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시간 화장실 백열전등이 끊어졌습니다. 잠자리 양 날개처럼 생긴 양쪽으로 배열된 전구 중 왼쪽 하나가 끊어진 것입니다. 양쪽으로 갈라져 50% 식 조명을 책임지던 실내 밝기가 별안간 반이 사라지자 왼쪽은 쓸쓸하고 황량한 모습으로 변해 버려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평소습관대로 적응해 온 탓도 있겠지 하며 시각적 불편을 잠시 긍정의 자세로 견디자 하였지만 균형이 실추된 전등은 지속적으로 마음을 불편하게 이끌었습니다. 전구 한 개를 사기 위하여 차를 몰고 나간다는 부담도 있어 더불어 필요한 물품이 없나 하며 차를 움직이는 것에 대한 합리성을 찾기 위하여 메모장에 적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우선 냉장고를 열어보고 식품자재를 넣어두는 보관칸을 열어가며 체크하고 구매물건 1 전등 1개, 2. 부침가루 한 봉지, 3. 달걀 10개, 4. 식빵 이외에는 도저히 생각나는 물품이 없었습니다. 요즈음 메모를 하지 않고 마음에 다짐해 놓은 자신감만 갖고 다녀오면 꼭 한 개씩 놓치는 결과에 속상해할 적 많아 메모를 하는 편입니다. 이 정도의 물건구매로 차를 이용한다는 생각을 쉽게 행동으로 옮기기에 부담되어 작은 배낭을 걸머지고 걷자 하고 걷는 것으로 결론 졌습니다. 걷기 편한 바지와 윗옷을 챙긴 후 바람막이 옷도 챙겨 입고 모자를 쓴 후 작은 등배낭을 걸머지고 파이목줄을 걸어 주고 끈은 분리하여 왼손에 잡고 산막대문을 나섰습니다. 언덕길에 서서 시계에 장착된 거리와 시간소요 버튼을 눌러 기록을 시작한 후 천천히 걸어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이 가을이니 하늘아래 흙 위에 모든 것들도 가을이었습니다. 가장 수확의 상징인 주황색 큰 열매 감들이 감나무에 주렁주렁, 연시가 된 것들은 가을바람에 연 줄이 끊어지듯 가지에서 떨어져 담장밖 길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거도 요즈음입니다. 병해를 입어 수확에서 멀어진 고추밭 풍경은 상심을 부르고 조금씩 커가는 김장용 배추, 무밭에서 발견한 뒤쳐지며 자라는 배추와 무들도 상심을 부르기는 만찬가지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같은 종자를 심어도 그중에는 어느 일정 부분 뒤처지는 것들은 늘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곡식의 대명사 벼이삭입니다.
다단계로 구성된 논 사잇길에서 만난 농기계와 농부, 잠시 스치며 작황에 대하여 묻자 풍년이라 말을 전해 옵니다. 다행이십니다 화답하자 수매가격에 대한 불만이 되돌아 왔습니다. 수확이란 기쁨 안에 또 다른 불편이 있다는 사실에 괜히 농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자리를 피했습니다 잰걸음으로 다리 건너 지름길을 선택하여 성지로 가는 길 아래 토끼굴 사이로 빠져나왔습니다. 이 굴다리 길은 조금만 비가 와도 굴다리 부분 이외의 길과 높낮이가 틀려 물이 항상 고여 건너가려면 발목까지 빠지는 고약한 길입니다. 이 길을 지나면 풍광이 수려한 천(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각종 민물고기들이 살고 있어 종종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거나 투망질을 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입니다. 백로들도 자주 찾아와 먹이사냥을 즐기는 곳이기도 합니다. 천을 가로질러 계속 오르면 산 정상으로 나가는 임도를 만날 수 있고 작은 호반을 이루는 저수지가 반기는 곳입니다. 반려견 파이, 행동반경이 참 좋은 녀석입니다. 그리고 산책을 무척 좋아하는 녀석입니다. 인적이 없으면 목줄을 풀어주고 인적이나 차량 통행이 있는 곳으로 진입하기 전 다시 목줄을 걸어 주는 방식으로 오늘도 어김없이 동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천은 갈수기에 접어들면 흐르는 물은 도로 아래에 묻어 놓은 배수관 사이로 흘러 편안하게 도로 위를 걸어 천을 건너갈 수 있어 편합니다. 천을 건너가기 전 등을 돌려 이곳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시간을 보니 산막을 출발한 지 30분이 소요되었습니다. 면소재지까지 약 15분 소요된다는 것을 예축할 수 있었습니다. 길은 외 길, 양쪽으로 우거진 숲을 빠져나오자 좌측 언덕밑으로 하얀 캠핑카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천에 놓여 있는 암초 같은 바위 사이사이로 가을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 캠핑카와 연관 지울 수 있었습니다. 기을밭의 풍경은 대부분 대동소이한 모습들입니다. 깨가 심어져 있고, 고추와 고구마, 배추와 무, 파 등이 주를 이루고 중앙에 밭은 이미 고구마 수확을 끝내 휑하니 비워 있는 모습이 대부분 가을밭 풍경입니다.
