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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모나리자
- ‘황진이 두줄시 시화집’ 신드롬, 어디까지 갈 것인가 -
방송의 타이틀 제목으로 내세운 자막은 조금씩 달랐지만, 주요 방송사의 특집을 통해 한 권의 시집이 지은이와 함께 이리 자세히 소개되어지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시집으로서 신드롬을 일으키기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가 있었고,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의 뒤를 이어 김초혜 시인의 <사랑 굿>이 있었으며, 개인이 낸 전체 시집을 통해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류시화 시인이 있기는 하지만, 아침과 밤의 정규 뉴스 시간을 통해 주요 방송사가 뉴스 시간 이후의 특별 순서까지 안내하며 시청자의 눈과 귀를 고정시키기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인터넷 시대가 활짝 열려 있다 보니 다음넷이라던가 네이버 야후 등의 메인 화면 인기 순위에서도, 자리를 차지하던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 사건 등을 가볍게 밀어내고, 연일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황진이의 두줄시 시화집이었다.
그 중 TV 채널을 통한 변화가 눈에 띄었는데, 1980년 대 후반의 밀리언셀러들이 매스컴을 탔을 때는 주요 내용이 어느 만큼의 시집이 팔렸다거나, 그 시집을 쓴 지은이가 어떠어떠한 사연을 가졌다거나, 어느 정도의 인쇄를 벌었다거나 하는 관심을 흥미로 해서 전달하였다면 이번엔, 과거의 시집이 지닌 작품의 질과 이번 두줄시 시화집 속 작품의 질에까지, 신뢰 받는 원로 시인과 평론가를 초대하여 자세히 전달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번 시화집이 불과 2년 만에 무려 7백만 부나 팔려나갔으면서도, 지은이가 인터넷 속의 <황진이>란 닉네임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밝혀진 것이 없어, 방송에서는 특별히 <얼굴 없는 시인>이라는 애칭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사용을 하고 있었다.
“김원로 시인님께서는 등단을 하신 지 60년이나 되셨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회원이 많은 문단의 사무국장님이시면서 명예 이사장님으로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황진이란 분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으신가요?”
여성 앵커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나오지 못한 때문인 지, 답변을 하고 있는 원로시인은 초반부터 긴장된 표정인 반면, 그 옆 자리의 평론가는 그래도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문단에서는 현재 황진이님에 대한 자료가 등록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그렇군요. 여류 시인이시면서 방송 대학교에서 문창과 교수로 계시며 평론가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손 평론가님께서도 나와 계시는데, 과거의 밀리언셀러 시집과 이번 두줄시 시화집에서 다른 점을 찾으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네, 좋은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먼저, 과거 80년대의 시집들이 밀리언셀러가 된 배경을 살펴보게 되면, 이미 그 이전부터 우리 역사의 회오리로서 육영수 여사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이어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 등이 있었고, 날조된 역사로서의 군사정부 탄생으로 가는 동안의 대학가를 비롯한 전국 데모 등이 핫 이슈를 이루며, 당시로서는 신문, 잡지, 방송이라는 세 가지가 국민들이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전부인 상태에서, 붓을 들고 있던 문인들 역시도 작품을 통한 거센 반발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의 홀로서기라던가 접시꽃 당신, 사랑 굿 등의 시집은 예외의 흐름을 지녔으면서도, 당시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언론 매체에 소개가 됨으로서 광고의 덕을 운명적으로 봤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시집에 수록된 작품에 의해서 독자에게 어필 했다고 하는 부분보다는, 눈과 귀를 대신 할 수밖에 없는 각종 언론에 광고가 되면서 상업적 성과를 눈부시게 얻었다고 하시는 말씀으로도 들리는데, 두 분 다 시인이시기도 한 입장에서 그리 동감을 하시는지요.”
앵커의 말에 두 사람은 대답을 피하고 웃음으로 대신했다. 원로 시인의 경우는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카메라가 자신을 클로즈업 한다 싶으면 급히 웃음을 만들어 내곤 했다. 그러다가는 앵커의 눈이 원로 시인에게로 다시 향했고, 카메라 앵글이 자신에게 맞춰지자 원로시인은 입을 열었다.
“왜 이런 게 있지요?”
