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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아래 초간정사중수기 번역문과 자료를 예천 초간종파 도유사 권경섭님으로부터 받았다.중수기를 쓴 남야 박손경 선생은 영남3로중 한분이신데 나의 족조(族祖)이시다.
남야선생을 방문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고향인 예천에 내려와서 안동과 의성,봉화와 영주,영양과 청송,문경과 상주,성주와 경주 등을 방문하며 영남학 역사공부를 한 것이 만6년인데,내 또래 다른 분들보다 조금 더 배웠다고 혼자서 자만했었는데 모르고 있었으니 기가 막힌다. 그래서 배움은 끝이 없고 죽을 때까지 해야한다는 것을 절실히 께달았다. 맨아래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문을 자료로서 같이 올린다.
◐참고자료1:남야 박손경 선생의 학통(병파:서애 류성룡 선생을 병산서원에 모신다고 해서) :
퇴계 이황-서애 류성룡- 우복 정경세- 수암 류진-졸재 류원지-무첨 정도응-남야 박손경-입재 정종로-강고 류심춘-계당 류주목(상주,류성룡의 9세손)-방산 허훈(왕산 허위 의병장의 장형) -응와 이원조-한주 이진상-면암 곽종석(예천의병장 나암 박주대의 묘갈명을 씀,파리장서를 씀) ,대계 이승희(한주의 아들)-심산 김창숙(파리장서운동, 상해임정활동,광복후 성균관을 재건하고 초대 성균관대 총장.예천 미산고택 방문하여 상해임정 군자금을 구함)
◐참고자료2(한강 정구 학통):퇴계에서 다산 정약용까지
퇴계-정구(퇴계와 남명의 두분께 배움)- 장현광-장경우-장응일-장벽-장대림,장대열-장주-장복추-장석영,장지연
-허목(숙종 때 남인의 영수)-이하진-성호 이익 右派 안정복-황덕길-허전-허훈(13도 창의진 군사장이며 서대문형무소 순국 1호인 왕산 허위의 장형),허유-장지연(황성신문 주필,시일야방성대곡)
안정복-신경준-정상기-최한기-김정호/지리지 편찬 전통/이익-이가환, 이중환
성호 이익 左派-권철신-정약용
◐ 정약용은 이순신의 종사관이었으며 임란초기에 선산 부사로서 대단한 활동을 한 반곡 정경달( 盤谷 丁景達,1542~1602)의 난중일기를 산정하고 남긴 글(題盤谷丁公亂中日記)을 지었다.반곡을 천거(이충무공전서 請以文臣差定從事官狀)하신 분은 이순신 통제사이고 , 발탁한 분은 서애 류성룡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남야 선생을 방문한 것은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정조(正祖)가 남야 선생을 발탁한 이후이다.부친인 예천군수 정재원을 모시고 남야를 방문한 것이 어디 한번 뿐이었을까?다산 혼자서 관사에서 시오리 밖에 안되는 지척거리에 정조가 인정한 학자가 있었다면 몇일을 두고 기숙하던지,수십번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그리고 금당실 마을은 십승지중의 한 곳이다.거기에 초간정사와 초간종택도 있는데 당연히 방문했을 터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예천 호명 선몽대(명승 19호)를 방문하여 부친의 명으로 선조인 관찰사공의 기문을 개판하여 전해오고 있다. http://blog.naver.com/gaetuel/20207533140
◐초간은 보물787호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개인이 집대성한 최초의 백과사전)을 만든 권문해의 호이다.초간정사와 원림 일대는 명승 51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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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정사중수기(草澗精舍重修記)
명나라 만력(萬曆) 임오(壬午)년에 초간(草澗) 권 선생이 공주목사(公州牧使)를 그만 두고 귀향하여, 죽소리(竹所里) 서북의 5리 되는 곳에 이르러, 특이한 곳을 발견하였다. 그 땅은 긴 벌판 넓은 구릉지의 후미진 곳에 있어서, 전체가 빼어나게 저절로 드러나진 않는 곳이나, 유독 남북의 양안(兩岸)이 물을 끼고 있어서 승지(勝地)가 될 만한 조건을 알맞게 갖추게 되었으니, 즉 그 기묘하고 특이함은 우뚝 솟은 바위, 깊숙한 골짜기, 여울소리, 그윽한 못, 이끼 낀 바위, 여라(女蘿)로 덮인 암벽등과 같은 절승(絶勝)의 조건을 본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모든 구비마다 의미 있는 자태를 갖추고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여 선생은 흔연히 이곳을 은퇴 처로 삼을 계획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남쪽 언덕위에 정자(亭子)를 지어 현판을 ‘초간정사(草澗精舍)’라고 했는데, 대개 이곳을 옛날부터 초원(草院)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라고 했다. 선생이 돌아가신 이듬해 임진(壬辰)년에 섬 오랑캐들이 정사를 불태우고 약탈했다.
