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거래-11
원래 선문답을 관통하려며는 능가경이나 금강경을 공부해야한다. 더욱이 능가경을 이해하게 되며는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능가경은 상당히 난해하다. 너무 난해하여 그냥 읽어보기에도 힘이 들 정도이다. 이러한 연고로 일반 계율경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워 조금은 더 현실적이며 이해할 수 있는 금강경에게 대승경전의 선두자리를 내 주게되었다.
보편성이어야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가경은 참으로 위대하다. 인연이 되시는 분 들은 능가경을 강의하시는데 참여하시면 많은 공부가 되리라 믿는다.
능가경에서 대혜보살이 석가세존에게 108 문제를 질문하는데
그 내용을 윤곽적으로 밝혀보건데 이러하다.
어떻게 해야 마음속 망념을 깨끗이 할 수 있는가요? 왜 마음속 망념이 멈추지 않고 늘어가기만 하는건가요?
왜 지견이 의혹속에 떨어지는가요? 왜 의혹을 보면 멈추지 않고 더 증가하기만 하는것인가요?
왜 세간에 있는 이 많은 국토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변화하는 가요? 이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요?
어떻게 해야 불자라고 칭 할수 있는가요? 해탈을 하고 난 뒤에는 다시 어디로 가는건가요?
어떤 것이 선정의 경계인가요?...
나는 누군가요. 그대는 누군가요.
만법을 생겨나게 하는 인과 연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요?
이러한 물음이 108가지가 된다.
이에 대한 석가세존의 대답은 거의 선문답식으로 진행되는데 이것이 말인지 글이니 난 수표인지 도대체가 알길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남희근 법사는 이를 해의하는데 성공을 한다. 그러나 보는사람이 거의 없다 ㅎ
단지 우리나라에는 역시 원효대사의 능가경 원해가 잇으나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는 애석한 일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겁먹을 필요없다. 100번 읽으면 한두줄을 이해가 가고 또 읽고 참구하면 서서히 풀이게 되고 이치가 들어서게 된다.
선 의 경지에서는 말 이란 것은 너무나 난삽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아주 간단해야 한다. 눈 한번 치켜 뜨면 거기에 소식이 다 들어있어야 한다. 말로 주고 받으면 이미 번거럽게 장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선정의 참구는 묵언에서 많이 다가올 수 가 있다.
자기는 말을 하지않고 타인들이나 주변들이 하는 말을 듣는 이근을 열어놓게 되면 말이라는게 참으로 하찮게 들리는 것이다. 이건 개나 이야기 하는지 고양이가 말하는것인지 말이라는 것이 참으로 보잘 것 없구나를 느낄수가 있다.
원래 마음자리란 적적하다.청정하고 밝다. 조용하며 움직임이 없이 움직인다.
조용하고 밝게되면 무엇이든지 찾아오게 되어있다. 그런데 찾아오는 대상은 무엇인가 내게 경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고 무엇인가 몰랑한게 두려움이 없다는 것과 같다.
산에 큰 짐승이 있으면 새들이 지저귀지를 않는다 그 산으로 새가 찾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약한 동물들 역시 접근하지를 않는다.
조용하고 큰짐승이든 작은집승이든 간에 서로 같음으로 여기는 밝은 햇살이 주어지게 되면 경계를 풀고 서로 지저귀고 햇살앞에 노니게 된다.
그러므로 선이란 경계를 푸는일이고 서로가 하나임을 아는자리이고 자기가 낮아지면서 모든이들이 함께 찾아와서 같은 지혜를 쓰는일이다.
내가 생활을 하는 영업장에는 참으로 쥐가 많다. 여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 먹을것이 많다는 것이고 조용하기 때문이며 나를 발견하여도 미동도 안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쥐는 내 곁에서도 돌아다니고. 내 책상위에도 왔다 갔다가 한다.