“...... . ”
“사람은 그 날 그 날을 살면서 하다못해 꿈속에서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작은 울타리인 집을 나와 사회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와 상대가 되어야 하고, 말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그 공동의 울타리에서 속된 말로 왕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또한, 말을 주고받으려면 거기에는 대단한 이슈에서부터 ‘밥은 먹었니? 어제는 잘 들어갔니?’ 등과 같이 아주 작고 사소한 이슈까지도 알게 모르게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정치라던가 연예계라던가 드라마라던가, 평소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자식이 어느 날 식사 시간에, 시에 관한 얘기를 불쑥 하더란 것입니다.
당연히 부모는 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요. 상상해 보면, 부모와 자식 간의 보이지 않는 벽이 쌓이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앵커님께선 부모로서 어찌 하시겠습니까.”
앵커의 입장이 서로 바뀌고 있었다.
손 평론가는 카메라를 피해가며 입을 손으로 막고서 웃고 있었다.
생방송이니만큼 여자 앵커가 방송용으로 대답을 하기 위해 생각을 꾸밀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 짧은 순간의 흐름이 손 평론가에게는 즐거움이었다. 그래 자세를 고쳐 잡고 여자 앵커의 입술을 바라보며,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까를 기다렸다.
“저 같으면 그 날 당장 서점 앞으로 갈 것 같은데요. 그런 뒤, 식사 시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그런 시집이 어디 있나 찾아보고, 아예 구입을 해가지고 와 모든 시를 감상한 뒤에 기회를 만들어, 자녀와의 시에 대한 얘기를 할 것 같습니다.”
망설임 없이 바로 나온 대답이었다.
들리지 않는 질문이 앵커의 눈빛을 통해 원로 시인과 평론가에게로 자연스럽게 돌려지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원로 시인이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 이상 모이는 모든 곳에서 왕따가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시간 속에서의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본래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이 어느 동물보다도 특별하게, 초인적으로 강하지 않습니까? 사는 동안 시 한 줄 책을 통해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살기 위한 본능에 의해 난생 처음이지만 그 시집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따라서 밀리언셀러가 된 시집의 작품 즉 내용이 판매 부수와 함께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황진이님의 이번 두줄시 시화집이 단행본 시집으로서는 우리 문학사 사상 최초로 기록되며 무려 7백만 부나 팔렸는데, 현재로 돌아 와 이번 시화집에 초점을 둬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화면에 시화집이 클로즈업 되고 있는데, 앞면 표지의 모습과 <두줄시 시화집>이라는 제목이 보이고, 지은이의 닉네임인 <황진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집의 표지에는 <지은이 누구>, <000시인>,<시인 누구> 또는 <000 시집>이라며 본명을 사용하지 않나요? 한데, <황진이>라고 하게 되면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세월 적 거리도 있고, 독자들이 본명으로 착각을 할 수도 있고, 여류 시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손 평론가님께서 말씀 좀 해주시지요.”
“요즘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일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문단 테두리 안에서의 활동만을 정도라고 고집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오히려, 인터넷 등을 통해 작품과 독자를 바로바로 연결시키는 일종의 모험을 하고 있는 시인들이 더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때 본명을 필명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닉네임이라 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필명으로 겸해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고등어>라던가,<이사도라>또는 <허수아비>라던가 하는 이름이 낯설기도 하고 진지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형 서점가를 통해 나오고 있는 시집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필명이자 닉네임입니다.”
“네, 그렇군요. 이번엔 표지 첫 장을 넘겨보겠습니다. 한 페이지 폭의 절반 정도로 해서 접혀 있는 부분입니다. 보통은, 시인의 사진이 작게 인쇄되어 있고, 프로필 또는 약력으로 기록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요. 두줄시 시화집에서는 텅 비어 있습니다. 지은이에 대해 독자가 알 권리를 전혀 주지 않았다 싶은데 원로 시인님께선 어떻게 보시는가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가만 보면 한 달 한 달만 해도 얼마나 되는 시집이 출판시장을 통해 나오고 있는지 손가락으로는 다 세기가 많이 불편한 요즘입니다. 한데 사진이야 당연히 싣는 것이고 소위 프로필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시인의 문학 활동과 관련된 것보다도 학력과 직업에 관한 것, 그리고 무슨 문학단체의 국장, 이사 등의 자리를 마치 특필이라도 해 놓은 듯 열거들을 하니 말입니다. 이번 두줄시 시화집 같은 경우도 문제지만, 어느 쪽 할 것 없이 씁쓸한 부분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록될 것으로 필요하다면, 지은이는 어디에서 언제 태어났으며, 본명과 필명은 어떻게 되며, 언제부터 어떠한 경로를 통해 시를 발표하게 되었고, 현재에는 어떠한 활동을 문학적으로 하고 있는가를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이 바른 자세의 프로필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학력이나 직업에 관해선 꼭 필요하다면 훗날의 사람들이 지은이 연보를 통해 자세히 기록을 해 줄 것이고, 현재에는 꼭 알리고 싶은 출신학교와 직업 정도를 추가해서 기록해 두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싶습니다.”
