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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전에 있어서 우리는 벌써 몇 천 년의 문화를 가진 한 민족이요, 그 사는 땅도 요하(遼河), 흑룡강(黑龍江)의 버덩으로부터 이 반도에까지 미치는 넓은 지역이었다
民族路線의 반성과 새 진로1. 함석헌
신천 함석헌
民族路線의 반성과 새 진로1
8.15를 기점으로
함석헌
2천 년 이래의 문제
우리는 지금 민족적 운명의 위기에 부딪치고 있다. 오늘까지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중에서도 이런 위기는 삼국시대 이래의 가장 중대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도 민족통일이 그 맡은 과제였는데, 그리고 그것을 잘 치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후 천 년 넘는 고난의 길이었는데, 이제 또 다시 그 흥망이 달린 통일문제를 당하게 됐다. 우리는 전민족의 지혜와 용맹과 정기(正氣)를 모아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하나 되면, 산다. 갈라지면 망한다!”
삼국시대 전에 있어서 우리는 벌써 몇 천 년의 문화를 가진 한 민족이요, 그 사는 땅도 요하(遼河), 흑룡강(黑龍江)의 버덩으로부터 이 반도에까지 미치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아직 부족국가의 낡은 깍지를 벗지 못해 몇 백 되는 자그마씩한 나라들이 그 지경 안에 갈라져 있어 서로 교통하고 싸우고 있었다. 오랜 동안을 그러다가 삼국시대에 이르러서야 그 모든 작은 나라들이 이 셋에 흡수돼 버리고 제법 나라다운 굳센 나라가 되었다. 동시에 세 나라 사이의 싸움은 더욱 심해갔다.
그러나 싸움은 서로서로를 자극하여 발달하게 하는 점도 있으나 그칠 줄 모르는 동족 사이의 싸움은 민족의 정력을 소모시켜 멸망의 비운(悲運)을 가져올 것밖에 없었다. 이 의미에서 삼국시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시기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삼국의 싸움은 싸움을 위한 싸움이 돼버렸지 민족의 대동단결을 이루는데 이르지 못했다.
생각해보라, 삼국이 만일 통일이 되어 정력을 동족상잔에 소모함이 없이 안으로 문화를 올리고 밖으로 세력을 넓히는데 쓸 수 있었더라면 동양 천지가 어떻게 됐겠나? 그랬다면, 중국이 비록 우리보다 조금 앞서 통일국가를 이루어 한대(漢代)의 융성(隆盛)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리 두려워할 것은 없었을 것이요, 일본은 아직 우리보다 훨씬 떨어져 초야(草野)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신라로부터 고려 이조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됐던 왜구(倭寇) 같은 것도 있었을 리 없고, 도리어 우리 힘이 일본에까지 미쳤을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정상 발육을 못하고 곱추가 되게 한 저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난이 없었을 것이요, 그래서 남북만주에 기운을 마음껏 펴는 민족이 됐다면 이조 오백 년의 악정과 그 결과인 민중의 위축(萎縮)도 없었을 것이다. 또 그랬다면 서양 문물을 실어 들이는데도 뒤지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남의 식민지로 떨어져 부끄럼, 슬픔에 날을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아아, 운명인가, 천명인가, 그렇지 않고 사람의 잘못인가?
역사를 읽다가 매양 책장을 찢어버리고 주먹으로 땅을 치고 싶어지는 것은 그놈의 소위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대목이다. 어려서 철없을 때 가르쳐 주는 대로 썩어진 선비놈들의 소리 그대로 읽었지만 지금 분해 견딜 수 없다. 생각 없는 사람들 아직도 그것을 자랑으로 알아 국민 교육이랍시고 하고 있지만, 생각해 보라, 그것이 어찌 통일이겠나? 땅으로만 해도 중요했던 국토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변변치 못한 그 일부분만이 남았으며 사람은 얼마나 없어졌는지, 문화는 어떤 것이 잃어졌는지 이루 알 수가 없는데 아무리 자기기만 자기위로(自己慰勞)로서거니 어찌 감히 삼국의 통일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렇게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무엇이 되란 말인가? 민족은 분(憤)을 품고 노(怒)를 발하는 것이 있어야 발전하는 법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 나쁜 버릇이 파쟁이요 지방색인데, 그것을 누가 만들었나? 단군, 동명(東明), 온조(溫祚)에게 그것 있었던가? 혁거세(赫居世), 김수로(金首露)엔들 있었을까? 이것은 틀림없이 외적과 흥정을 하여 나라 땅과 사람의 대부분을 넘겨주는 대신 그 일부를 얻어 제 몫으로 차지하고는 감히 민족통일의 이름을 도둑질하는 역사적 죄악을 지은 신라의 지배계급의 병든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매국망족(賣國亡族)의 심리가 성격으로 굳어져 나중에는 ‘경상도 대통령’이니 ‘전라도 대통령’이니 하는 따위 생각으로까지 나왔다.
우리 민족의 모든 불운, 모든 죄악의 근원은 삼국이 그 역사적 과제를 옳게 치르지 못한 데 있다. 그 책임은 셋이 같이 져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는 망했으니 물어도 소용없고, 이기고, 역사를 이어 받았노라는 신라가 전적으로 담당하는 수밖에 없다. 신라 사람에게 만일 티벳하(河) 언덕 일곱 뫼 위에 나라를 세웠던 라틴족의 기상이 있었더라면 우리 역사가 이렇게 떨치지 못하는 것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와 한반도가 무엇이 다르며 황해, 동해와 지중해가 무엇이 다를 것이 있나? 그런데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대로마의 주인인 라틴족의 웅대한 기상이 아니고 협소(狹小)한 그리스 사람의 버릇이었으니 어찌할까? 그것들도 우리 신라와 마찬가지로 긴 역사와 위대한 조상과 빼어난 재질을 가지면서도 도량의 좁음으로 인해 손바닥만한 반도 안에서 저희끼리 싸움을 하다가 업신여기던 마케도니아에게 멸망을 당했고, 오늘날도 군인정치 아래 꾸물거리고 있다.
