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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하나, 체크 천 가방에 넣고 뜬구름 타고 나선다. 떠나는 발걸음은 뒤돌아보면서도 가볍다.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마음에는 전날 밤잠을 이루지 못한 두근거리는 새벽이 있다. 배를 타고 섬에 도착. 혼자만의 여행에 몇 권의 책과 마음 사전 한 권이 친구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섬.
야자수가 가로수인 섬.
보쉬에의 말을 따르면 인간이란 멈출 수 없는 시간을 여행으로 꽉 채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빈 곳을 채우려고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여행에는 무슨 의도가 몇 개쯤 있는데 미지의 세계를 가보는 호기심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호기심이 짙은 발걸음을 데리고 안내자가 없는 걸음으로 가벼운 산책을 했다. 산책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것이라는 사전적인 말보다도 나보다 먼저 걸었던 이 길을 두고 자연과 함께 있다는 기분을 가진다. 걷고 또 걷고 회전목마처럼 빙빙 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그러다 해 질 무렵 잠시 쉬면서 즐길 수 있는 산책을 자연과 교감이라고 했던가. 그럴 때 작은 풀, 돌담길, 구름을 데리고 노는 하늘, 눈에 보이는 것이 새롭다. 이 섬에 와서 한 달 살기를 시작한 첫날 돌담과 돌담 사이에 피어있는 하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코의 점막을 타고 병적으로 냄새를 못 맡는 코에 달려드는 향기.
진실로 향기에 눈을 뜨고 감게 하는 모스카토의 향.
뜨거운 햇살에 빛나는 오묘하고 도도한 하얀 꽃잎.
식이 끝나고 걸어오는 하얀 신부의 여유로운 미소같은...
그리움의 순결로 피어있는 꽃,
스물다섯의 내가 신혼의 드레스를 입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다.
신혼의 꽃물이 새겨진 이불을 덮고 꿈나라를 갈 거라는 상상도 잠시, 다닥다닥 붙은 막다른 골목집에는 밤늦도록 시장 술꾼들 목젖 취하는 소리, 옆집 아저씨의 군기 어린 목소리, 그리고 어둠에 붙어 있는 욕망과 아집과 자존심이 누렇게 물든 소리들로 인하여 육체와 정신의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때 우리의 애인은 한 권의 책 폭풍의 언덕, 데미안, 제인 에어. 푸른 벌판에 서 있을 때 책 속의 주인공들
평생 앓아야 할 가슴앓이와 상실감을 닮은 제인.
그 시절 내 마음은 제인을 닮았다.
책 온도로 내 안에 피어있는 치자꽃.
하얀빛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랗게 빛을 잃고 떨어진다.
나의 신혼도 구겨진 몇 줄의 페이지에 지문을 넣고 불필요한 수식어를 빼보면 한순간 지나가 버렸다.
신혼이란 단어에 포장도 해보고 비단 보자기에 쌓아놓고 싶지만 절절한 소금기에 절어 짜고 주름이 있다. 소금기 있는 물에도 곡식은 여물어지고 꽃들은 피어나고 잎들도 나름대로 그 자리를 지켰다. 입을 열지 못한 내재해 있던 희망과 우울은 적당히 숨어 있다가 머리에 흰 꽃이 필 때 문장으로 빛이 피우고 있다.
긴 여름의 더위와 장맛비를 견디면서도 제 향기 잃지 않는 꽃처럼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말을 위로해주던 그 꽃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준 꽃.
마당 없는 집에 핀 한그루 치자 꽃나무.
해마다 피는 꽃물에 작은 디딤돌을 놓으면서 걸어왔던 게 아니었던가. 제 자리 잃지 않고 말라비틀어져도 본연의 색을 유지하는 꽃을 들고 잔 여운을 들이킨다.
아직은 여름 햇살과 장맛비, 그리고 지지부진한 바람이 꽃잎에 잔잔하게 붙어 있다. 푸른 이파리를 쳐다보면서 땅 위에 뒹구는 저 하얀 치자꽃을 집어 냄새를 맡아본다.
여름은 저무는데 향기는 아직도 은은하다.
지치고 우울했던 시절이 내려앉는다.
이제는 웃음보다 미소로.
앞모습보다는 뒤태가 은은한 우리의 생(生)을 생각한다.
삶은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일이라 했던가
걸으면서 잊어버렸던 일을 되새김질하며 신혼 시절의 자아의 향기를 다시 찾아보려 한다
검은 돌담 사이에 피어있는 하얀 치자꽃을 보면서.
너와 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향기를 주는
장소가 어디여도 장소 불문하고
제 향기를 내는 치자꽃처럼
호기심과 상상의 세계에 빠지며
오늘도 나는 걷고 또 걷는다
전북 순창 출생
2015년 계간지<시현실>로 등단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시집: 내일도 나하고 놀래, 소낙비, 단추들의 체온
2023년 최충문학상 수상
현재: 단국대 평생교육원 시창작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