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8. 12월 송년산행 - 195차 산행] ♣ 한북정맥 철원 복계산 (1,057m)
▶ 2018년 12월 16일 (일요일)
* [산행 코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한북정맥] 수피령(09:40)→ 갈림길→ <오름길>→ 능선→ 복계산[1,057m] 정상→ 삼각봉→ 노송대→ 매월대폭포→ 주차장(15:40)
* [프롤로그] — 대한민국 2018년, 날이 저물어 가고 있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겨울이 깊어지고 찬바람이 분다. 가슴이 시리다.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갈등과 반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서로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메시지들을 쏟아낸다. 화해와 용서는 우리에게 여전히 요원한 얘기인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그 동안 우리는, 남침전쟁의 참화를 딛고 경이적인 산업화를 이루었고 민주화를 성취하면서, 여러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제 살 만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우리끼리 원수처럼 헐뜯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성현이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화이부동은 사람마다 입장과 처지, 생각은 다르지만 대의(大義)로 하나[親和]가 되는 것이요, 동이불화는 겉으로는 동조하면서도 내심 불화하고 적대하는 것을 말한다. 면종복배(面從腹背), 구밀복검(口蜜腹劍)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한 배에 타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불화(不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문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 갈등 양상은 전(全) 방위적이다. 소득 주도 성장과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은 그것의 옳고 그름은 별개로 갈등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교과서와 전교조, 사법부, 군부, 기업, 민노총 등은 물론 헌법까지 자기들 이념대로 재단하려 든다. 외교·안보는 아주 비굴할 정도로 종북(從北)에 목을 매달고 있으니, 남·북문제, 한·미관계, 국방정책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우리 경제 곳곳에는 이미 빨간 불이 들어왔고, 많은 국민은 이러한 정치적 ‘분열’ 속에서 팍팍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념의 동무들’로 구축된 정권이, 편을 갈라서 시퍼런 칼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들만의 세상’을 위하여 ‘내로남불’하는 양상이 갈수록 치졸하고 파렴치하다. 다른 사람의 적폐를 단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더 많은 적폐를 쌓아가고 있다. 국가의 근본을 지탱하는 사법부와 검찰과 경찰 등 온당하게 법 집행을 해야 할 공권력이 오직 그 권력의 주구(走狗)가 되어, 충성을 다한다.
그렇다. 세상이 뒤집혔다. 국정을 장악한 주사파 권력이 우리 사회의 모든 가치 구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세상 전체가 지금처럼 이렇게 살벌하게 갈리는 때가 또 있었던가. 사실 문 정권은 '이념의 집단'이다. 그 이념으로 대한민국 국정에 대못을 박아놓고 내 편이 아닌 것은 모두 '적폐'로 몰아가고, ‘자유민주주의’라는 나라의 기본 틀을 뿌리 채 뽑아버리겠다는 야심이다. 급기야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광화문 네거리에서 3대 세습의 독재자 김정은을 찬양하고 그를 ‘위인(偉人)’으로 칭송하며 충성을 맹세한다. 그의 방남(訪南)을 '쌍수를 들고' 환영한단다. 여기까지 왔다.
문재인 정권은 국정의 우선순위로 ‘평등’과 '평화'를 내세운다. 그 ‘평등’은 특정 지역과 특정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 ‘평화’는 북한이 내세우는 ‘우리 민족끼리’에 장단에 맞추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정권이 내세우는 ‘평등’과 평화는 허울 좋은 구호처럼 들린다. 북에는 비굴하게 올인(All-in)하면서 대한민국 사회가 두 동강이 나는 것은 수수방관한다. 문 대통령이 표방하는 ‘사람 중심의 정치’는, 일찍이 김일성이 주창하여 북한 헌법에 명시된 말이라고 한다. 기실, 그 말은 대부분의 인민을 굶주리게 하거나 또는 일인 독재에 반하는 인사는 죽이거나 정치 수용소에 보내면서 ‘일부 사람들만 호의호식하는 독재정치’가 아닌가. 문 정권의 ‘사람 중심의 정치’도 결국 ‘내 편 사람만을 위한 정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이 국민을 하나 되게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분열은 패망의 지름길인데 — 아, 속절없이 날이 저물고 있다!!