대체로 볼 때 신라에 군인은 있었으나 정치가가 없었다. 생각해보라. 웅크린 손만한 반월성(半月城)에서 무슨 큰 경륜(經輪)이 나올 수 있겠나?
주몽(朱蒙) 어디 가고 을파소(乙巴素) 어디 갔느냐?
나라를 하는 것은 정치가지 군인이 아니다. 항우(項羽)는 망하고 유방(劉邦)은 천하를 얻은 것을 모르나? 시저, 나폴레옹이 충실히 군인으로 있었더라면 공이 길이 남았을 것이지만 하지 못할 정치를 하려다가 저도 망하고 세상도 망가쳤다. 우리나라는 신라 군인이 잘못 만들었다.
우리가 반도 구석에 옴츠리기 시작한 것은 그들 때문이다. 나쁜 풍(風)은 유전하는 법이라, 신라가 그랬기 때문에 고려에 군인의 폐가 심했고, 이조에 온즉 이성계와 아들 방원까지는 군인이었으나 그 후는 군인도 없고 긁어먹고 짜먹는 벼슬아치뿐이었다. 군인정치에서 부정부패는 논리적 귀결이다. 그런데 국민정신 일으킨다고 자꾸 군인숭배만 시키는 것은 참 좁고 옅은 생각이다. 이대로 가면 민족의 장래 없다.
위로 아래로 생각해볼 때 일본에 먹혔던 것도, 영원히 망하는 줄 알았던 그 지배에서 해방이 된 것도, 되면서도 또 남북으로 분단이 됐던 것도, 다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다 이천 년 이래의 같은 문제가 그 모양을 변해서 나온 것이다. 잃었던 네 자신을 찾아라!
민족통일 돼야 한다. 우리는 운명을 같이하는 한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 돼야 한다. 인격이 통일 못되면 사람이면서 사람 아니듯이 통일된 나라 못 이루면 민족 아니다. 운명이 같으면 의무도 하나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하나 되어야 한다. 죽고 삶을 같이하면서도 마음이 하나 못되는 것은 어떤 악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악을 한사코 물리쳐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민족으로서의 의무다. 한 가정이 깨지면 그 서로 당하는 불행과 남에게 끼치는 해가 남남끼리 사이에서보다 한충 더 심하다. 한 민족도 그렇다. 우리만 잘못 살 뿐 아니라 통일 못된 한국 민족은 유대 민족처럼 세계 역사에서 말썽꺼리가 될 것이다. 두렵지 않은가?
우리는 첨부터 평화통일만이 단 하나의 길인 것을 주장해 왔고, 그것을 위해서는 호전적이요 권력주의적인 두 정권이 하는 대로 맡겨둘 것이 아니라 남북의 씨알이 직접 일어서야만 한다고 부르짖어 왔다. 7·4성명은 그들이 그것을 진실로 했거나 술책으로 했거나 물을 것 없이 우리가 본 것이 발랐고 발랐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뒷받침해주는 일이다. 그들이 하는 것 아니라 역사 자신이 한다. 그들이 자주, 평화, 이념, 제도를 초월한 통일념, 고 싶어서, 할 자신이 있어서 선언한 것 아니다. 엉겅퀴에서 없이 무화과를 따의적찔레에서 없이 포도를 얻을 수 있겠나? 역사가 명령하기 때문에, 대세가 몰아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은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하는 일은 그대로 두어서는 아니된다.
언제나 혁명은 전체가 하는 법이다. 이것은 혁명이다. 씨알 전체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만” 될 일이다. 무명의 전사야말로 참 전사요 무관의 왕이야말로 참 왕이다. 그 속에 참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씨알만이 통일을 구상할 수 있다.
해방 직전의 모양
잃은 길을 다시 찾으려면 그 헤매기 시작했던 곳에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어진 방법이다. 통일을 위해 나갈 길을 찾으려면 우선 해방 이후 우리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아야 할 것인데, 그러려면 자연 말이 해방 직전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먼저 생활 형편
한마디로 “무(無)”로 표시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무물자, 무자본,무기술, 무교육.
제 2차 대전이 끝에 가까웠을 때는 먹을 것조차 없었다. 생각은 없고 칼만 아는 전쟁직업자들 할 수 없는 억지의 전쟁을 하며 초토전술(焦土戰術)이라 하고 “뿌리째 긁어내기 운동”이라 하면서 국민을 몰아쳤다. 자기네 본토에도 그렇거든 식민지인 우리게 사정 둘 것이 있었을까?
식량을 배급제도로 하여 하루 한사람에 2합(合)3작(勺)인데 그것도 제대로 얻을 수가 없어 밀가루를 물에 풀어 글자 그대로 입에 풀칠을 하여 지내는 사람이 수두룩했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나는 근대화랍시고 잘사는 남의 나라 흉내 내어 소비경제라고 한번 쓰고 픽픽 내던지는 오늘의 꼴 보면 이 백성이 정신이 있나 없나하고 의심한다. 배가 고파살 수가 없었다. 나무 조각 하나, 쇠 조박 하나, 못 한 개를 구하려 해도 이리저리 헤매야 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먹고 식민지 정치를 시작할 때 자기네가 선정을 하노라고 밤낮 내세운 소리가 “대머리 산이 푸르러졌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조 끝에 양반 벼슬아치놈들 긁어만 먹고 치산치수(治山治水) 하나 아니 했기 때문에 산은 모두 대머리가 됐고 비만 오면 홍수가 났다. 일본정치 36년에 과연 산에는 어느 정도 푸른 기운이 돌았다. 그러나 전쟁 하노라고 그 나무 싹 베어 갔고 그 나무만 아니라 선조 대대의 묘 앞의 나무까지 다 베어 갔다. 성냥 한갑, 신 한 켤레를 구하려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고, 장사꾼을 보고 무슨 신세나 진 듯이 치하를 하던 생각. 미친 생각을 조금만 누르면 해방됐을 때 가게마다 텅텅 비었던 그림이 좀 눈앞에 떠오를 것이다. 예만 그렇다더냐? 그런 날은 내일로 곧 올 수도 있다.
