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가장 생생하게 보였다. 신비한 캔버스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캔버스. 그가 그리는 캔버스는 생명력을 가졌다. 촉촉한 윤기와 희고 고운 살결, 얼음처럼 차가운 피부, 탱탱한 탄력으로 생동감이 느껴지는 몸이다. 누구보다 예각이 적고 곡선이 우아하고, 한 떨기 싱싱한 들꽃 같은 몸은, 내 몸이다. 어떤 화가들은 하얀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그는 내 몸에 그림을 그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사를 그려 주겠다. 그가 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었다. 그가 길고 가느다란 펜슬을 가져왔다. 스케치가 시작되었다. 펜슬은 살결의 여린 털을 하나씩 가로질러 나갔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펜심은 조금씩 짧아져 갔다. 그의 키도 펜심처럼 점점 작아져갔다. 봉긋한 가슴에서 잘록한 허리를 거쳐 암팡진 무릎 선으로, 점점 작아졌다. 어느새 몸은 가느다란 선들이 어지럽게 감싸고 있었다. 마치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것처럼. 그는 펜슬을 놓았다. 그리고 길게 늘어뜨려진 내 머리카락을 단단하게 묶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가 손에 붓을 잡았다. 붓은 몸에 그려진 선을 따라갔다.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고 세밀하게 그려 나갔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입체적인 굴곡에서도 그의 손은 하염없이 유연했다. 붓은 정신없이 내 몸을 휘감았다. 어깨에서 발목까지 드러나는 견강함의 균형도 완벽하게 잡아주었다. 전신에 자리 잡은 근육은 붓의 포옹을 받자 사뭇 긴장감이 돌았다. 부드럽게 스치듯 지나가는 붓은 내 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얼굴은 화이트 그레이 색상으로 밀착 있게 칠해졌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보이는 두피와 귓바퀴가 말려 들어간 귓속, 주름진 목둘레까지. 그는 숱이 많은 둥근 붓으로 부드럽고 꼼꼼하게 칠했다. 살짝 튀어나온 이마 아래, 눈썹은 그레이 블랙으로 날카롭게 그려졌다. 흑옥같은 눈에 두꺼운 아이라인을 그리고, 눈두덩이는 골드 펄을 칠해서 매서움을 강조했다. 눈매 끝부분은 카키를 칠해서 스모키한 느낌을 가져왔다. 오뚝한 콧날에는 하이라이트를 주었다. 한층 좁혀진 미간이 앙큼한 고양이를 떠올리게 했다.
"네 입술은 언제 봐도 매혹적이야. 입술에 있는 점까지도."
입술에 피보다 더 짙은 농도의 다크 레드를 칠하던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나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도톰한 내 입술이 매혹적이라는 것은 인정해도 아랫입술에 까만 깨처럼 박힌 점까지는 아니었다. 내 입술에 있는 점은 언니도 똑같이 가지고 있었다. 내가 엄마보다 언니를 더 닮았다는 사실을 알고, 점을 없애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점은 언니가 찍어 놓은 낙인같이 느껴졌다. 여린 입술에 깊이 새겨진 낙인은 악몽 같은 기억처럼 선명하게 찍혀 지워지지 않았다. 언니에 대한 그 기억은 더듬더듬 목을 메이게 하는 슬픔이었다. 하지만 나는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 그 점에 손대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한 것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싸늘히 식어버린 부모님의 주검 앞에는 나와 이모뿐이었다.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녀가 된 이모였다. 친척이 없는 내게 이모는 둘도 없는 가족이 되었다. 딸이 하나밖에 없던 엄마가 젊은 부부의 아기를 돌보면서 샘을 내자, 삼신할미가 나를 점지해주었다. 이런 신빙성 없는 말을 믿고 자란 나는 늦둥이였다. 초등학교 학부모 회의에는 으레 언니가 왔었다. 또래 학부모보다 나이가 많은 엄마는 언니를 대신 학교에 보냈다. 나는 엄마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언니가 학교에 가는 것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흰 백합을 안고 와서는 젊은 엄마 역할을 멋지게 잘해주었다. 그런 언니 모습에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특히, 남자 담임선생님은 엄마랑 많이 닮았다면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나는 그런 관심이 거북했지만 참을만했다. 언니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몰랐지만 엄마는 절대 못하는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한번쯤, 나는 언니가 엄마였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그는 무사의 얼굴을 칠했던 붓을 씻고 있었다. 나는 거울 앞에 가서 얼굴을 보았다. 입술과 눈은 색상 대비를 이루어 강렬한 이미지가 연출되었다. 풋풋한 과일처럼 싱그러운 내 얼굴은 표정 하나 없이 무섭고 차갑게 굳어버린 무사의 얼굴이 되었다. 그는 나에게 왜 이런 그림만 그리는지 모르겠다. 내게 그리는 그림은 하나같이 차갑고 남성적인 느낌이 강했다. 여자라는 것이 억울할 만큼.
