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 노근리 양민학살 현장인 충북 영동 인근 철교. 1950년 7월 26일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위에서 피난 중이던 영동읍 주곡-임계리 주민들을 전투기에서 총을 쏘아 사살했다. 피난민들이 철로밑으로 피신하자 제1기갑사단 7연대 장병들이 뒤쫒아가 계속 사살했다.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인,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이 사건은 미군에 의해 500여명이 사살된 베트남전 당시 ‘미라이 학살사건’ 다음으로 희생자가 많은 사건이었다. "피난민 중에 북한 군인이 위장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이들을 일단 적으로 간주해 적절한 행동을 취하라"고 지시한 당시 미군사령부의 기록도 발견됐다.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최소한 12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처음부터 이 사건이 공개된 것은 아니었다. 1994년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정은용이 사건을 토대로 한 실록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하자 AP통신 등의 외신과 국내 언론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취재하여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99년 유족들이 미국을 방문, 미 육군성은 사건의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밝혔고, 2000년 1월에는 미국에서 대책단과 자문위원단이 내한하여 충북 영동군 사건 현장을 찾아 주민들의 증언과 요구사항을 들었다. 2001년 1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여 사건의 실체를 인정했으나 피해주민 및 유족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은 미흡했다.
[1952년] ‘에비타’, 에바 페론 사망
←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퍼스트 레이디 에바 페론. 1952년 7월26일, 에바 페론이 죽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밑바닥을 전전한 끝에 27세라는 세계 최연소 나이로 영부인 자리에까지 올랐던 드라마 같은 33년의 삶이었다. 에바 지지자들은 슬픔에 젖었다. 조문 행렬은 3km나 늘어섰고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전례없는 대규모였다. 유랑극단의 3류배우, 나이트클럽의 무명 댄서였던 그의 인생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것은 24살이나 나이 차가 난 육군 대령 후안 페론을 만나면서였다. 에바는 아름답고 총명하면서도 야심까지 가득한 여성이었다. 페론이 군부에 잡혔다가 풀려날 때도, 또 대통령에 당선될 때도 에바는 조연이 아니라 사실상의 주연이었다. 페론이 대통령에 취임(1946년)하자 에바는 아예 노동부 건물에 사무실을 차리고 정치 일선에 뛰어든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고 하층민에게는 병원·고아원·학교를 지어주었다. 그의 선심정책은 하층민으로부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반페론주의자들 눈에는 전형적인 선전·선동으로 비쳤다. 한쪽에서는 성녀였고 반대편에서는 악녀였다. 에바 사후, 아르헨티나는 우려한대로 서서히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곪아있던 환부도 터지기 시작했다. 3년 뒤 페론은 군부쿠데타로 망명길에 오른다.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 민중선동과 탄압 등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였다.
[1953년] 쿠바 혁명 발발
← 카스트로(1964)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가 혁명세력을 조직해 산티아고데쿠바 시에 주둔해 있던 몬카다 군병영을 공격하면서 쿠바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가 7·26운동 조직을 지휘하다가 1956년 12월 2일 다시 쿠바의 오리엔테 주에 상륙했다. 그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동생 라울, 그리고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등과 함께 게릴라전을 벌였다. 1958년 12월 31일 마침내 바티스타가 쿠바를 떠나면서 카스트로는 승리를 거두었다. 1961년 쿠바 공산당의 서기장에 오른 카스트로는 이후 쿠바에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했다. 이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자들의 피그스 만 침공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은 더 이상 카스트로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한 미국중앙정보국(CIA)의 활동은 한동안 이어졌다.