그러면 직원들이 쥐틀을 산다거나 잡으려고 야단이다. 그러나 그것도 가만히 놔둔다. 방에 쥐가 들어오는데 놔둘 사람이 있겠는가?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직원들이 따진다. 왜 쥐가 돌아다니는데 그렇게 가만히 있느냐고.. 질병도 옮기도 보기도 흉하고 마구 어지럽히지 않느냐고 그런다. 맞는 말인데 할말이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말한다. 가만히 놔두면 다 해결되니 신경쓸거 없다 라고 말이다. 쥐들은 번식을 하고 점점 식구들이 많아진다. 아예 쥐는 폴딱 폴딱 뛰어논다. 특히 밤만되면 신이 났다. 낮으포복이 없다. 그냥 자기집 안방처럼 행세한다.
그렇다고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는다. 쥐서방도 살자고 하는 짖 아니던가? 내가 쥐 하고 전생이 인연이 있는가 싶다 g
그러나 지금은 자연스럽게 쥐가 하나도 없다. 쥐약을 쓴것도 없다. 왜 그러한가. 쥐기 많으니 이제는 고양이가 출몰하는 것이다. 이제는 나의 영업장에 고양이 서너마리가 찾아와 투숙을 한다. 먹고살기 위해서이다.
그러다가 머지 않아 다시 개가 출몰할 것이다. 고양이는 사라질것이며 또 다시 쥐는 찾아올 것이다. 나는 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적당히 쥐도 살아야 하고 고양이도 살아야 하며 개도 살고 사람도 살면된다.
마음은 이처럼 살기위하여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탓 할필요도 없다.
인간은 너무나 꼴을 떤다. 쥐보면 흉측하다하고 고양이 보면 너무 기분이 나빠하게 되고 개를 보면 지저분해 한다. 그리고 대상들은 경계하고 쫏으려 하며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다리게 되면 나는 쥐약도 놓지 않고 쥐를 해결하는것이고 스스로 고양이 개 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해결되는 것이 마음법이다. 모두가 같기 때문이다. 서로 균형을 맞추게 되는 자연적인 일이다.
사업을 해 보아도 내가 너무 잘되는 것이 보이면 경쟁자는 자꾸 뒷다리를 걸고 뒤통수를 치고 끊없이 민원을 제기 한다.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본능적인 의사표시이다. 사업이 너무 잘되는것도 잘못이다.
사업이 잘되면 특히 더 조심하고 경쟁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더욱더 겸손해야 한다. 이럴때는 아! 내가 너무 벌었나 싶어 다시 써야 한다.
우리나라의 부자라고 회자되는 임상옥 이는 만석군을 넘어 호남의 땅이 대부분 그 사람것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낮선이가 돈을 빌리로 왔다. 임상옥이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 내 운이 여기까지구나....
생면부지 가 내게 돈을 빌리러 왔을때는 그 자체가 이미 이상한 것이다. 그것도 큰 돈을 말이다. 임부자는 말없이 돈을 꿔 주었다.
그리고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그 지방에서 토지와 창고를 내어주고 재산을 정리했고 모든 것을 일하는 사람과 주변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준 것이다. 마음을 보는 사람이 였다.
이 소식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임부자가 돈을 꿔주지 않았으면 그 낮선이에게 칼에 찔려 죽게 되는 것이다. 후일 임부자는 그에게 물었다. 왜 생면부지인 나게에 돈을 꾸러 왔었는가?
그 낮선이가 하는 말이 돈은 절박하게 필요하고 당신이 돈이 많은 부자이므로 돈을 꿔주면 나는 살고 돈을 꿔주지 않으면 이왕 죽으니 그것을 대비하여 가슴속에 칼을 숨기고 왔었다고 했다.
강도를 하겠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에 강도가 들겠는가? 그러므로 돈이 잘 벌릴때라 하더라도 돈을 벌기만 하면 안된다. 쓸만큼은 써 주어야 하고 같이 살기를 위하여 최소한의 노력을 할줄 아는게 인지상정이다.