원로 시인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손 평론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앵커는 앞면 표지에 이어 연속 두 장으로 된 컬러의 공 페이지를 넘기며 물었다.
“이렇게 좋은 재질의 종이를 무려 4 페이지씩이나 빈 공간으로 남긴다는 것은 낭비가 아닌가요? 표지의 앞과 뒤쪽을 합하면 8페이지나 되는데 말예요. 아니면, 시집이 대체적으로 얇다 보니 두께를 주고자 하는 역할인가요. 제 생각엔 프로필을 이 중 한 곳에 정리를 하면 어떨까도 싶은데요. 그리고 시집이 사용된 종이의 재질 등이며 상당히 고급스러운데 이럴 경우 출판사 측의 이문 등에서도 차이가 나지 않을까요?”
앵커의 말에 원로 시인이 다시 답변을 했다.
“그러한 시집을 손에 든 독자들 중 상당수가 한 번쯤은 궁금해 했을 내용입니다. 하나, 사진과 프로필이 새겨졌던 앞표지 안쪽의 접힌 면도 그냥 멋으로 접어놓은 것이 아니지요. 지금 말씀하신 두 장의 공 페이지도 아무런 의미 없이 낭비를 할 리야 있겠습니까.”
이 말에 앵커를 비롯한 세 사람의 입에서 웃음이 나왔고, 원로시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고리의 소매통이 넓게 곡선을 이룬 한복을 구정이나 특별한 날에 앵커님께서도 입어보셨을 겁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서찰 등을 곡선 진 소매통에 넣고 다니기도 했고, 점잖은 체면에 드러내놓고는 볼 수 없었던 여인네의 그림 등을 넣고 다니기도 했던 역할을 했었지 않습니까?”
얘기를 듣고 있던 앵커는 시집과 연관해서 원로 시인이 꺼낸 한복 저고리의 소매에 대한 비교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어지는 말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이야 물려받은 재산가인 시인도 있고, 상업적인 성공을 통해 부를 누리고 있는 시인들도 있는가 하면, 현재에 지니고 있는 물질의 힘을 바탕으로 해서 작품과 관계없이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모두가 시대의 흐름이 낳은 변화지요.
그러나 초창기의 시인들은 말 그대로 시를 좋아했고, 시를 쓰며 낙을 찾았으며, 자신의 시 한 편이 민중과 대화를 했을 때 가장 큰 영광과 명예와 행복과 지적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지녔을 뿐, 거의가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에겐 비현실적인 낙오자들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가난과 절망 등 아픔과 상처 속에서 그들은 운명처럼 시를 사랑했고, 같은 처지끼리 모였다고 할 수가 있겠지요.
가진 것이라곤 시 밖에 없으니 모여 봐야 한 그릇 막걸리와 서로의 작품에 대한 감상평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 말고 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 문객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작품 하나하나는 시대를 거쳐 오면서 사람들에게 뜨거운 눈물이었고, 또 한 시대에서는 총칼도 두려워 않고 저항할 수 있는 민중의 힘과 단결이 되어 주었고, 신세기의 물질적 풍요로 가는 변화 속에서는, 다 소화 할 수도 없는 풍요 속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사람으로서는 텅 빈 마음속이라는 나머지 반쪽의 보이지도 않는 창고를 마저 채워 주는 1등 공신이기도 했습니다. 정작 본인들은 언제나 반쪽의 행복일 수밖에 없었지만요.
그러다 보니 그들과 가까이서 지내는 후배 문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안타까운 사연들 역시 많았을 것입니다. 일테면, 너무도 가난한 선배 문인이나 동료 문인의 자존심 등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서도,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한 장 편지로 쓰고, 조금의 용돈이나 생활비라도 자신의 시집 접힌 면에 넣어 전달을 하기도 했었던 사랑의 모습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계좌번호만 있으면 다 되는 요즘에서야 어떨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앵커님께서 말씀하신 두 장의 고급스런 컬러의 공 페이지는 동양화에서 주는 여백에서의 무한한 환상적 사고 의미와, 불교에서의 공.무(空.無)의 사상적 의미와도 연관을 시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도 싶습니다.
