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전(許傳)-증이첨추(贈李僉樞)(이첨추에게 주다)(비루하게 살지 않기를)
墦間醉飽世滔滔(번간취포세도도) 묘지에서 취하고 포식하는 행태 만연한 세상에서
所謂伊人志尙高(소위이인지상고) 이른바 이 사람은 뜻이 높구나
囂塵咫尺如千里(효진지척여천리) 지척의 속세를 천 리 밖인 것처럼 여겨
獨也醒醒不啜糟(독야성성불철조) 지게미를 먹지 않고 홀로 깨어 있구나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性齋集성재집)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권경열님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재性齋 허전이 이인공李寅恭에게 보낸 시이다. 상대인 이인공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장수한 노인들에게 관례적으로 내렸던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것은 분명하다.
이 시는 상대의 고결한 행실을 칭찬하는 내용이지만, 그 속에는 세상 사람들의 위선적 모습과 뜻을 굽혀 가며 이익을 위해 적당히 타협하는 행위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무덤 사이를 오가면서 취토록 마시고 배불리 먹는다는 것은 맹자 ‘이루離婁’에 나오는 고사다.
제나라에 어떤 남자가 살았는데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그런데도 매일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술에 취해 포식을 한 상태였다. 아내와 첩이 물어보면 오늘은 누구를 만나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고 자랑을 해댔다. 만났다고 하는 상대는 모두 높은 벼슬아치나 이름난 부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내와 첩이 이상하게 여겨 하루는 뒤를 밟아 보았다. 남편은 시장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성 밖 근교에 있는 공동묘지로 향했다. 남편은 거기서 제사를 지내는 묘소를 찾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었다. 한 곳에서 다 먹으며 또 다른 묘소로 옮겨 갔다. 그 광경을 본 아내와 첩은 집에 돌아와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가족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한 집안의 가장의 실상을 알고 실망한 것이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남편이 그날도 집으로 돌아와 전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었다.
내실은 없으면서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허세를 떠는 세상 사람들의 가식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는 고사이다.
마지막 구절은 초나라 굴원의 ‘어부사’에 나온 표현이다 ‘어부사’는 굴원이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다가 정적들의 모함을 받고 쫓겨나서는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강가에서 거닐다 만나 어부와의 대화 형식을 빌어 표현한 글이다.
굴원이 자신이 쫒겨난 이유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신만 깨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자 어부가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다면 어째서 그들과 어울려 술지게미를 먹고 묽은 술을 마시지 않았는가? 어째서 홀로 깊이 생각하고 고상하게 행동하다 추방을 당하는가?
혼자서 별나게 행동하지 말고 세상의 흐름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며 살면 편하지 않겠느냐는 충고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고결한 뜻을 지닌 굴원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선비는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이 글에 드러난다.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혼자 고고하게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인간이기에 욕심도 있을 수 있고, 실수도 있을 수 있다. 또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느 정도 기준은 있어야 할 것이다.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최소한의 기준이 아닐까?”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許傳[허전, 1797년(정조 21) ~ 1886년(고종 23), 자 이로(以老), 호 성재(性齋), 시호 문헌(文憲), 출신지 포천, 본관 양천(陽川)]은 조선 후기 문인, 1835년(헌종 1) 39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0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 1844년 전적(典籍)·지평(持平)을 거쳐 1847년 함평현감이 되었다. 1850년(철종 1) 교리·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경연에 참가해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였다. 1855년 당상관에 오르면서 벼슬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862년 진주 민란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들끓자, 그 해소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 1) 김해부사로 부임해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는 한편,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거쳐, 18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86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황덕길을 이은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柳致明)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는 경의(經義)와 관련해 항상 실심(實心)·실정(實政)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바탕한 구체적인 개혁안도 제시하였다. 저서로는 『성재집』·『종요록(宗堯錄)』·『철명편(哲命編)』을 비롯해,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한 『사의(士儀)』 등이 있다.
*囂(효) : 들렐 효, 많을 오, 1. (들렐 효), 2.들레다(야단스럽게 떠들다), 3.시끄럽다
*啜(철) : 먹을 철, 1.먹다, 2.마시다, 3.훌쩍훌쩍 울다, 嚽(동자), 涰(동자), 𩟫(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