* [한북정맥(漢北正脈)]— 백두대간 추가령에서 갈라져 나온 한강과 임진강의 분수산맥
우리 국토의 산줄기 체계는 하나의 백두대간(白頭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이로부터 가지를 친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졌다.『산경표(山經表)』에 근거를 둔 이들 산줄기의 특징은 모두 강(江)을 기준으로 한 분수(分水) 산맥으로 그 이름도 대부분 강(江)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북정맥(漢北正脈)은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哥嶺)에서 갈라져 나와 남쪽으로 한강(漢江)과 북쪽으로 임진강(臨津江)을 가름하는, 약 185㎞의 산줄기를 말한다. 평강 추가령~강원도 화천군 수피령~경기도 파주시 장명산에 이른다. 수도권 시민들이 많이 찾는 북한산이나 도봉산·사패산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북한 지역에서는 함경도와 강원도 도계(道界)를 이룬다.
한북정맥은 동쪽으로 회양·화천·가평·남양주, 서쪽으로 평강·철원·포천·양주 등의 경계를 이루는데 자연히 동쪽은 한강 유역이고 서쪽은 임진강 유역이 된다. 이 산맥은 우리나라 중부 지방의 내륙에 위치하여 비교적 높은 해발 1,000m급의 높은 산으로 연결되었다.
현대 지도에서의 산 이름으로 말하면, 추가령·백암산(白巖山)·양쌍령(兩雙嶺)·적근산(赤根山)·대성산·수피령(水皮嶺)·광덕산(廣德山)·백운산·국망봉(國望峰)·강씨봉(姜氏峰)·청계산(淸溪山)·현등산(懸燈山)·죽엽산(竹葉山)·도봉산(道峰山)·노고산·현달산(峴達山)·고봉산·장명산 등이다.
* [오늘의 산행지 ; 철원 복계산(福桂山)] — 휴전선 대성산에서 뻗어온 전방의 고지(高地)
‘한북정맥(漢北正脈)’은 북한의 백봉에서 시작하여 백암산, 법수령, 오성산을 지나 남한의 대성산으로 이어진다. 안타깝게도 대성산은 민통선 내에 있으므로 남한지역 한북정맥의 시작점을 대성산의 날머리인 수피령이다. 복계산은 한북정맥 수피령에서 뻗어나온 산으로 남한 최북단의 등산코스이다. 특히 국내에서는 비무장지대와 가장 근접한 최북단의 산행지로 아직도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곳이다. 복계산은 '매월대'로 더 잘 알려진 산행지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비분한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지내다가 한 동안 복계산 산촌에서 은거했다. 복계산은 철원지역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는 3대 명산으로, 38선에서 북쪽으로 25km지점에 있으며 수도권에서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산행지이다.
* [산으로 가는 길] — 새로 난 고속도로와 43-47번 국도를 경유, 백골부대의 56번 도로
오전 7시 30분, 서울의 군자역(능동)을 출발했다. 오늘의 산행지는 강원도 철원에 있는 복계산이다. 휴전선 바로 아래에 있는 산이다. 우리의 ‘금강고속관광버스’는 강변북로 토평I.C에서 새로 난 구리-포천간 고속도로[29번]를 이용하여 일로 북으로 질주했다. 망우산 아래를 통과하는 긴 구리터널을 지나 갈매-별내-동의정부를 경유하여 포천의 신북I.C에서 43번 국도로 내려섰다. 차는 만세교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달리다가 일동교차로에서 47번 국도를 만나서 북상한다. 이동을 경유하여 계속 북으로 달리는 차는, 서면에서 우회전, 56번 도로를 타고 ‘백골부대’ 입구를 경유하여 육단리에서 우회전, 수피령에 도착했다.
