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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손흥정은 영국 프리미어 리그 에서 토트넘 소속으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이다 그 역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초등학교 시절 축구 선수로 시작하여 각 레밸 대표 선수를 거치며 국가 대표, 프로 선수로 활약 하다 부상 으로 인하여 조기 은퇴를 하고 가정 생활을 위하여 고용직과 공사장 노동자로 열심히 살며 두 아들이 간절히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의지를 확인 한뒤 자기만의 가치관, 노하우로 지도하여 첫째 흥윤이는 프로 축구 선수를 거처 현재는 지도자로 둘째 흥민이는 동북 중,고등학교 제학중 2008년 우수선수 해외 유학 프로그램 과정 으로 독일 유학길에 오르도록 하고 그를 보호 하기 위하여 근처에 값싼 방을 얻어 자취하는 고생을 마다 하지 않았다 유학 과정이 끝나 독일 프로 축구단 함부르크 와 계약을 하고 부터는 아들 흥민과 가끼운 거리에서 생활 할수 있었다 손웅정 과 그의 아들 손흥민의 관계는 맹모 삼천(맹자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번의 이사를 한 고사)을 뛰어 넘는, 고비 고비가 눈물이 날 정도다 부자간 이지만 평상시 에는 인격 높은 감성과 덕을 지닌 지성 을 위하여 , 축구 훈련시는 오로지 축구만을 생각하는 냉철함 으로 지도 한 사실로 미루어 볼때 유명힌 사람은 홀로 만들어 지지 않듯 세계적 축구 스타 손흥민 역시 그랬다 그는 부친의 재능을 이어 받고 고된 훈련을 이겨내고 숱한 고생을 감수하여 세계적 축구 선수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손흥민 선수의 명성을 부러워 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과정은 도외시 한다 그래서 우선 그의 부친 손흥정이 쓴 이야기를 요약해 본다
1962년 6월 16일 충남 서산군 인지면 산동리 도비산 자락에서 빈농의 3 형제중 막내로 태어 났다 초등학교 3학년때 형이 하고 있는 육상 훈련이 부러워 선생님께 부탁하여 육상을 시작 하게 되었다 당시 선생님은 그가 워낙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 이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포기 할것 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고 줄거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서산 시 교회대항 초등부 축구 대회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가까운 교회 소속으로 대회에 참가해 보자는 제안에 응했지만 정작 축구공을 한번도 차보지 않았기 때문에 속 깊은 고민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가한 대회 에서 1회전에 타 교회를 이기고 2회전 에서도 축구부 선수가 있는 팀을 상대로 승리하자 자연 활약이 두드러진 손웅정을 눈 여겨 본 축구부 선생님은 " 쌀 다섯말 만 가저오면 축구부 에서 훈련 하도록 해주겠다 " 라고 이야기 했으나 손웅정 가정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어린 손웅정은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 하는 야무진 꿈을 품은채 육상 연습에 열중했다 어느날 서산 장 터에서 육상부 선생과 축구부 선생이 손흥정의 이야기를 부친이 듣게 되었다 부친은 선생님 들에게 축구 선수로서의 가능성을 확인 한뒤 쌀 다섯말을 준비 하여 아들을 축구부에 맡겼다 손웅정은 꿈에 그리던 축구선수가 되기에는 부족한게 너무 많았다 우선 공을 다루는 기술이 턱없이 부족 했다 하지만 달리는 속도는 또래 선수들 보다 좋아서 선생님은 축구 기본기를 집중 훈련 시키며 1년후 있을 전국 소년 체육대회 서산 초등학교 축구 대표로 준비 시켰다 그리고 충남 대표로 선발 되어 1976년 전국 소년 체육대회 를 서울 동국대학교 에서 치루었다 그때 각 학교 축구부 선생님 들에게 눈 도장을 찍었을 정도의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서산의 중학교 축구팀 창단을 앞둔 학교로 진학이 결정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껏 가르처온 선생님이 축구 감독으로 오기로 한 계약이 변경돼 다른 선생님이 오신것 이다 외골수 성격인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 이었다 고민 끝에 학교를 그만 두고 집으로 왔다 학교 측의 비용 변상 문제가 대두 되었는데 당시 형이 취직해 있어 이를 해결해 주었다 자유 신분 학생이 되었을때 강원도 춘천에 있는 축구부 