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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40년대 미국 대중신문의 저질성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던 때에 신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줄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전신(電信)의 출현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와중인 1794년 클로드 샤프(Claude Chappe, 1763-1805)에 의해 발명된 전신기는 파리에서 1천킬로미터 떨어진 툴롱까지 전보 송신을 단 20분만에 가능케 했다. 영국에선 1820년대에 철도 운용의 보조 수단으로 전신이 이용되었다. 미국의 새무얼 모스(Samuel Morse, 1791-1872)는 1837년 ‘모스 부호’를 사용한 전신기를 완성해, 1844년 5월 24일 미국 의회의 도움을 받아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의 통신을 성공시켰다.
이 때에 전달된 첫 번 째 메시지는 “신이 무엇을 이룩했는가?(What hath God wrought?)”라는 짧은 문장이었다. 모든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첫 번째 메시지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Everything worked well)”였는데, 나중에 특허위원의 딸이 만든 더 유명하고 인상적인 말들이 공개 실험에 사용되면서 “신이 무엇을 이룩했는가?”라는 말이 역사에 남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1794년 발명된 이래 신문업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전신기. 사업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신문의 내용적 측면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컨데 간결한 기사 작성, 요약문을 앞에 배치하는 식의 기사 스타일은 전신의 등장으로 ‘속도’ ‘명료성’ ‘단순성’이 중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모스가 독자적으로 발명한 것은 그의 이름이 들어간 간단한 암호였다. 그 중의 하나인 SOS는 1906년에 열린 국제회의에서 조난신호로 채택된다. 9개의 부호(점 세 개, 줄 세 개, 점 세 개)가 전송하기 쉽다는 이유 때문이다. SOS는 ‘save our ship’ 혹은 ‘save our souls’의 약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나중에 그럴듯하게 해석한 것이며 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미국에서 전신의 진짜 발명자는 모스가 아니라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인 조셉 헨리(Joseph Henry, 1797-1878)였다. 그는 1831년에 발명을 끝내놓고도 완벽을 기하겠다는 생각에서였는지 특허를 신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헨리의 논문을 대부분 표절했을 뿐만 아니라 여의치 않을 때는 그를 직접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모스였다. 헨리는 수년 동안 모스를 격려하고 도왔지만, 모스는 성공해 엄청난 부자가 된 뒤에 헨리의 도움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1)
세상은 헨리의 억울함엔 별 관심이 없었다.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의 통신이 성공하자, 사람들은 이제 곧 다가올 변화를 염두에 두고 “바야흐로 동쪽의 메인과 서쪽의 플로리다 두 주가 서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열광했다. 그러자 초월주의 철학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과연 그렇군, 하지만 도대체 메인은 플로리다에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는지?”라고 물었다. 철학적이진 못할망정 상업적으로 왜 할 말이 없었겠는가? 1848년 미국 내 전신선은 1만2천마일에 이르렀으며, 계속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경제발전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2)
그렇지만 에머슨에 이어 그의 제자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도 여전히 할 말이 있었다. 그는 1854년에 출간한 [월든(Walden)]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메인 주에서 텍사스 주를 잇는 전신을 가설하려고 무척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메인과 텍사스는 서로 통신할 만큼 중요한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 우리는 대서양에 해저 전신을 가설하여 구세계의 소식을 신세계에 몇 주일 앞당겨 가져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 해저 전신을 타고 미국인의 나풀거리는 큰 귀에 들어오는 첫 소식은 (영국의) 아델레이드 공주가 백일해를 앓고 있다는 소식 정도일 것이다.”3)
최초로 대서양 횡단 케이블 개통을 시도한 사이러스 필드
물론 에머슨이나 소로우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1858년 8월 5일 사이러스 필드(Cyrus W. Field, 1819-1892)의 주도하에 최초의 대서양 횡단 케이블이 개통되었을 때에 나타난 세상의 반응이 그걸 잘 말해준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로 그 어떤 일도 인간의 활동영역을 이토록 획기적으로 확대시킨 이번 사건에 견줄 만한 것은 없었다.”고 했다.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는 당시의 열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런던시는 최고의 흥분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영국의 이러한 기쁨은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나타난 미국측의 태풍 같은 환호 소리에 비교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곧바로 가게들은 문을 닫아걸었고 거리거리에는 온통 질문하고 소리지르고 토론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흘러 넘쳤다. 완전히 무명이었던 필드는 하룻밤 새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열광이 최고조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케이블이 장애를 일으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축하 메시지는 8월 16일 저녁 시간에 뉴욕에 도착했다. 다음날 신문들은 다시 한번 흥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끽했다. 포병부대는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1791-1868) 대통령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답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백발의 축포를 쏘아 올렸다. 그 다음 날 영웅 필드가 나이아가라 호를 타고 뉴욕에 돌아오자 또 한번 난리가 났다. 2주간의 준비를 거쳐 8월 31일 필드를 축하하기 위한 개선행진이 열렸다. 좀 호들갑스럽긴 하지만, 츠바이크의 실감나는 묘사를 다시 감상해보자.