선생의 아들 죽소공(竹所公)이 천계(天啓) 병인(丙寅)년에 띠집 몇 칸을 지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또다시 불타 버렸다. 이에 폐허되어 수리하지 못하고 몇 세대가 지나가니, 지나던 나무꾼들도 ‘초간정사 옛터’ 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우리 선왕 15년 기미(己未)년에 이르러 선생의 현손(玄孫) 처사(處士) 봉의공(鳳儀公)이 여러 후손들을 불러 모아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여 이르기를, ‘기거하면서 집을 간수하려면 승려(僧侶)의 힘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여 남쪽 언덕 끝 한 곳에다가 먼저 승려의 요사(僚舍)를 세우고, 그 앞의 작은 공간은 정자 자리로 놓아두었다가 해를 넘겨 비로소 정자를 세우게 되었다.
옛날 터와 그 자리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음을 근심하자, 봉의공이 이르기를, ‘전체가 한 구역이니 진실로 좋은 장소를 선정하여 그 자리가 적당한 자리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라고 하여, 비워 두었던 자리의 서쪽 두둑에, 못을 굽어보는 자리에 기둥을 늘여 세워서 정자를 세우기로 하였다. 승료의 동쪽에는 폐허가 된 연못의 흙을 파내고 바위를 깎아서 새로 못을 만들었다. 여타의 손질할 수 없는 동산의 풍경 같은 것도 또한 모두 환연(煥然)히 그 모습을 바꾸게 되었으니, 그 흥폐(興廢)를 굽어보고 올려 보노라면 희비가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아! 남주(南州)가 사대부의 연수(淵藪)가 된지 진실로 오래 되었도다. 좋은 것을 알아내고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이 또한 서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땅이 또한 깊숙하고 멀어 세상과 격리된 지역이 아니라, 모두 짐수레가 다니고 사람의 발걸음이 닿는 곳과 가까운 곳에 남겨 놓아서, 마침 선생이 쉽게 터를 잡을 수 있었다. 이 터에 대한 선생의 훌륭한 덕과 높은 뜻과 암묵적인 약속이 없었다면, 조물주는 결코 수천 년이나 아끼고 비장해 두었던 물건을 내어 보내 주지 않았을 것이니, 이렇게까지 하기에는 조물주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변고를 겪고 세대가 바뀌어 백 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서, 정사(精舍)를 유지할 책임을 누구에게 지워야 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만약 부신(符信)을 가지고 이곳에서 그러한 물증(物證)을 찾아내자면, 옛날 당(唐)의 재상이었던 이 위공(李衛公)의 평천장(平泉莊)에 있었던 나무와 돌이 어떻게 유지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또한 충분하지 않겠는가?
물과 돌이 그대로 있고 옛 모습을 이미 회복 했으니, 무릇 당시의 사시사철 자연을 감상하는 취미와, 명사(名士)들과 교류하는 즐거움과, 조용히 잠겨 책을 읽는 즐거움 등 이 모두가 사무치게 그리워할 만하지만, 유독 선생이 명명한 정자 이름의 의미는 종내 그 은미한 뜻을 참여하여 들을 수 없었으니, 이는 정말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위응물(韋應物)의 시(詩) 간변유초(澗邊幽草) 한수는, 천고를 일깨우는 뛰어남이 있어서, 평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위소주(韋蘇州)의 이 구절은, 실제로 군자가 조정에서 뜻을 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그윽이 홀로 지킴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한다. 