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청도, 평사리, 도리원…. 지명유래나 어원을 떠나 정감 가는 땅이름이다. 우리말 땅이름도 곳곳 흔하게 있다. 기축년 묵은해가 가는 그믐날이었다. 내가 탄 10번 녹색버스는 굴현고개를 넘어 온천장으로 향했다. 차내는 ‘다음 내릴 곳은 감나무골입니다.’라는 방송이 나왔다. 다음 정류소에서는 ‘까치골’이라고 예고했다. 내가 내린 곳은 감나무골과 까치골을 지나 동전마을 입구였다.
백월산 아랫마을 월촌과 남백이 가까이 있다. 백월산은 여러 차례 올랐는지라 맞은 편 방향으로 길을 들었다. 야트막한 산 아래 역사가 꽤 되어 보이는 초등학교가 나왔다. 동전마을은 무동지구 도시개발지 인근이었다. 동전에서 고개를 넘으니 무동이었다. 전원형 신도시가 될 부지 공사는 많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밀성 박씨 집성촌임을 알 수 있는 커다란 비가 세워져 있었다.
예전엔 산중 그림 같은 자연마을이었을 것이다. 이제 논과 밭은 온대간대 없이 사라져버렸다. 무덤도 덜어내고 산언덕도 뭉개어 터를 골랐다. 나는 무동마을에서 아저씨 한 사람을 만나 무릉산 가는 길을 물었다. 마을에서 바로 가는 길은 없고 에둘러 한참 돌아야 큰 길이 나오고, 거기서부터도 제법 올라야 한다고 했다. 마을 뒷산을 넘어가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길이 험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을 골목길을 빠져나가 단감나무 과수단지를 지났다. 골짜기가 끝난 곳 외딴 농막에는 가축이 있었다. 아래채 묵어둔 개 세 마리가 나를 보고 왕왕거리며 짖어댔다. 주인은 바깥나들이 가고 없는 모양이었다. 조금 위에 농막 한 채가 더 나왔다. 감나무그루 아래는 볏이 붉은 여러 마리 토종닭들이 모이를 찾느라 땅을 헤집었다. 울타리 안에는 집오리들도 뒤뚱거리며 모여 있었다.
주인은 없는 농막에 꿀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볏짚검불을 깔아둔 돼지우리가 있었다. 우리 안을 넘어다보니 앙증맞게 생긴 흑돼지 세 마리가 보였다. 내 어릴 적에는 토종돼지를 보았다만 털이 새카맣고 덩치 작은 돼지는 오랜만이었다. 마을과 농막을 지나기까지 만난 사람이라고는 아까 길을 물어본 아저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과수원 언덕을 넘어 가시덤불 숲을 헤쳐 내려갔다.
산을 내려서니 행정구역은 바뀌어 함안 칠북면 소목이었다. 마을회관을 지나 돌담 너머 시골집 처마 밑에 달아둔 메주는 잘 뜨고 있었다. 날씨가 춥기도 했다만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무릉산 오르는 등산로 들머리를 묻고 싶었다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자손들이 무덤 찾아간 길 따라 올랐다. 볕 바른 자리 몇 곳 무덤을 지나니 길이 끊어졌다. 이후는 길은 이어졌다 다시 끊어졌다.
능선에서 덕암에서 오르는 희미한 등산로를 찾았다. 장춘사 갈림길을 지나 무릉산 정상에 닿았다. 나뭇가지가 가리지 않은 동남쪽은 훤히 조망되었다. 마금산 아래는 온천장이었다. 백월산 너머엔 주남저수지가 보였다. 구룡산과 이어진 천주산은 청룡산이 앞을 가려 보이질 않았다. 시야 한 겹 밖으론 낙동강이 흘렀고 창녕 남지, 밀양 수산, 김해 진영 읍락과 도청소재지 창원이었다.
산정의 배씨 무덤가에서 도시락을 비웠다. 나는 점심 식후 장춘사를 찾아갔다. 비탈면을 제법 내려가니 임도가 나왔다. 임도 끝난 곳 그윽한 자리가 절이었다. 겨울 나목이 줄지어선 산문이었다. 우람한 일주문은 없었다만 시누대로 엮은 사립문이 인상적이었다. 신라 말 무염국사가 창건한 절에는 도 지정 유형문화재 석조여래좌상과 오층석탑과 도 지정 문화재자료 대웅전이 있었다.
오층석탑은 탑신이 사다리꼴로 가늘고 긴 느낌이 들었다. 대웅전 뒤 돌계단을 오르니 자연스레 가지를 펼친 세 그루 소나무 곁에 약사전이 있었다. 전각 문고리를 살짝 여니 돌부처에 금박을 입힌 약사여래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약사전과 산신각 사이 한국의 약수 100선에 드는 약수를 세 모금 마셨더니 속이 찌르르했다. 달빛에 물든 사연은 전설이었고, 햇빛에 바랜 사건은 역사였다. 09.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