한 가지 더 덧붙여, 시집의 앞과 뒤쪽에 각각 4페이지 즉 두 장씩의 공 페이지가 있는데, 앞이나 뒤 중에서 공 페이지로 있는 첫 장을 넘긴 두 번째 장에다 일반적으로 시인의 친필을 간단히 남겨 지인에게 전달되어지곤 하지요.
끝부분에 말씀하신 출판사의 이익이 줄어들지 않겠느냐 하시는 말씀은, 물론 분위기를 좀 더 부드럽게 풀어주시기 위해 일부러 추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 이해가 됩니다만 그렇습니다. 시집에 사용하는 종이에도 질적으로 여러 등급이 있습니다. 초판으로 보통 1천부라던가, 2천부를 찍어냈다 했을 때는 그 차이가 불과 십만 단위의 액수겠지만 재판을 거듭하며 수 만부, 수 십 만부를 넘어서게 되면 종이의 사용에 있어서만도 엄청난 차이가 나지요. 이 때 출판사에서는 편법을 동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테면 중국에다 하청을 주는 것이지요. 비양심적이고 욕심에 끝이 없는 출판업자라면 아마 그것도 모자라 하 등급의 인쇄지를 사용할 것입니다.
비단 시집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우리가 어떤 책을 소장하고 싶어 아무런 상식도 없이 구입을 했더니 일 년도 안 되어 누렇게 색이 변해지고, 수년도 지나지 않아 하야스름한 아주 작은 벌레들이 책 속에서 가물가물 기어 다니는 그런 책 말이지요. 내용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하다못해 인쇄지의 질에 있어서도 독자들은 잘 모르는 사이 이리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 하나만 보더라도 이번 시화집은 초판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두고도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아주 모범적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오늘에야 처음 알게 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이번 방송을 준비하며 특별한 경로를 통해 지은이신 <황진이> 시인님으로부터 친필 사인을 받아 왔는데요, 보시는 것처럼 제 이름을 넣어 <정보배 선생님 혜존(惠存)>이라 쓴 뒤, 제게 보내는 날짜와 그 아래로 <황진이 배상(拜上)>이라 되어 있는데, 제가 평소에 알고 있는 사인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인은 보통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요.”
“최상의 사인이라 생각을 합니다. 저도 이 곳 저 곳 출판 행사 등에 초대를 받아 다니다 보면, 직접 받는 시집 외에도 우편을 통한 것까지 한 달이면 대략 대여섯 권 정도를 받게 되는데, 각양각색입니다. <홍갑동님께로 시작해서 홍갑순 드림. 자신의 알파벳 사인을 갈겨 쓴 것으로부터 아예 엽서 한 장 속의 내용을 적어 놓은 것, 어디서 들었는지 <홍갑돌 선생님 청람(淸覽)>그리고 끝에는 <홍갑순 올림. 드림.> 등등 말이지요. 그러나 시인에게 전달이 될 때에는 사실상 <홍갑돌 시인님 혜존> 또는 <홍갑돌 선생님 혜존> 그리고 아래에는 <홍갑녀 배상> 정도의 사인이 상대에게 가장 예우가 되는 사인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외의 <님께>라던가 <드림>이라던가 하는 사인은 자신의 시집을 전달하고도 큰 실례를 범한 것이지요.
어찌 보면 제게 보수적이고 답답하다 할지도 모르나, 가장 좋은 모습으로 물려받을 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그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혹시, 한글을 사랑하시는 분들께서도 딴지를 거실 지 모르나 참고로 청람이라는 것은, 시집을 받는 사람이 자신보다 분명하게 아래 사람이거나 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淸 맑을 청자와 覽 볼 람 자를 사용하는데, 상대에게 자신의 책을 잘 받아서 읽어 달라는 의미로서의 경칭이 되겠고, 혜존에 있어서는 惠 은혜 혜자와 存 있을 존자를 사용하게 되는데, 혜감(惠鑑). 혜람(惠覽) 등을 사용할 수가 있고, 자신의 저서를 전달하니 잘 받아서 간직해 주십사 하는 의미로서 시집을 받는 사람의 이름 아래에 쓰면 되며, 받는 사람을 가장 예우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 그랬었군요. 이번에는 몇 장을 더 넘겨볼까요?”
