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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
박 화 성
수옥이가 눈을 떴을 때는 머리맡의 들창이 희미한 새벽빛에 젖어 있고, 모기장을 바른 방문으로 밖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이는 아주 이른 첫새벽 이었다.
수옥은 반듯이 누운 채로 두 다리를 쭈욱 뻗고 두 팔을 베개 위로 올려 기지개를 한 번 힘껏 켰다. 뼈마디에서 오독오독 소리가 나는 듯싶게, 그리고 줄어들었던 근육이 맘껏 펴지는 것 같게 그 기지개 켜는 맛이 유쾌하고 시원하였다.
어젯저녁 일곱시에 정거장에 도착하여 석양의 산등성이 길과 논밭 두렁길로 오 리 남짓하게 결어서 집에 왔을 때는 마당에 지핀 모깃불이 한창 연기를 무럭무럭 내고 있었고, 그 연기속으로 마루 끝에 모처럼 매달아놓은 남포불이 화안하게 보였다. 모여드는 일가들과 인사를 교환하고 가족이 둘러싼 곳에서 밥을 먹고 났을 때 수옥의 팔목시계는 열시 반이나 되었던 것이다.
수옥은 잠이 모자랐다. 좀더 새벽잠을 청하고자 모로 돌아누웠다. 그러나 그 순간 의사의 부탁이 생각났다.
‘시골은 공기가 좋을 테니까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한 시간쯤 산보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쓸데없는 생각은 일체 말고 평화한 심정을 계속하도록 노력 하시오.’
교의(校醫)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수옥은 자리에서 냉큼 일어났다.
오늘이 보리타작하는 날이라 하여 어머니는 반찬 준비하기에 앞터전과 뒷밭으로 왔다갔다하고, 수옥의 동생 수진은 생선과 마른 반찬을 사오려고 첫차로 목포에 갔다.
아버지는 도리깨의 열을 조사한 다음에 사람 수효대로의 도리깨발을 장대에 끼면서 머슴더러 어서 마당을 쓸지 않는다고 호령한다.
“용쇠야 구석구석에 있는 것 다 좀 잘 치고 깨끗하니 딱 쓸어놔라. 너 이놈! 왜 몽그작하기만 하냐?”
수옥은 아버지의 말소리를 듣고 안심하였다. 칠십이 다 된 노인의 음성이건만 그 넓은 마당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쨍쨍하게 울리고도 그 담을 넘어서 앞집 이쁜 어머니의 잠까지 깨워주고 만 것이다.
이쁜 어머니가 허둥지둥 달려와서 밥을 시작하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수옥이가 마당에 나서니까 아버지는,
“첫새벽에 어디를 갈래?”
하고 딸의 짧은 치마를 못마땅한 듯이 훑어본다. 키가 자그마하고 손가락만한 상투가 아직도 달려 있는 다부지게 생긴 노인이었다.
“신경쇠약에는 새벽 산보를 해야 났는대요.”
딸은 간단하게 대답을 남기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노인은 중얼거린다.
“흥 신경쇠약이란 것이 다 뭐여? 새파란 어린것들이 쇠약이라니, 참 세상은 거꾸로 되어먹었다니까.”
그는 도리깨를 벽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앞터전에서 풋마늘을 뽑던 어머니가 또 소리친다.
“아가, 어디 가냐? 몸할라 아프담서 새벽에 어딜가?”
“네, 산보 가요. 새벽 공기 마시러 좀 갔다오겠어요.”
수옥은 말소리만 뒤로 보내고 앞을 향하여 걸었다. 밭두렁 길은 좁았다. 무성한 풀잎에 엉긴 이슬방울은 수옥의 비단 양말을 아롱지게 하였다.
