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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3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김소리 목사
마가복음 8:27-33
성공과 영광, 실패와 수치
부활주일 후 둘째 주일이 됐습니다. 2주 전 우리는 부활주일을 맞아, <우리 의식의 부활>이라는 설교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초대를 받았습니다. 부활이란 죽은 사람이 깨어나는 것이니, 우리 안에 죽은 신앙(죽은 의식)이 무엇인지 깨우치며 깨어나는 삶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죽음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진정한 부활이며 부활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라며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상황에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죽어있는 의식(잠든 의식)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깨우기 위해 말이지요. 그리고 그 노력 중에 하나는, 분명 주님께 간구하는 일일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눈이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뜨인 것처럼, 내 눈과 의식 역시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뜨이기를 간절히 원하며 말이지요. 이런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에게 함몰되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깨우쳐달라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는 아무 소용없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 보거나 보지 못하는 것에서,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에서 나를 깨우쳐달라는(건져달라는) 간구는, 나는 오류에 빠지거나 오류를 범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그저 공염불과 같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 우리의 죽어있고 잠들어있는 의식이 깨어나길 원합니다. 자비를 베푸시고 도와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완벽하지 않음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며, 그러니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며 그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겸허히 따르겠다는 우리의 염원을 담은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식의 부활>은 ‘겸손’과 동반 될 때에야 가능합니다. 그 겸손은 막연한 것이 아닌,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것을 내려놓는 겸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의식의 부활>은 내가 옳다는 ‘자기 확신’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입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며 엄히 경고하십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고는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후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과 그 고백 이후 가르치기 시작하신 자신이 겪을 고난과 죽음, 이 가르침에 대한 베드로를 대표한 제자들의 반발과 반박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이 모든 부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어 묵상과 설교 본문으로 많이 애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사순절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다루는 대표적인 구절이니 말이지요. 그럼에도 지금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깨어야 하는 의식’과 그에 동반되어야 하는 ‘겸손’이 무엇인지 반면교사로써 숨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우리의 의식’이 무엇이며 그와 붙어 다니는 ‘자기 확신’이 본문에 담겨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메시아십니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 문제없어 보입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들립니다. 기독교 신앙,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시다, 그리스도시라는 신앙이 핵심이며, 이 정신 위에 세워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이 고백은 훌륭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오늘 본문과 거의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있는 마태복음 16:13절 이하가 말해줍니다. 본문과는 달리 마태복음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예수님도 이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네게 이것을 깨닫게 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라며 복이 있다며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인데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며 칭찬하십니다. 그 후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본문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에 가타부타 하시지 않고, 그저 제자들에게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30절에 ‘엄히 경고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ἐπιτιμάω(에피티마오)입니다. ‘비난하다, 질책하다, 꾸짖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가 본문 이전에서 사용된 맥락은 귀신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에게 조용하라며 내쫓으실 때 사용됩니다.(1:25, 3:12)
즉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조용하라며 내쫓으실 때 사용하신 표현을 베드로의 고백 직후 제자들에게 사용한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상당히 어색하고 낯설게 다가옵니다.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는 베드로의 고백 직후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는 것이 말이지요. 게다가 이 표현이 주는 어감은 그저 나무라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께서 귀신들을 내쫓으실 때 꾸짖으시는 어감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마가복음은 왜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실 때 사용하신 꾸짖으셨다는 표현을 동일하게 베드로의 고백 직후 제자들에게 사용한 것일까?라는 궁금증과 의구심이 들게 만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이 틀린 것도 아니고, 귀신과 같은 취급을 받을 정도는 더더욱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ἐπιτιμάω(에피티마오)는 본문에서 2번 더 사용됩니다.(32,33절) 반드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시자, 그것을 들은 베드로가 반대로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고는 꾸짖기 시작합니다.(ἐπιτιμάω)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ἐπιτιμάω)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일에만 마음을 두고 있구나.”