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소양중학교로 전학 하였다 아직 어린 아이지만 홀홀 단신 객지 생활이 시작 된것이다 오전에 학과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축구 훈련이 있는 합숙소 생활 에서 따돌림 당하지 않기 하기 위하여 남들이 하기 싫어 하는 청소등 허드렛 일을 도맡아 하며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 관념 으로 정해진 훈련 시간을 끝내고도 밤 늦은 시간, 이른 새벽 시간에 개인 훈련을 하여 연습 벌레란 별명이 붙었다 물론 휴일, 일요일도 어김 없이 개인 훈련에 매진 했다 강원도 지역에서 우승한 주문진 중학교 에서 선발 하는 전국체전 강원도 대표 18명에 선발 되었다 8개월간 합숙 훈련 하고 있었는데 훈련 기간에는 소양중학교 소속으로 뛸수 없다는 불만을 못 이겨 주문진 합숙소를 이탈하여 도 교육청이 있는 강릉 으로 가 교육감을 만나 겠다고 버텼다 결국 교육감도 보지 못한채 주문진 합숙소로 보내졌다 천방 지축 야생마 처럼 행동 했지만 주어진 훈련에는 전심 전력을 다하여 열중 했다 1980년 강원도 에서 개최된 소년체전 남중부 축구 결승전이 춘천 종합 경기장 에서 열렸는데 강원도 팀이 우승을 차지 했고 그 우승의 주인공이 되었다 부상 투혼을 발휘하여 결승골을 넣었기 때문이다 중학교를 마치고 춘천고등학교에 진학 해서도 연습벌레 명성을 유지 했다 고등학교 재학시 제38회 청룡기 전국 중,고등부축구 선수권 대회 에서 대회 첫 해트트릭 기록을 세우는 쾌거도 있었다 몸뚱이 하나만 유지해 온 그로서는 축구가 인생 전부 이기도 했다 따라서 시간이 보장되면 축구 연습에 올인 하였으며 자투리 시간이 주어지면 부족한 독서에 매달렸다 책 속에는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배울것들이 있었고 부족한 지식을 체워줄수 있는 내용 들이 많았다 책을 읽으며 중요한 내용은 노란색 으로 밑줄을 긋고 보고 재차 볼때는 노란색 위에 분홍색을 그으며 읽었고 재삼 읽을땐 검정색 으로 칠하며 읽는 습관을 길렀다 한번 보낸 시간은 다시 가질수 없다는 생각과 같은 강물에 두번 담글수 없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쪼개 가며 어찌나 열심 이었는지 ! ? 웃지못할 사건도 있었다 어느날 새벽에 개인 훈련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순찰차가 나타나 영문도 모른채 연행되어 파출소로 끌려 갔으나 전후 사정이 밝혀져 훈방된 일도 있었다 당시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던 때의 에피소드다 고등학교 3학년말 체육특기자 전형으로 축구로 유명한 명지대학교에 입학 하였다 그해 12월 청소년 축구 국가 대표에 선발되는 영광을 가졌다 그러나 춘천고 에서 같이간 동료들의 불이익( 당시 체육특기자 선발 정원이 4명 이었기 때문에 타학교 에서 뽑은 학생 포함 18명중 14명이 불합격 처리되었는데 춘천고 동료들이 포함됨) 으로 울부짖는 학부모의 모습을 보고 혼자서 남아 있을수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짐을 싸들고 고향집 으로 줄행랑 첬다 학교에서 찿았지만 몸을 숨겼다 그러다 보니 아무데도 쓸모 없는 백수가 됬다고 걱정 하던차에 상무(국군 체육부대)에서 연락이 왔다 상무에서 연락이 온것은 명지대 재학 시절 대통령배 전국 축구 대회 에서 상무팀과 예선전 에서 패했지만 결승전 에서 다시 만난 상무팀과 격돌하였는데 2 : 2 상황에서 결승골을 터트려 2 : 3 으로 명지대가 우승 하였다 명지대가 대통령 배 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 했는데 경기종료 2분을 남기고 결승골을 넣은 주역이 바로 손웅정 이였기 때문이다 상무팀에 입단한 시기는 전(前)부터 육군은 웅비, 공군은 성무, 해군은 해룡 축구단 으로 운영하다 국군체육부대 창설에 따라 축구팀이 상무로 통합한 시기였다 상무팀은 군인정신을 우선하였기 때문에 어떤 경기든 패하면 그 벌칙으로 소위 말하는 기압을 받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경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됬었다 1983년 프로 축구 리그가 생겼고 할렐루야구단, 유공, 포항제철. 