“저 위대한 황제와 시저 시대 이후로 그 어떤 승리자도 자기 국민으로부터 이토록 축하받은 일은 없었다. 이 좋은 가을날에 도시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축하행렬이 행진하는 데 여섯 시간이나 걸렸다. 연대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국기가 펄럭이는 거리들을 지나가면 그 뒤를 합창대, 노래패, 소방대, 학생, 퇴역군인 등이 끝없는 열을 지으며 따랐다. 행진할 수 있는 자는 모두 행진했고, 노래할 수 있는 자는 모두 노래했으며, 기뻐할 줄 아는 자는 모두 기뻐했다. 필드는 고대 로마의 개선장군처럼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있었고 또 다른 마차에는 ‘나이아가라’호의 선장이, 그리고 또 다른 마차에는 미합중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 시장들과 관리들과 교수들이 그 뒤를 이었다. 끊임없이 간단한 인사말, 잔치, 횃불행진 등이 이어졌고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으며 축포도 터졌다. 그런 후엔 또다시 환호의 물결이 제2의 콜럼버스를 금방 둘러싸곤 했다. 두 세계를 하나로 합친 인물, 공간을 정복한 승리자, 이 순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신격화된 남자인 사이러스 필드를.”4)
츠바이크는 왜 이렇게 장황한 묘사를 하는 걸까?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범죄자’로 전락하는 걸 대비시키기 위해서다. 그 엄청난 축하 행진이 벌어지고 있던 그 순간 대서양 횡단 케이블은 작동을 멈춘 상태였다. 곧 180도 반전한 분노의 물결이 필드를 덮쳤다. ‘사기꾼’이라는 비난이 홍수 사태를 이뤘다. 이후 수년간 케이블을 다시 부설하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한 필드가 다시 나선다. 무려 8년만인 1866년 7월 13일에서야 제대로 작동하는 케이블 설치에 성공한다. 참으로 기가 막힌 드라마가 아닌가.
그 와중에 또 다른 드라마가 있었다. 1861년 10월 미국 내 대륙횡단 전신선이 완성되면서 포니익스프레스(Pony Express)는 사업을 접어야했다. 포니익스프레스는 조랑말 릴레이를 통해 미국 미주리주와 캘리포니아주 사이의 우편물을 배달하던 속달우편 사업이었다. 20년전인 1841년 윌리엄 해리슨 대통령의 사망 소식이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도달하는 데에 3개월 20일이 걸렸던 것을 돌이켜 보자면, 이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전신은 정보의 속도 측면에서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예컨데 미 대륙횡단 전신선이 구축되기 전, 윌리엄 해리슨 대통령의 사망 소식이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도달하는 데에는 무려 3개월 20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전신(telegraph)’의 원래 의미인 “먼 곳에 글을 쓰다”는 그렇게 실현되었지만, 먼 곳에 소리를 보내는 ‘전화(telephone)’는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전화’라는 단어는 전화의 발명자인 미국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이 태어나기 전인 1840년에 나타났지만, 그때엔 나무 막대기를 통해 음조(音調)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를 묘사하는 단어로 쓰였을 뿐이다.5)
초기에 전신은 철도망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보조적 수단이기도 했다. 아니 둘은 반드시 붙어 다녀야 하는 쌍둥이와도 같았다. 전신이 없이는 철도를 운영하기 어려웠다. 다른 건 다 제쳐 놓더라도 초기에 단선이었던 철도망을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출발역에 도착역의 기차가 언제 출발했다거나 무슨 일이 있다는 것 등을 꼭 알려야만 했다. 이후 전신이 커뮤니케이션 사업이 아닌 통상(通商) 사업의 영역에 속하게 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전신주’와 ‘전봇대’라는 말을 낳았다. 이에 대해 김주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도망과 전신망은 같이 퍼졌다. 기찻길이 지나가는 옆에 나무기둥을 심고 그 위에 구리선을 매달아서 전신망을 연결했는데, 그 나무기둥을 전신주라고 부르게 되었다 (…) 전신주 혹은 전봇대라고 불리던 이 기둥들은 전신줄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전화선과 전깃줄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요즈음에는 주로 전깃줄만을 떠받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둥을 전선주 혹은 전깃줄대라고 하지 않고 여전히 전신주 혹은 전봇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6)
대중 신문이 등장한 1830년대 이후에 일어난 미국 저널리즘 혁명의 한복판에도 전신이 있었다. 전신을 이용한 단순 사건의 보도는 그 이전까진 뉴스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대중 신문들은 그걸 주요 뉴스로 삼았다. 뉴스를 배포하는 통신사도 183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뉴스 통신사는 1832년 샤를 루이 아바스(Charles-Louis Havas, 1783-1858)가 금융정보중계를 위해 파리에 세운 아바스 통신사다. 이 당시는 금융정보 중계가 통신사의 주된 목적이었으며, 전달 수단도 역마차와 비둘기였다. 전신에 의한 뉴스 배포는 1840년대부터 이루어졌다.