“...... .”
“여기 사진 인쇄 아래로 상하의 최대 여백을 보이며 두줄시 한 편이 수록되어 있네요. 그리고 매 편마다 두줄시 한편씩과 사진을 수록해 놓았고요.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과거의 시집에 사용했던 인쇄의 글자 크기보다도 눈에 띄게 글자가 커졌다 싶은데요, 손 평론가님께선 기존의 시집 구성에 비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네, 보통은 시에 그림 또는 사진이 따르게 되면 그 시가 속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 등이 흩어지게도 되고, 품위가 오히려 떨어질 수도 있다 하여 시집 하면, 제목과 함께 본문의 내용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마 99퍼센트 아닌가 싶습니다.
글자의 크기 역시 대다수 시집에서 아직까지도 10포인트 평균의 인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두줄시 시화집에서는 그러한 염려를 충분히 깨며 독자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준다 싶습니다.
사실 단 두 줄의 행으로 구성이 된 두 줄 시만을 페이지 하나에 싣게 되면 아무리 속뜻을 감상해 내며 시집 한 권을 읽는다 해도, 한 시간씩 몇 차례 읽고 나면 허전한 느낌 등이 오지 않겠습니까.
이때의 충분한 여백을 두면서도 사진이나 그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품격을 더해 줄 수가 있겠지요.
본질과는 애기가 잠깐 흩어지나 모르겠습니다만, 현대에 와서 시집에서의 글자 크기를 변화시킨 사람은 도서출판 <문학공원>을 통해 <미완성 대동여지도> 처녀 시집을 상재했던 <장문> 시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시집을 읽으며 반백년 이상을 10포인트 크기의 글자에만 우리의 눈이 적응을 해왔고 내 것처럼 익숙해져 있는데, 갑자기 한 포인트나 확대 시켜 11 포인트라니요. 어찌 보면 아무나 시도 할 수 없는 일종의 반란이기도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당시에 문학공원의 김순진 대표와 절친한 문우였던 장문 시인이 자신의 원고를 맡기면서 그랬답니다.
‘우리나라 시집에 인쇄되는 글자의 크기를 이젠 변화시켜야 한다. 현대에 이르러 너도 나도 시력들이 좋지를 않고, 어쩌다 책을 보는 사람들은 작은 글자 앞에서 눈살부터 찌푸리기 일쑤 인데, 고정의식을 깨야 한다. 그러니 미완성 대동여지도에서는 글자를 기존의 것보다 1포인트 더 키워라’고요.
사실 갑자기 커진 글자의 크기로 인해 시집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처음엔 다 들지요.
그러나 그 1 포인트를 키운 글자가 황진이님의 두 줄 시화집에서는 천생연분처럼 그리 잘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여러 면을 놓고 보더라도 이번 시집에서 그 성공 사례를 찾을 수가 있다 하겠습니다.”
상당히 진지한 진행에 이어 이번에는 시화집 속에서의 몇 편씩을 골라 앵커가 먼저 낭송을 했다. 뒤이어 원로 시인과 평론가의 낭송이 이어졌다. 화면에서는 별도로 준비가 된 영상과 음악이 함께 흐르며 현재 낭송되고 있는 두 줄 시가 자막으로 새겨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십 여 편 정도의 낭송이 있었고, 앵커의 질문은 낭송한 작품에 대한 의미 해석과 기존의 시와 비교한 작품성 등에 대해 이어졌다. 지금은 기존의 거대 문단에서 바라보고 있는 두줄시에 대한 시각에 대해 손 평론가의 얘기가 이어가는 중이었다.
“솔직히 기존의 문단에서 바라보는 두줄시 협회라고 할까요? 문단의 이단아로 보는 경향입니다.