자본도 없었다. 민족 전체가 일본의 심부름꾼이었으니 어디서 자본을 모아둘 수 있었겠나? 우리 사람으로서 돈이 있다는 것은 극소수의 몇 사람이고 그 밖은 그저 땅을 파먹는 농업인데 그 농토마저도 거의 다 일본사람 손에 넘어갔었다. 해방 됐으니 말이지 만일 그대로 갔다면 전 민족이 농노(農奴) 아니면 날품팔이로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기술을 배운 것도 없었다. 지금 이 공업시대라면 기술 없이 어떻게 경제 부흥이 있겠나? 그런데 일본은 우리를 인간으로 살리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짐승처럼 부려먹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힘 드는 일만 시켰지 고등기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기술 배우면 나중엔 제 발등을 밟고 일어설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 기술진은 빈약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쉽게 부흥한 까닭의 하나는 그들이 닦아뒀던 기술 때문이다. 전쟁에는 졌지만 살아 있는 한 기술은 있다. 어리석은 한국 민족이 쓸데없는 삯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옛날의 기술을 살려 우리 덜미를 딛고 일어서게 됐다. 우리는 기술 중에서도 몹쓸 전쟁이란 기술만 배웠다.
교육도 부족했다. 크게 볼 때 근본 문제는 교육에 있다. 일본은 명치(明治) 이래 백 년을 국민교육을 해왔고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철저히 못하고 있다. 제 이름도 쓸 줄 물라 작대기를 그어 투표하는 민중에게 민주주의를 어떻게 기대하겠나. 교육은 일반으로 보급이 되어야 교육이지, 어느 놈은 받고 어느 놈은 못 받으면 폐해만 생긴다. 무식이 죄 아니지만 무식하면 유식한 놈에게 속게 된다. 그러므로 민중의 일반적 교육 수준을 높이는 것이 언제나 근본 문제다. 일본이 우리 전체를 무식쟁이로 만들었던들 우리 불행이 오늘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 놈은 가르쳐 심부름꾼으로 써먹고 대부분은 무교육으로 두었기 때문에 그것이 화근이 됐다. 오늘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배운 제국주의 아닌가?
사상
먼저 생각할 것은 식민지적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고정이 됐던 일이다. 민족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우리는 조선 사람,저 사람들은 일본 사람 하는 감정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었다. 그만이라도 하니 민족으로서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주권은 없으나 사회적으로는 통일이 있었다.
그러나 감정이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생각하는 밑바닥에는 일본의 세력을 거의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체념하는 생각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만일 해방이 오지 않았다면, 소수의 사람을 내놓고는 일반은 그 감정조차 약해지고, 차별 대우에도 만족하면서, 고유한 문화가 사라져 버리는 것을 그냥 보기만 하면서, 식민지 백성으로 멍청하게 그대로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대전 끝 무렵에 우리말을 금하고 옷을 금하고 이름을 고치라고 했을 때의 태도를 보면 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거기 대해 감히 반항하려는 기세를 뵈지 못했다. 그리고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후손을 위해서”라면서 그 멍에를 감수하고 있었다. 이것을 나는 식민지적 사고방식의 고정화라고 부른다.
일본의 압박에 대해 싸운 것은 민족주의였는데 그것도 3·1운동을 절정으로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를 비난할 때는 늘 배신했다고 욕하는데 사실 거기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날에 눈물 흘리고 생명을 내놓으며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이 일본의 압력이 차차 굳어지고, 그 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라 지극히 좁게나마 출세의 구멍을 열어놓자 그 대개가 타협의 태도를 취하게 됐다. 변치 않는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씨알들뿐이었다.
거기다가 공산주의자들이 계획적으로 민족진영을 무너뜨리려고 갖은 책략을 다 썼다. 오늘의 민주 공산의 대립은 거의 운명적이라고 하고 싶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표면에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공산주의는 당초에 이념의 이해로 보다는 하나의 전술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적은 일본이란 대적을 물리치자는데 있었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러시아의 힘을 비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에 친러(親露)의 길을 택했으며, 그 러시아가 공산주의로 됐고, 그 러시아 공산당은 세계혁명의 한 단계로 극동을 공산화하잔 것이 그 정책이었으므로 그 영토 안에 있는 한국 사람을 이용해서 선전했다. 상해 중경에 망명해서 임시정부를 조직하면서 민족주의요 공산주의요 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오늘의 꼴을 와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광주학생사건을 민족진영에선 민족정신의 발로라고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당시에 교육 일선에 서있었던 사람은 아는 일이지만 벌떼같이 일어나던 동맹휴교는 결코 애국애족 심에서만이 아니었다. 소수의 조직체를 가지고 조직 없는 민중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는 한편 민족주의 진영을 완전히 깨뜨려버리자는 공산주의자의 책동이 많았다. 어떤 때는 철없는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혹은 종교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이 일본 관리보다 더 미움을 받았다. 역사의 진정한 시비를 누가 능히 가릴 수 있을까? 온건했다 해서 다 일본제국주의 앞잡이라 할 수 있을까? 사납게 굴었다 해서 다 열렬한 투사라 할 수 있을까? 아마 당시의 싸우던 사람 앞에 오늘의 이 결과를 보여준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한 가지 속일 수 없는 일은, 결과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가 이를 봤다는 사실이다. 사실 일본 경찰은 암암리에 그 싸움을 이용하고 돕기까지 했다. 우리를 간방 안에 잡아넣고 지키는 말단 경찰관이 언젠가 우리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공산주의자를 단번에 다 잡아 없애려면 못할 것이 없으나, 그렇게 하면 안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구멍에 든 게처럼 아주 잡지는 않고 발을 내밀기만 하면 잘라서 나오지만 못하게 한다고 했다. 아마 저희 일본 상전이 설명하는 것을 듣고 옮긴 것일 것인데, 그 단번에 잡아버리면 안된다는 점을 저도 설명 아니했고 나도 물으려 하지 않았지만, 오늘 와서 생각하면 머리가 끄덕여지는 것이 있다. 망하는 민족이란 어리석은 것이다.