다시 붓을 든 그는 무사의 갑옷을 차곡차곡 입혀나갔다. 갑옷은 역사 속의 가죽과 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디자인 된 갑옷이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갑옷. 갑옷의 비늘 문양은 악어의 껍질을 닮았다. 비대한 악어의 비늘은 부드러운 피부를 모두 덮었다. 딱딱하고, 미끈하며, 끈적거리는 촉감이 느껴졌다. 한 조각, 한 조각의 비늘들은 악어가 아닌 나와 같이 호흡을 했다. 곧게 뻗은 팔과 아름다운 가슴, 미끈한 등, 매끄러운 허벅지 모두 다른 문양의 비늘을 하고 있었다. 섬세하고 정교한 비늘 문양은 내 살결을 따라 미려하게 갖추었다. 그는 비늘 문양에 단총처럼 생긴 에어브러시를 사용했다. 집게손가락이 에어브러시의 방아쇠를 누르면 비늘 문양에 색소가 분사되었다. 에어브러시의 색소는 농도와 분사 거리, 세기에 따라 나타나는 표현이 달랐다. 가까운 거리에서 묽은 색소를 약하게 분사하면 섬세하게, 멀리서 된 색소를 세게 분사하면 질박하게 되었다. 그가 에어브러시로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은 손등이었다. 칼에 찔린 자국이 금이 간 모양처럼 생겨서 문신같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그려야 했다. 나는 손등의 흉터를 볼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적, 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은 화구들이었다.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은 언니는 그림을 그렸다. 언니 방에는 언제나 화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붓으로 코를 간질이거나 알록달록한 물감을 몸에, 하얀 종이에 칠하며 놀았다. 이런 내게 아버지는 심하게 야단을 치곤했다. 왜 언니 방에 들어갔냐면서, 또 들어가면 매를 들겠다며 혼쭐을 냈다. 하지만 나는 언니 방에 들어가서 노는 것이 즐거웠다. 아버지한테 매번 들키면서도, 매번 들어갔고, 매번 야단을 맞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왜 그토록 그림이 싫은지 물었지만 대답은 듣지 못했다. 언니도 나처럼 아버지에게 야단을 많이 맞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새된 목소리와 언니의 흐느낌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나보다 더 오랫동안 꾸중을 듣는 언니를 따라 나도 울었다. 엄마는 불쌍하다고 되뇌면서 나를 토닥여주었다. 그런 언니가 그림 공부를 한다며 프랑스로 떠났다. 어린 나는 아버지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니가 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언니 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도둑고양이처럼 아버지 몰래 잠긴 언니방 문을 따고 들어갔다. 들키지만 않으면 혼나는 일은 없었다. 부모님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안 된다, 미술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안 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시간에 공부를 하라는 부모님이었다. 내가 그림을 그려서 받은 상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상장을 쳐다보기는커녕 집어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림대회에서 번번이 상을 받아왔다.
나는 대학 진학을 위해서라도 계속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림만은 절대 안 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왜 자꾸 안 된다고만 하세요? 도대체 안 되는 이유가 뭐예요!"
나는 아버지에게 부들부들 떨며 울부짖었다. 더 이상 야단만 맞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넌 그 더러운 물감을 묻혀서는 안 된다. 그림만은 절대 용서 못한다!"
아버지는 못 박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이유 없는 아버지의 반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식의 재주를 키워줘야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내 가슴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찼다. 나는 미어지게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억울한 누명을 쓴 죄인이 형벌을 받는 것처럼, 그리고 또 그렸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 가기도 했다. 친구는 손으로, 나는 눈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늦은 밤, 술이 잔뜩 취한 아버지는 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놀랬다. 미처 화구들을 챙겨 놓지 못한 이유였다. 나는 우왕좌왕 했지만 이미 문은 열려 버린 뒤였다. 악의가 서린 아버지의 눈은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다.
"도대체 왜 말을 안 들어!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은 거냐?"
아버지는 상처 입은 호랑이 마냥 부르짖었다. 목수 일을 하는 아버지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독수리 발톱으로 뺨을 갈겨놓은 듯한 무자비한 아픔이었다. 아버지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정신병자처럼 모조리 그림을 찢고 화구들도 부숴버렸다. 나는 애원하듯 붙잡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아버지를 말리던 엄마는 기절한 듯 쓰러져 있었다. 어느 틈에 아버지는 책상 밑에 있던 화구박스를 던져버렸다. 화구들과 미술용 칼이 사방에 쏟아졌다.