간혹 꽃을 좋아하는 밭 주인댁을 지나갈 때면 가을꽃 군락을 이루도록 심어 놓고 가을을 즐기는 모습에 감탄을 할 적이 종종 있습니다. 군락으로 심어 놓는 꽃은 대부분 코스모스, 해바라기, 백일홍이 주를 이릅니다. 어느새 다리를 가로질러 길을 두 번 꺾어 나가자 면소재지가 나왔습니다. 농협은행과 함께 붙어 있는 마트에 진입하기 전 반려견 파이를 마트 앞에 설치된 휴게소 데크 기둥에 묶어 대기하도록 한 후 목록에 적어둔 대로 구매를 하였습니다. 산막을 출발하여 마트에 도착한 시간 약 45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왕복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으로서 걸음 수를 계산해 보면 정확하게 10,000보입니다. 거리로는 약 8.5km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소형배낭에 구매물건을 챙겨 넣고 오던 길을 다시 돼 밟아 걷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돼 밟는 길은 역시 색다른 걷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올 때는 스치는 기분이라면 갈 때는 왔던 길도 자연의 마중 길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주하는 곳을 떠나는 기분과 정주처를 찾아서 다가가는 마음과는 엄청 심리적 차이가 있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조금씩 색다른 기분을 얻기 위하여 약간 돌아가더라도 새 길을 모색해 걸어 보았습니다. 종 전 지나온 길에서 만난 농기계와 농부가 있던 논들은 이미 벌거숭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알곡은 이미 농기계에 의하여 정리되어 자루에 담겨 화물차 짐칸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 사이 추수가 끝난 것입니다. 한 동안 황량한 논을 보며 산막을 오르고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잊히겠지요. 익숙함이란 반복 효과가 빗어내는 긍정의 결과라 순응의 길은 저절로 열릴 것이고 또한 모내기 철 봄이 겨울을 지나 꼭 온다는 신의 섭리를 믿기 때문에 불편함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심성이 발칙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순환의 고리는 부활이라는 생명의 성사에 의하여 주관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기에 봄에 의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르막 길 다 다가섰다는 마음에 안도가 남은 길을 밀어주어 그랬는지 단숨에 올라 산막데크에 앉아 신발을 벗고 편안한 신발로 갈아 신고 긴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한 오후빛을 보며 잠시 쉬었습니다. 가을 햇살도 이젠 서서히 기운을 잃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산막, 해만 떨어지면 기온은 17도 이하로 떨어지면서 냉기가 돕니다. 산막은 그래도 가을빛을 흠뻑 먹고 벽전체를 덮여 놓아서 그런지 오후 8시 30분까지 실내는 난방기구 필요 없이 훈훈합니다. 실내에 들어서자 기분 좋은 온기가 반겨줍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걸어서 잘 다녀온 것 같습니다. 어차피 걷는 시간으로 대신했다는 생각이 그런 마음으로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젊은 날~~ 자주 챙겨 불렀던 두 곡을 들으며 추억의 공간을 걸으며 하루의 시간을 정리한 후 긴 휴식시간을 갖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