마땅한 마음의 법이다. 모두가 같다.
더하기 빼기로 살아가는 작금의 일은 목전의 이득만 염려하는 것이지만 멀리 안목을 보고 기다려 보면 모두가 같다. 불리하고나 유리하거나를 떠나서 마음은 이렇게 써야 한다.
돈이란 사랑하는 가족을 먹여 살려고 하다가 찾아오는 행운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지 돈 많이 모아 떵떵거리며 살자고 하는 이들은 절대로 돈을 벌 수도 없고 보존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것은 기다리며 조용하게 모두가 같음을 보는 자리로 이해하게 되면 모두가 같다는 이치로서 지혜가 작동하여 바라는 바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 사구게등을 수지하고 암송하는 능력을 갖추면 이세상 모든 생명류들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나와 같음을 여기고 도와주게 되어있다. 착한 마음을 쓰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례를 보자
옛말에 10 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틀림이 없다. 모든지 마음의 문제이다.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변한다. 끈질기게 잡고 늘어지면 언제가는 난해한 정체지만 자기마음과 같음을 내는 자기 본면목을 내어주고 만다. 귀 찮아서도 허락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왜 그런가 누구의 마음도 모든 생명류가 다 함께 살면서 하나의 생각을 내 주기 때문에 내가 생각을 내는 것이지 나 단독으로 존재로서 생각을 내어 판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수시로 변화하고 변하면 서로가 일치되는 생각점은 서로 동의할 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나의 친구 하나가 신문에 대서 특필이 될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산모 경찰서에서 긴급체포되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그 부모님은 홀어머니 이고 친구를 돌 보아줄 힘이 없었고. 발을 동동굴리며 내게 전화를 했다.
법적으로 최고 징역 7 년형을 받아야 하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하도 친구가 벨나게 굴어서 형사가 7명이 와서 잠을자는 사이에 바잠마 바람그대로 꽁꽁 묶힌체로 부산으로 압송된 것이다.
내가 어려울 때 내 몰래 액자에 돈 꼽아놓고 사라진친구인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돈이 없어 파워핸들 안되는 고물화물차를 이용하여 배달하고 살아가는데 이 차를 끌고나가 가죽으로 핸들카바를 씌우고 차 밑에 기름치는 데는 다 치고 시트 깔고 새차로 만들어 온 사건도 있었다. 가장 불리할 때 마음을 내게 준 친구이기도 하다. 또한 쌀을 한달에 한가마이를 먹고 고등어를 먹으면 두손을 한끼에 다 먹어치우는 괴물이기도 했다.
변호사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누구한테 부탁을 해도 서부로 가는 것은 50페이 셋째줄 독도는 우리땅이였다.
부산경찰서에 가서 담당형사 반장을 만났는데 골이 아팠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인상이 고약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내려가기전에 친구에게 절대로 진술을 먼저 받지말라고 당부하고서는 부산을 내려갔다.
무조건 빌었다. 무릎끓고 두손을 비비고 우는 시늉하고 계속 빌어댔다. 친구좀 살려주소. 다른말은 필요없었다.
그리고 친구한테 가서는 혀와 입이 아프고 목이 아파 진술을 하지 못하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하였다.
일단 진술을 받게되면 구하려해도 구할 길 이 없기떼문이다. 전후사정을 알아야 대처를 할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자 친구는 자기 주먹으로 자기 입을 너무 세게 처버려가지고 입이 산이 될 정도였고 한쪽 눈을 뜨지 못할정도였다. 정말 나 한테도 혓바닥이 어떻게 됐는지 웅얼 웅얼되니 말도 하지 못했다. 상당히 무식할 정도로 미련한 친구이기도 하다.
아예 경찰서서 난리가 났다. 병원으로 후송을 하고 보고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이 사람이 말을 못할 정도로 아프니 왜 그랬는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다..
