다.
돌아온 작은아들을 받아들이고 잔치까지 베푼 것에 화를 내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하지요.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이런 아버지의 생각처럼 작은아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다 아버지의 것이 되면 좋을 텐데 왜 굳이 자기 재산을 따로 챙기는 것일까요?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둘째로, 작은아들이 먼 고장으로 떠난 점입니다.
요즘 자식들이 시집 장가 가도 부모 곁에 집을 마련하여 왕래하고 또 아이들 돌봄도 받고 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분가하더라도 옆집으로 분가하거나 멀리 가더라도 가까운 도시로 갈 수 있었는데 왜 굳이 그리 멀리 멀리 간 것일까요?
아예 관계를 끊고 상관을 않고 살겠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관계를 끊으려고 한 것일까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라고 큰아들에게 한 말처럼 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버지와 그러니까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았던 걸까요?
왜 굳이 그리 멀리 간 걸까요?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아버지 간섭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싶어서?
아마 그랬을 겁니다.
자기 몫 챙긴 것, 먼 고장으로 떠난 것, 둘 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내 맘대로 살고 싶어서일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것인데, 결과는 아버지의 자비를 떠난 것입니다.
작은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자비가 간섭이었고, 맘대로 할 자유의 침범 또는 제한일 뿐이었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자유와 사랑이 충돌합니다.
자유 때문에 사랑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고, 자유롭기 위해서 관계를 거부하고 자비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이 사순 시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관계보다 고립을, 사랑보다 자유를 더 사랑하는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을 기억하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숨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입니다.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집의 처지가 밖에 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아들이 배고픔에 지쳐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을 때는 집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연습한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하시며 먼저 받아주셨을 때일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 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큰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종처럼 살았으니 오랫동안 아비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사람을 살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 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목을 뻣뻣이 하고 있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꿈을 결정해줘도 될까?>
테니스 선수인 세레나 윌리엄스(Serena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23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73회, 더블스 23회 우승을 하였고, 언니 비너스 윌리엄스(Venus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7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49회, 더블스 14회 우승을 하였습니다.
두 자매가 나란히 세계 랭킹 1위와 2위를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세레나 윌리엄스는 여자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는 한 집안에서 두 명의 모차르트가 태어난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합니다.
이 두 위대한 자매를 키워낸 아버지가 리차드 윌리엄스입니다.
리처드는 두 자매가 태어나기 전부터 위대한 스포츠 스타로 만들 꿈을 가졌습니다.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도 되는 걸까요?
심한 인종 차별을 겪고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던 리처드는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두 딸을 믿고 둘 다 최고의 선수로 키워냈습니다.
이는 인종 차별에 막힌 흑인들에게 자신의 딸들이 희망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역인종 차별자라 볼 수 없습니다.
두 자매가 승리를 거듭하며 자신들이 이긴 백인 선수들을 조롱하자 아버지는 엄하게 야단칩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을 강조하고 두 자매가 경쟁하되 서로 가족임을 잊지 않도록 교육합니다.
두 자매의 지금 심정은 어떨까요? 자신들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테니스를 시킨 것에 후회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모든 흑인들에게 희망이 된 두 자매는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꿈을 꾼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인생을 선택하여 살았다면 지금처럼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도 아버지에게 보이는 존경과 사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개인적인 영광을 위해 딸들을 이용하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자신처럼 힘들게만 살아야 할 것이라고 여기면 더 나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들이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테니스라고 정한 것은 큰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세 자매를 모두 위대한 체스 그랜드 마스터로 키운 아버지 라슬로 폴가의 예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천재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들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꿈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뤄두고 싶습니다.
적어도 자녀들은 아버지의 믿음대로 큰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믿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방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어쨌거나 자녀를 인도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무시하면 자녀는 올바르게 클 수 없습니다.
이는 부모가 잘못된 표지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고 자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잘못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보다는 표지판 없는 도로가 낫지만, 표지판 없는 도로보다는 제대로 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가 낫습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종교도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어 자녀가 커서 선택하게 하겠다는 부모의 입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믿음은 어쨌거나 자녀의 표지판입니다.
오늘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 대상은 이 비유에 나오는 형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죄인들의 회개를 보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모라면 자녀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자녀는 낮은 자존감으로 살 수밖에 없고 삶도 그 믿음대로 됩니다.