목화밭에는 목화싹이 제법 자랐다. 목화나무 사이사이로는 배추잎이 파랗고, 고추나무는 벌써 꽃맺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고추밭 가로 둘러가며 옥수수나무가 어린애 키만큼 커 있었다. 언덕 밑에는 호박잎들이 넓은 잎새들을 너풀거리며 순들을 언덕 위로 보내어 성장할 길을 찾고 있다.
메뚜기 한 마리가 팔딱팔딱 수옥의 앞을 질러 뛰어간다. 수옥은 메뚜기를 잡으려다가 두어 번 허탕만 쳤다. 팔뚝시계 유리 위에 깨어진 이슬방울이 어렸다. 수옥은 손수건을 찾다가 얻지 못하고 검은 보이루 치마를 걷고 인조견 속치마 자락으로 손등과 시계 유리를 닦았다.
시계는 다섯시 오분이었다.
수옥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 ― 수옥의 집 뒤 울타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인데, 그 앞으로 망망한 넓은 들이 널려 있는 곳이다 ― 이 자리에서 그의 애인을 처음으로 만났고, 또 그가 올 때마다 이 자리에서만 서로 밀어를 속삭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깃이었기 때문에 수옥은 이곳을 가장 사랑하였다.
수옥은 널리 들판을 바라보았다. 못자리와 이른 모를 낸 논이 연두색으로 끝없이 이어 있다. 움직이는 하얀 몸뚱이들이 아물아물하게 보인다. 수옥은 정말식(丁抹式) 체조의 대강만을 한 다음에 심호흡을 하였다. 밭과 논에 나가면서 수옥을 힐끗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디 선지 소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여름의 새벽이란 무척 보드랍게 감촉되는 것이어서 수옥은 자기의 가슴이 허허하게 비어 있는 것처럼 느꼈다. 수옥은 이 풍경, 이 자리에서 애인인 정 찬(鄭燦)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께 밤에 정은 수옥에게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수옥 씨! 이번에야말로 수옥 씬 수옥 씨의 사는 곳을 잘 알아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체로 수옥 씬 수옥 씨의 부모라든가 고향이라든가 거리가 퍽 먼 곳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전문학교 삼학년이 아닌가요? 한 해만 더 있으면 학창에서 밀려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창이란 또 기숙사생활이란 영구한 게 못 되거든요. 그런데 수옥 씬 평생 학생으로 기숙사 생활만 계속할 사람처럼 그 학창과 그 생활에 사로잡혀서 도취되어 있단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수옥 씬 현재의 그 환경이 눈을 꽉 가리고 있어서 당신의 좌우에 있는 실사회라든가 현실이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고, 집에서 보내는 학비 이십오 원의 쓸 곳밖에 보이지 않거든요. 그믐에 돈이 오면 식비와 월사금 내고 날마다 학교에 갔다와서는 영어 단자만 외고 그럭저럭 밤이 지나면 또 학교에 가고 또 돈오기를 기다리고, 그러는 동안 한 달이 지나거든요. 부수적으로는 예배도 보고 빨래도 하고 운동도 하고 외출도 하
면서, 삼 년을 지내왔으니 말이죠, 나머지 일년에서 수옥 씨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수옥 씬 벌써 현대여성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이 약간 흥분되어서 여기까지 말할 때 수옥은 혼잣말처럼,
“내가 현대여성이 아니면 뭘까?”
하였더니 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수옥 씬 물론 현대식 여성입니다. 머리를 지지고 전대에 없던 뾰족구두를 신고 양속 양복을 입고 금시곌 차고, 얼굴이 현대식 미인이겠다, 스타일이 만점이겠다, 과연 울트라 모던이죠.”
