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具瑩)-여수의 소 전염병 시에 차운하다(次汝守牛疫韻)(차여수우역운)(소, 반복되는 슬픔)
萬姓憂灾疫(만성우재역) 재앙 같은 돌림병을 만백성이 근심하니
千牛病勢同(천우병세동) 수천 마리 소가 같은 병에 걸렸네
豈徒遍湖右(기도편호우) 어찌 호서에만 가득 퍼진 것이랴
傳道自遼東(전도자요동) 요동에서 옮아왔다 말들을 하네
藥物無神效(약물무신효) 약물로도 신통한 효력이 없으니
寃氛化白虹(원분화백홍) 원통한 기운이 흰 무지개로 뻗쳤네
村童舊牧笛(촌동구목적) 시골 목동의 옛 피리소리는
不復弄溪風(부복농계풍) 시내바람 살랑대도 더는 들리지 않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죽유시집竹牖詩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권경열님은 “구영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영연(瑩然), 호는 죽유(竹牖),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성품이 강직하여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 의견을 내기도 하였다. 정묘호란 때 남쪽으로 내려가는 왕세자를 수행한 공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사헌부 감찰과 회인 현감을 지냈다.
소 한 마리가 농가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농사를 지을 때는 쟁기를 끌며 밭을 갈아 주었고, 물품을 운반할 때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거나 수레를 끌어 주기도 하였다. 농촌에서는 해마다 태어나는 송아지를 팔아 자녀들을 혼인시킬 수도 있었고, 학자금을 대줄 수도 있었다. 말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커다란 눈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정겨운 벗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농가에서 그 어떤 가축보다도 든든한 존재가 소였다.
어느 해 겨울, 온 나라가 구제역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국가의 축산업이 존폐의 기로에 설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았어도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동네마다 전염을 걱정하여 외지 사람의 방문을 막는 금줄의 쳐졌기 때문이다.
구제역은 말굽이 둘이 동물에게만 발생하는 병으로, 치사율이 매우 높은 급성 전염병이다. 피해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병이 발생한 지역의 일정 반경 이내의 소는 감염 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생매장을 해야 한다. 애지중지 키우던 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병도 없이 죽어 가는 것을 볼 때 소를 키우던 사람들이 느낀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구덩이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정든 소를 차마 보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기원하며 농장주들은 한없이 울었다. 안락사 주사를 맞은 어미 소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버티고 서서 새끼에게 젖을 다 먹인 다음 죽어 갔다는 소식에 국민들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수백 년 전 인조 때의 시 한편이 이런 오늘날의 상황을 그대로 그린 듯하다. 소 한 마리가 농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요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던 시대였다. 그러니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농민들의 모습이 그려질 법도 하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것들을 과장되게 묘사하지 않고, 목동의 피리 소리가 끊어졌다고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절제가 더욱 많은 여운을 남긴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구영[具瑩, 1584년(선조 17)~1663년(현종 4),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영연(瑩然), 호는 죽유(竹牖)]-조선시대 별좌, 감찰, 회인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사직(司直) 구세영(具世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장 구담(具曇)이고, 아버지는 증 승지 구대륜(具大倫)이며, 어머니는 전설사수(典設司守) 이윤증(李胤曾)의 딸이다. 구위(具煒)의 동생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이때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나자 전주의 유응원(柳應元)이라는 자가 이에 찬동하는 통문을 구영에게 보냈다. 분연히 고산현(高山縣) 향교의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반대의 항의문을 지어 이를 배척하고 유응원의 통문을 불살랐다.
인조반정 후 고산현감이 유일(遺逸: 산림의 선비로서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은 학문과 명망이 높은 인물)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극력 사양하였고, 1626년(인조 4) 처음으로 활인서 별좌를 배수받았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로 대가(大駕)를 옮기려 하자 유태형(柳泰亨)과 더불어 묘당에서 부당함을 역설하여 그치게 하였으며, 곧 체찰사 이원익(李元翼) 예하의 호소부사(號召副使)가 되었다. 1628년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으로 승진되었다가 곧 그 직에서 물러났으나, 호종공신(扈從功臣)에 녹공되어 사과(司果)가 되었으며, 1644년 다시 별좌·감찰을 거쳐 회인현감(懷仁縣監)을 지냈다.
*氛(분) : 기운 분, 1.기운, 2.조짐(兆朕), 3. 재앙(災殃), 𣱦(속자)
*虹(홍) : 무지개 홍, 어지러울 항, 고을 이름 공, 1.(무지개 홍), 2.무지개, 3.무지개 다리, 𧈫(동자), 𧈬(동자), 𧉔(동자), 𧌫(동자), 𧍺(동자)
첫댓글 목동의 피리 소리는 얼마나 애절했을까요...
하물며 그 소리도 끊어졌으니...
소의 죽음에 농가의 아픔은 가족의 죽음과 같지 않았을까.....
예전에는 소가 비싸서 집안의 가보였을 때가 있었네요.
회장님의 멋진 댓글에 감사드리고,
행복한 금요일과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