* [산행의 들머리] — 한북정맥 수피령(水皮嶺), <대성산지구전적비>
오늘 산행의 들머리는 강원도 철원군과 화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한북정맥의 수피령이다. 수피령의 북쪽은 대성산으로 이어지고, 그 남쪽은 복계산-복주산-포천의 광덕산-백운산으로 이어진다. 이곳 수피령과 대성산은 6·25전쟁 때 중공군과 격전을 벌여서 우리 국군이 대승을 거둔 대성산전투지구의 현장이다. 오늘 산행 들머리에 <대성산지구전적비>가 높다랗게 세워져 있었다. 대성산지구 전투는 6·25전쟁 중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우리 국군이 혁혁한 전과를 이루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1951년 6월 9일 국군 제2사단 17연대가 대성산 1.042고지에서 활동 중인 중공군 제 58사단 177연대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하여, 1,042고지는 물론 신월동과 865고지를 탈환한 후, 연이어 6월 14일 승임고재, 삼천봉, 바조봉 일대까지 적의 공격 기세를 분쇄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적 사살 453명, 생포 19명, 55점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피해자는 전사 38명, 전상 123명으로 불후의 전공을 세웠다.
육군 제 15사단에서는 대성산지구전투 장병들의 영웅적인 전공을 높이 찬양하고 조국의 수호를 위해 불굴의 신념으로 산화한 호룩영령들의 고귀한 넋을 추모하며 그 위훈을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1980년 8월 15일에 이 탑을 세웠다.
잔뜩 흐린 날씨,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비록 싸락눈이지만 볼을 스치는 대기의 차가운 감촉이 신선한 느낌이 든다. 산길은 완만하게 올라가는 토산(土山)이다. 일전에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수피령에 복계산으로 들어가는 갈림길까지 한북정맥의 산줄기에 해당한다. 이 길로 계속 남하하면 복주산-광덕산-백운산에 이른다. 오늘 산길에는 우리 대원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어 우리들만의 쾌적한 산행을 할 수 있었다. 눈 속에 켜켜이 쌓인 낙엽 때문에 발이 푹푹 빠진다. 산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완만했다.
* [수피령에서 촛대봉까지] — 싸락눈이 내리는 산길을 오르다
한북정맥의 <갈림길>에서 복계산으로 이어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해발 1.010m의 촛대봉 앞이다. 헬기장 같은 너른 공터를 지나, 높은 산봉의 오른쪽 옆구리를 돌아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다. 싸락싸락 눈발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민창우 기획위원이 앞에서 길을 잡아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외길의 산길을 따라 대원들이 열을 지어 오른다. 토산의 흙길이지만 울퉁불퉁한 바위가 곳곳에 돌출해 있었다. 그렇게 오르내리기를 몇 차례, 막바지 가파른 경사면을 치고 올랐다. 헬기 비상착륙장이 있는 복계산 재3지점, 1008고지이다. 안내판에는 등산안내지도와 긴급구조를 위한 지점표시를 해 놓았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복계산 능선길이다. 앞으로 400m 정도 나아가면 정상이다. 후미에 오는 대원을 기다리며 물을 마시고 과일을 나누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 [복계산의 정상] — 정상을 오르는 산길, 발갛게 얼굴이 상기된 대원들의 모습
저만큼 뿌연 운무 속에서 복계산의 산봉(山峰)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원들을 정비한 후 다시 산행이 시작되었다. 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쏟아지다가 안부에 이르고 다시 오르막길이다. 아주 가파른 경사면에 지그재그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다. 능선 길의 바람이 차갑게 몰아친다. 싸락눈이지만 제법 자욱하게 내린다. 능선을 넘는 구름이 앙상한 나무의 잔가지에 얼어붙기 시작한다. 상고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산길은 가팔랐다. 대원들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묵묵히 산을 오른다. 선두의 지평 대장과 그 뒤를 잇는 김의락 위원, 전진국, 강재훈, 이명자 님 그리고 호산아가 산을 올랐다.