우리들도 돌아온 탕자를 정죄하지 않고 인정하시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인정해주시는 분이시지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죄하는 자는 그것을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죄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아버지처럼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부모가 자녀의 삶의 방향까지 정해주어야 하는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일찍 시작하면 그만큼 이점이 있기에 빨리 정해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한국 남자 스노보드 이채운(17·군포 수리고) 학생이 한국 설상 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선수들의 아버지는 어떨까요?
모두 자신보다 자녀가 더 나을 것이란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빨리 캐치하여 자녀를 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는 ‘부모가 자녀의 미래까지 결정해 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표지판이 잘못된 것보다는 표지판이 있는 것이 낫고 – 이것은 자녀를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 또 남들처럼 똑같이 공부시켜 경쟁시키기보다는 더 명확한 표지판이 되어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역할은 판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서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대목이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말이지 단출합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전에는 이 비유를 묵상할 때마다, ‘나는 과연 첫째 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안에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죄 없다고 큰소리치며 돌아온 동생을 손가락질하는 큰아들의 모습과 크게 가슴치며 탄식하는 작은아들의 이미지, 그리고 사랑밖에 모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사실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판공성사 좀 보라고 외쳐도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판공성사 본 지가 5년,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량한 이웃들을 큰 궁지로 몰아넣는 패악을 저질러놓고도, 반성하기는커녕 큰소리치고, 의기양양하게 활보하는 적반하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 큰아들입니다.
우리는 부단히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온 이후에 또 한 가지 과제가 생깁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큰 죄인이다.’‘나보다 더 큰 죄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치기만 하면서 살아서는 또 안 될 일입니다.
이제는 작은아들에서 아버지에게로 넘어갈 순간입니다.
죽을죄를 짓고 돌아왔지만 두 손을 활짝 벌리고 뛰어나와 맞이하신 아버지의 크신 자비를 온몸으로 느낀 작은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그 한없는 따뜻함, 그 극진한 환대를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이제 밥 먹듯이 용서할 때입니다.
치유 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이제 틈만 나면 치유와 구원의 손길을 펼칠 때입니다.
탕자의 귀환을 통해 드러난 영적 순환(큰아들☞작은아들☞아버지), 그것은 오늘 우리네 일상생활 안에서 부단히 되풀이되어야 할 아름다운 스토리입니다.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요한 23세 교황)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 - 하느님의 기쁨>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오늘 새벽 성무일도 시편136장 26절까지 매절마다 반복된 후렴이 긴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온 피조물에게 미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한 시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제가 자주 즐겨부르는, 사제서품 미사 시 화답송 시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보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복음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정통하신 유일무이한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드러내 보여 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복음입니다.
제 집무실 벽에는 렘브란트의 이 복음을 요약한 자비로운 아버지의 명화가 수십년째 걸려 있습니다.
면담고백 성사시 제 배경의 그림이요 고백성사를 보는 형제자매들은 저절로, 돌아온 자녀를 반가이 맞이하고 있는 자비하신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돌아갈 아버지가,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참으로 우리를 환히 비춰주는 거울같은 복음이요 끊임없이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떠오르는 ‘산처럼!’ 이란 자작시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에서 한없이 기다렸다 맞이하는 아버지의 품같은 불암산을 보며 2000년 11월에 쓴 고백시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서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
- 2000.11.17.
너그럽고 자비하신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늘 거기 그 자리 정주의 불암산입니다.
또 하나의 불암산을 소재로 한 “온 세상 제대로 삼아”란 자작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가슴 활짝 열고 있는 불암산을 향해 동녘에서 떠오르는 해가 흡사 성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도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산 가슴 활짝 열고
온 세상 제대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찬란한 태양 성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태양 성체 모시고
살아 있는 태양 성체 되어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다.”
- 2007.11
오늘 복음의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영원히 배워야할 롤 모델입니다.
미카 예언자가 제1독서에서 고백하는 하느님은 바로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는 회개한 자녀들의 과거는 결코 묻지 않고 영원히 불문에 붙이십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런 자비하신 주님을 닮을 것을, 결코 잊지 말고 찬미와 감사와 사랑을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시편 103장 화답송이 온통 자비하신 아버지께 드리는 찬미로 가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의 귀환에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너무나 실감나는 묘사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하느님의 기쁨은 이런 것입니다.
이어지는 즐거운 잔치가 흡사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닮았습니다.