아무래도 그때 형편에서 보면 우리의 투쟁이 민족적으로 됐어야 할 것은 토론의 여지가 없는데, 이렇게 해서 서로 싸우는 동안에 이도 저도 깨져 무력해졌고 일본은 마음대로 그 동화정책, 황국신민화정책을 쓸 수 있었다. 이제 땅 밑에 들어가서 그때 시국 강연을 시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하면서 젊은이들 보고 일본 군대에 들어가라 하던 사람들을 만나서 묻는다면 그들이 뭐라 할까? 아아, 생이란 이렇게 어려운 건가? 역사의 길이란 이렇게 눈앞에 가리워져 있는 건가? 왜 그렇게 한 치도 미리 보여 주지는 않을까? 지공무사(至公無私)지! 아끼는 건 띠로 간다!
정치
지나간 담엔 말하기 쉽다. 그때는 감히 엄두도 못 냈지만, 이제 와서 말한다면, 나라 망한 지 40년도 못됐는데 조직적인 반항운동은 하나도 없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만일 가늘게나마라도 미리 붙어 있어 계속돼오던 운동이 있었다면 일이 오늘 같지는 않을 것이다. 모체 될 만한 단체운동이 있었다면 끌려서 군대로 나가면서도, 그렇다, “조조(曹操)의 살 가지고 조조를 쏜다” 하면서 젊은 마음들이 말은 못하지만 포부를 가지고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없었다. 나갈 때는 딴 생각으로 나가고 이제 와서는 “우리도 독립운동 했다”,그 양심이 허락할까?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해방 후 공산주의자가 갑자기 큰 소리를 친 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일제하에서 그나마 조직적인 투쟁을 한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해방 후 새 역사 건설한다면서 “영감 대감”하는 꼴을 보면 분하다. 구역질이 나다 못해 웃음이 나지만, 생각하면 우연이 아니다. 영감 대감 하다가 나라 망한 뒤에는 해방까지 정치부재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얼마나 정치를 몰랐으면 나라 세운단 말 듣고 샌님도 의사도 금광꾼도 건달도 정치한다 나섰겠나? 일본이 우리게 정치 훈련 아니 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너도 나도 일본 되기는 싫다면서 독립할 생각은 잊어버렸고, 독립은 한다면서 정치 공부는 아니한 것이 잘못이다. 대통령 출마 국희의원 출마를 해야만 정치일까? 나라 찾을 결심을 품고 하면 일제하에서 군수 면장을 해도 정치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 산이 죽었다. 무슨 식 무슨 행사 이를 때마다 일제하에서 투쟁해왔다 자랑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한 것이 무엇인가? 그만 것을 무슨 투쟁이라겠나? 그것은 동물적 본능으로도 한다. 참돼야 장래가 있다. 쓸데없는 자기 칭찬 말고 못한 것은 솔직이 못했다 하자. 그렇게 잘했다면 오늘 이 꼴이 웬일이냐?
역사의식 없어서 그렇다. 옛날은 간단했기 때문에 호미 자루 놓고 와서도 임금 될 수 있고 사냥 활 버리고 와서도 정치 할 수 있었다. 집과 나라가 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정치는 기술 중에서도 고도로 발달된 복잡한 기술이요, 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고 많은 머리와 심정이 유기적으로 조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태고(太古)적 생각을 가지고 저마다 하겠다니 어떻게 되겠나?
정치적 자격이 있었다면 누구보다 먼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들어야겠는데, 이랬건 저랬건 망국 이후 남의 강낭 죽을 얻어먹으면서라도 존속한 것만은 부인 못할 사실이고, 어째 그랬는지 미국도 그것이 공식으로 입국하는 것을 허락 아니했다. 그것만 됐어도 혼란이 오늘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국민 대부분의 감정으로 하면 거의 거기 반대가 없었고, 극력 반대한 것은 오직 공산주의들뿐이다. 그러나 비록 반대가 다소 있다 하더라도 임정이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면 민심은 비교적 쉽게 자리가 잡혔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역사에서 우연을 생각해도 소용없다. 역시 우리의 실력이 부족했다 해야 할 것 이다.
그러니 한마디로 해서,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해방을 만났다. 그러니 일이 어렵지 않았을 리 없다.
해방
해방의 소식이 왔을 때 솔직한 씨알들은 “하늘에서 준 떡”이라고 했다.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어라” 하지만 정말 우리는 나중 가서는 젊은이들이 군인으로 좀 끌려가기는 했지만, 대체로 보면 제2차대전이라는 전고(前古)에 없는 역사 굿을 구경만 하고 있다가 해방의 떡을 받아 들었다.