어떤 느낌입니까? 매우 살벌하지 않습니까?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꾸짖는 험악하고 거친 분위기입니다. 그것도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 일을 훼방 놓는 귀신을 꾸짖는 것처럼 말이지요.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것이 아닌 사람의 것에만 관심을 갖는 사탄과도 같다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이런 분위기,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했을까요? 대체 왜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이 스승과 제자 간에 이런 험악한 대결을 가져오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이 이런 극명한 갈등을 일으킬만한 문제인가요?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예수님과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상반되게 이해했습니다. 예수께선 메시아는 반드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식이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31절에 ‘반드시’라고 번역된 헬라어 ‘δει’(데이)가 이를 분명하게 강조하며 밝혀줍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오는데, 많은 경우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와 그 필연성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대표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여기자 이 점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난과 죽음을 가르치는 예수님을 꾸짖었다는 것은 아마 이런 내용일 것입니다. “선생님, 틀리셨습니다! 메시아이신 선생님이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고요? 반드시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요? 대체 왜 그러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착각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당신께서 왜 귀신들이나 생각하고 말할법한 것을 말씀하십니까? 고난과 죽음의 길은 메시아가 걸어야할 길이 아니라 귀신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에 예수님께선 “아니? 네가 틀렸다. 메시아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원하는 것이라는 너의 생각이야말로 사탄의 생각이다. 메시아는 고난과 죽음이 아닌 성공과 영광의 길을 가야한다는 네 생각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일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요.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고백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고백에 담긴 의미, 내용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한쪽은 그리스도라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야한다고 이해했고, 다른 한쪽은 무슨 소리냐며 펄펄 뛰면서 그리스도라면 당연히 성공과 영광의 길을 가야한다고 이해하며 주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이해와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런 해석을 많이 들어서 익숙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 즉 로마를 비롯한 이방나라들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로 오해했다며,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영적인 메시아라는 것 말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와 예수님을 그렇게 이해한 것은 사실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해가 잘못된 것일까요? 순전히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모습 중 많은 부분이 이방나라들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해가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이해는 성서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당시 사회는 종교와 정치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당시 패권국가인 로마제국도 종교를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B.C 29년경 자신의 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디비 율리우스’라고 하고 아시아 속주 중에 에페수스와 니카이아에 이를 모시는 신전을 짓고는 여기에 거주하는 로마인은 이 신에게 의례를 올리라고 명했습니다.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황제 자신에게 신전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여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 신전이 하나둘 세워졌습니다. 또한 B.C 12년경에는 최고 제사장직까지 승계 받아 국가적 제의 전반을 직접 감독·관할했습니다. 이후 이 최고 제사장직은 후임 황제에게 자동승계로 계속 이어지게 됐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이 원하던 수준의 종교적인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곧 그만큼의 정치적인 자유를 얻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인 자유 없이는 종교적인 자유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로, 이 두 부분은 현대의 시각에서 보듯이 쉽게 나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당시 상황에선 영적인 메시아 곧 종교적인 메시아는 상당부분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제한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던 유대인들은 그것이 하루 속히 완전한 자유로 회복되길 바랐고, 그 일을 이루실 메시아를 고대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이루실 메시아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어떤 길일까요?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제대로 맘껏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들의 제약을 끊어버리실 메시아라면 어느 길을 걸으셔야 할까요? 승리와 영광의 길일까요? 고난과 죽음의 길일까요? 이방인들을 이스라엘과 유대에서 내쫓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 메시아일까요? 이방인 통치자의 판결을 통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사람이 메시아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라면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예수님을 꾸짖는 베드로를 마냥 단순한 사람, 즉흥적인 사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도 고집부리는 사람, 오해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한 듯합니다. 솔직히 상식적으로 보면, 성공과 승리, 영광의 길이 그리스도의 길이라고 보이는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나 같아도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맞다고 인정하지 못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훗날 이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옳게 여기셨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이 맞았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가르침이자 삶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말씀으로 읽은 베드로전서는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도 의인이시지만 불의한 자를 위해 죽으셨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었다”며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곤 그 고난으로 초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이 베드로전서가 실제 베드로가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후세에 그 이름을 빌려다 쓴 것인지는 분분합니다만, 베드로의 이름으로 기록됐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본문과 비교해서 읽으면, 입장이 전향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향적인 변화의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고 그로 인해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이 승리와 성공,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던 내 생각을 일깨워줬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이지요. ‘고난과 죽음, 실패와 수치의 길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겠구나, 아니 그 길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생전에 걸으신 길이니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성공과 승리를 향한 집착으로 내 의식이 죽어있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깨우쳐주시는구나. 이 땅에서 누릴 성공과 승리, 영광에 내 의식이 빠져 잠들어있어 섬김의 길을 가야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패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구나. 그래서 그 가르침을 따르지 못했고, 결국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하는 일까지 하게 됐구나. 고난과 죽음을 여전히 실패와 부끄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면, 난 또다시 주님이 걸으신 길을 부인하는 것이구나. 하나님께선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해 이것들을 깨우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시는구나.’
승리와 성공과 영광에 매몰되어 죽어있던 베드로의 의식이 주님의 부활하심을 만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깨우치게 된 것처럼, 우리의 죽어있는 의식 역시 생명의 주님을 통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고 깨닫게 되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