거지처럼 되어 버린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환대를 받으며 완전히 존엄한 인간 품위를 회복한 모습입니다.
참으로 아버지께 돌아와 자기를 찾을 때 거지같은 초라한 존재에서 왕자같은 품위의 존재가 됩니다.
아, 이게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너무나 아버지를 떠나 무지와 허무속에 세상맛에 중독되어 살아 가기에 존엄한 품위의 진면목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아들의 환대 잔치에 격렬하게 분노하는 큰 아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작은 아들은 물론 이 큰 아들의 모습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지칭하는 큰 아들이지만, 동시에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 또는 모범적 신자들의 내면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의 분노와 항의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또한 우리 인간의 한계요 이를 넘어서야 진정한 회개이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속 시원한 내면의 토로입니다.
아버지곁에서 자녀답게 산 것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다니 아버지를 참으로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아버지 곁에 가까이 살면서 자비하신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깨닫습니다.
작은 아들에 대한 연민이 추호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우라 하지 않고 저 아들이라 합니다.
이 또한 우리의 죄스런 부정적 내면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감정적으로 대응해 아버지가 함께 화를 냈다면 수습 불가능한 태풍으로 변했을 것이나, 아버지의 한량없는 자비가 큰 아들의 태풍같은 화를 미풍으로 가라 앉혔습니다.
새삼 자비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태풍을 미풍으로 바꾸는 자비입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조용히 간절히 호소하시는 진정성 가득한 아버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큰 아들에 대한 사랑 역시 한결같았음을 고백하는 아버지입니다.
늘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살면서 아버지의 진면목을 몰랐던 바로 우리 수도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잃었던 아들을 찾은 당신의 기쁨에 동참해 달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호소입니다.
참으로 주님곁에서 모범적으로 산다는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일화입니다.
큰 아들의 반응이 복음에는 생략되었지만 제 추측으로는 회개하여 작은 아들의 환대 잔치에 참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의 거울에 비춰본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았습니까?
무자비한 모범생 큰 아들을, 또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 온 회개한 작은 아들을 닮았습니까?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가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았는가 하면 때로는 옹졸하고 편협한 큰 아들을 닮았고, 또 때로는 작은 아들처럼 탈선하여 죄를 짓기도 합니다.
아, 여기 자비하신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자비하신 아버지에게는 큰 아들, 작은 아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예수 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평생과제가 평생회개의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이 우리에게 평생과제로 주어진 것입니다.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아버지의 자녀로 사는 것, 그리하여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요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환대 잔치 은총이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께 고백하고 싶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예수 아드님을 닮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찬미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방향성'을 관상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고 있었다.'
(루카 15,1)
평소 율법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라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와 죄인이 예수님을 향해 모여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을 향합니다.
"들음"으로써 삶의 미혹과 진동을 떨쳐내고 구원의 희망이라도 실낱처럼 건져보려는 간절한 바람이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루카 15,11)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환대하는 예수님에 대해 투덜대자 예수님은 저 유명한 비유를 들려 주시지요.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산 작은 아들과, 아버지 곁에서 스스로를 종처럼 비하하며 산 큰 아들 모두를 향하는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루카 15,20)
작은 아들은 현실의 세리와 죄인들처럼 아버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방향성은 먼저 떠났었고 길을 잃었으며 실패했고 비로소 자기 처지를 자각했기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주님을 향하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짓거나 그분을 등질 필요는 없지만, 많은 경우 죄와 어둠은 은총을 부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루카 15,28)
아버지는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작은 아들을 조건 없이 환대했지만 형은 동생이 몹시 불편합니다.
아니, 그런 놈을 다시 거두어 최상의 대우로 복귀시키는 아버지가 못마땅한 것이지요.
큰아들은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 잔치의 현장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어둠이 그들을 밀어냅니다.
생명의 잔치에서 일렁이는 기쁨을 배척합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루카 15,31)
착실한 모범생 큰아들이 당신 곁에서 이토록 사랑을 갈구하며 이토록 외로웠다니 아버지는 속이 탑니다.
그래서 그를 달래며 마음을 돌리려 합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루카 15,12) 주었다고 했습니다.
작은 아들만 아니라 큰아들도 분명 제 몫을 받았지요.
제 것을 제 것으로 누리지 못한 큰아들의 자발적 소외와 두려움이 오히려 안쓰럽습니다.