하늘에서 준 떡이라는 데는 몇 가지 뜻이 들어 있다. 첫째는 감사하는 뜻이다. 자기네가스스로 할 것을 못했으니 만큼 값없이 받은 은혜, 불쌍한 자를 잊지 않는 공도(公道)의 인자(仁慈), 늘 지는 것 같으면서도 마침내 이기고야 마는 정의의 법칙에 대해 목젖이 붙어서 한 탄사(嘆辭)였다. 둘째는 당연히 스스로 뉘우치는 마음이다. 셋째는 소위 지도층이란 것에 대해 심판을 내린 것이다. 입으로는 떠들지만 너희 한 것 없지 않으냐? 하는 말이다. 민족주의 공산주의를 말할 것 없이,기독교 불교 유교 천도교 그 밖의 어떤 종파를 구별할 것 없이 무엇을 하고 있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다 이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넷째, (이것이 특히 주의해야 할점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 앞으로는 어느 놈도 독점해서는 아니된다는 경고가 들어 있다. 하늘에서 준 것이기 때문에, 전체를 보고 불쌍히 여겨 준 것이요, 그저 살리고 싶어 준 것이지,누구의 공로를 보고 누구에게 특권을 주려고 준 것 아니다. 그러므로 이 앞으로는 나라는 어떤 놈도 독점해서는 아니된다. 다섯째, 그러니 우리 다 같이 즐거워서 힘을 아울러 새 나라를 합시다 하는 맹세가 들어 있다. 사람 속에는 어질고 밝은 것이 있다. 그것은 강제를 당하지 않을 때에 잘 나타난다. 해방으로 인해 이때까지 있던 모든 압박 모든 구속이 일시에 벗겨졌다. 온전한 자유를 느꼈다. 그러므로 비로소 인간의 착한 본성이 저절로 발동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늘 말씀을 말할 수 있었다. 천만 사상가 운동가의 선언문보다 이 한마디가 가장 훌륭하게 된 혁명선언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종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빈들로 나와 길 아닌 길, 홍해를 건너, 천지의 주재 여호와 신(神)의 산 아래 나갔을 때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고 살았다”는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해방에 있어서 먼저 주의할 것은 그 정치적 공백상태다. 이것은 참 혁명을 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못되고 전혀 밖에서 예측할 수없이 갑자기 왔다는데 불행이 있다 할 수 있다.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일이 서로 들어맞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갑자기 도둑같이 와서 한 동안의 정치적 공백기가 있었다는데 크게 의미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준비할 새 없이 와서 손해 보는 사람은 그래도 무엇을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이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은 참 혁명 못한다. 두 벌 옷이면 그 남은 한 벌 걱정을 하기 때문에 벗은 사람을 잊는다. 씨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가진 것이 있다면 지배자가 가져다 씌운 구속의 사슬과 의무감에 눌리는 양심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갑자기 벌어지는 사태가 있어도 잃을 염려가 없다. 잃는다면 손발에 씌워져 있는 사슬이 한 코라도 벗겨져 버리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 공백기야말로 그들을 위해 하늘이 보낸 것이었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낡은 악의 청소(淸掃)다. 이것을 하기가 어렵다. 사람인 다음에는 아무래도 참 공정(公正)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혁명하겠다하는 놈일수록 혁명가의 자격 없다. 참 청소는 하늘이 하는 수밖에 없다. 갑자기 예측할 수 없이 왔다는 것은 될수록 공정히 완전 청소를 하기 위해서였다. 생각해보라 조금이라도 미리 알았다면 자기 에게 유리하도록 준비하지 않았을 만한 인물이나 조직체가 있었던가? 그렇게 하늘에서 내린 떡이건만 그것도 모두 제가 만들어가지고 왔노라고 억지 협잡을 해서 이 꼴이 되지 않았던가? 해방 때처럼 쌓이고 쌓였던 역사적 죄악을 하루아침에 그렇게 시원히 청산해버리는 일은 전에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랬는데 그 청소 뒤에 “전보다 더한 악귀를 일곱씩이나 데리고 들어왔으니, 이 무슨 일인가? 청소를 해주었으면 모실 주인을 재빨리 모셨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도깨비의 떼가 들어왔다. 주인이 누구냐 씨알이지 도깨비가 누구냐 소위 정치가란 것이지.
그러나 씨알이, 적어도 처음엔, 잘못하지 않았다. 곳곳마다 일어났던 자치위원회를 보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식으로 된 것도, 권력으로 된 것도,누가 시켜서 된 것도 아니고, 전체 민중이 아무 기대 없이 “사람의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발동되어 나온 것이다. 그때에는 투표도 선거운동도 없었다. 그때의 분위기가 편견이나 사혐(私嫌)이나 당파심이 작용할 수없이 돼 있었다. 민중이 저마다 입을 열고 나서지 않아도 민중의 뜻이 어디 있으며 누가 그것을 비교적 공정히 대표하겠는지를 서로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계시적인 감동으로 전체 민중이 과거의 죄에서 공동적으로 속죄를 체험하여 마음의 씻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물론 이런 감동은 오래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동안에 잘 합의하여 감동이 식은 후에도 자기네를 지켜줄 테두리와 나갈 노선을 결정해서 서로 맹세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만 됐더라면 그 후의 일이 그렇게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정치에 그때까지 아무 관심도 없고 따라서 아무 경험도 소양도 없는 내가, 스스로 원한 것도 아니고 중의(衆意)에 끌려 나가서 직접 경험해봤던 것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정치에 경험 없는 마음으로 당했더니 만큼 참고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만 아니라 비슷한 몇 사람의 경우를 보아서 다 그러하다.