대우, 국민은행등 5개 구단이 참여하고 있었다 프로 축구단에 끼지 모한 실업팀은 1부 리그에 일곱팀이 있었고 2부 리그에 여덟개 팀이 있었는데 1984년 1부 리그와 2부 리그에서 우승한 팀은 자웅을 가려 우승팀 에게는 프로팀에 합류 할수 있는 기회를 부여 했다 당시 상무에 입단하여 군사 기초 훈련을 받다가 상무의 주전선수로 뛰기 위하여 훈련 도중 끌려가 뛰었는데 팀이 패권을 차지하였다 이로서 소위 성인 무대 축구에서 명지대 1학년때 는 대통령배 우승을 하였으며 상무에 입단하여서는 실업 리그에서 우승하는 팀의 팀원이 되었다 행운도 함께 했지만 열심히 노력한 선물 이라고 생각했다 1985년 상무의 슈러리그(프로 리그) 참가 성적은 8개 팀중 6위를 차지했다 이후 상무는 실업팀 으로 분류되어 더 이상 프로 리그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었댜 군 생활을 마치고 현대 호랑이 프로 축구단( 현 울산 현대)에 입단 하게 되었다 지금도 일류에 속하는 팀 이었지만 당시에도 왠만한 실력 으로는 들어가기 힘든 구단 이었다 3년을 뛰면서 자신의 축구 실력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 했다 생각 해보면 축구의 기본 훈련이 부족한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육상 선수 에서 갑자기 축구 선수가 됬기 때문에 축구공 다루는 기술이 몸에 배이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편 뒷 공간에 볼을 띠워 주면 남보다 빠른 주력 으로 달려가 볼을 툭 차 넣는 게 주특기 였다 드리볼을 잘 하거나 볼 콘트롤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도 운이 좋아 이름 있는 팀의 공격수가 되어 주역 으로 뛰었고 결승골을 넣는 행운이 뒤 따랐다 호랑이 축구단 에서 3년을 뛰었는데 이때 국가대표 B 에 선발 되었다 3년 동안 뛴 뒤 1989 년 새로 창단되는 일화 천마 (현 성남 FC) 프로 축구단 으로 옮겼다 한국이 국제 무대 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린 멕시코 청소년 축구대회 에서 4 강 신화를 이룩한 박종환 감독이 불러 주었기 때문이다 박종환 감독은 대중 에게 인기 가 좋은 만큼 선수들 에겐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호랑이 감독 이었다 일화 천마의 선수로 첫 게임 에서 첫골을 넣어 수훈가 되는 행운을 만들 었다 팀의 첫골 이며 첫 승리하는 게임 을 만든 것이다 1989 년 대우 로얄 팀과 경기가 있었는데 상대편 골문 앞으로 띠워준 볼을 터치 하여 슛팅 하기 위하여 무리 하게 달려 가다 아킬레스 건이 파열 됬다 그러나 게임을 무리 하게 뛰었다 부상중 인데도 한골을 내가 넣어 2 : 0 으로 승리 했지만 경기가 끝나고 걸을수 조차 없어 할수 없이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재활 훈련을 거처 다시 게임에 복귀 했으나 주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의지만 으로는 안된다는걸 느꼈다 결국 1990 년 은퇴를 하였다 돌아 보면 프로선수 4 년차, 37 경기 에 출장 하여 7골을 넣었다 오른발 로 2 골, 왼발로 3 골, 해딩 으로 2골 이었다 20 대 나이의 프로 축구 선수로 보잘것 없는 기록이 부끄럽기도 했다 은퇴후 아쉽고 허무한 생각에 젖어 울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것은 지나간 과거 일뿐 이었다 원망 하고 후회 하며 방황 해봐야 미래의 희망을 어둡게 할뿐 이며 나 자신과 가족을 망가뜨릴 뿐이다 무슨 일 이든 해야 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나는 나 일 뿐이다 삶은 몇 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다 이를 선물 처럼 기회를 잡는자와 흘려 보내는 자가 있다 했다 그래서 모든걸 잊고 가족 생계와 두 아들을 위하여 무엇 인가 할 일을 찿아야 했다 자식을 낳았다고 다 부모가 되는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다 어른이 되는건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 하게 생각 되는것이 생각 하면 답은 나온다 가장 (家長)이라면 가족을 부양 하는것이 첫째 의무다 내가 힘들더라도 , 내 삶과 생활은 없다 하더라도 내가 책임져야 할것들을 먼저 돌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사판 막노동을 나갔다 틈이 나면 방과후 체육교실 강사 일도 하고 학교 시설 보수 일도 해가며 생활비를 벌어 네 식구의 생활을 꾸려 갔다 단칸방 에서 생활하고 때로는 콘테이나 생활도 하면서 투잡 쓰리잡을 했다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아이들과는 많은 시간을 보낼수 있어 행복 했다 아이들은 알것이라 확신 한다 돈은 잘 벌지 못하는 아빠지만 공 차는것, 체육관 에서 운동 하는것, 운동장 에서 뛰는것, 사색 하는것, 독서 하는것을 , 떳떳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 "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때 함부로 걷지 마라 내 발자국 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될지 모르니 " 라고 말한 서산대사의 말을 항상 잊지 않는 언행을 한다 초등학교 3학년 흥민이가 축구를 가르처 다라고 말 할때 " 왜 ? 