자유인이면서 스스로를 종처럼 억압하며 살았기에, 있어도 자유롭고 없어도 자유로운 동생이 고울리 없지요.
형의 분노에는 자기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마음껏 저질러도 심판받지 않는 동생에 대한 부러움도 뒤섞여 있는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아들의 방향성이 아버지를 떠나기도 하고 향하기도 하고 또 고집스레 버티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방향성은 오로지 아들을 향한다는 걸 봅니다.
유산을 요구할 때도, 작은 아들이 돌아올 때도, 큰 아들이 어깃장 부리며 버틸 때도,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그런 주님의 속성을 너무 잘 알기에 당신 생기신 모습 그대로 우리를 좀 봐달라고 졸라댑니다.
"보살펴 주십시오."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저희 죄악을 ... 던져 주십시오."
"성실히 대하시고 ...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이 이렇게 졸라대는 예언자가 귀찮으실까요?
절대 그렇지 않지요!
오히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해 간청하는 자녀를 향해 몸을 돌리고 허리를 굽히고 팔을 벌리고 머리를 숙여 그가 바라는 바를 해주지 않을 수 없으실 겁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니까요.
스스로 아버지 곁에 있다고 여기고, 자신이 율법과 제도 안에 공고히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면, 오히려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곁인 줄 알았지만 영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마음, 다른 생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자주자주 자신을 살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시는 아버지를 정향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사순절이 참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LA에서 미술관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지난번에는 ‘게티 센터 (Getty Center)’ 미술관을 보았습니다.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전망이 좋았고, 정원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소장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게티 미술관은 석유 사업으로 부자가 된 게티가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룬 부를 예술을 통하여 나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지만 이렇게 자신이 이룬 부를 이웃을 위해서 나눌 수 있다면 부자도 쉽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노턴 사이먼 미술관(Norton Simon Museum)’ 미술관을 보았습니다.
신문에 글을 주시는 부제님과 함께 갔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하신 부제님은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보는 만큼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부제님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작품을 보니 새롭게 보였습니다.
지하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노턴 사이먼 미술관은 부동산 사업으로 부자가 된 노턴 사이먼이 작품을 기증하면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기만 한다면 부자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철부지 아들, 싸가지 없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큰 아들과 철부지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큰 아들은 유산에 상관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아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거지꼴이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옷도 주고, 반지도 주고, 잔치를 벌여 줍니다.
큰 아들은 밭에서 일하다 돌아와서 동생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벌여 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는 달리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큰 아들의 불만은 성실하게 일한 자기를 위해서는 잔치를 벌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방탕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니 잔치를 벌여 준다는 것입니다.
큰 아들의 불만도 이해가 갑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큰 아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달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것은 모두 너의 것이 아니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죄를 지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은 형제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으니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고, 그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했으니 겸손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잡혀가는 스승을 위해서 함께 하지 못하였고, 도망을 갔습니다.
정의롭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를 벌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잘못한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치는 것입니다.
카인은 자신의 죄가 크지만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머슴으로라도 살겠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 아들을 봅니다.
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 큰 아들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의 잣대로 규정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에비앙 생수 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매끈한 피부. 에비앙 천연 광천수를 하루에 1리터씩 추가로 마신 사람 가운데 79%는 피부가 눈부시게 부드럽고 촉촉해져 결과적으로 더 젊어 보이는 효과를 경험했다고 보고합니다.”
이 문구를 보고 나서 에비앙 생수와 우리나라 생수 중에서 무엇을 손에 쥘까요?
과학적 연구 결과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왕이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에비앙 생수를 선택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다른 생수라도 하루에 1리터씩 마시면 에비앙 광고와 똑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은 에비앙 광고를 보고서는 이런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살 때가 많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하나의 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정말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상대의 방식을 “틀렸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기도방식이 있습니다.
조용히 침묵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에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영화를 보면 쉽게 잠듭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영화라도 집중하지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눈으로 그리고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지면 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신나게 찬양하는 성령 기도는 조금 힘듭니다.
그렇다고 성령 기도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기도회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조건 갑니다.
다양한 길이 항상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를 이해하는 길이 생기게 됩니다.
단지 나와 다른 길을 갈 뿐인 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에도 주님께서는 함께 하십니다.
되찾은 아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착한 아들은 누구일까요?
분명히 큰아들입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한 아들만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아들이 왔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면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버지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관점에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도 원망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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