그러나 인심은 유위(惟危)요, 도심(道心)은 유미(惟微)라. 세속의 아들들은 언제나 진리의 아들들보다 영리한 법이다. 눈치 빠른 정치인들은 양의 무리 속에 여우가 섞여 들어가듯 감격에 문을 열어놓은 민중 속에 몰래 들어가 속이기를 시작했다. 몇 날이 못 가서 자치회 속에는 분열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나고, 그러는 때에 38도선 문제가 일어나고, 미·소 양국군의 진주(進駐)가 생기고, 장마에 버섯처럼 하룻밤 새 정치단체가 일어났다. 정치는 또 한 번 민중을 속이고 역사는 잘못되기 시작했다.
남북 분열
민족의 통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우선 할 것은 그 분열의 책임이 어디 있느냐를 밝히는 일이다. 개인의 수양이 먼저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책하는 일 없이는 될 수 없듯이 나라 일도 뜻을 말하면 전체 민중의 일이지만 현실로는 누가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어야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도 있고 새로 합의해 결정을 지어 일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하면 민족 분열의 책임은 그때와 그 후 나서서 스스로 나라 일 하노라는 정치인들의 야심에 있다. 화합이 아니되는 것은 야심 때문이다. 이념, 구상이 서로 다른 것은 걱정할 것 없다. 여러 가지 사상과 의견이 있을수록 좋다. 그래야 네 생각만도 아닌, 내 생각만도 아닌, 보다 높은 참에 가까운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나쁜 것은 자기중심적인 야심이다. 화합만 되면 백화난만(百花爛漫) 식으로 찬란했을 이상들이, 싸움으로 그치고 민족 생명의 뿌리까지 말리어 버리고 마는 독이 되는 것은 이 자기 본위의 사심 때문이다.
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성인(聖人))만이 정치하느냐 반문하겠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반사회 반역사적인 말이다. 그런 핑계 변명을 하려면 정치에 나서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불완전한 인간이라도 적어도 나라 일을 하겠다 나서려면 그만한 양심은 있어야 한다. 나선 이상은 그런 변명 못한다. 스스로 그런 변명을 하는 사람은 첨부터 나라를 제 것으로 먹잔 심산이다. 그런 변명을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의견을 성화(행化), 절대화하여 독재를 하려 한다.
겉으로 보면 미·소의 세력 다툼에 있다. 소련은 첨부터 극동 적화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모를 사람이 누군가? 거기 대해 미국은 태평양에 있어서 자기 권익을 지키려고 했다. 그 서로 끌고 당기는 힘의 균형으로 생긴 분열이 38선 아닌가?
그러나 당초에 패잔(敗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내세운 두 나라 군대의 진주(進駐)가 왜 그 둘의 외세를 배경으로 하는 두 개의 정권대립으로 낙착이 되고 말았나? 안에 있는 정치단체들이 손을 내밀어 끌어들였기 때문 아닌가? 모든 정치적사건이 흑막 속에서 되니 그 자세한 것을 알 도리가 없지만, 청천백일하에 드러난 객관적인 사실로 보아, 안에서 끌어들이는 손 없이 어찌 그런 일이 성립될 수 있었겠나? 아무리 야심 있고 음험한 강대국들이라 하더라도, 음험하고 야심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내응(內應)하는 매국노들 없이는 남의 나라 점령 못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이룩해가지 않으려면 몰라도, 적어도 역사적 국민이 되려면 이것을 딱 못을 박아 규정지어 놓아야 한다.
그러기에 남을 빌 것 없이 자기네 입으로 스스로 이름을 지어 놓지 않던가? 남에서는 북엣 것을 괴뢰정권이라 하고, 북에서는 남엣 것을 괴뢰정권(傀儡政權)이라 하고, 나는 그 소리 했다가 자유당 때에 감옥에까지 갔다 왔지만 지금도 그 판단은 변할 수 없다. 그것은 칼이나 감옥으로는 바로 잡아지지 않는다. 사실의 실현만이 그것을 한다. 그러므로 나라를 둘로 갈라 민족의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은 두 정권의 정치인들이다.
잡념이 없이 자기와 나라를 하나로 살고 있는 씨알의 심정으로 할 때 의심할 수없이 맨 첨부터 뚜렷한 문제가 “자주독립” 아닌가? 해방이 된 이상이것이 우선 하늘의 해처럼 분명한 전체적 역사적 첫째 과제 아니었던가? 거기 먼저는 무엇이니 후에는 무엇이니 할 여지가 어디 있었던가? 말이 많은 것은 생각이 많기 때문이요 생각이 많은 것은 양심을 뒤로 물리치기 때문이다. 지아비 지어미라도 양심은 다 거울 같은 것이다. 거울 같은 마음을 가지고해 같은 문제를 대하는데 설명이고 결의고 무엇이 필요하겠나? 정치단체의 난립이요, 토론 협상의 복잡이라는 그 자체가 벌써 양심이 아니고 객기(客氣)에 눌린 증거였다.
나라인 담에는 자주독립 아닌가? 나라를 참 사랑하고 참 알았다면 자주독립이 알파요 오메가인 것을 알지 않았겠나? 그랬다면 거기 무슨 “어떻게”가 붙었겠나? 죽어도 제 발로 일어서 버티고 서서 목에 칼을 받는 놈을 누가 능히 죽일 수 있나? 그 정신은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것이다. 그 정신에 민족주의 공산주의 따로가 어디 있으며 이북정권이고 이남 정권이고가 어디 있겠나.