우선은 두 줄 시의 등장을 들 수가 있겠는데, 현재까지 공주사대의 교수로 있으며 다음넷의 블러그에서 <미려난 늘그니>라는 집을 짓고, 칼럼과 함께 두 줄 시에 흠뻑 빠져 계시는 이달우 교수님의 글을 인용하자면, 나름대로 기원을 찾기를, 고려 말의 金黃元(김황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김황원이 관련된 일화중 하나로, 평양의 대동강 변 부벽루에 올라가, 거기에 걸려 있는 현판에 당대의 거목이었던 시인묵객들이 평양 산천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를 보고, 신통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다 태워버린 뒤 자기들이 멋진 시를 짓기로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종일토록 부벽루의 난간에 기대어 괴롭게 시상을 떠올리고자 애를 썼으나, 부벽루에서 보는 아름다운 경치를 도저히 글로 옮길 수가 없었고, 해질 무렵에야 겨우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장성일면용용수 대야동두점점산" 이라는 두 구절을 생각해 냈을 뿐, 끝내 시를 완성하지 못하였답니다.
김황원은 부벽루 기둥을 붙잡은 채 마냥 통곡을 하다가 그냥 내려왔다고 하는데, 그 때의 미완성인 長城一面溶溶水(장성일면용용수). 大野東頭點點山(대야동두점점산). /긴 성벽 한견으로 넘실넘실 흐르는 강물 / 넓은 들 동녘 끝으로 아스라한 산, 산이여 / 라는 두 구절이 결과적으로 본래 의도와는 관계없이 형태상으로 보아 두 줄 시를 짓고 만 셈이 되었다는 것인데, 근이재 이달우 교수는, 정확하게 두 줄 시의 기원을 어디에다 대야 할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모른다 하면서도, 형태상으로나 유명세로 보았을 때, 김황원의 부벽루 시를 두 줄 시의 원조 격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의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김황원이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요(遼)의 사신을 맞는 자리에서 鳳銜綸?從天降(봉함륜발종천강). 鼈駕蓬萊渡海來(별가봉래도해래) / 봉황은 조서를 입에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 자라는 봉래산을 지고 바다를 건너왔다 / 라고 하는 시를 지었는데, 요나라 사신이 그 솜씨에 크게 감동하여 전편을 베껴서 자기 나라로 가지고 갔다고도 합니다.
그러가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양장시조 선구자로 알려진 최남선 시인에게서 <북극信> <송년> <교통데이> 등의 두 줄로 된 양장 시조가 동아일보의 1931년 5월 13일자에 실렸으며, 뒤를 이어 노산 이은상 시인의 /소식이 끊이오매 안부를 알 길 없어 / 저 달로 점치는 줄은 님도 아마 모르시리 / 라는 본문의 달 둘째 수라던가, <소경되어지이다>라는 양장시조에서는 / 뵈오려 못뵈는님 눈감으니 보이시네 /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되어 지이다 / 라는 절창을 했고
윤금초 시인은 <어느 날의 풍물지>라는 양장시조에서 / 보리 뜨물 빛깔로 트여오는 동쪽하늘 / 바람이 샛강 물결을 찰랑찰랑 조리질 한다 / 는 절창을
김혜선 시인의 <반다지>라는 양장 시조의 첫째와 둘째 수에서는 / 섬진강 놀러온 돌 은빛 비늘 반짝이고 / 드레스 입은 물고기 시리도록 푸르다 / 작은 것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시는 / 아버지 기쁜 옛 얘기 차곡차곡 접어둔 곳 / 이라는 절창을 들을 수가 있으며
우순조 시인의 <어머니> 둘째 수에서는 / 하교길 마중 나와 웃음 심던 눈매 가엔 / 세월이 쟁기질하여 고랑 지어 놓았네 / 라는 절창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습니다.
그런 외에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계간 시조 세계>만 통해서 보더라도, 조순애 시인은 <오늘은>이라는 양장 시조 속에 / 사금파리 소꿉동무 꿈속에 만나보니 / 일부러 토라진 척 흘긴 눈도 이뻐라 / 와 같은 수작을 포함 매회 12편씩의 작품을 벌써 48회째나 연재를 하고 있으니, 그 수가 576 편에 이르고 있습니다. 형식은 양장시조지만, 역시 두 줄로 쓴 시임에는 틀림이 없고 보면, 현재의 두줄시 협회라는 곳이 한 문단의 형태로 존재를 해야 하는 의미가 과연 있는가 하는 문제지요.”
정확한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한 손 평론가의 말이 끝나자 곁에서 듣고 있던 원로 시인 역시 깊은 공감의 마음을 나타냈다.
“이번엔 원로 시인님께서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 .”