한 삼일동안 매일 아침부터 담당형사 와 반장에게 손이 딿토록 빌었다. 무슨욕을 하든지간에 귀찮다 하든지간에 계속 친구좀 살려달라고 빌었다.
좀 살려주소 살려주소
담당형사가 화를 내도 빌었다. 그러나 나는 오직 친구좀 살려주소..
항우장사가 필요없다.
나중에는 당신이 친구 맞는교? 정말인교? 하면 그렇다고 빌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친구일 때문인데 뭐 그렇게 비느냐고 했다.
불리할때는 친구가 아니고 유리할때만 친구냐고 반문하면서 배우지 못한친구는 친구가 아니냐면서 반문하면서도 계속 빌었다.
4일째 되던날 담당형사가 나를 불렀다. 나의 비는 정성에 감복이 있었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는 요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이렇게 하게 되면 보석이 가능해진다라고 했다.
친구는 그 다음날 조서를 받았고 이내 교도소로 넘어갔다. 그 다음은 피해자라는 자 에게 가서 하루종일 빌었다. 세상에 이만큼 빌면 석가세존께서도 버떡일어나 내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나 싶었다.
하도 빌다보니까 내가 그넘이 된것처럼 슬프고 간절해졌다.
비는데는 항우장사도 못견딘다. 귀찮아서도 도움을 주게 되어있다. 같은 사람사이가 아니겠는가. 형사이든 공무원이든 피해자이든 모두가 사람이 하는일이다. 도둑도 사람이고 싸움질도 사람이며 모두가 같다. 잘못하면 빌어야 한다. 이것이 지상최대의 무기이며 소림권법이며 육법전서이다. 이것이 마음의 판사가 결정내리는 것과 같다. 아예 치가떨릴 정도로 빌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나처럼 되어주려고 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와 외상 합의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경찰서에 제출한다음 일주일 후 보석으로 친구는 석방될 수 있었다. 검찰청에가서 또 빌고 빌었다. 겨우 불구속 으로 조사받고 기소유예로 처분받고 나올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석방되어서 이번에는 나에게 빌고 빌고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반성문도 100 장이나 썼는데 워낙 글재주가 없어서 글 쓰다가 손 접친사람은 친구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다음부터 친구는 화가나면 자기가 자기를 때리는 연습을 하곤했다. 그래서 나는 전혀 생소한 샌드백을 만들어 주었으며 숙제를 하는 조건으로 불경책을 읽어 몆구절을 암송해야 하는 책임을 지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손바닥으로 빌고 또 빌게되면 척추 등짝 까지 따스한 기운을 들어온다. 아예 선정삼매로 손을 비비는 소식에서 찾아 오는 것이다. 오직 일념이다. 친구를 구하는데 목적이 있는것이지 다른 것은 없다.
그친구는 현재 시골로 이사가서 7000평이나 되는 밭을 빌어 밭농사를 짖고 참한 색시도 얻었다. 그리고 아주 독실한 불교신도가 되어 자기 다니는 절에 가서 빗자루 들고 청소도 해준다.
나는 무조건 빌어라 라고 표어를 만들어 주었다.
마음법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아무리 괘씸하고 화가난다 하더라도 비는 사람이 계속 진정으로 빌게되면 주욱 계속 화가 날 일이 없다. 약간 동정심도 찾아오고 시시때때로 비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 저 사람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우정 같은 것이 있지 않는가 도 반신반의 할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했으면 초지일관 빌어야 한다.
아무리 예쁘고 사랑하고 싶은 여인이 있다 하자 너무 까칠하고 도도하고 자기 같은 사람스타일을 제일 증오한다고 하여도 , 자기를 아무리 미워하고 싫어한다 하여도 계기를 만들어 아이고 한번만 데이트를 하면 죽어도 소원이 없다고 빌며 빌고 무릎끓고 빌고 빌면 다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죽는사람 소원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한번 들어달라고 빌고 빌면 용뺄 재주가 없다 밥먹을 힘도 없이 굶으면서도 빌고 애걸복걸 하며 한번만 사랑좀 해주이소 하면 지성이 감천이라 다 들어주게 되어있다. 이를 이심전심에 맞춘다고 하는 본성인 불성이 공유하고있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늘 이렇게 작용하는 것이며 생각을 내는 것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기다리며 빌게되면 자기와 합치되는 이심전심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총알이 날아오는데 총알보고 비는 것은 어리석은것도 물론이다.
