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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0일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 이사 42,1-4.6-7
제2독서 : 사도 10,34-38
복 음 : 마르 1,7-11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상형을 만났습니까? 지금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내 이상형이 맞습니까?
종종 자신의 이상형을 만났다면서 기뻐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이상형이 아니었다면서 실망의 표정을 짓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상형을 만날 확률은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는 아주 희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 될 확률은 100%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실망하면서 “이상형이 아니다.”라고도 말하지만,
그래도 이상형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될 확률은 높아집니다.
왜냐하면, 이상형은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완벽한 사랑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완벽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진정한 사랑으로 만들어 갈 때 꿈꿔왔던 이상형이 보이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세례는 회개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는 하느님이시기에
굳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참사랑을 만들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도 직접 받으시고,
아프고 힘들어하는 이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활동으로 주님께서는 사랑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우리의 이상형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형이 되어 오신 주님을 보면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또 다른 이상형이 되어 주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셨고,
그런 이유로 이 땅에 오셨고 오늘 기념하듯이 세례도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온 순간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지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오늘 제1독서를 통해 말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붙들어 주는 이, 선택한 이, 마음에 드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곳, 최고의 이상형이 가득한 곳. 바로 지금 이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
류해욱 요셉 신부
이제 좀 코로나가 진정되는가 싶습니다.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을 맞습니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깊이 묵상합시다.
장면의 배경은 나자렛에서 시작해서 요르단 강으로 가는 길과
세례가 베풀어지는 요르단 강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기 위해 떠나시는 장면부터 묵상해 보십시오.
나자렛에서 어머니와 지내시던 예수님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어느 날 ‘가서 보리라’고 결심하십니다.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 어머니께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깊은 포옹을 나누신 후
손을 흔들며 길을 떠나는 예수님과 아들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배웅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세례를 받기 위해 어머니와 헤어져 먼길을 떠나시는 이 여정은
그분이 앞으로 걸으셔야 할 공생활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하느님께 맡겨드리며 그분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각자에게 소중한 존재를 하느님께 맡겨드리며, 세례의 장소로 홀로 떠나십시오.
강둑을 따라 길게 난 숲속 길을 예수님이 걸어가십니다.
여러분도 그분의 그림자처럼 그 길을 따라 걸어가십시오.
점점 해가 뜨고 날이 밝아오면서 여기저기 들꽃들이 살포시 고개를 들고 미풍에 향기를 건네주며,
새들은 나무 위에서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강물에는 햇살이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례의 장소인 요르단 강가에 도착하십니다.
요르단 강가에서 사람들이 둘러서서 요한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까이 다가서시어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멀지 않아 성령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세례자 요한은 누구입니까? 왜 그를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까?
요한은 유대인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준 사람입니다.
이전에 유대인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깨끗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받는 것이 세례였습니다.
그들은 죄인이니까 죄에서 깨끗이 씻어져야 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 죄를 씻기 위해 물속에 잠기었던 것입니다.
즉 세례는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결심하신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죄인들의 무리에 기꺼이 동참하시고 그들과 하나가 되신 것이지요.
세례는 인간이 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온전히 죄인과 하나가 되신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건을 제 2의 육화사건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 자신이 죄인이 되신 것이지요.
단순히 세례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부복하시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요르단 강물에 예수님과 요한이 있습니다. 두 분 주위로 강물이 흘러갑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손을 담그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요.
강물은 흐르고 있기에 늘 새로움을 상징하지요.
흘러가는 강물에 여러분의 삶을 비춰보십시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17).
이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의 순간 안에 머물러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깨닫게 되십니다.
여러분도 세례 때 느낀 감동의 순간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옛것은 지나갔고,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지요.
예수님의 세례, 그 낮아짐과 이를 통한 하느님의 영광을 기억하면서
늘 그분의 자식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 우리의 신원,
바로 우리도 그분의 아들, 딸임을 잊지 않기로 해요.
“하느님, 그분이 나의 아빠, 아버지. 나는 그분의 뜻만을 따라야 함을.”
주님 세례에 관한 시를 하나 썼습니다.
나무들이 깨어나는 소리
강가에 물안개 피어오르는 시간
강둑을 따라 길을 걸었다네.