"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내가 붓을 잡는 손에 깊은 아픔을 느꼈다. 가늘고 예리한 칼이 오른 손에 꽂혔다. 포스터 보드에 사용했던 미술용 칼이었다. 날카로운 아픔이 손에서 피를 흐르게 했다. 내 매끄러운 손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짜디짠 눈물이 촛농처럼 뜨겁게 흘렸다. 따스한 온기의 핏물이 바닥에 퍼져갔다. 정신이 혼미했다. 엄마는 소매를 훔쳐가며 바닥에 피를 닦았다. 목구멍에서 치밀어 나오는 슬픈 음색으로 말했다.
"아버지도 오죽하면 이러시겠니. 제발……. 아버지 말에 따르거라."
나는 오른손에 하얀 붕대를 감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반대하는 이유를 끝내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삭이고 싶어도 엄마는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 부모님이 그렇게 갑작스레 돌아가실 줄은 상상도 못했다. 때늦은 후회지만, 그땐 내가 왜 그렇게 그림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에어브러시의 색소가 분사될 때마다 샤워기의 물줄기처럼 몸을 적셨다. 그 느낌이 시원할 만큼 내 몸은 열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새, 갑옷의 비늘들은 에어브러시가 내뿜은 스카이 블루, 다크 블루, 블루 그레이, 다크 네이비 색상으로 화려한 메탈릭 퍼플 빛이었다.
"시드니에서 매년 3월에 열리는 마디그라를 아니? 난 매년 참석하지."
그가 에어브러시의 색소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허공을 주시하던 나는 짐짓 놀랐다. '마디그라'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축제였다. 그는 더 이상 숨길 게 없다는 듯이 편안해 보였다. 내 시선은 방향을 잃었다. 내 불온한 심사가 오톨도톨하게 돋아난 피부를 통해 역력히 드러났다. 그는 내 심사를 헤아렸을 것이다. 누구보다 내 몸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매력적인 내 몸을 앞에 두고도 아무런 감정이 없는 남자였다.
"왜 가슴 달린 무사를 원하냐구? 이 멋진 갑옷을 근육 박힌 남자의 몸에 그려야 한다면, 난 시작도 못해보고 작업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네가 입어야 되는 건 당연한 거야."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여성스런 내 몸에 무사를 그리는 죄책감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캔버스일 뿐이었다. 그는 다시 묵묵히 붓질을 시작했다. 물감은 흔적도 없이 몸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이미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차갑지도 부드럽지도 않고 미적지근했다. 갑옷의 양쪽 어깨에는 초록빛 눈동자를 그렸다. 마치 적외선 투시카메라와 같았다. 탄탄한 둔부에는 길쭉한 악어의 붉은 눈을 그렸다. 악어의 눈은 밤이 되면 붉은 색이 된다. 특수한 색소가 망막에 반사되기 때문에 동공이 길쭉하다. 무릎에 그려진 민무늬의 붉은 보호대는 단단하게 보였다. 미끈한 종아리에는 무두질한 가죽 장화를 그렸다.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레 붓을 놓았다. 그 순간, 나는 숱하게 박혀있는 비늘의 전율에서 벗어났다. 그의 감각적인 색상들은 근육과 골격의 흐름에 맞게 조화를 이루었다. 골격에 맞는 음영과 명암의 포인트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무사의 갑옷은 냉철하고 비장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는 뭔가 빠진 것을 찾는 듯 나를 훑어보았다. 세심하고 치밀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물끄러미 한 곳을 응시하던 그가 커다란 링 귀걸이를 달아주었다. 귀걸이는 조그만 귓불에 매달려 이리저리 움직였다. 굳어 있던 내 마음도 귀걸이를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갑옷을 입은 무사가 되었다.
그가 내게 칼을 주었다. 80cm 정도의 짧은 단칼. 초심자가 사용하기에 가장 편하다는 '숏 소드'였다. 휘두르기에도 편하며, 짧고 단단해서 잘 부러지지도 않는다고 그가 알려 주었다. 나는 천장을 향해 칼을 들었다. 양손에 쥐어진 칼은 직선으로 곧게 뻗었다. 예리한 칼날이 빛과 마주치자 눈이 시리도록 따가웠다.
"칼 다루는 연습을 해둬."