“그렇다면 반대로, 두줄시 협회가 계속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가고, 기존의 자유시라던가, 우리의 시조와 양장시조와 경쟁이 되며 국민 시로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면 어떤 점을 들 수가 있을까요?”
“제가 예언가도 아니고,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십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린다면, 첫째는 양장시조와 같은 형식에서의 탈피를 들 수가 있겠습니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문을 활짝 열었다고나 할까요. 그 열린 문으로 남녀노소가 다 자유롭게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들어 올 수 있는 것이지요. 전문 지식이나 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두 줄이라는 시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탄생의 배경인데, 2001년 3월 2일에 정중수. 주정연. 최병두 시인 등이 당시, 정영일 시인의 따님 결혼식에 참석을 했다가, 장대비를 피해 서울의 어느 다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시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2행시에 대한 상호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 이미 조희범. 정중수 시인이 먼저 2행시에 대한 논의를 한 바 있어서 이날엔 아마도 구체적이고 진지한 2행시의 반란을 준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고중영 시인 등이 동인으로 결집되며 인터넷의 카페를 통해 2행시 게시판을 만들어 발표를 시작했고, 불과 열흘 만에 한국 2행 시인협회를 창립한 것만 보아도 당시 구성요원들의 확신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엄연히 기존의 넘기 불가능 하다 할 문단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2행시 이전에 자신들이 활동했던 시인이란 이름에서, 사이비로 낙인이 찍히며 모든 게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요. 그럼에도 이들에겐 확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분들이 대부분 초.중.고 등에서 현역으로 교편을 잡고 있거나, 학교를 총괄하고 있는 교장 등의 위치에 있음으로 해서, 설령 2행시에 대한 존재를 전혀 모른다 해도, 기본적으로 시에 대한 감상을 상당히 했을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엘리트들을 제 일선에 포섭하기가 상당히 용이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 뒤로는 피라미드 식 포섭도 가능했을 것이고요.
어쨌든 2행시 협회는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됩니다. 창립 일 년도 안 되어 동년 12월엔 두 줄 시집 창간호가 발간되었으니까요. 대단한 일입니다. 매년 1회씩의 두 줄 시집 발간이 한 차례도 쉰 적이 없습니다.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19집이 발간되었다 하니 그동안 수록된 두 줄 시 작품만 해도 매 회 250편 기준으로 할 때 약 2800여 편이 되었을 것이며, 수록되지는 않았어도 모두가 참여하는 발표의 공간인 카페의 작품 수까지 말하자면 수 만 편이 발표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간접적으로 저변의 확대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다고 그 배경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기존의 문단 시에 뒤지지 않는 두 줄 시로서의 수작을 생산하고 있는 두 줄 시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희범. 봄춘, 주정연. 고중영. 김정수. 문경. 김계숙. 에듀피아. 박애월라. 윤슬. 김은희. 모나리자. 김병조. 서주영. 최병두. 김동하. 정여경. 김엄조. 강승도. 전효숙. 정선영. 박찬미. 최홍걸. 정중수. 이달우 시인 등과, 학생부의 성양현과 미래부의 푸른하늘을 비롯 일반부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미래 꿈나무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견고한 기초 성을 것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추가해서 말씀 드린다면, 모 방송국에 있는 이원표 시인의 합류인데, 발표된 두 줄 시를 중심으로 해서 <두줄시 동요>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만들어 보급해오고 있다는 것이, 자동차로 말하자면 장거리를 가는 데 있어 부족할 수도 있는 기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황진이>님의 이번 두 줄 시화집의 천만 부를 향한 행진이 앞으로의 유행은 물론, 자유시와 시조 그리고 양장시조의 거대한 성을 함락시킬 것이란, 저희로서는 긴장되는 경계의 위치에 섰다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이상 두 줄 시 협회를 마냥 이단시만 할 수도 없거니와 경쟁의 파트너로 인정을 해야 할 때도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번엔 시화집의 두줄시가 끝나고 난 뒤편을 보겠는데요. 제가 만난 시집들을 보면 <작품해설> 이란 제목의 글을 별도로 수록해 놓은 경우가 많던데요. 이번 시화집에서는 빠져 있습니다. 이런 경우 독자님께서는 한 권의 시집을 고르는데 있어 어떤 차이점을 가지게 될까요. 역시 이 부분은 손 평론가님께서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평(書評)이라 하지요. 그러나 상업화가 진행된 지금에 와서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고, 작품해설이라 싣고들 있습니다. 양쪽 모두 그것을 쓰는 일종의 형식에 의해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에 저는, 서평이나 작품 해설이나 같은 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시집의 앞머리에 혹은 뒤쪽에 별도로 실어지면서 <서평>이라 하느냐 <작품 해설>이라 하느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서평이라 하여 글을 싣게 되면, 그 글을 쓴 사람이 한마디로 ‘이 시집의 작품에 대해서 내가 보증한다.’