축구가 하고 싶어 ? " 라고 물었다 내가 축구를 좋아 했고 또한 내가 축구 밖에 아는것이 없었지만 아들이 조른다고 쉽게 허락할 만큼 어려운 결정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흥민이 에게 축구는 재미 있는것 이상 으로 힘든 운동 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뒤 " 힘든 운동 인데도 축구를 하겠느냐고 ? " 재차 물었다 흥민 이는 그래도 하겠다 했다 아비로서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에 축구로 인생을 산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라서 많은 설득과 설명을 한 끝에 흥윤 이와 흥민 에게 축구를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제도권 안에서 축구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 만큼은 체계적 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구상 하여 1989년생 흥윤 은 초등학교 6학년 1992년생 으로 초등학교 3학년 흥민이 형제를 몇번이나 대화 하면서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한 축구를 가르키기 위하여 엄격한 규율을 정해 훈련을 시작 했다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배제하고 줄겁게 건전하게 축구를 할수있도록 배려 하였다 우선 축구공 100개를 샀다 기초 훈련 으로 체력을 기르기 위해 러닝과 계단 오르기를 반복 하였다 볼 리프팅을 충분히 익히고 볼 트리핑 도 충분히 한뒤 슛팅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골대 앞에서 여러 각도에서 세게 볼을 패스하여 흥윤이와 흥민이가 골문에 슛팅하도록 했다 오른발이 익숙해진후 왼발 슛팅을 익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경기에 임했을때 충분한 체력을 유지 하고 볼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고 어느 상황 , 어떤 자세 에서도 슛팅 힐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날씨에 상관 없이 정해진 시간에 엄격한 훈련을 하였다 슛팅한 볼을 모으는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다 아이들은 편한 장소 에서 쉬도록 배려해 주고 내가 부수적인 일을 했다 아이들이 훈련이 힘들어 떼를 쓸적이면 " 너희들이 스스로 가르처 달라고 해서 하는 운동 이다 " 라는 말로 경각심을 갖도록 했다 나는 스스로 ' 나 처럼 하면 안된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만큼은 나와는 정 반대인 시스탬 을 갖추고 가르처야지 '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훈련으로 경직 되었을 근육을 풀어 주기 위하여 맛사지 전문가를 찿아 다녔고 이와 관련한 공부도 하여 직접 근육을 풀어 주기도 했다 학교 에서 하는 경기에서도 잘 하라는 이야기 보다는 기본적인 것에 충실 하도록 했다 당장의 성적 보다는 멀리 보고 발전 할수 있도록 배려 하였다 과거의 내가 성적을 위해 뛰었다면 아이들은 줄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선수로 뛰도록 하고 싶었다 흥윤이는 . 포철동초 - 포철중 - 포철고를 졸업하고, 독일 5부리그 팀에서 뛰었지만, 큰 부상으로 인해 이른 나이에 은퇴했고, 현재는 유소년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흥민이는 동북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정식 축구부 에 편성 되었지만 3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2008년 우수선수 해외 유학 프로그램에 의하여 독일에 유학생 에 선발 되었다 독일로 떠나기 까지 우선 흥민이가 간단 하게 라도 독일말을 할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독일말 하는 사람을 찿아 독일어 과외를 시켜다 물론 살림에 비하면 큰 돈이 지출 되었지만 결코 아까워 하지 않았다 1년의 유학을 마치고 운이 좋아 함부르크와 계약이 성사 되었다 그때 나는 매일 흥민이 에게 전화를 걸어 " 네가 거기서 살아 남으려면 나태 하거나 게으르거나 남하고 똑같이 해서는 생존 할수 없다 남 잘때 같이 자고, 남 먹을때 같이 먹고 남 놀때 같이 놀면 남을 앞서 갈수 없다 " 는 말을 했다 흥민 이도 " 독일 에서 잘못 될 까봐 두려웠어, 그래서 힘든것도 끝까지 참고 견뎠어 " 라고 말했다 열 일곱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흥민이가 대견 하다고 생각했다 흥민이가 함부르크와 계약 하고 지낼때 나역시 비자 없는 90일 체류 여권으로 독일로 