그가 에어브러시를 분해하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칼을 잘 다루었다면, 내 손등은 찔리지 않았을까. 문득 이런 생각에 내 다리는 힘없이 풀려 버렸다. 내게 서 있는 일이란 익숙하지만 힘든 건 매번 마찬가지였다. 다리가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선명하게 찾아드는 기억의 상념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시간이 지나도 칼에 찔린 상처의 아픔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가슴은 답답했고,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밤에 잠을 이루기도 힘들었다. 그 날 밤도 잠을 뒤척였다. 나는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려고 일어났다. 눈에서 딱정벌레가 왔다 갔다 하듯이 현기증이 몹시 났다. 집안은 온통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내 눈은 곧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발걸음은 부엌으로 조용히 재촉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소리는 부엌으로 가까워질수록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부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긴장이 온몸을 엄습했다. 어두운 부엌에서 엄마의 뒷모습은 측은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늦은 시간, 엄마의 통화는 예사롭지 않은 일임을 짐작했다. 엄마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내 갈증의 결과를 기다렸다. 고개 숙인 엄마가 입을 열었다. 나직한 엄마 목소리는 갈래갈래 찢어졌다. 금세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엄마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것아,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다. 그러면, 모녀간의 사이가 끊어지는 줄 아느냐. 네가 뿌린 씨앗이니, 삶아먹든 볶아먹든 맘대로 해라. 더 이상 그림 그리는 꼴도 보기 싫다. 네가 그림만 안 그렸더라면, 그 몹쓸 인간을 만나지도 않았을 텐데……. 그래, 그만 하자. 서연이가 내 딸이지, 언제는 네 딸이었더냐. 몹쓸 것. 이 나쁜 것아!"
나는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엄마의 '네 딸'이라는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눈은 목격자로, 귀는 증인이 되어 나를 꼼짝없이 만들었다. 엄마는 식탁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나는 엄마의 등을 토닥거려 줄 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가슴에 각진 소금을 뿌린 것 같이 따갑고 쓰라렸다. 엄마의 뒷모습이 눈물에 잠겨왔다.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갔다. '언니가……. 엄마였다니'.
나는 한동안 끙끙 앓아누웠다. 어딘가에 숨어 있던 아버지의 슬픔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뾰족한 송곳 같은 고통을 몸이 대신 아파해 주었다. 차라리 아픈 것에 위로를 삼았다. 기운을 차린 나는 그림을 모두 찢어버렸다. 화구들도 불태워 버렸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활활 타는 불꽃의 매운 연기가 눈물을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벌겋게 치솟는 불꽃을 보면서 떠오르는 괴로운 기억이 눈물을 나게 한다는 것을. 그때 나는 결심했다. 내게 언니는 영원히 언니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이다.
"무사의 기본은 칼을 능수능란하게 휘두르는 거야. 그 칼로 무사의 면모를 보여줘."
그가 물끄러미 칼을 보고 있는 내게 말했다. 나는 그를 보았다. 그는 에어브러시를 세척하고 있었다. 에어브러시의 곳곳에 묻은 여러 색상들을 씻었다. 용액 병에 알코올을 담아 헹구는 손놀림은 마술사같이 능숙하고 재빨랐다. 나는 허공을 향해 칼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다른 무사와 겨뤄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장한 무사의 모습을 보여 봐."
작품 사진을 찍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던 그가 말했다. 그의 비장한 목소리에 정말 누군가를 죽여야 할 것 같은 전율이 느껴졌다. 그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나는 오직 강한 무사여야만 했다. 작업장은 온통 블루였다. 금방이라도 파란 물결이 일렁일 듯한 바다와 같았다. 작업장에는 조명을 바꾸는 그와 칼을 잡은 나, 그리고 머무르지 않는 공기가 있었다. 그는 카메라 렌즈 속으로 무사가 된 나를 들여다보았다.
"네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몸짓과 눈빛으로 뿜어내! 무사의 언어를 몸짓에 담아서 표현하는 거야."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명료하고 무겁게 들려왔다. 사진 찍을 때의 그의 모습은 부산스러웠다. 나는 가슴 달린 무사의 면모를 펼쳐 보여야 했다. 그의 집게손가락은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다.
"흐얏! 내려치기! 베고!, 찌르기! 흐얏! 한 번 더 내려치고! 찌르고! 베기!"
그는 조련사처럼 흥분하며 외쳤다. 나는 점점 미묘하게 동요되어 정말 무사가 된 것 같았다.
"오케이, 한 번 더! 내려치고 찌르고! 좋았어!"