[1830년] 프랑스 7월혁명 발발
← 샤를 10세, Francois Gerard가 그린 초상화(부분), 프랑스에 있는 Chateau de Versailles 소장 1830년 7월 26일 프랑스의 샤를 10세가 '1814년 헌장'의 정신에 역행해 기본권을 제한하는 3가지 칙령을 발표함에 따라 7월혁명이 일어났다. 이 칙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했으며, 선거법을 개정해 유권자의 3/4이 선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파업과 항의시위에 이어 27일부터 3일간 파리에서 시가전이 벌어졌고 샤를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급진파들은 공화정을 지지하고 귀족주의자들은 샤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상황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은 1792년 프랑스 혁명을 위해 싸운 경험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7월혁명으로 상원은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었고 특별재판소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 대신에 삼색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근본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1875년]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를 융 Carl (Gustav) Jung 출생
1875년 7월 26일 태어남 / 1961년 6월 6일 죽음 융은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스위스의 심리학자이다. 1902년 바젤과 취리히의과대학에서 공부한 뒤, 취리히대학교 부설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언어적 연상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수립했고, 그 덕분에 국제적 명성을 얻는 동시에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긴밀한 공동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주로 성적인 견지에서 해석하는 데 반대해, 인간의 동기를 좀더 폭 넓은 창조적 에너지라는 견지에서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로 프로이트와 결별했고, 1914년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탈퇴해 분석심리학을 창시했다. 그는 개인적 차원의 무의식을 넘어 집단무의식에 관한 독특한 이론을 개진했다. 신화와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연구는 정신의학은 물론이고 종교나 문학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 저서로 <무의식의 심리학 Wandlungen und Symbole der Libido>(1912)·<심리적 유형 Psychologische Typen>(1921) 등이 있다.
[1913년] 소설가 박계주(朴啓周) 출생
1913. 7. 26 간도 용정~1966. 4. 7. 흥미 위주의 신문소설과 그리스도교 사상을 다룬 소설을 썼다. 호는 서운(曙雲). 박진(朴進)이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구산소학교를 거쳐 1932년 용정 영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계 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34년 중앙선도원에서 발행하는 월간잡지 〈예수〉를 창간했으며, 1937년 〈새사람〉 편집장을 지냈다. 8·15해방 후 김영주·조풍연과 고려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차렸고, 6·25전쟁 때는 박영준·김용호와 납북되던 도중에 탈출했다. 이어 〈죄없는 죄인〉·〈순애보〉 등이 영화화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1963년 연탄 가스 중독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고생하다가 죽었다. 중학교 시절 단편 〈적빈〉이 〈간도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당선되었으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금강산 여행중 구상했던 〈순애보〉가 1938년 〈매일신보〉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당선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대중적이고 흥미 위주의 소설에 주력해 〈오랑캐〉·〈처녀지〉 등을 발표했으나 한국문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해방후에는 단편보다 장편을 많이 썼는데, 특히 〈진리의 밤〉(경향신문, 1948. 10~1949. 4)은 대표작 〈순애보〉와 마찬가지로 삼각관계 속에서의 희생정신을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집으로 〈순애보〉(1939)·〈처녀지〉(1948)·〈진리의 밤〉(1952) 등이 있고, 1952년 평범사에서 〈박계주선집〉을 펴냈다.
[1872년] 독립운동가·목사 손정도(孫貞道) 출생
1872. 7. 26 평남 강서~1931. 2. 19. 자는 호건(浩乾), 호는 해석(海石). 1882년 7월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의 토착 유학자이며 부농인 가정에서 출생하셨다.6세 때 사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셨다(신학세계3호)23세 청년시절인 손정도는 1902년 겨울에 관리가 되기위한 시험을 치르러 평양으로 길을 떠나던 중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조목사가 서구의 문화와 기독교교리를 손정도에게 설명하는 동안 손정도는 심령이 변화되어 예수 믿기로 결단하였다. 이러한 신비체험이 있은 후 다음날 아침 조목사는 손정도의 상투를 짤랐고 손정도는 평양을 포기하고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Z.Moor 1874-1963)목사와 함께 고향으로 가 사당을 부두는 활동등의 신앙적 결단을 보이고 증거하였다. 