선생의 세대는 종조부(從祖父) 수헌(睡軒) 선생이 돌아가신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사화를 거치면서 집이 겨우 평안을 유지하기도 어려웠으니, 즉 이때는 조정의 의론이 어지럽게 찢겨지는 근심이 있어서, 그러한 우려가 여울물이 끝없는 넓은 물이 되듯이 만연되어, 다시 헤진 곳을 깁고 전체를 통할(通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선생은 출세길을 가는 것을 싫어하시고, 자연을 좋아하는 고아(高雅)한 마음 때문에, 망설이고 탄식한 것이 필시 하루 이틀에 그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주저탄식(躕躇歎息)은 궂은 때든 갠 때든 나아가 벼슬하던 때든 물러나 자수(自守)하던 때든 간에 항상 선생이 스스로 헤아린 것이었다. 생각건대 정자가 완성되던 날, 마침 위응물의 시가 곁에서 응하여 묵시적으로 자신의 뜻을 붙일 수 있음을 기뻐하신 것이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그 뜻을 취하여 호(號)로 삼으셨을 것이고, 유독 옛날에 초원(草院)이라 불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선생의 나중의 벼슬 이력을 공평히 살펴본다면, 마침내 몸소 지방 아래 읍으로 멀리 가셔서 공무를 처리하는 중에서도, 하루라도 그 자리에 앉게 되면, 비록 일찍이 홀(笏)을 바로하고 조정의 섬돌위에 서서 공의(公議)를 바로 세우고, 차마 바로 이별하고 떠나지 못하는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셨지만, 그러나 은퇴 처로 떠나려는 처음의 계획을 이루려는 생각과, 영수(潁水)가로 돌아가겠다는 바람은 승정원에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계실 당시에도 넘쳐났으니, 드물게 남아있는 선생의 짧은 시문을 읽어 보더라도 선생이 평소에 마음먹은 뜻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세상 벼슬길에 나서는 군자들은 선생의 정자에 올라가서 그 초간이라는 이름을 감상하고, 이러한 사실을 깊이 성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은 단지 선생의 후손된 자들만 그러할 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 그 뜻이 진실로 은미(隱微)하도다!
처사공의 손자인 응탁(應鐸)씨가 나를 잘못 보고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이 정자(亭子)가 복원되어 기문을 쓸 사람이 많음을 말했으나, 마침내 거절을 못하고 띄엄띄엄 꿰 메어 글을 지었으니, 끝맺는 구절에서나마 감히 나의 성의를 더욱 다하여 선생의 뜻을 천명하는 데 스스로 부칠 따름이다.
현판은 소고(嘯皐) 박선생의 필적인데, 임진년 왜란 때에 타고 남은 재(灰)에서 발견되었으나, 다시 불타게 되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모래자갈 속에서 찾은 것이니, 당시의 흔적은 이것이 유일하다. 뜨거운 불이 두 번이나 녹여도 종내 재난을 당하지 않았으니 기이하도다! 나중에 정자에 놀러 오는 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사실을 함께 적는다.
아(我)임금 즉위2년 무술(戊戌)년 하지(夏至)날에 후학 함양(咸陽) 박손경(朴孫慶)은 삼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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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澗精舍重修記
