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라는 우상을 버리라 ( 삼하6:1-8, 삼상4장)
대제사장 엘리는 늙고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아버지의 이름을 빙자해서 온갖 불의한 짓을 다 했습니다. 그때 마침 이스라엘의 숙적이었던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이스라엘도 군대를 모아서 블레셋과 전장을 했는데 첫날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이 4천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내일 또 전쟁이 전투가 벌어질 텐데 이긴다는 보장이었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실로하는 곳에 있는 성소 안에 안치되어 있는 법궤를 들고 오게 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려주신 십계명두 돌판을 넣어둔 언약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법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에서 아니라 그 법궤를 부적으로 여긴 거예요, ‘저 부적만 우리곁에 있으면 내일은 전세에서 반드시 이길거야’
블레셋이 침공해서 전투가 벌어질 때 대제사장 엘리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 법궤만 있으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법궤를 이송하는 책임자가 되어서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이기는 영광은 자기네들이 받겠다는 홉니와 비느아스가 법궤를 지금 이송해 전쟁터로 가니까 온 이스라엘 군사들이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궤를 한낮 부적으로 여기는 그 패역한 인간들을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장담했던 그 다음날 전투에서 3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전 날보다 더 큰 완패였습니다. 그 전투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탈취 당한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하나님의 법계를 적군에게 탈취당한 최초의 수모였습니다. 승리를 장담하고 법궤를 매고 전쟁터로 나갔던 엘리 제사장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습니다.(삼상4:11).엘리 대제사장은 충격으로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서 즉사했습니다.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 홉니의 아내는 그 순간에 아이를 낳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며느리도 죽습니다.
블레셋 군이 역사상 전래없는 대승을 거두고 법궤를 가지고 되돌아 갔습니다. 그들은 생애 최고의 전리품인 법궤를 아스돗으로 가지고 가서, 그들이 경배하는 다곤신신상을 모신 신전에 가서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의 신의 법궤 자기들의 신상 앞에 바쳤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아스돗 사람들이 신전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곤 신상이 법궤를 향해서 엎드려 넘어져 자빠져 있는 겁니다. 신상을 바로 세웠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신상에 들어갔더니 이번에는 다곤신상의 목과 손이 잘려진 채 법궤 앞에 엎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스돋에 사는 사람들 몸에 독종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드로 보냈습니다. 가드 사람에게 독종이 또 퍼지기 시작합니다. 에그론이라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이번에는 에그론 사람들에게 또 독종이 퍼집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이거 정말 여호와라는 신이 살아서 지금 이런 일을 하나 그렇다면 이거 우리 법궤를 돌려 줘야 되지 않나? 안 그러고는 재앙이 계속되지 않겠어?’.그렇지만 우리가 얻은 일생 일대 최고 최대의 전리품을 그냥 돌려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게 우연한 일인지 아닌지 정말 여호와 신이라는 분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내자 해서 그들이 고안해낸 방법이 새 수레를 만드는 겁니다.
3천년전 새 수레는 길이 날 때까지 끄는데 훨씬 많은 힘이 듭니다. 새 수레를 만들고 그다음에 한번도 멍에 매어 보지 않은 젖이 나은 암소를 멍에에 매게 하자고 한 것 입니다. 지금 새끼가 있어요. 짐승들의 새끼 보호 이 모성 본능은 무섭지 않습니까? 근데 지금 새끼를 때게 해서 젖지 줄줄줄 흐르는 암소를 데려다가 한 번도 멍에를 매어 보지 않았는데, 멍에를 매게 하자,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 두 마리 다 저지 흐르는 암소 두 마리를 가져다가 그 수레에다가 법궤를 실어서 이스라엘 지경인 베스메스를 보내겠다는 것이지요.’ 상식적으로는 안 가야 하는 겁니다. 암소가 새끼가 옆에서 우는데 그 소리를 듣고 한 번도 메어 보지 않은 멍에를 매고 새 수레를 끌고 간다는 것은 좀 정신이 이상한 암소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두 마리를 그렇게 했습니다. 그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절대 못 갈 거란 것이지요. 안 가면 지금까지 재앙은 우연이고 우리가 법궤를 그냥 갖고 있으면 된다고 한 것이지요. 근데 그런 상황에서 암소가 벧세메스로 똑바로 수레를 끌고 가면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야 미련 없이 법궤를 보내기도 한 것이지요.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가는데 암소 두 마리에게 가게 했는데 이 암소 두 마리가 소리를 지르면서 울면서도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벧세메스로 법궤가 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제 깨끗하게 포기했습니다.