어느날 밤 집안 어른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손정도는 눈덮힌 들판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손정도 목사의 신앙 메모에 의하면 그날밤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날밤 청년 손정도는 속옷바람으로 집을 나와 눈덮힌 산에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다 실신하였고 인근 주민들에 의해 구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과 결단을 가진 손정도는 단신으로 평양으로 가 문요한 선교사 집에 머물면서 일하였고 문 선교사는 손정도를 1905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켰으며, 고학하면서 1908년에 숭실중학을 졸업하였다. 손정도는 13세때 2살 위인 박신일과 결혼하였고 시집에서 견디지 못한 부인은 평양으로 남편을 찾아 왔으며 평양 기독병원(기흘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면서 남편의 학비를 도우며 자녀를 양육 지도하였다. (당시 자녀는 진실, 성실, 두 딸이 있었음). 1907년에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해석은 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다니다가 휴학하고, 평양 남산현(南山峴)교회의 부목사를 담임했다. 그러면서 이승훈이 세운 영창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날 하디 목사의 부흥회에 참가하여 감화 감동을 받고 국가가 가져야 하는 자주 독립과 국민이 가져야 할 민족주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이를 위한 선한 싸움을 해보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곧바로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에 오자마자 협성신학당(協成神學堂)에 입학하여 목회자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학업이나 행동면에서 주목을 받아 감리교 부흥의 주도자로서 지목되어 부흥사 일을 맡게 되었다. 서울지역 교회를 출입하면서 전덕기 목사 뿐 아니라 이승만, 이동령, 이시영, 장지영, 이준, 노백린, 조승한, 이갑, 최남선, 이필주 등과 어울려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진남포(鎭南浦)교회에서 2주일 간 부흥전도사로 초청되었고, 그 결과가 호평을 받자 북감리교 측에서는 정식으로 전도사 직첩을 주어 해석을 진남포교회로 파송하여 1년 간 시무토록 했다. 1911년 목사 안수를 받은 손정도 목사를 만주지역 선교사로 매연회에서 파송하였다. 1912년 하얼빈[哈爾濱]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914년 석방되었다. 이후 서울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19년 2월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이해 4월 10·11일 양일간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이무렵 서울에서 공포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했다. 1920년 1월 김립(金立)·김철(金徹)·김구(金九)·윤현진(尹顯振)·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했다. 1921년 3월 3일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조상섭(趙尙燮)·송병조(宋秉祚)·장덕로(張德櫓)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그해 8월 임정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 대한적십자회 회장이 되었으며, 8월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를 지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홍진·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지린[吉林]으로 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27년에는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고자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12월 고활신, 오인화 등의 초청으로 길림에서 독립운동의 진로 문제를 협의하다가, 1931년 2월 19일 동양의원에서 지병으로 서거하였다. 손목사의 가족은 2남 3녀로써 부인 박신일 여사와 장녀 진실(在美), 차녀 성실, 장남 원일(해군 참모총장 및 국방부장관 지냈음), 차남 원태(의학박사), 3녀 인식(이대 교수, 한국여성단체 협의회 회장, 한국YWCA 회장)이시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56년] 순국지사 송주면(宋宙勉) 출생 1856. 7. 26 전남 화순~1910. 10. 17.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정여(正汝), 호는 규사(圭沙).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있다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1905년(광무 9) 10월 사퇴했다.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우리 강토를 내놓아라"라는 요지의 혈서를 통감부(統監府)에 보내고 절명시(絶命詩) 5수를 남긴 다음 음독자결하려다가 가족에게 발견되어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우물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48년] 한국 개신교장로 서상륜 (徐相崙) 출생