그는 오직 피사체에만 집중하며 이리저리 뒹굴었다. 무사의 포즈는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빛났다. 무사의 모습을 담기 위한 그의 뜨거운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가 작품성을 인정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칼은 성난 뿔 같이 허공의 흐름을 뚫고 나갔다. 내 몸은 칼의 유혹을 받은 듯이 따라갔다. 칼이 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나아간다 해도 몸은 따라갈 것이다. 하지만 칼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카메라가 덩그러니 제 자리에 놓여졌다. 촬영이 끝났음을 알렸다. 몸에 수분이 수증기처럼 다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피로가 묽은 물감이 쭉 흘러내리듯이 느껴졌다. 카메라도 맥이 풀린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너와 작업하면 항상 희열감을 느껴. 네 몸이 뿜는 묘한 에너지에 감전될 정도야. 여느 남자의 몸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네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아. 난 그게 뭔지 궁금해. 알고 싶어. 언제까지 작품 사진을 찍는 작업만 할 거지? 너에게는 칼의 매서움을 능가하는 카리스마가 배어 있어. 사진 속에 갇힌 무사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면, 또 다른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지칠 줄도 모르고 의욕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소풍가기 전날에 설레는 아이처럼. 내 기억이 맞다면 언제까지 작품 사진만 찍을 거냐는 그의 말은, 세 번째였다. 들을 때마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그의 작품은 사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보디페인팅은 미술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는 '퍼포먼스' 장르에 속한다. 배우들의 몸에 그려진 문양과 기획된 율동을 통해 작가가 원하는 주제를 관철시키는 예술이다.
그가 원하는 진정한 무사의 공은 사람들에게 공연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진만 찍어왔던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가 모험과 도전을 낯설어 하는 나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분명,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그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캔버스 값을 지금의 배로 올려주지.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작품에 넌 빠지지 않을 거야. 이 정도면 충분한 조건이라 생각되는데."
나는 얼굴에 클렌징 크림을 묻혀 티슈로 닦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그가 그런 조건을 제시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굳이 조건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지만 선뜻 대답할 문제는 아니었다.
"생각해 볼게요."
석연치 않은 내 대답에 그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이 눈두덩의 약간 튀어나온 부분을 문질렀다. 깊숙한 소파가 그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갑옷이 보이지 않도록 옷매무새를 몇 번이나 다듬었다.
"안 씻고 그냥 가니?"
그는 소파에 기대어 무심코 말을 던졌다. 순간, 내 몸에서 붉은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그의 집에서 씻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한가하게 그의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그럴 시간은 이모가 누워 있는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만 갈게요."
나는 현관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갑옷을 입은 무사는 없고, 긴 바바리에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만 있었다.
"기회는 잡는 자의 것이라는 걸 명심하고 잘 생각해봐." 소파에 파묻힌 그의 잠긴 목소리가 귓전을 고요하게 맴돌았다.
'생각해봐…… 생각해봐…… 생각해봐……'.
나는 작업실을 나왔다. 세상은 아직 잠을 깨기 전이었다. 밤보다 더 어둡게 느껴지는 새벽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나는 집 앞에서 열쇠를 꺼내려다 벨을 눌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해피엔코 파자마를 입은 정민이었다. 정민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바블바쓰를 풀면서 휘저었다.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풍성한 거품 향이 콧속을 어지럽게 했다. 관능적이고 세련된 화이트 무스크 향. 은은하게 퍼져갔다. 나는 보글보글 거품이 풍성한 욕조 안에 들어갔다. 내 몸은 정민의 손에 맡겨졌다. 정민은 결벽증 환자였다. 대학에서 현대미술의 동향을 강의하는 강사이기도 했다. 더럽다고 느껴지면 무조건 깨끗하게 만들어야하는 결벽증. 하루 두 번, 정민은 욕조를 침대 마냥 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밖에서 집에 들어오면 바로 목욕을 했다. 반드시 목욕을 해야만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남자였다. 정민이 함께 살자고 했을 때 취미가 목욕하는 거야, 라는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미리 결벽증을 알았더라면 분명 거절했을 일이다. 이모도 자신이 무배란증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이모부의 청혼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리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나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더 많이 발생한다는 췌장암에 이모가 걸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점점 급속도로 퍼져 가는 암세포를 막을 길은 없었다.
정민은 나에게 하루 두 번, 목욕하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목욕물을 받아주는 정민의 정성에 목욕을 했다. 하지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하기 싫다며 짜증을 냈다. 정민은 바로 나를 안고 욕실로 데려갔다. 은근히 고집이 센 정민이 싫지 않았다. 정민은 갓 태어난 아기를 다루듯이 내 몸을 조심스럽게 씻어주었다. 나는 욕실에서 태어난 기쁨을 새삼스레 맛보았다.
매혹적인 정민의 손이 내 몸을 만졌다. 정민의 손이 닿을수록 갑옷은 벗겨지고 있었다. 음식이 담겼던 그릇을 씻는 것처럼 나를 뽀드득 씻어 주었다.