나중에는 기가맥히다가 동정을 하다가 짜증을 하다가도 그러다가10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이렇게 써야한다. 물론 진심으로 빌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불경 공부도 자꾸 자꾸 독송하고 읽을때에도 국어책처럼 읽지 말고 옛날어르신데 들이 시장가서 산 국문소설 음률을 주고 읽는것처럼 그렇게 읽어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글자나 뜻 도 견디지 못해 정체를 보여주고만다. 그 도도하고 어려운 글자도 자기마음에 감응이 되어 매가리 없이 풀어주게 해주는 것이다.
선문답인 법거래를 읽을 적에도 주욱 읽지 말아야 한다. 그져 비는마음으로 끈질기게 그리고 반복 반복하여 천천히 노래처럼 읽어나가야 한다. 요것이 무슨뜻이냐 아이고 니가 무슨뜻이냐 세존이 일어나서 갈키주라는 식으로 계속 반복해서 음악을 주면서 노래하는 것처럼 읽어야 한다.
마음은 이처럼 다른법이 없다. 주어진 인연에게 잘 하면 되는 것이다.
병에 걸린사람은 자꾸 불경을 보고 노래를 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공명현상으로 내장이 흔들리게 해야 하고 배에 힘을 주고 도릇도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새 병이 감동을 받아 비는 마음으로 달려와서 안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겁먹을 필요가 없다. 겁을 내게되면 이미 경계이미 대상을 혐오하거나 자기를 믿지못하는 마음인 아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옛날에 천자문 공부할 때처럼 말이다. 그러면 문리가 트는 것이며 격물에 대하여 취지 할 수 가 있는것과 같다.
오직 천천히 가락을 주면서 슬근 슬근 읽어가면 아무리 어렵게 느껴 져도 불현 듯 찾아온다.
그것은 원래 마음이란 무아이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생각을 내는 것이므로 내가 생각을 스스로 독단적으로 하고 의지를 내는 것이 아닌 것이 진리의 본질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강경도 한분을 오전내내 천천히 음미하고 음미하면서 노래가락을 부처 읽어나가면 뭔가가 새롭게 다가 올 수 가 있다. 그냥 국어 숙제 하는 것처럼 읽어내려 가서는 아니된다. 항상 울림을 생각해서 그렇게 염불을 하게 되면 부처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 부처님 생존시는 늘 게송으로 찬탄하며 배움을 일으키며 깨달음으로 정진했음을 보아서라도 잘 알 수 가 있다.
사서삼경에서도 시경을 읽으면 죄다 천리를 죄다 깨달을 수 가 있다. 음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경이 그렇게 아름답고 마음의 본자리를 알 수 있는 경전이된 것이다.
담주에 화림화상이 있었다.
스님이 미리와서 바야흐로 방석을 펴는데 대사가 말했다. “천천히 하라” 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무엇을 보셨습니까? 아깝게도 종루가 주저앉았구나 몸과 마음이 급하니 되는 것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쉬엄 쉬엄 가야 한다. 그러자 스님은 크게 깨달았다. 마음이 무겁고 머물게 되니 몰이란 대들보도 견딜수가 없어 무너지는 것이다. 항상 마음을 가볍게 하고 천천히 하라는 의미이다. 마음이 가볍다는 것은 모두가 같으니 경게를 내려놓고 조용하게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조주의 대전화상이 있었다.