1848. 7. 26 평북 의주~1926. 1 황해 장연. 최초의 개신교 신자·전도사·장로·성서번역가. 양반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3세 때 부모를 잃고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했다. 31세 때 열병에 걸려 고생할 때 J. 매킨타이어(한국이름은 馬勤泰) 목사의 도움으로 서양인이 경영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뒤 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배웠다. 1879년 이응찬(李應贊) 등과 함께 J. 로스(한국이름은 羅約翰)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882년 로스 목사를 도와 중국의 봉천에서 인쇄소를 차리고 그해 가을 선양[瀋陽]에서 '문광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예수셩교 요안 복음젼셔〉라는 복음서를 간행했다. 그뒤로는 성서를 지니고 압록강변부터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1883년 그는 로스 목사의 부탁으로 성서를 국내로 들여오려다가 짐 속의 성서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먼 친척이며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 등의 도움으로 몰래 빠져나와 의주(義州)로 돌아왔으나, 위험을 느끼고 황해도 솔내[松川]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전도를 시작하여 1884년 솔내에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그후에도 전도를 계속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는데 1887년 서울에 새문안교회가 세워질 때 설립자 14명 가운데 13명이 서상륜의 전도로 신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백홍준과 함께 한국 최초의 장로로 뽑혔다. 그의 동생 경조(景祚)는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을 공부하여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된 7명 중의 한 사람이다. 서상륜은 성서의 한글번역과 줄기찬 전도활동 등으로 인해 한국 그리스도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 장로교회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2005년]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 2005년 7월 26일 31번째 발사 때는 외부 연료탱크, 볼트 캐처, 바이포드 램프 히터, 날개 센서, 카메라와 추적기 등의 안전장치를 최첨단 장치로 바꿨다. 그럼에도 몇 차례 연료 센서 고장 등으로 발사가 연기된 끝에, 26일에야 발사되었다. 승무원 7명이 탑승하였는데, 국제우주정거장에 14일간 머무르면서 우주실험실의 조립을 위한 장비를 전달하고, 2008년 수명이 다하는 허블우주망원경의 성능을 점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원래는 12일 만에 지구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몸체의 단열 타일 사이를 메우는 '갭 필러'가 튀어나와 사상 처음으로 승무원들이 우주유영을 하면서 수리작업을 하느라 8월 9일에야 귀환하였다. 컬럼비아호 참사 후 처음으로 발사된 우주왕복선으로, 2010년 퇴역 예정으로 있다.
[1994년] 디즈니 사의 영화 <라이언 킹> 로스엔젤레스에서 개봉
애니메이션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라이온 킹》은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차용하던 디즈니 스튜디오가 처음으로 오리지널 스토리를 창작하여 만든 첫작품이다. 원작이 우화나 문학작품이 아닌 최초의 창작물인 셈이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의 잇따른 성공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디즈니 스튜디오가 1994년 32번째로 내놓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스토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데스카 오사무의 《밀림의 왕자 레오》의 이야기는 물론 캐릭터까지 도용했다고 비난했다. 아프리카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라이온 킹》은 동물 캐릭터가 주도하는 작품이다. 제작진은 동부 아프리카 현지답사를 통해 실제 풍경을 스케치했고, 스튜디오에 아예 사자를 데려다놓고 동작과 표정을 연구했다. 들소떼가 화면을 가득 메운 채 달리는 장면의 스펙터클을 위해서는 따로 컴퓨터그래픽팀이 2년여에 걸친 장기간 작업을 하기도 했다. 엘튼 존이 주제가를 부르고 한스 짐머가 음악을 맡았다. 《라이언 킹》은 사악한 숙부 스카에게 왕이었던 아버지도 죽고 아버지의 왕국도 빼앗긴 어린 사자 삼바의 모험담을 그린 작품이다. 프라이드 랜드의 왕으로 운명지어진 권리를 되찾아야 하는 어린 사자 삼바는 제왕이었던 그의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며 삶을 배운다. 아프리카 벌판을 배경으로 한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 묘사는 아름다운 영상의 극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마치 아프리카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웅대한 자연을 체험하게 한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자는 밝은 색으로 나쁜 사자는 어두운 색으로 표현한다든지 한 것으로 인해 《알라딘》에 이어 인종차별적인 태도가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다. 《라이언 킹》은 1994년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흥행실적에서 3억 4100만 달러를 벌어들여 2억 900만 달러의 《쉰들러 리스트》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1962년] 한국-요르단, 국교수립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서 한국과는 1962년 7월에, 북한과는 1974년 6월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1983년 9월에 후세인 국왕이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1972년 쌍방간 무역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문화협정, 경제·기술협력협정, 항공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1974년 2월에 한국의 남광토건㈜이 암만시의 상수도공사를 계약한 이래, 한때 한국건설업체의 진출이 활발하였다. 통상면에서는 2002년 대한수입 1억 9538만 달러, 대한수출 1146만 달러였다. 2003년 체류자는 183명이다. 북한은 수교 이후 문화협정을 체결하였으나 관계가 긴밀한 편은 아니다.