우리가 공부 잘못했었다. 일본에 36년 종살이 헛했었다. 나라 망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라 뺏긴 것 아닌가? 누가 뺏아? 일본이? 아니다, 하늘이 뺏은 것이다. 하늘이 뺏지 않는다면 일본이 어찌 능히 할 수 있나? 하늘이 왜 뺏았나? 뺏아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살이 바로 했다면, 나라 없는 설움 바로 알았다면, 뺏긴 나라를 속에 찾았을 것이다. 해방이 되기 전에 벌써 나라를 정말 속에 찾아가지고 있었다면 해방이 왔을 때 민족주의 공산주의 때문에 어찌 화합을 못봤을 수 있겠나? 차라리 일제가 물러가지 말고 더 오래 있어 더 심한 채찍을 더해 우리로 하여금 나라를 눈 밑의 새싹처럼 키워주었더람 좋았을 것을!
6·25
남북분열의 의미가 그렇다면 6·25의 의미도 환하다.
통일정부 세우지 못한 죄다.
죄는 야심 정치인들이 짓지만 벌은 국민이 받는다. 왜 그런가? 정치를 감시하고 바로잡을 것은 국민이기 때문이다. 먹기는 입이 잘못 먹고 도 고통은 온몸이 받아야 하며, 보기는 눈이 잘못 보고도 손실은 전 인격이 당하지 않으면 안되지 않던가?
자주독립이 근본인 것을 모르는 놈들이기 때문에, 아들 사랑할 줄 모르는 욕심쟁이 가짜 어미가 아들 하나를 두 토막을 내어 그 절반이라도 달라 했던 것같이, 가짜 정치인들이 가짜의 두 정권을 세웠다. 그런 악독한 지배자를 물리칠 줄 모르는 백성은 벌을 받아야 했다. 어린 양 같고 송아지 같은 조만식, 김구가 희생이 돼야 했다. 그러면, “그 죄 없는 것이 죽을 데로 나가며 벌벌 떠는 것을” 보면 혹시 정신을 차리게 될까? 그래도 아니됐다. 그러면 남은 것은 제 새끼를 바쳐보는 것 밖에 없었다. 이것이 6·25의 이유다.
6·25의 뜻을 설명하면서 공산주의의 침략성이니, 김일성이니, 중공 이니, 미국이니 하는 것은 옅은 소리다. 신문기자 아니고 정치평론가 아닌들 누가 그것 모르겠나? 그것보다는 깊이 제 속에 찾아보아야 한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은 동정하는 마음에 그중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용서 못하겠습니까, 45명이라도 못하겠습니까, 하면서 깎아서 열 명에까지 내려가며 하나님 앞에 애걸(哀乞)했다. 대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니됐다. 하나님은 그에게 백 살에 낳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의 뜻은 보통 심정으로는 이해 못한다. 제 아들의 목에 칼을 대본 다음에야 인생을 알고 종교를 알고, 그런 다음에야 역사의 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25는 그만큼 심각한 것이 있다. 이겼노라고 훈장 차고 별 달고 쭐렁대는 심정들은, 그것을 공로로 특권을 주장하는 것들은, 그 심연에 기웃도 못한다.
그럼 유엔군은 왜 참가했으며 중공은 왜 끼어들었냐고 묻는가? 마찬가지다. 정치가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 조만식 김구요, 조만식 김구의 피 값을 바치는 것이 전국민이요, 그 방법이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여 보는 전쟁이듯이, 이 한국이라는 불쌍한 역사의 수난의 여왕의 죄 값을 지는 것은 또 이 인류 전체요 이 문명이어야 한다.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유엔군 묘지가 이 나라에 세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류가 민족의 아름다운 이삭들을 골라 바치는 역사의 속죄 제단이다. 이것은 역사의 심판인 동시에 구원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지키면 살 것이다. 아니 지키면 망할 것이다. 오늘까지 이 정치적 혼란, 이 사회적 불안은 무엇 때문인가? 이 바쳐진 제물을 짓밟고 맺어진 약속을 아니 지키기 때문이다.
적어도 전쟁의 뜨거운 불 속에서는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다시는 아니 그러마고.
그런데, 혼도 나지 않아, 그 민족들의 마음으로 한 평화의 약속을 또 속여 팔아먹는 것이 정치다. 그러기 때문에 오는 정국의 급변이요 경제의 혼란이다.
그러면 혹시 죄가 많다면 가장 많다할 일본은 왜 무사하며, 무사할 뿐 아니라 그 기회에 부흥이 됐으니 웬일이냐 묻는가?
날로 보면 이가 남는데 해로 보면 손해가 난다는 말이 있다. 역사의 논리는 일상 살림 논리와는 다르다. 두고 봐야지, 무사한 것이 더 심한 벌이며 고난을 심히 당한 것이 복인지를 누가 아느냐? 소금이 썩는 날이 있을지언정 회개하지 않은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유기적인 전체의 시대인 것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의 뺨이 빨갛게 이쁜 것은 폐에 고장 있는 증거 아닌가? 일본의 번창,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전쟁의 특별한 점은 4년 동안 몇 억되는 국민이 관련되어 싸웠어도 이익 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어느 편에도 손해뿐이라는 사실이다. 남은 그만두고 우리를 볼 때 얻은 것은 1. 민족력(民族力)의 소모(消耗), 2. 도덕의 타락, 3. 독재정권의 기회, 이것뿐이다.
현실적으로 손해가 났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신적으로 그것을 보충하란 말이다. 이른바 밖에서 잃고 안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정신이 뭔가? 장차 올 역사의 밑천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6·25를 치루고 나서 자란 것은 민중뿐이다. 6·25 전까지 민중의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는 매우 애매했다. 곳곳에 있었던 공비사건을 생각해 보면 안다. 낮에는 민주주의 밤에는 공산주의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6·25를 겪고 나서는 누가 강연 하나 한 것 없이 국민의 태도가 싹 결정돼 버렸다. 또 독재 정치가 강화되는 반면 거기 대한 민중의 투쟁의식도 늘어갔다. 이것이 자라난 민중의 일 아닌가?