처음에 석두를 뵈니 석두가 대사에게 물었다. 어느 것이 그대의 마음인가? 말 하는 이것입니다 문득 석두에게 할을 당하고 쫒겨났다. 말로는 아니된다 마음으로 해야한다. 짚신이라도 공손하게 바라보고 절해야하 한다. 마음이 말을 할 수 있는가? 법에 걸린 것이다. 십여일이 지나자 대사가 다시 물었다. 먼저의 대답이 틀렸다면 이를 제외하고 어떤 것이 마음입니까? 석두가 대답했다. “눈썹을 치기거나 눈을 깜빡이는 일을 제외하고서 마음을 가져오라“ 경!을 해야 한다. 순간적인 찰나의 몸짖을 말한다. 하나에 집중하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일념을 보아야 한다. 말로 하다가는 이미 법이 지나가고 버스는 이미 떠나는것과 같다.
대사가 말했다. “가져올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따나 많은 연구를 한 것이다.
석두가 말했다
원래 마음이 있거늘(부처의 본성) 어째서 마음이 없다고 하는가? 마음이 없다고 하면 모두가 비방하는 말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가장 낮은곳에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따르게 되어있고 처처에 마음이 가득하다.
대전화상은 이 말 끝에 크게 깨달았다. 마음이란 안과 바같이 없으며 처처에 가득한데 마음이 없다라는 말을 하였으니 천리바깥인데 이미 마음이 익어지는 공부를 하여 돈오한 것이다.
훗날 시봉하면 석두가 물었다. 그대는 참선하는 승려인가 고을로 돌아다니는 승려인가?
참선하는 승려입니다. 어떤 것이 선 인가? 눈썹을 키기고 눈을 깜빡이는 것입니다. 석두가 말했다. “눈썹을 치키고 눈을 깜빡이는 일을 제외하고 그대의 본래면목을 갖다 바쳐라“
대사가 대답하기를 화상께서 눈썹을 치키고 눈을 깜박이는 일을 제외하고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석두가 이르되 “나는 제거해 버렸다” 치키고 깜빡이는 것을 제거했다는 말이다. 제거하는것도 찰나의 경 이 되지 않는가.
팔을 피었으면 오므리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에 대사는 저도 이미 화상께 바쳤습니다“ 그대가 이미 바쳤다니 내 마음은 어떠한가? 화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니마음 내마음이 없다 동시에 하나이며 이심전심이므로 석두따라 하는 것이다.
석두가 말했다. 그대의 일에는 관계하지 않는다. 쥐가 와서 내방에 들어와도 나는 쥐 한테 관여하지 않겟 다는것과 같다. 대사가 대답하되 본래 물건이 없습니다 무념을 말하고 있다. 무념이란 생각이 없다라는 것을 말하다.
석두가 말했다 그대도 물건이 없다? 대사가 대답하길 이미 물건이 없다면 곧 참 물건이겠습니다 참 마음을 말한다. 참 물건은 얻을 수 가 없다 이심전심은 주고받음이 없다 그냥 하나의 경지로서 낮다. 해인삼매를 말함이다. 그대 마음의 견량(정체) 과 의취 가 이러하니 부디 잘 보호해 지녀라.
마음이란 생각이 없는 자리를 본질로 한다. 내 가 앞에 있는 식탁을 보게 되면 이미 생각이 내 마음속에 들어가 식탁을 일으키므로 생각을 내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으면 스스로 본래의 면목으로 가게 되어있다. 눈을 감고 잘때에 생각이 일어나던가? 마음자리는 이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보는 본질과 옳음을 취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부디 잘 보호해 지니라는 인가를 내 준 것이다.
제자는 스슫의 영향을 받게 되어잇다.