들꽃들이 살포시 고개 들어 건네주는
향기 맡으며
나무들이 깨어나는 소리에
노래를 부르는 새들의 소리 들었네.
아침 해가 떠오르니
강물은 은하수를 뿌린 듯 반짝이었네.
주막에 들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
요한의 세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민초들의 눈빛에서 희망의 설레임을 보았네.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광야에 살고 있던
낙타 털옷에 가죽 띠를 두른 사나이
강가에 나와 외치는 소리 있었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줄을 지어 세례를 받고 있었네.
차례가 되어 물속에 잠기었지.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소리에 놀라 요한을 바라보았지.
그의 깊은 존경과 신뢰의 눈빛을 보며
평화 안에 깨달았네.
하느님, 그분이 나의 아빠, 아버지.
나는 그분의 뜻만을 따라야 함을.
성령께서 나를 광야로 이끄셨네.
그분을 만나 기도하여야 함을 아네.
그 깨달음의 의미를 새기기 위하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주며,
성탄시기와 주님 공현 주간을 마무리해 줍니다.
한편,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생활과 공생활을 가르는 기점이 되고,
이제 성탄시기는 끝나고 연중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과 마침에서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곧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듯이,
공생활의 시작에서는 죄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왜일까요? 왜 죄 없으신 분이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묘?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도 이를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라는 1인친 단수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우리”라고 복수 형태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결코 하느님 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응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를 당신 구원의 동반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구세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당신 아드님의 장엄한 공현입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공적인 축성임과 동시에,
만천하에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확인받는 장엄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의로운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에로니무스 성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리낌 없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더없이 겸손한 자세로 율법의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는 한편,
당신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요한이 베푸는 세례의 정당성을 인정하시고,
또 그 물을 성화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의 세례 안에
성령께서 내려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셨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요한 1,10)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하늘이 갈라지고 은총이 내렸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시대 왔음을 알려줍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구세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당신 아드님의 장엄한 공현입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공적인 축성임과 동시에,
만천하에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확인받는 장엄한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심”과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모습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하늘과 땅이 화답하는 일치의 모습 안에서 그 기름부음의 성취는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역사의 시작은 이처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보여 지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장엄한 장면을 통해 연출됩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아버지의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 선포의 내용은 셋입니다.
<첫째>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시편> 2장 7에서 말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성자임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역시 세례로 하느님의 아들이 됩니다.
곧 우리의 세례가 죄를 용서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의 탄생됨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창세기> 22장 2절에서 말하듯이,
‘사랑하는’ 이란 유일한 아들이심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미 사랑받은 존재, 이미 은총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받게 됨을 말해줍니다.
<셋째>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 말하듯이,
‘마음에 드는’ 이란 ‘주님의 종’임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구원의 협조자로,
제 2의 예수님으로, 구원의 도구로 소명을 지닌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으로 태어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세례를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의 허물과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이미 그 은총을 입었기에 그 사랑을 곧 그 용서를 베풀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탁하여 사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주님!
제가 당신 마음 안에서 탄생되었으니. 당신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옷 입었으니, 당신의 영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 안에서, 당신의 사랑의 향기 품게 하소서.
사랑을 입었으니,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서울의 신학교에는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기념품이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앉으셨던 의자와 교황님께서 입으셨던 제의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한 것은 제게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 신학교를 방문한 것은 신학교에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대학교에서는 사회에 공헌이 큰 인사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곤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추기경님께는 큰 영광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대학교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자 요한에게는 큰 영광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줄 때 물은 ‘정화’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은 ‘성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은 성수(聖水)가 된 것입니다.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머문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3번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동방박사의 경배입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가 황금, 유향, 몰약으로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구세주가 아닌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나타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은 1784년 한국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입니다.
단순한 정화의 상징인 세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구원의 성사가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오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 모세와 함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곳에 천막을 짓고 살고 싶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거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변모는 죽음을 넘어 부활하심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례 안에
삶의 해답이 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를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사람은
세례를 향해 있고
세례는
사람을 향해 열려있다.
세례는
사랑의
뜨거운 관계 맺음 이다.
세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일깨워준다.
세례로 우리의 삶 또한
주님의 삶 안에서
사랑으로 공유된다.
세례는
우리 삶의
가장 고귀한 변화이다.