[1956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
← 나세르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된 혁명 4주년 기념연설에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희생하에 구축된 것인데 외국의 부당한 지배하에 있어 이제까지 착취를 받아왔다. 운하를 국유화하면 이집트가 얻을 수익은 연간 1억달러에 달할 것이다. 따라서 외국에 원조를 얻지 않고도 애스원댐을 건설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될 것이다’라는 강력한 어조로 연설했다. 군중은 나세르의 연설에 환호를 보냈지만 구미 각국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수에즈 운하 회사는 사실상 프랑스 소유였고 조차권도 아직 12년이나 남아 있었다. 나세르는 미국과 영국이 신(新)애스원댐 원조를 취소시킨 보복으로 국유화를 선언했고 영국과 미국은 28일과 31일에 각각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자국에 있는 이집트의 재산을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8월 9일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운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합동군 창설을 결정했다.
[1945년] 포츠담선언 발표
←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체칠리엔호프 궁전(지금은 호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국 3개국 수뇌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공동선언으로, 일본에 대해서 항복을 권고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표명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처칠, 중국 총통 장제스[蔣介石]가 회담에 참가하였으나, 얄타회담 때의 약속에 따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8월 이 회담에 참가하고 이 선언문에 함께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제1∼5항은 전문(前文)으로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제7항은 일본영토의 보장점령, 제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은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유지의 허가, 제12항은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은 일본군대의 무조건항복을 각각 규정하였다. 특히 제8항에서는 “카이로선언의 모든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소련도 8월 8일 참전하여, 10일 일본은 이 선언을 수락, 14일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1887년] 자멘호프, "에스페란토 박사"라는 필명으로 《국제어》를 출간
자멘호프(Zamenhof, Lazarus Ludwig)의 고향 비아위스토크는 당시 러시아령의 신흥 방직업 도시로서 폴란드 ·독일 ·유대 ·러시아의 네 민족이 섞여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들이 서로 반목 속에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아프게 여겼으며 이민족간의 불화의 주된 원인이 언어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은 상호 이해의 결핍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의 해결책으로서 중립적인 국제어 창조에 뜻을 두어 1878년 고교 재학시절 ‘보편어’를 완성하였다. 그 후 ‘보편어’ 개량을 거듭하여 마침내 1887년 7월 ‘국제어’라고 이름 지은 에스페란토를 발표하였다. 이 때 그가 사용한 필명 ‘에스페란토(희망자라는 뜻)’가 그 후에 이 언어의 명칭이 되었으며, 그는 평생을 이 언어보급에 헌신하였다. 학습서 ·사전 등의 저작 외에도 《구약성서》, 안데르센의 《동화》 전부와, 실러의 《군도(群盜)》 이외의 많은 작품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하였다. 또한 국제어 창조의 동기가 된 인류애적 사상을 간추려 ‘호마라니스모(인류인주의의 뜻)’라고 이름 붙여 보급하였다.
[1856년] 아일랜드의 극작가 쇼(Shaw, George Bernard, 1856~1950.11.2) 출생
더블린 출생. 20세 무렵 런던에 나와 회사에 근무하면서 소설 5편을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사회·정치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1884년에 설립한 페이비언협회 회원이 되어 현실적 사회주의자로서 실천하며 연설 활동을 했다. 이 일이 웅변가 및 극작가가 되는 기초가 되었다. 1885년 W. 아처의 소개로 신문·잡지에 서평·미술비평·음악비평을 쓰기 시작했으며, 1895~1898년 《토요평론》 극평가로 활동했다. 그 무렵은 영국 사실주의근대극의 태동기였는데 상업주의연극계의 겉치레 연극에 도전하는 <희곡>의 투사로, 사회문제 제기자로 등장해 《입센주의 정수(The Quintessence of Ibsenism, 1891)》를 발표했으며, 그해 창립된 독립극장에서 발표한 《홀아비의 집(1892)》에서 빈민굴생활을 하는 게으른 중산계급의 실태를 파헤쳤다. 