대사가 상당하여 대중에게 말 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가의 본심을(자기집의 본심을) 알려고 하므로, 마음을 가지고 보여 주면 바야흐로 도를 볼 수 있다. (진실한 마음의 본성을 가지고 보여주면) 요즘 사람들이 단지 눈썹을 치키거나 눈을 굴리거나 한 번 말하고 한번 침묵하는 것을 인정해서 곧바로 인가하는 것을 심요(心要)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아직 요달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해 주겟으니 제각기 자세히 들어라 다만 이 마음은 티끝 경계에 응할 때든 고요한 침묵을 지키면서 인정할 때든(인내를 가지고 머물때이든) 전혀 교섭이 없다(교환하여 거래하는 법이 없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니 닦고 다스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근기에 응하는 데 따라 비추면서 차디차게 스스로 작용하지만 그 작용하는 곳을 궁구해도 끝내 얻을 수 없다. 묘한 작용이라 부르려 하지만 바로 본래의마음일 뿐이니 잘 보호해 지니면서 경솔히 여기지 말라.
진심으로 낮게 하나되는 마음으로 여기는 경지가 돈오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그 속의 사람끼리 서로 볼 때는 어떠합니까? 벌써 그 속이 아니다. 이말은 바깥상을 보기 위해 마음이 바깥에도 통하여 나왔으므로 속과 밖이 없는 경지를 속의 마음을 서로 본다는 이심전심이다. 그 속이란 것은 어떠합니까? 그런 물음을 하지 말라 물음자체가 잘못되었다 속과 밖이 따로 있는게 마음이 아니다라는 말
괴로움의 바다에 파도가 깊으니 무엇으로 배나 뗏목을 삼으리까? “나무로 배나 뗏목을 만들라“
마음이 생각이나 행위를 만드는 것이다.
말로 하는 상식에나 젖어 생각되로 해라 애라 이 인간아 하는 경책이다. 마음 생각 의지 는 모두 하나일 때 가 중요하다 그러면 건넙니까? 장님은 여전히 장님이요 벙어리는 여전히 벙어리니라.
뭘 건지고 자시고가 있는가 아무리 말해도 장님은 장님이고 벙어리는 벙어리 이구나 보지 못하니 말도 못한다 라는 의미로 꾸짖는 것이다.
담주의 광선사가 석두를 만났다. 석두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영(領) 마루터의 한 존자는 공덕을 이루었던가 성취한지 오랩니다만 아직 점안을(點眼) 못 했습니다. 점안해 주기를 바라는가? 청하옵니다. 석두가 한발을 드니 대사가 절을 하였다. 이에 석두가 말했다 그대는 어떤 도리를 보았기에 절을 하는가 제가 보건데 커다란 하롯불 위에 한점의 눈송이가 내린 것 같습니다. 점안을 못했다 하거나 점안해 주기를 바라는가 는 이미 절벽이다. 이미 갖추어진것에 무슨 점안이 있는가. 한 다리 드는것에 생명의 경 이므로 대사가 절을 하지만 하롯불 같은 중생심에 한점의 부처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는 것으로 의미없음을 밝히는 자리이다.
하롯불이 원래 없고 눈송이가 원래 없는 하나의 자리에 서 구별짖는것과 같은 경이므로 엉터리로 주고 받는 것을 두사람다 알고 통하는 자리이다.
투자가 물었다. 2조가 처음으로 달마를 보았을 때에 무엇을 얻었습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지금 나를 보고 무엇을 얻었는가?
지금을 보라는 의미이다.
마음은 항상 지금에 머무른다. 머무르지만 흘거가면서 머무른다. 쉽게 말하자면 흘러가는 물이 있다하자 그 흘러가는 물이 마음이라면 마음이 흘러간다.
이 마음이 흘러가는데 아상으로 자기라는 존재를 세워서 흘러가는 물과 같이 똑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항상 보는것만 보고 얻는것만 얻으며 인연만큼 그것을 항상 서로 마주하고 가는 것이 마음의 법이기도 하다.
흘러가는 물은 이끼가 생기지 않는다. 물이 머물게 되면 이끼가 생기지 않던가. 이 소식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 라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이 이것이다.