顯皇帝萬曆壬午。草澗先生權公。解公山符歸。則就竹所西北五里所發異地焉。其地在脩原廣陸之隈。略不以光穎自露。獨以南北兩岸。挾水而遇爲材具。出奇逞異。無不如法。其峭巖,邃壑,鳴瀨,玄潭,苔磯,蘿壁之勝。皆曲有意態。可喜可笑。公欣然爲菟裘計。置亭宇南岸上牓。曰草澗精舍。蓋以其地舊號爲草院。故名云。公歿之踰年壬辰。爲島夷所燔劫。子竹所公以天啓丙寅。結茅屋數架。未幾。又燬於火。仍廢不修且數世矣。而樵客過者猶能說草澗舊墟。至我先王十五年己未。玄孫處士公鳳儀屬諸孫。謀所以重建。謂居守當賴僧道。就南岸盡頭。先置僧寮一區。稍空其前以待亭。越明年。始建亭。病舊址莫直其地。謂均是一區。苟選勝而得其宜。斯可矣。乃於稍空之西畔。俯潭列楹以爲亭。僧寮之東。得廢沼。塹土斲石以新之。他如林園物色之不暇修治者。亦皆煥然改觀。俛仰興廢。可喜而悲也。嗟乎。南州之爲士大夫淵藪固已久矣。人之智竅眼力之所同好。亦不相遠矣。地又非幽遐越絶之域。而擧皆遺之於輪蹄杖屨之側。公乃一朝而獲焉。自非公令德高標默契於玆地者。造物者必不以千百載慳祕之物。擧而餉之。斯已難矣。自公歿以來。經變異。歷人代。積百有餘年。而責成於所不知何人。若持契而索物焉。視衛公之平泉木石。又不已多乎。水石不改。舊觀旣復。凡當日魚鳥四時之趣。名勝往還之樂。圖書涔寂之娛。皆可以慨然想慕。而獨於公名亭之義。終不可以與聞微旨。斯固未易言也。韋應物澗邊幽草一詩。警絶千古。說者謂蘇州此句。實以喩君子不得於朝。而幽獨自守。當公之世。去叔祖睡軒先生未久也。閱歷史禍。家難甫平。而時則若朝議潰裂之憂。從涓至漫。無復彌綸補綴之勢。以公之雅意林泉。倦遊名塗。其所躕躇太息。自講於潦霽行藏之間者。必非一日。竊意公於吾亭適成之日。正喜韋詩爲傍應。可以默寓己志。故遂取以爲號。非獨以舊號爲草而已也。夷考公後來宦跡。終自遠引於下邑朱墨之間。及其一日立乎其位。則雖未嘗不正笏立陛。扶植公議。以盡吾未忍便訣之誠。而其遂初之思。歸之願。溢發於銀臺夙夜之日。觀乎寂寥短篇。而公之素定。亦可知已。後之君子立世路者。登公亭而賞其名。不可以不深省之。非但爲公後者然也。嗚呼微矣。處士公之孫應鐸。謬屬余爲記。余謂斯亭之復而可書者多。遂不辭而點綴爲文。尤敢致意於卒章。以自附於闡公之旨云爾。牓題。卽朴嘯皐先生筆也。出自壬辰煨燼。復入於火。久而得諸沙礫間。當時舊蹟。獨此耳。烈火再鑠。終不能爲災。異哉。幷書之以告亭中來遊者。
上之二年戊戌長至日。後學咸陽朴孫慶謹識。
초간정이 아니라 초간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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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을 모시고 박 징사 손경 의 금곡에 있는 집을 찾아가다[陪家君訪朴徵士 孫慶 金谷幽居]
첫댓글 좋은 글을 잘 봤습니다.남야선생은 서애선생 현손자인 주일재 류후장공의 손서孫壻입니다.
그래서 남야 앞에 주일재선생을 넣기도 합니다. 만력 임오년 1582년,천계 병인년 1626년,
우리 先王(영조)15년 기미년 1739년,수헌 권오복(1467-1498)-무오사화 희생자,
我임금(정조)즉위 2년 무술년 1778, 소고 박승임(1517-1586)-초간 從姑母夫이자 스승,
소고 外祖 예안 金萬鎰, 妻父 醴泉 權五紀(초간 從祖父)
아이고...이한방 교수님께 조언좀 구할려고 전화를 드리니 꺼져있더군요.ㅎ
심승지마을 금당실을 안내하는 어떠한 자료에서도 저는 다산 정약용이 금당실마을이나 남야 박손경 선생을 방문했다는 것을 보지를 못했습니다.ㅎ
저거 진작에 써먹었어야 하는데 용문사에서 상주하는 해설사에게 물어뫘더니 모르고 있더군요.그러니...예천은 좋은 관광자원을 하나 버린 셈이죠.
이제 다시 케태어야합니다.ㅎ
지난 주말 마침 중양절이어서 용문사 대장전에서 윤장대를 서너번 돌렸습니다.
용문사를 등지고 왼쪽 200m에 폐비윤씨(연산군 모후/소헌왕후라고 보통 알려져 있으나 소헌왕후는 순흥에 있음)와
정조 아들로 5살에 죽은 문효세자(정조 이산에서 송연이가 낳은 아들)의 태가 묻혀 있지요.
명봉사에는 세종 큰아들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실이 있고요. 이것도 잘 활용하면 좋은 이야기거리가 되는데...
자료 감사드립니다.ㅎ
정성스런 글 덕분에 잘 봤습니다.
남야 박손경 선생 생가가 저의 외가집이어서 정리가 남다릅니다.
저의 외증조부인 금원 권상표가 작은 맛질 춘우재 둘째아들로 금당실로 분가할 때 처가인 함양박씨집이 남야선생 생가라는 사실을 알고 글 잘하는 후손을 기대하여 시가의 두배를 주고 매입하여 사랑채 뒤의 안채와 곳간채를 신축하여 살았지요.
용문면사무소 오른쪽 뒤의 집으로 청곡당이란 당호를 가진 집으로 집안 사정으로 현재는 다시 원주인인 함양박씨분에게 팔게 되었지요.
예전의 청곡당 문간채
저도 다시가서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ㅎ
자료 고맙습니다.
현재의 청곡당 문간채
청곡당 사랑채
다음에 금당실 가면 찬찬히 살펴 보겠습니다.좋은 자료에 고마운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