세례는
참된 세례의
여정을 걸어간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나가게 한다.
세례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사랑의 하느님께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세례는
구원을 향해 열려있다.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세례의 은총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세례로 세상을
바꾸신다.
세례는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통한
세례의 내면화이다.
우리의
소중한 세례를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삶의 주일이다.
소중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시며
소중한
세례를 주셨다.
세례는 삶이다.
사춘기 반항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신호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날입니다.
30년간의 사람의 아들로 사는 삶을 마감하고
3년간의 하느님 아들로 사는 삶을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해주듯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여기서 “너는”이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직접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이심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뜻입니다.
왜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그런 인정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인간의 성장 과정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신을 따라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인간이 아는 것은 당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이전의 상태를 인간 성장 과정에 빗대어보면 ‘사춘기’입니다.
많든 적든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는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4~5학년이면 사춘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부모에게 대한 반항입니다.
사실 부모가 너무 잘난 사람이라면 자녀는 더 큰 사춘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사실 자퇴지만 퇴학 이틀 전에 학교에서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이 자퇴한 것입니다.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스트레스가 컸던 것입니다.
5년 동안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아이도 그래서 지옥과 같은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대한민국 최고의 강사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아들인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니
열등감과 무기력감에 피시방만 전전하는 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입시학원에 다니다가 갑자기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무언가 의욕적으로 하고 싶어 해서 기뻤지만,
입시 석 달 남겨놓고 예대를 가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엄마는 웃겨서 말이 안 나왔지만 그래도 뭔가 하려고 하니까 시켜주었는데
아이는 음악성이 있는지 악보도 못 보면서 한 곡을 몽땅 외워서 시험을 보고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들어온 학생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 년을 겨우 버티다 또 자퇴하였습니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다 엄마가 믿어주는 것에 죄송했는지 이번엔 일본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합니다.
엄마는 기쁜 마음에 돈을 대 줍니다.
아이는 일본에서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다시 노력해서 음대에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왜 태어났는지 성당을 다니며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때부터 하루에 6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는 모르지만 아마도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사춘기를 길게 앓고 있는 아들이
자신에게 계속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들렸다고 말합니다.
“엄마,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
근데 나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사춘기는 ‘왜 태어났는지’ 알려주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흔히들 ‘사춘기에 맞는 부모의 대화법’이란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춘기는 ‘왜 태어났는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왜 태어났는지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왜 태어났는지 가장 처음에 묻는 때가 언제일까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입니다. 물론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아기는 그저 불안해서 울기만 합니다.
다행히도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문제는 엄마가 금방 해결해 줍니다.
젖을 줌으로써 자신이 엄마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는 엄마 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엄마, 아빠처럼 되면 됩니다.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민이 다시 시작되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사춘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굳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무기력하고 고립되는 시기가 성장에서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에서는 이 시기가 참 부모를 찾으라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춘기가 없다면 하느님을 굳이 찾을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때 참으로 세례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때 부모가 자신이 부모임을 강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 자녀다”라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사춘기가 되면 자신들도 아기를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되며 더는 부모를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기의 모든 문제가 부모를 만나면서 해결되었던 것처럼
사춘기 때의 모든 문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하느님만이 다시 생명을 주시고 몸을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부모처럼 되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고민이 사라지듯이,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으로 모든 고민이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기 시작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바로 시작하신 두 가지는
‘자기 자신과 싸움’과 ‘아버지 뜻의 실현’입니다.
성령은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자신이 부모임을 믿으라고 주는 젖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며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주시는 그분을 우리의 참 부모로 확신합니다.
저도 사춘기를 극복한 것은 아마도 ‘나는 누구인가?’를 넘어선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에 대한 어쩌면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였습니다.
그때 자주 하던 말이 “외롭다, 외롭다!”였습니다.
한 개신교 친구가 “너 성당 다니잖아. 예수님이 옆에 계시는데 뭐가 외로워?”라고 했을 때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혼자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믿어졌고 그 이후로 사춘기의 반항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춘기는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요즘 계속 같은 말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첫영성체와 세례가 진정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어 우리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고 특별히 자녀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고
그래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편안히 하느님처럼 되려는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합시다.
사춘기는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화론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해 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아버지께 자녀임을 인정받도록 주님께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세례의 의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