건너가 흥미의 숙소 옆에 싸구려 숙소를 얻어 배고픈 생활을 하면서 흥민이가 필요로 하는 일들을 도왔다 그런 세월이 3년 이었다 흥민 이의 훈련 모습을 보기 위하여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았다 훈련이 끝나는대로 흥민이 숙소를 청소 하고 내 숙소로 돌아와 허기진 배를 빵 조각으로 달랬다 그리고 냉기뿐인 침대에 누워 머리 에서 발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을 잤다 그래도 행복했다 나도 그랬고 흥민이도 많은 소유는 짐이 된다고 생각하여 필수적인 물건만 소유 하였다 당연한 일은 없다 노력한 만큼 돌아오고 투자한 만큼 주어진다는 사실이 있을뿐 이다 이 세상에 재능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재능을 본인과 주변에서 잘 키워야 꽃이 필수 있다 아무리 우수한 선수라도 자만심이 생기면 빛을 잃어간다 한참 잘하고 있을때 초심을 잃지 않고 성실히 유지 하기 위해서는 끊임 없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생의 삶은 공사중 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뿐 일이 오고 가혹 하게 힘든 일도 올수 있다 2010 - 2011 시즌 을 준비하기 위하여 치루어지는 첼시와의 친선 경기에서 흥민이는 후반전에 교체 투입 되어 결승골을 넣어 기뻐 하였으나 발가락 부상을 입었다 희망이 사라지는가 싶어 본인도 나도 잠시 침울 했지만 수술을 마치고 3개월 만에 분데스 리가 정식 데뷰 게임에서 경기 시작 23분 만에 흥민 이의 데뷰골이 터졌다 이 골은 함부르크 구단 역사상 최연소 득점 기록을 39년만에 갈아 치웠다 열여덟 한국의 소년이 함부르크의 미래 이자 기대주가 된것이다 주위는 물론 흥민 이도 들뜬 흥분감추지 못했지만 나는 애써 흥민이 에게 말했다 ' 성공 했다고 생각하면 불행이 따른다 아직 갈길이 멀다 , 하고 생각 해야 오래 간다 ' 흥민이도 이해 하여 주었다 국가 대표로 선발 되어 귀국 했다 하지만 밴치만 지키는 후보 선수가 됬는데도 식사량은 경기를 뛴 선수처럼 하다 보니 체중이 불기 시작 했다 이로 인해 몸 동작이 예전 처럼 기민 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로 부터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를 극복 하기 위하여 별도의 특별 훈련으로 체중을 조절 하여 원래의 기량을 되찿을수 있었다 그 특별 훈련은 흥민이도 나도 극히 힘든 훈련 이었다 나는 흥민 이 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강조 한다 특히 외국에서 받는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당당 해야 한다 무엇이 차별 된다는 것인가 ? 옳은 일에는 깨지고 얻어 맞아도 자기 주장을 할수 있어야 한다 남의 비난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남의 말은 사흘을 못간다 했다 배짱과 자신감 그리고 감사와 겸손 을 흥민이 에게 강조 한다 성공 보다 중요 하게 생각 해야 할것은 성장 이다 오늘 이겼다고 내일 또 이기란 법은 없기 때문에 승리의 기쁨 보다는 다음 게임을 준비 해야 한다 흥민이도 세계적 선수가 됬다는 데에는 토를 달지 않지만 아직도 성장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첫째 흥윤 이를 흥민과 비교 하여 물어 본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두 아이 모두 성실하고 자랑 스러운 아들들 이다 사람 마다 개성이 다르고 살아 가는 방식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데 어떻게 둘을 비교 할수 있겠는가 ? "' 두 형제간에 머리를 비교 하면 둘 다 망하지만 두 아이가 지닌 개성을 비교 하면 둘다 성공한다 " 는 말이 있다 굳이 개성을 말하자면 첫째는 모든 일에 진지 하여 부담감을 많이 받는 반면 두째는 여유 롭게 줄기는 성향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지만 소유물은 아니듯, 부모는 자식의 삶을 도와 줄수는 있지만 간섭 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옳고 그름은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따라서 나는 두 아이들 에게 말한다 ' 너희들 에게 필요가 없어 지면 나는 나으 삶이 따로 있다 너희도 부모에게 부담을 가져서는 안된다 ' 그래서 가끔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이 쓴 시를 떠 올린다 " 나무는 정면이 없다 바라보는 쪽이 정면 이다 나무는 경계가 없다 모든게 넘나든다 나무는 볼때 마다 완성 되어 있고 볼때 마다 다르다 " 나는 아이들이 그 나무라 생각한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