1849년에는 같은 목적으로 버나드 볼프(Bernard Wolff, 1811-1879)가 베를린에 볼프 통신사를 개설하였으며, 1854년에는 구글리엘모 스테파니(Guglielmo Stefani, 1819-1861)가 튜린 그리고 뒤이어 로마에 통신사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통신사들은 주로 경제 뉴스만을 취급했고 그 대상도 신문이 아니라 예약된 특정 고객들이었다. 경제뉴스뿐만 아니라 일반뉴스도 취급하여 신문에 공급한 최초의 통신사는 1851년부터 1858년 사이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독일계 유대인으로 은행원 출신인 파울 율리어스 더 로이터(Paul Julius de Reuter, 1816-1899)가 런던에 세운 로이터 통신사다. 이 유럽의 3대 통신사는 1859년에 카르텔 협정을 맺고 세계 시장을 3등분하여 장악하였다.
전신을 이용한 단순 사건의 보도가 대중 신문들의 주요 뉴스로 등장하게 되면서 뉴스 자체를 배포하는 통신사들도 하나 둘씩 나타났다. 사진은 뉴스통신사 로이터 본사(뉴욕)의 모습.
유럽 카르텔이 국제뉴스 시장에서 횡포를 부리는 기간 중에도 미국 신문들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미국에서 전신은 큰 신문들과 아무런 차별 없이 전신 뉴스를 받을 수 있게 된 소규모 신문들의 번성을 가져왔다. 1847년 창간한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에 이어 1850년대의 신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신문은 <뉴욕트리뷴>에서 일했던 헨리 레이몬드(Henry J. Raymond, 1820-1869)가 1851년 9월 18일에 창간한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다. 이 신문은 1센트에 판매하면서도 페니신문들의 선정성을 배격하고 <뉴욕트리뷴>의 변칙성, 특히 그릴리의 변덕도 배격하면서 ‘객관적이고 초당적인 기록신문’을 표방하였다.
신문 인쇄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신문의 대량생산도 가능해졌다. 1846년 리처드 호우(Richard Hoe, 1812-1886)가 최초로 개발한 윤전식 인쇄기(revolving press 또는 rotary press)는 시간당 2만부 인쇄를 가능케 했다. 이전에 쓰이던 영국제 원통식 인쇄기(cylinder machine)는 시간당 2천부를 인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또 1840년대엔 광고대행사(advertising agency)가 등장하면서 신문사업이 이전보다 용이해졌다. 이런 변화에 힘 입어 1870년대엔 미국에서 5천여개 이상의 신문이 발행된다.
뉴욕주의 신문들은 미국-멕시코 전쟁(1844-1846년) 기간 동안 막대한 전신뉴스 비용을 부담하면서 이대론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1846년 3월 공동으로 뉴욕주 AP(Associated Press)를 만들었으며, 이는 1856년 전국적인 AP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통신사를 영어로 ‘News Agency’ 또는 ‘News Service’라고 하지만 ‘Wire Service’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즉, 전선(Wire)으로 뉴스를 전하는 회사라는 뜻이다.
신문의 전신 의존은 신문제작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무엇보다도 전신요금 절약을 위해 간결한 기사 작성이 요구되었다. 특히 전쟁 보도시에 그런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오늘날까지도 지켜지고 있는 ‘역피라미드(inverted pyramid)’나 ‘서머리 리드(summary lead)’ 등의 스타일은 전신 때문에 생겨난 기사 작성법이다. 또 전신으로 사건의 전개과정을 계속 알리는 과정에서 기사의 헤드라인도 탄생했다. 이 모든 게 남북전쟁 시기에 일어났다.7)
기자들의 문체는 속도, 명료성, 단순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이른바 ‘전신적 문체’로 바뀌어 갔다. 훗날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의 단순명료한 영어 문체도 부분적으로는 대서양 케이블을 통해 기사를 전송해야 했던 외국 특파원으로서의 경험이 낳은 산물이다.8)
전신은 언론인의 직업관과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뉴스가 점점 전신을 닮아가고 있었으니, 어찌 변화가 없었으랴. 임영호는 전신으로 인해 “뉴스에 대한 판단은 객관적인 사실의 기계적인 선택과정과 유사하게 되고 뉴스는 운반, 측정, 감축 등이 가능한 물건처럼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9)
1843년 열차를 타본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고 경탄했다지만,10) 전신은 과연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서도 철도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전신은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살해한 주범이 아니었을까? 전신은 철도와 더불어 이른바 ‘시, 공간 압축(time-space compression)’의 매체로 근대사회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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