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올여름은 최악이었다고 한다. 열대야, 강수량, 해수면 온도 등 모두 기록을 갈아치웠고, 특히 9월의 더위와 열대야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가로수와 산의 나무들도 비실거리고 많이 죽었다. 농작물은 직격탄을 맞았고, 가을배추의 모종을 아무리 심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제러미 리프킨은 기후 위기로 수년 안에 온 지구가 식량 난민으로 뒤덮일 거라 했다. 다행히 비켜 간 태풍을 보니 그 위력이 정말 대단했다. 점점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현상과 움직임을 심각하고 위중하게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은 왜 바벨의 문명(창 11:1-9)을 싫어하셨고 그 일을 중단시키며 그들을 흩어놓으셨을까. 인류는 여전히 바벨의 문명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고 인간의 힘과 이름을 하늘에까지 높이려 했다. 바벨의 문명은 인간의 힘으로 못 할 게 없다는 착각이다. 해보니 되더라, 인간은 이 땅의 주인이며 뭐든지 모든 걸 소유하고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일종의 망상증 환자가 되었다.
세상이 아파도 너무 아프다. 상처가 깊어지면 위중해지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풍요로운 물질과 문명, 편리하고 세련된 세상이 되었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몸과 마음이 아프고, 사람과 자연이 아프다. 사회와 국가가 아프고, 지구와 함께 모두가 심히 아프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아픔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심각한 위기의 상황을 보지 못한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듯이 그 자리에 있으면 뭐든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권력에 집착하니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시대를 읽지도 못하니 제대로 된 정책이나 일이 나올 수 없다.
이제는 지속 가능과 공생, 공존을 넘어 지금 당장을 위해서라도 생태 문명으로의 전환이 절박하다. 많이 늦었다고 하지만 선택지가 없이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무얼 할 수 있느냐 묻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찾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생태적 삶인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창조 세계의 수많은 생명을 살피고 지키며 함께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인간 중심의 생각은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바벨 문명 또한 포기해야 한다. 풍랑을 만난 배가 꼭 필요한 것만 빼고는 다 버려 배를 가볍게 하여 살아남듯이 지금이 그럴 때다. 진정한 미래산업이나 인류의 대안은 무엇일까? 첨단 과학기술이나 AI 인공지능 로봇이 아니다. 하나님 만드신 창조 세상, 그 안의 수많은 생명의 벗들과 공생하는 지혜다. 불행하게도 인류가 발전하면 할수록 자연과 생태적 세상은 오염되며 망가진다.
숲에 미래가 있고 자연이 소중하다는 말만 하지 말고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제는 정치가 상생과 공존을 위한 지구 생명의 정치로 바뀌어야 한다. 교육은 생태교육으로 자연 친화적인 사람을 길러내고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경제는 무한 성장과 개발의 방향을 멈추고 지속 가능하며 건강하고 소박한 삶으로 안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 중심과 성공, 축복의 눈으로만 성경을 보았던 신앙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생태 문명은 오래된 미래처럼 완전히 판이 바뀌는 태초의 순전한 문명으로의 전환이다. 석탄과 석유의 산업문명을 끝내고, AI 로봇이나 인공지능의 첨단 과학에 목을 매는 게 아닌 생명 자연의 생태적 원리로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바벨의 문명을 끝내고 다시 생태 문명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야 한다. 지금도 전쟁과 폭력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가,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강하게 제어하고, 옳지 않은 힘과 권력의 사용을 막아야 한다. 자연과 생명의 존재를 가볍게 보거나 함부로 대하는 바벨의 문명을 거부하고, 아픔을 치유하고 삶을 사랑하며 모두가 어울려 사는 생태 문명으로 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