사람은 고정관념에 머물러 있기에 이끼가 끼고 착상이 되어 무엇인가가 생겨나게 된다. 착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시간의 속절과 관계없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던간에 늘 마주하던 생명과 함께 가고 있다. 이것이 인연이다.
늘 시간에 정지된 개념들을 보고 적적부동하게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돈오가 되면 이제는 확장이다. 동시의 이 공간이 모두 하나로 연결됨을 볼 때 견성이 되는 것과 같다. 이 확장성이 확고할 때 이미 시간의 정지개념을 넘어서 삼계를 자유자재로 쥐었다 폈다하는 부처의 성품을 보는게 마음의 본성인 것이다.
모든 것을 같음으로 볼 때 마치 밝은 광명이 주어질 때 모든 구석이 다 보이는것과 같고 어둠에 묻어있는 모든 중생들이 광명을 쫓아 모여드는것과 같다.
숨을 것이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광명이 원래 주어져 있는데 이를 양심이라 한다.
양심 찾는 것이 원래 견성을 의미한다. 지극히 어려운게 아니다.
단하산의 의안 선사 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어떤 것이 그대인가? 그렇다면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대에게 할 말이다.
우리는 모두가 같다. 같음을 벗어나면 이미 원죄이다. 하나의 마음을 바다처럼 여기라. 라는 사자후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선문답을 해박하게 푼다고 하여도 마음이 무쇠처럼 단단치 않으면 공부가 덜 된 것이다.
마음이 굳세다는 것은 이미 마음자리를 보았다는 것이고 마음이 약하다는 것은 아직은 멀었다는 반증이다.
길주의 성공선사 한테 어떤 스님이 와서 참문을 했다.
이에 대사가 손을 벌려 보았다. 스님이 앞으로 다가섰다가 물러서니 대사가말했다. 부모가 모두 죽었는데도 전혀 슬퍼하지 않는구나.
스님이 앞으로 다가섰다가 물러서는 것은 오고 감이 원래 부동이며 지금 이 자리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죽어도 늘 지금 있으므로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 스님이 깔깔 웃으니 대사가 말했다.
잠시 그대와 더불어 슬퍼하마 세속의 정을 나누어 보자는 말이며 부모의 슬픔을 함께하자는 이심전심을 쓴느것이다.
그 스님이 곤두박질을 치면서 나가니 대사가 말했다.
아이고 아이고...
담주 도오산 원지 선사 는 예장 해혼 사람으로서 성은 장씨이다. 어릴 때부터 화상에게 계를 받고 약산의 법회에 가서 심인을 깨달았다.
어느 날 약산이 물었다. 그대는 어디를 갔었는가? 산을 돌고 왔습니다 윤회로 두루두루 다니면 지금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방을 여의지 말고 빨리 말해보라.
이 방안에 마주한 나와 너를 빼지말고 당장에 말해보라는 의미이다 생각하고 골똘하게 연구해서 대답하면 이미 늦다 마음자리란 흘쩍 지나가는 물과 같기 때문이다.
산위의 까마귀 새끼는 눈과 같이 희고, 시냇물 속의 노는 고기는 바빠서 멈추지 않습니다.
중생으로서 아상을 가졌지만 까마귀라 검은색이므로 물이며 새끼는 가장 순수무구한 불성이므로 白(백)을 써서 눈과 같이 희다고 하였고 시냇물 속의 노는 고기란 물이 생명이며 노는 고기도 생명인데 시냇물과 고기는 하나이건만 고기가 되어 시냇물을대상으로 여기어 고기라는 아상을 내어 살고 있으니 시간에 이끌리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는 말로서 윤회에 걸림을 말하고 있다.
원래 불성이며 모두가 같음인데 시냇물을 마주하는 대상으로 여겨 착하는 생각에 머물러 윤회를 타고 다니면 지금 고기가 되어 시냇물인줄 모르고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할!
다음에 계속합니다 -합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