오전 11시 5분, 해발 1,075m, 복계산(福桂山)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장방형으로 다듬은 미끈한 정상석이 산정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산정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안개구름이 자욱하여 주변의 산세와 풍치를 조감할 수가 없다. 꼭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나라의 사정과 같이 시야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눈이 쏟아지는 겨울 산 정상의 분위기는 아주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속속 도착하는 대원들이 정상에 오른 감격의 탄성을 지른다. 정상 오른 대원들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모두 흔쾌하고 행복한 얼굴이다. 그리 길지 않고 험하지 않은 오름길이지만 온몸에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하다. 뿌연 입김이 뿜어 나와 인간적인 체취를 느끼게 한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도 찍고 개인의 인증샷을 눌렀다. 산에는 우리 대원밖에 없어서 잠시나마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
* [산으로 내려오는 길] — 능선 아래 산록, 바람을 피하여 점심식사
오전 11시 20분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아래로 쏟아지는 내리막길이다. 눈 속에 낙엽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기는 했으나 쾌적한 산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길은 완만한 능선길이다. 능선의 왼쪽아래에는 능선을 따라 참호시설이 구축되어 있었다. 여기가 6·25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이고 지금도 휴전선 바로 아래의 경계지역이다. 능선 길을 한참 걷다가, 이른 식사를 하기로 했다. 바람이 들지 않는 능선의 아래쪽에 자리를 잡아, 준비해온 음식을 내어놓 고 다함께 나누어 먹었다. 추운 날씨에 불편한 자리이지만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시간이 아주 유쾌하다.
* [하산의 갈림길, 삼각봉] — 매월대폭포로 내려오는 가파른 길
오후 12시 15분, 식사 후 산행을 계속했다. 완만한 내리막길, 그리고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다. 대원들이 열을 지어 걷는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오르내림이 이어지므로 편안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능선의 바람이 쌀쌀하게 옷깃을 파고 들지만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몸에서 더운 열기가 솟아나기 때문이다. 12시 27분, 삼각봉에 이르렀다. 갈림길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매월대 바위봉으로 가는 길이요 왼쪽으로 가면 매월대폭포로 내려가는 길이다. 오늘은 원래 매월대 코스를 계획했으나 눈이 와서 바윗길이 미끄럽고 위험하므로 매월대폭포로 길을 잡았다. 지평 기획이 결단을 내렸다.
삼각봉에서 폭포로 하산하는 길은 아주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경사가 급한 산길이 사정없이 지그재그로 쏟아지진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주위를 바라본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얼어서 있고, 그 가지 사이로 주변의 산봉과 오른쪽으로 매월대 암봉이 어렴풋이 보인다. 성근 눈발이 날리는 겨울 산, 싸아하게 밀려오는 차가운 공기, 그 호젓한 정취가 좋다.
* [노송대의 장엄한 풍경] — 천 길 벼랑에 목숨을 내건 노송, 가슴이 서늘해지는 수묵화
그렇게 능선 길을 타고 한참을 내려왔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놀라운 풍경이 문득 앞을 가로막았다. 이른바 ‘노송대(老松臺)’이다. 비교적 널따란 암반 위에 눈맞은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그 왼쪽 벼랑 끝에 하늘을 찌르는 거송 한 그루가 앙상한 고사목(枯死木)이 되어 잔설을 이고 서 있었다. 살아서 몇 백 년, 죽어서 몇 백 년인지 가늠을 할 수 없는, 그러나 아직도 시공의 일부분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그 엄연한 존재감, 생명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노송(老松)은 죽지 않았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또 하나의 굵은 둥치가 천 길 벼랑 위에 가지를 드리우고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 ‘천 길 벼랑에 목숨을 내건, 저 천 년 노송의 기개(氣槪)’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의 고혼(孤魂)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오늘 겨울 산에서 만난 가장 절절하고 장엄한 풍경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말해 주는 고사목이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로 살아 있었다. 살아서 당당하면 죽어서도 저렇듯 장엄하고 품위가 있었다. 휴전선 바로 아래에 있는 복계산의 비경(秘境)이다. 대원들이 번갈아가며 그 소나무를 배경으로 포즈를 잡았다. 노송대에서 발길을 돌리면서 그 풍경의 여운(餘韻)과 고절(孤節)한 선비의 아픔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암봉과 어울린 설송(雪松)] — 겨울 산을 지키는 정령