라고 하는 책임이 서평자에게 보이지 않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보증한다>라는 의미는 추호도 거짓말로 시집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기록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작품해설이라 하게 되면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그러한 책임으로부터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한 권 시집의 원고와 함께 작품해설을 청탁 받았다고 해볼까요? 그리고 작품은 백 편이었다고 하지요. 한데 그 중에 90편은 시가 될 수 없었고 다행스럽게도 10 여 편 정도가 독자에게 권할 수 있다고 했을 때, 작품해설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머지 90편에 대한 감상평은 전혀 건들지 않고, 그 열편만 가지고도 필요한 작품해설의 원고를 채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시집을 출판하는 본인에게 있어 좋은 면이 많이 기록될수록 좋은 것이지, 부족하다거나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식의 해설을 기록으로 갖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상업적 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해설에 기술이 좋을수록 찾는 이가 많을 테니 수입도 늘어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서평이든 작품해설이든 원래의 품질이 변한 이상은, 시 역시도 독자 스스로가 잘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대에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네, 우리가 이번 두줄시 시화집의 지은이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보니, 얘기가 상당 부분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방송을 보고 계시는 시청자님들께는 지금까지 몰랐던 두줄시와 연관해 한 권의 시집 구성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궁금증을 푸셨을 거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손 평론가님께서 이번 두 줄 시화집 속의 전체 작품에 대한 감상평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방송 초대를 열흘 전에 섭외 받고서, 두줄시 시화집에 수록된 황진이님의 작품 150편을 여러 차례에 걸쳐 깊이 감상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점가에서 수 만부 이상 팔리고 있어 소위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시집들을 보면, 시 참 좋다 하며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 어떤 시집을 막론하고 그 한 권 속에서 아직까지 열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두줄시 시화집은 150편 모두 버릴 게 하나 없는 절창이었습니다.
특징이라면, 각각의 편마다 진. 선. 미. 또는 감동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슬픔을 노래했음에도 구차 하거나 하지 않고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것과, 어둠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음에도 과거의 노동시라던가 현실 참여시 등에서 느껴졌던 분노와 상대를 적으로 한 큰 목소리 등이 아니라, 정말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인간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 선한 마음이 원망과 증오 등을 대신하며 매우 따스하게 스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의 수많은 시들이 유행을 따르거나 모방 내지는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한 편의 시 안에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 지, 아니면 지은이의 실제 삶의 모습은 작품의 화자들과 얼마나 동행을 하는 것인지 바로 의심이 되는데 비해 이번 시집에서는 황진이님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 깊이 느껴졌고, 수 만 명에 달하는 자유시 시인들의 대부분 작품들이 개인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작품성의 결과를 내고 있다면 이번 시화집에서는, 개인의 이야기 인듯하면서도 시를 감상하고 있는 독자들 공통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흡수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주 대단한 시화집이라고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 여 편 정도를 영상음악과 함께 이 자리에서 저희들이 낭송해드린 작품을 통해서도 시청자님들 스스로 충분히 느끼셨을 줄로 믿습니다.”
평론가의 입에서 작품의 흠을 하나 집어내지 않고 이렇듯 찬사를 보내는 일도 드문 일이었다. 원로 시인 역시 평론가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저도 이 시간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큰 공부가 되었는데, 오늘 귀가를 하게 되면 가지고 있는 시화집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감상을 하겠습니다. 그럼 한 편 씩을 골라, 낭송과 함께 영상과 음악을 시청자님들과 함께 하며, 화면 아래로는 <황진이> 두줄시 시인님을 작품과 함께 만날 수 있고, 댓글을 통해 직접 대화도 나누실 수가 있는 블로그의 주소를 안내해 드리며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앵커 정보배, 그리고 좋은 말씀 해주신 초대 손님에 원로시인이신 <김원로>, 평론가인신 <손평론>님이셨습니다. 두 분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시청자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저희는 물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