"낯설게 느껴진다. 네 몸이……. 네 몸에서 네가 느껴지지가 않아."
정민의 높낮이 없는 나직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정민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몸을 닦는 정민의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민의 말보다 이모의 담당의사가 했던 말에 신경이 쓰였다. 이모의 병이 악화되는 게 심상치 않다고 되도록 병상을 지켜달라고 했다. 나는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무사의 흔적들은 조금씩 지워져 갔다. 나는 깨끗한 몸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정민은 왜 이렇게 나를 열심히 씻겨 주는 걸까. 내 몸에 묻은 물감이 더럽게 느껴지나. 정민은 직접 나를 씻겨야만 침대로 가는 일이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욕실 거울에 비친 불그스레한 내 몸은 신선했다. 오래 삭힌 포도주처럼 붉은 빛깔과 향기를 빚어내었다. 비린내가 없고 탄력 있는 살점이 혀에 녹아내리는 생선요리처럼 훌륭했다. 정민은 수건으로 내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배냇저고리 같은 수건으로 감싸주며 이마의 입맞춤도 빼먹지 않았다. 엄마도 정민처럼 나를 목욕시켰을까.
정민은 산모처럼 나를 배에 품었다. 따스한 자궁 속에 들어간 것 같이 포근했다. 내 젖은 머리카락은 정민의 따스한 손이 만져주었다. 정민과 함께 살면서 느끼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따스한 입김 같은 드라이어는 머리카락을 한 올씩 말려주었다. 이 행복이 평생토록 이어지길 원했다.
"언제 작업 들어가?"
정민에게 아직도 내가 안 느껴지는지를 물어보려는 찰나, 나는 질문을 받았다.
"모르겠어."
나는 정민에게 태연한 척하며 세탁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정민은 드라이어를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공연에 대한 생각을 미루고 있었다.
"어디? 이모한테 가려고?"
나는 나갈 채비를 서두르며 정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할 텐데, 눈이라도 조금 붙였다 가지."
정민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속삭이듯 괜찮아, 라고 말하며 정민을 살포시 안아주었다. 청결하고 하얀 시트의 침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내 품에 안겨 있던 정민이 온화한 눈빛으로 잠깐만, 하더니 '타히티 노니 주스'를 들고 왔다. 남태평양 타히티 섬에서 자라는 나무인 '노니'의 열매에서 짜낸 원액에 벌꿀, 배즙 등을 넣어 만든 건강음료였다.
"타히티에서 '노니'는 신이 주신 선물로 불린다고 하더라. '노니'가 세포기능을 활성화시켜 신진대사를 촉진……."
정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매끄럽고 촉촉한 입술을 정민의 입술에 포개었다. 나와 감미로운 시간을 함께 나눈 정민은 자상하고 지적인 남자였다. 따스한 오전 햇살을 받으며 걷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는 정민이 준 '타히티 노니 주스'를 손 그네에 태워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버스정류장은 기다림과 떠남이 공존하는 곳이다. 바람은 속이 텅 빈 것처럼 휑하게 불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몇몇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아저씨는 기다리는 버스가 오지 않는지 연방 시계를 보았다. 나는 차도로 고개를 비죽이 내밀었다. 마침, 내가 타야할 버스가 오고 있었다. 나는 별 기다림 없이 버스를 타니 좋았다. 창밖으로 정류장의 광경을 보았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투덜거리는 표정들, 사람들은 참을성을 실험하는 중 같았다. 내가 기다리는 버스도 잘 안 오는 편인데, 단 하나뿐인 이모에게 가는 길에 찾아온 기쁨이었다. 정민의 선물에, 곧바로 온 버스까지.
나는 버스에서 내려 병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손끝에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나는 주위를 살폈지만 튀어 올 만한 물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낮의 하늘은 여전히 햇빛을 비추고 있었다.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건 물방울이 아니라 빗방울이었다. 빗방울은 고르지 않았다. 실같이 가늘거나 구슬같이 굵었다. 사정없이 빗줄기가 쏟아졌다. 맑은 하늘이 비를 뿌렸다. 유독 내게만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병원을 향해 곧장 뛰었다. 병원 입구에 다다르자 내 몸은 후텁지근했다. 이모의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자 열기는 식어갔다.
이모 혼자 있는 병실 문이 열려 있었다. 내 몸은 다시 후끈한 열기에 휩싸였다. 나는 병실로 빨려 들어가듯 황급히 들어갔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하얀색으로 차단된 병실이었다. 굵은 빗줄기는 창문을 타악기처럼 두드렸다. 의사들이 이모를 다른 침대로 옮기고 있었다. 나는 '타히티 노니 주스'를 내팽개치고 이모에게 달려갔다.