이제 생각지도 않게 법궤가 가자 자기 마을로 들어온 벧세메스 사람들은 정말 기뻐했죠. 누구든지 법궤를 열어 보면 죽는 다는 걸 그 사람들 다 알고 있는 겁니다. 근데 유대인이 과거 그 법계를 열어서 모세가 받은 그 두 돌판이 들어있는지 너무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열었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거 우리 마을에 더 이상 두면 안 되겠다 ’그래서 기랏여야림이라는 마을로 법궤를 보냈습니다. 기랏여아림 그 동네 사람들도 하나님의 궤를 보고는 자기 동네 마을로와 기쁜 일인데 자기네들이 잘못해서 이 법궤 때문에 벳세메스 사람들처럼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마을 한 가운데 둔게 아니라 기랏여아림의 산 위에 외딴 집에 있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다 법궤를 안치하게 했습니다. 아비나답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그 법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70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인간의 수명이 40년이 그 당시 70년은 지금 70년보다 훨씬 긴 세월입니다 70년 동안 하나님의 법궤가 아비나답 집에 있는 거예요 . 그러면 그 집이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아비나답 아들이 그 법궤를 지키는 겁니다. 법궤에 관한한 아비나답 집안의 가족들 외에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전통이라는 우상이 70년 동안 만들어져 갔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법궤가 아직까지도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있는 다윗 성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지금 오늘 본문이 그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겁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3만명을 다시 모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오기 위한 오직 그 목적으로 3만 명을 다시 조직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러갔습니다. 삼하 6:2“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이 바알레유다는 기랏여하림의 옛 이름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이 있는 그 기랏여하림에 가서 하나님의 궤를 매어 와야 하겠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사람이 반드시 메고 와야 한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하나님의 법궤를 매어 오려고 했습니다.(민4:18) 그러니까 이 궤를 드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두 가지 명령은 궤를 사람이 매워야 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누구든지 임의로 만지면 그 사람은 죽는다였습니다. 다윗은 그걸 알고 법궤를 매어 오려갔으니까 다윗이 법궤를 모셔오려고 고핫 자손을 비롯하여 제사를 드릴 때에 필요한 제사장들 다 모아 지금 3만 명을 모으고 간 겁니다.
그 법궤는 그냥 나무궤가 아니고 천사들 사이에 좌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법궤입니다. 그래서 모시고 오려고 다 준비를 하고 갔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수레에 싣고 나옵니다.(3절) 그러니까 70년 전에 하나님의 법계가 아비나답 집에 들어갔을 때 아비나답이 나이가 늙어서 자기 아들 엘리아살에게 법궤를 지키게 했는데 70년이 지났으니까 엘리아살도 죽고 이제는 엘리아의 아들 아비나답의 손자 웃사와 아효가 법궤를 책임지고 있는 거예요.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매어 오기위해서 3만명이나 되는 사람을 데리고 만반을 준비를 하고 갔는데 아비나답의 집에서 그동안에 법궤를 지키고 있던 그 형제 웃사와 아효가 하나님의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오는 겁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몰라서 새 수레에 실었고, 만약에 안다 할지라도 이게 정말 하나님이 내린 재앙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취한 것이 새 수레에 씻고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지금 웃사와 아효는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궤를 자기들 딴에는 정성 드린다고 수레가 아니라 새 수레를 만들어서 그 새 수레 위에 하나님의 궤를 딱 싣고 집에서 나오는 거예요. 지금 그 자리에는 왕있어요. 다윗 왕은 그를 메어 오게 하려고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우사와 아효가 하나님의 법궤를 마치 물건짝처럼 새수레에 실어서 소들이 몰고 나오는 걸 보고는 전부 다 벙어리처럼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법궤에 관한한 아비나답 집안 가문 사람이 지킨다는 전통이라는 우상이 공고하게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우상의 전통 앞에 왕도 입도 뻥긋 못했습니다.
4절“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앞에서 가고” 지금 하나님의 법궤를 실은 새 수레가 나오는데 동생 아효가 수레의 앞에서 섰습니다. 그 소를 지금 몰고 인도를 합니다. 형 웃사는 수레의 뒤에 섰습니다. 동생은 앞에서 소를 몰고 가니까 등 뒤에 있는 법궤를 못 보고 형은 지금 앞에 법궤를 놓고 지금 이렇게 당당하게 지금 나오는 거예요. 그들은 마치 전통이라도 된 것처럼 그 전통이라는 우상의 권위로 매어야 될 법궤를 수레에 싣고 지금 나오는데 왕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좀 가만히 쳐다보다가 하나님 법궤가 나오니까 대동해서 따라갔던 악사들이 전부 다 연주를 했습니다.(5절)법궤를 실은 수레가 중앙에 있고 3만 명이 앞에서 뒤에서 양 옆에서 전부 다 이 수레를 옹립해 지금 행진을 합니다. 그리고 악사들이 연주를 합니다. 아효는 앞에서 가고 웃사는 바로 법궤 바로 그 뒤를 따라가면서 그 스포트라이트 봤고 그 행진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행렬이 나곤의 타장 마당 앞으로 갔을 때 갑자기 소들이 뛰었습니다.(삼하6:6)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습니다. 6절에 ‘붙들었더니’했는데 여기에 ‘붙들다’하는 이 히브리 동사는 ‘아하드’는 자기의 소유를 표현할 때 붙드는 동작입니다. 지금 소가 뛰니까 웃사가 그냥 법궤를 잡은게‘ 이거 내 거야‘하고 법궤를 잡았습니다. 마치 법궤의 주인이 되 있었던 것처럼 행동한 것이지요. 마치 자기가 그 법궤의 주인인 것처럼 손을 들어서 법궤를 내거야 하고 붙잡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다윗도 그 관경을 보고 분했습니다. 첫째는 아효와 웃사가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실어 나오는 그 엉뚱한 짓을 하는데도 그 권위에 억눌려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노 했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법궤와 온 백성을 농락했던 웃사에 대해서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베레스우사다 한것입니다.(8절). 베레스는 친다 , 우사는 웃사 하나님께서 베레스를 치셨다 이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비나답의 가문에서 법궤에 관한한 아비나답의 가문이 무엇을 해도 그게 다 맞다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하나님께서 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의 삷 가운데 하나님 말씀 위에 전통이란 이름의 우상을 놓고 그 권위에 압도당하여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전통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동안 복음의 본질을 모르고 신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슨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