그 뒤 전쟁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영웅의 정체를 묘사한 《무기와 사람(1894)》, 매춘문제를 다룬 《워렌부인의 직업(1893 작, 1902 초연)》, 정치와 종교문제를 다룬 《안드로클레스와 사자(1912)》 등으로 상식을 타파하고 속설을 뒤엎는 문제를 제시했으나 그의 철학을 잘 나타낸 작품은 《인간과 초인(1903)》이다. 인간은 우주의 <생명력>의 작용을 인식하여 <창조적 진화>에 따라야 한다는 그의 이론은 《메투셀라로 돌아가라(1921)》에서도 나타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희극이며 날카로운 희극감각과 기지가 넘치는 것으로 희곡대사의 언어구사가 매우 뛰어나다. 그에 대한 세평은 극단적이어서 쇼는 결국 선전가이며 또 <파괴적 비평가>로서, 극중 인물은 그의 대변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극은 현재까지도 무대적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가 단순한 선전가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성녀 존(1923)》 등은 사극으로서나 무대극으로서나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밖에 영화로서 성공한 작품도 많은데 그중 《피그말리온(1912)》은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로 각색되어 널리 인기를 모았다. 그의 사고나 말은 항상 역설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는 산문극작가로서 영국에서 제일가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2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847년] 라이베리아 독립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원래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1816 설립)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해방노예들을 위한 근거지로 세워진 곳이다. 이 단체는 1821~22년 메수라도 곶에 작은 식민지를 세웠으며, 1822년말 감리교 목사 제후디 아시문이 이 식민지의 지도자이자 실질적인 라이베리아의 창설자가 되었다. 1824년 이 식민지를 라이베리아라고 이름지었으며 중심 거주지를 몬로비아라 불렀다. 라이베리아 최초의 흑인 총독 조지프 젱킨스 로버츠는 1847년 라이베리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국경을 확장했으며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법 노예거래를 근절시키기 위해 힘썼다. 1847년 7월 25일 미국의회와 맥을 같이하는 의회가 구성되고 다음 날인 26일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8월 24일에는 국기가 게양되고 9월 27일에는 라이베라아 초대 대통령으로 조셉 제킨스 로버트가 선출되었다.
그밖에 2005년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외무장관회담 개막 2005년 홍석현 주미대사 사의표명 2005년 북한에 제공될 쌀 육로로 첫 수송 2005년 북핵관련 제4차 6자회담 개막(베이징) 2004년 미국 랜스 암스트롱, 투르 드 프랑스 101년 사상 첫 6연패 달성 2001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러시아 방문을 위해 열차편으로 북한 출발 2000년 미국 연방법원 온라인 무료 음악공유 사이트 ‘냅스터(Napster)’ 잠정폐쇄 명령 1998년 캄보디아 첫 다당제 총선 1994년 미국 하원에서 ‘화이트 워터’사건 청문회 시작 1993년 미국 육군 장교 리지웨이 사망 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전남 해남 야산에 추락해 66명 사망 1989년 문규현 신부, 임수경양의 판문점 귀환에 동행하기 위해 방북 1988년 한국-멕시코, 항공협정 체결 1984년 美 여론조사 전문가 갤럽 사망 1981년 이란 대통령에 라자이 수상 당선 1981년 인도 국민단합회의, 동북아지역 국제단합상 수상자로 전두환 대통령 선정 1974년 구로공단사건 범인 이종대, 문도석 다시 살인난동끝에 자살 1972년 공화당 의장서리에 정일권 임명 1971년 백두진 제8대 국회의장 피선 1957년 한국서 영국연방군 철수 1956년 이승만 대통령 휴전협정 이미 사문화(死文化)임을 강조 1953년 피델 카스트로, 쿠바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 습격 실패로 체포 1948년 미국-영국-프랑스 3국 군정장관 서독정부 수립 결정을 성명 1943년 이탈리아 바도리오정권 성립 1939년 미국, 대일 통상항해조약 파기 통고 1931년 독일의 금융공황구제 7개국회의 1930년 한국독립당 및 한국독립당군 창설 1928년 미국의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생 1926년 이청천, 홍진 등 길림에서 한국독립군 조직 1922년 일본 신사현(나카다현), 신월전력공사장에서 한인 노동자 100여명 학살됨 1909년 스페인에서 공화주의자 반란 1909년 피의 일주일-에스파냐 정부, 계엄령하에 총동맹 파업 진압 1908년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 출생 1896년 국내전보규칙 반포 1894년 영국 작가 헉슬리 출생 1887년 매독 검사법을 개발한 미국의 면역학자 칸 출생 1782년 ‘피아노를 위한 야상곡’을 만든 아일랜드의 피아니스트 필드 출생 1485년 동국통감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