"우리 이모, 어디로 가는 거예요?"
가슴 속에 찬 기운이 돌고 있는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일단, 중환자실로 옮겨서 경과를 지켜봐야겠습니다. 의식이 희미한 상태입니다."
귀가 뾰족한 의사의 말이 냉랭하게 들렸다. 나는 모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이모는 뿌연 정맥주사약에 피부색이 노랗게 보였다. 추운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이모의 모습이 내 가슴을 더욱 저미게 했다. 나는 손끝까지 차가운 이모 손을 꽉 잡았다. 의식이 희미하다는 이모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이모를 불렀다.
"이모! 나 왔어. 눈 좀 떠봐, 제발, 눈 좀 떠봐! 이모!"
나는 주사바늘에 뻣뻣해진 이모의 팔을 감싸며 애원했다. 눈물에 아른거리는 이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내 감고 있던 이모의 눈이 천천히 떠지고 있었다. 이모는 어슴푸레 내가 보이는지 애써 눈인사를 건넸다.
"이모가 눈을 떴어요!"
의사는 다급한 내 말을 듣고 이모의 상태를 살폈다. 이모는 혈관 속으로 한 방울씩 들어가는 수액처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허옇게 메마른 입술은 조금씩 갈라져 있었다.
"할말이……."
들릴 듯 말 듯한 이모의 말은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흰 가운을 입은 그들이 침대를 움직이려 했다.
"잠깐만요. 이모가 내게 말을 한단 말예요!"
나는 이모를 중환자실로 데려가려는 그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모의 입 모양을 뚫어지게 보았다. 순간, 이모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했다. 나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내 손에 이모의 힘이 전해지자 나도 모르게 말문이 터졌다.
"이모, 나 알고 있어요. 나를 낳은 사람이 언니라는 거. 그러니 힘들게 말할 필요 없어요."
나는 절대 내 입으로는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이나마 이모의 짐을 덜어줘야만 했다. 창백한 낯빛의 이모는 심호흡을 깊이 내쉬었다. 그러던 이모가 내 손을 다독거리는 듯 하더니 쓱 끌어당겼다. 나는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모는 지친 듯이 가쁜 숨을 연신 내쉬었다. 다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모의 손에 힘이 빠지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심장은 단거리 경주하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침대는 잠에 빠진 이모를 담고 중환자실로 바쁘게 움직였다. 잠은 이모에게 고통을 잊게 있는 처방 약이었다. 나와 의사의 손은 침대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바퀴 달린 침대는 쉴 새 없이 병원바닥을 굴렀다. 중환자실의 고통스러운 문은 거칠게 열렸다. 내 생명까지 위협할 정도의 공포감이 느껴졌다. 간호사는 내게 밖에서 기다리라며 중환자실을 못 들어가게 막았다. 나는 굳게 닫힌 중환자실을 물끄러미 보았다. 내 머리 속는 이모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았다. 온갖 혼돈이 나를 사로잡아 뒤흔들었다. 언니와 언니의 남자 그리고 남자, 애인.
나는 가슴이 저린지, 쓰린지, 슬픈지, 그저 멍하게 얼빠져 있었다. 목은 석고를 바른 것처럼 딱딱해져 숨이 막혀왔다. 창밖은 비가 말갛게 그치고 빗방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중환자실에 있는 이모를 뒤로 한 채, 몽유병 환자처럼 병원을 헤매며 빠져나왔다. 빗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눈부신 햇빛에 내 눈이 싸늘하게 흐려졌다. 현기증이 나는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힁허케 부는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다. 나는 스산한 가슴을 부여잡고 흐늘거리며 걸었다. 돛이 꺾인 풍랑을 맞은 배처럼. 나는 병원 벤치에 주저앉았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헐떡여졌다. 칼로 헤집는 듯 한 아픔이 송충이처럼 내 가슴을 갉아먹고 있었다. 가슴 깊이 솟구쳐 오르는 슬픔이 내게로 젖어들었다. 가슴의 울분을 토하고 싶어도 터져 나오질 않았다. 목젖으로 넘어가는 애증만을 꺼억 거릴 뿐이었다. 이런 내 감정에 지쳐갈 즈음,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주위를 둘러보니, 내 뒤쪽에서 환자복을 입은 아이들이 플라스틱 칼로 칼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미적지근한 피가 혀 속을 비릿하게 스며들었다. 기합소리가 인상적인 칼싸움에서 한 아이가 점점 밀리고 있었다. 결국 그 아이의 칼이 보기 좋게 떨어지자 빗방울이 여기저기에 튀었다. 순간, 전율이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감싸 돌았다. 나는 현란했던 무사의 칼 사위를 떠올렸다. 이모가 내뱉은 말보다 무사의 칼에 찔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세상 밖으로 무사가 나온다면. 나는 그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휴대폰을 열었다. 신호음이 떨어지자 그의 목소리가 반겨주었다.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저, 해보겠어요."