4·19
그렇게 돼서 온 것이 4·19혁명이다. 4천 년 역사에 어찌 이런 일이 또 있었던가. 민중이 일어나 평화적인 항의를 하여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을 했던 일? 없었다. 없는 것이 당연하다. 민중이 깨지 않고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3·1운동과도 다르다. 3·1운동도 민중의 운동인 것은 같지만 그래도 그것은 다른 민족의 압박에 대한 것이니만큼 민족적인 감정이 많이 작용했으므로 순수한 민주주의 투쟁이라 할 수 없다. 거기 비하면 4·19는 온전히 민주주의적이다. 그만큼 민중이 깬 것이다.
이때까지 오도록 민족노선에 있어서 분명치 못한 것이 있었다. 민족주의인가 민주주의인가? 반드시 그 둘이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 있어서 계단적인 성장의 관계가 있다. 민족주의는 민족 감정이 자연적인 것이니만큼 각별한 훈련을 하지 않고도 민족운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사회과정을 통해서 자란 것이니만큼 민중이 깨지 않고는 될 수 없다.
그런데 해방이 될 때까지 우리는 민족적인 분위기 속에는 살았지만 민주적인 체험을 할 기회는 적었다. 그 사회적 사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관계의 대상이 일본 사람이기 때문에 민족적으로 느껴졌지 민주주의적으로 파악되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이 될 때도 단순하게 이제 일본이 갔으니 이제는 우리 손으로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 우리란 조선 사람 혹은 한국 사람이란 말이지, 자주하는 민중이란 뜻이 아니었다. 사실로 당한 것은 민주적 단계인데 생각은 민족주의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것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있어서 이쪽이 늘 약했던 원인의 하나다. 저들은 옳거나 끓거나 간에 분명한 이념이 있는데 이쪽은 성의는 있으면서 도 분명한 인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늘 이론적으로 몰리기 쉬웠다. 그러기 때문에 해방 직후 정부수립에 있어서 싸울 때는 민족주의 대 공산 주의였는데, 미국 응원 밑에 민주주의를 택하고 나니 언젠지 분명치 않게 민주주의가 되어 거기 사상의 혼선이 있었다. 그래서는 약해진다.
이것이 바로 6·25 후에 당면한 문제였다. 사회는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민주주의적으로 급템포로 변하는데, 그래서 민중은 도리어 민주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데 사회구조는 옛날 일제시대 그대로 있었다. 아무 특별한 소양 없이 단지 구식적인 출세 의식에서 나선 많은 정치인 관리는 민족이라는 명분 밑에 숨어서 옛날 봉건시대의 죄악을 그대로 행하는 때가 많았다. 이 상징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생각하면 바로 운명 같다. 아무리 낡은 시대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청년시대에 민주주의의 본산인 미국을 가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민주주의적이 아니었을까? 역사가 개인 영웅의 일로 되던 때는 이제 지나갔으나 지금도 개인의 인격 사상이 전체 역사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한 요소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데, 다른 점에서 퍽 유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그가 좀 더 민주주의적으로 됐더라면 얼마나 나라에 복이었을까?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역사 발전의 극적인 효과를 노려서 그런 사람을 배우로 뽑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4.19가 얼마나 극적이었나? 사실은 세계가 눈이 휘둥글해 축하를 보냈고 우리 자신도 세계무대에서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것이 세계 학생운동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다.
좋은 극적 배치였다. 90 노인에 20대 젊은이, 순수한 지성에 역사의 썩어진 제도, 교묘한 흉계에 대해 물속에서 올라와 말하는 영(靈).
주의할 것은 3·1 때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배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아무런 정치적 세력의 조종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미리 짠 조직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온전히 젊음과 이성의 결합으로 된 즉흥시(卽興詩)라는 점이다. 그리고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비폭력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소년 다윗이 물매돌로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광경과 같았다.
젊음 만세!
이성 만세!
비폭력 만세!
그럼 왜 실패됐나?
학생에겐 실패 없다. 바치우는 제물이 제단으로 나가 바치우면 그만이지 그 이상 또 무엇이 있겠나? 그것은 봉화(烽火)였다. 타오르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혁명의 선봉이었다. 외치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였다. 해석은 다른 이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들은 4월의 꽃이었다. 피었다 떨어짐으로 영원히 피어 있는 꽃이다.
실패한 것은 민중 특히 그 지도층이었다. 그들은 그 햇불 뒤에 계속해 나가야 하고 그 외침을 실행해야 하고 그 계시를 풀어 해석해야 하고 떨어진 꽃 뒤에 열매를 알드렸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다.
왜 못했나?
체계 있는 혁명 이념 없었다. 민주주의가 있다면 있었지만 빈 이름 뿐이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이, 핵심 세력이 없었다. 핵심 없는 민중은 골통 없는 몸과 같다. 몸이 있어서 있는 골통이지만 그 골통이 분명한 작용을 하기 전엔 몸은 살았어도 죽으나 마찬가지다. 아무도 민중을 만들어내는 재주는 없다. 그렇지만 민중은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자기를 깨워 주는 인격을 만나기 전에 제 노릇을 못한다. 반대를 말한다면 인물은 민중 없이는 못 난다. 맑은 호수가 천지 만상을 비쳐 내듯이 겸손해 텅 빈 마음만이 민중 앞에 설 때 능히 그들로 하여금 자기 모습을 보게 한다.
민주주의라면서 하나도 민주주의 교육을 한 것 없다. 그러니 뿌리 없는 나무가 어찌 자라겠나? 새 정부가 한해가 못가고 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