내려오는 산길은 가파른 바위 벼랑이었다. 눈이 쌓인 바윗길의 주위에는 소나무들이 즐비하여 겨울산의 정취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오늘 이때까지 없었던 험한 산길, 나무테크의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소나무들과 나무계단 등 눈 덮인 풍경이 아름다웠다. 바위봉우리를 하나 넘고 나니 벼랑에 위에 서 있는 장엄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거송(巨松) 한 그루가 눈길을 끌었다. 그야말로 생명의 기개가 느껴지는 자태, 외진 벼랑 위에 살아 있는 설송은 겨울 산을 지키는 지킴이요 정령(精靈)이었다. 조용히 겨울눈을 맞은 설송(雪松)의 품격이 참으로 우아했다. 풍경에 취해 걷다 보니 대원들은 이미 저만큼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 [복계산에 서린 충절(忠節)의 기개]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혼이 서린 곳
아래로 가파르게 쏟아지는 길이다. 험하고 불편한 산길이 이어졌다. 산을 곳곳에 안전 자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후미를 수습해 오는 베토벤 대장과 함께 산을 내려온다. 바위를 타고 안전 자일을 잡기도 했다. 암봉을 넘어오니 길고 가파른 나무테크 계단이다. 아득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벼랑에 세운 구조물,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건너편의 암봉이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매월대’이다. 계단을 내려오니 ‘매월대폭포’, 폭포는 그리 높지 않지만 물이 얼어 순백의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 복계산은 세조가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 때, 그 충절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매월당 김시습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복계산은 북동쪽으로 대성산(1,157m)과 남쪽의 복주산(1,152m)과 더불어 남한의 최북단에 솟은 명산으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 선생이 은거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산에는 선암바위[매월대]라고 하는 넓이 세 칸 정도의 높은 너럭바위가 있는데, 주위의 울창한 숲과 밝은 샘이 있어 천혜의 은둔지로서 매월당이 긴 방랑의 생활 중 한 동안 이곳에 머물며 지방 선비들과 교류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매월동, 바위가 있는 곳을 매월대, 산 아래의 폭포를 매월대폭포라고 한 것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구은사(九隱祠)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항하여 은거하였던 김시습을 비롯한 아홉 분을 배향한 사당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아홉 선비가 매월대에 바둑판을 새겨놓고 바둑을 두면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다고 하는데, 바위에 조각된 바득판의 그림이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 [에필로그] — 차갑게 얼어붙은 폭포의 빙벽(氷壁), 그것은 매월당의 가슴이다
안골의 ‘매월대폭포’는 싸늘한 얼음벽을 이루고 그 아래는 온통 빙판이었다. 차갑고 매서운 공기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노송대에서 만난 천 길 벼랑 위의 소나무가 절체절명의 한 시대를 살아간 매월당(梅月堂)의 고혼이라면, 매월대폭포의 차갑게 얼어붙은 빙벽은 그야말로 매월당의 가슴이 아니겠는가. 잠시 고절한 선비를 기리며 내심 뜨거운 묵도를 올린다. 그렇게 매월대폭포에서 잠시 머물며 사진을 찍고, 그 아래에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오후 3시 40분, 모든 대원들이 무사히 하산을 완료했다. 오늘은 2018년, 연중 산행을 마감하는 송년산행일, 비교적 이른 시간에 산행을 마쳤다. 상경하여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여 뒤풀이를 했다.
싸락싸락
차가운 눈이 내리는 날
휴전선 가까운 저 철원의 수피령-복계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 산행.
매서운 바람결을 가르며
하늘을 우러러, 뜨거운 땀을 흘렸다.
저 아득한 하늘 아래 1,057고지의 복계산 정상
눈을 맞으며 한해를 마감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천 길 벼랑에 목숨을 내건
저 천 년 노송의 기개가 살아있는 곳
거기 벼랑과 얼음 절벽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저 무도한 시대에 천 길 벼랑의 설송처럼 살다간
고절한 선비 매월당의 마음을 생각하며
잔인하고 무도한 이 시대
시퍼렇게 살아있는 우리들의 아픔을 생각했다.
어려운 속에서도 올 한 해,
언제나 한결같은 산이 있고 벗이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
새해에도,
산처럼 청정하고
산처럼 당당하고
산처럼 건강한 삶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