나는 다시 갑옷을 입었다. 한번 입었는데도 아직 라벨을 뜯지 않은 것처럼 새로웠다. 내 몸에 그려진 갑옷은 편안하고 익숙했다. 공연이 시작되는 음악이 들려왔다. 무사가 잡아든 '숏 소드'에 땀이 베여 들어왔다. 무사는 두 명의 전사를 맞이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려움을 느꼈다. 가슴이 구겨진 종이같이 조여 왔다.
"무사로 다시 태어난 네 진면모를 보여 봐!"
그가 공연이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이었다. 나는 강렬한 그의 눈빛에서 잠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의 열정에 찬 목소리에 마치 무사의 영혼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사의 섬세하고 용맹한 모습을 최대한 보여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무사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무엇을 발견하게 될 지 궁금했다.
첫번째 전사가 등장했다. 화려한 장신구와 진홍색이 조화로운 갑옷을 입은 전사였다. 전사는 칼을 든 채 나를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왼손에 쥔 칼을 천천히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칼은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겼다. 나는 칼을 잡은 오른손의 상처를 확인했다. 나는 두 손으로 칼을 쥐었다. 칼은 허공을 가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머리 위로 칼을 들어올렸다. 관중들은 빛에 더 강렬해진 칼날을 확인했다. 칼은 마치 영사관의 필름처럼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가슴 깊이 억누르고 있던 울분을 세차게 질렀다. 그리고 전사에게 칼을 힘껏 뻗었다. 전사의 허리를 향해 빠르게, 깊숙이 찔렀다. 칼의 끝자락은 쓰러진 전사를 가리켰다. 의욕을 잃은 채 쓰러진 전사의 몰골은 초췌했다. 나는 전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낯빛은 창백하고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내가 그토록 기억해 내려고 했던 사람, 언니였다. 프랑스로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언니. 14년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내가 줄곧 언니라고 불렀던 여자였다. 엄마가 언니로, 할머니가 엄마가 되어야만 했었던 이유, 그 부득이한 이유를 '그녀'는 내게 말해야 했다. 무사는 전사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두 번째 전사는 파리한 낯빛에 다소 여리지만 강한 체격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몸짓이었다. 자못 놀라워하는 전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칼을 대응했다. 창. 창. 창. 부딪히는 경쾌한 칼날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나는 칼을 휘두른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전사와 나는 서로 칼을 겨루었다. 수직으로 세워진 칼을 힘으로 맞섰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 전사의 칼이 나를 밀어냈다. 내 몸은 꽉 움켜잡은 칼과 함께 휘청거렸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를 찾았다. 날카로운 칼끝은 전사를 주시했다. 내 칼은 전사의 허리를 향하는 척, 전사가 미처 자신을 막을 새도 없이 바로, 날렵하게 오른쪽 가슴을 찔렀다. 쓰러진 전사의 가슴에서 핏방울이 솟구쳐 칼날에 튀었다. 내 가슴을 저미는 피냄새였다.
나는 전사의 얼굴을 침통하게 보았다.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언니의 남자였다. 나는 그 남자에 대한 멍에를 지우지 못했다. 남자는 괴로워하며 힘겹게 허리를 굽히면서 겨우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내게 뒷모습을 보였다. 언니의 남자는 도망치듯 정신없이 달려갔다. 나는 지옥 같은 천국을 향해 뛰어가는 남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남자는 쉬지 않고 절룩거리며 뛰어갔다. 한없이 가련하고 애처로운 그것은 고통과 무관하지 않았다. 가슴 깊이 울려 퍼지는 징소리처럼.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 무사의 정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고통은 언제나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나는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있었다.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두 전사에게 휘둘렀던 칼을 보았다. 냉철하고 대담했던 칼에도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칼이 온전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스스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두 전사의 영혼을 찌른 칼은 가만히 몸서리쳤다. 나는 손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칼을 높게 쳐들었다. 그리고 지그시 두 눈을 감고 비릿한 칼로 내 가슴을 향해 깊숙이 찔렀다. 나는 무릎을 꿇으며 힘없이 쓰러졌다. 뜨거운 핏줄기가 그의 붓끝처럼 내 몸을 따라 흘러내렸다. 따뜻한 피의 온기가 나를 감싸주었다.
칼날 같은 눈부신 빛이 나를 비추었다. 나는 눈가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을 꾹 감았다. 관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