그는 픽 웃었다. 수옥도 따라서 웃었으나 속으로는 일종의 모욕을 당한 듯이 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입니다. 수옥 씬 다만 일천구백삼십삼 년식의 여성이었다 뿐이지 현재 실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은 아니란 말입니다. 수옥 씬 현실에 어둡습니다. 현실과는 너무나 너무나 동떨어진 자리와 생각에 묻혀있습니다. 좁게 말하면 수옥 씬 자기의 가정과 고향에 융화되지 못할 것이고, 넓게 말하면 우리의 현실이 현재의 수옥 씨 같은 여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수옥 씨가 어떻게 현대여성 즉 현 사회를 짊어진 한 사람, 다시 말해서 사회생활의 개척과 성장을 맡은 한 분자인 그런 여성이 될 자격이 있겠습니까?”
“아니 그럼 난 아무 자격도 없는, 쓸모가 없는 여자란 말예요?”
수옥은 빨근해서 톡 쏘아붙이며 정을 똑바로 보았다. 시선이 분노로 떨리는 듯했다.
“그렇죠. 지금의 수옥 씨 같아선 그렇단 말입니다. 수옥 씨가 적어도 현실에 입각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고 수옥 씨의 안계를 전환 또는 넓히지 못하는 한도 내에서는 정찬이라는 이 몸이 요구하는 여성도 되지 못할 것이니까요.”
수옥은 더 앉아 있을 수 없어 발딱 일어나 급히 기숙사로 돌아와버렸던 것이다. 한 달밖에 남지 않은 하기휴가를 앞에 두고 극도의 신경쇠약 증이란 교의의 진단에 남보다 일찍 고향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어서 그저께밤 특별허가를 얻어 정찬의 숙소를 찾아갔던 것이 그만 자기의 자존심을 꺾이운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수옥은 밤새도록 분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전전반측 앙앙불락하다가 일어나니까 머리가 더 무겁고 눈은 아찔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어제 아침에 정은 흔연히 용산역까지 수옥을 전송했다. 그는 수옥의 귀 가까이 입을 가져갔다.
“어젯밤 내 말에 노했다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잘 생각해보시오. 이번엔 병으로 가니까 좀 뭣하지만 가능한 범위 안에서 당신의 향토와 농민들과 친하려고 애를 써보고, 또 그네의 실생활을 허수히 관찰하지 말고, 수옥 씨도 그 생활에 동화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보시오. 며칠 내로 나도 내려갈 테니까요.”
정은 수옥의 안색을 살핀 후에 시계를 내어보고 다시 말했다.
“시험만 끝났더라면 이번에 함께 갈 텐데 아직도 두어 개가 남았소. 그것만 끝나면 바로 수옥 씨 있는 곳으로 가리다. 틈나는 대로 아주머니께 가보시오. 그럼 조심해서…….”
그는 수옥의 손을 꼭 쥐었다. 수옥을 그윽히 바라보는 정의 눈에는 애정이 있었다. 수옥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웅변조인 듣기 좋은 그의 말소리! 힘찬 표정! 남성다·운 태도! 허위대 좋은 체격! 무엇하나 미흡한 점이 있으랴.
그가 지금 앞에만 있다면 그의 가슴에 꽉 안기어 울고라도 싶다고 수옥욱 그렇게 정찬을 그리워했다.
타작할 보리이삭을 잔뜩 한 짐씩 지고 들어오는 일꾼들은 다섯 사람이었다. 그들이 밭에서 손수 베어 가지고 온 것이다. 그들은 마당 복판에 타작할 보리마당을 만들었다. 열댓줄이나 되게 사각으로 놓여진 보리이삭들은 장차 당할 고난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누워 있다. 다섯 사람은 이 쪽과 저쪽으로 갈라서서,
“에잉…….”
소리를 함께 발하면서 도리깨를 똑같이 들이쳤다. 그들은 소리와 도리깨를 꼭꼭 맞춰가며 도리깨질을 하는 그들이 도리깨를 올렸다가 놓을 때마다 팔의의 근육이 불룩불룩하고 장대 잡은 손에는 굵은 힘줄들이 퍼렇게 솟아오른다. 도리깨발들은 공중에서 휘이휘익 소리를 내면서 빼액 돌아 떨어지곤 하였다. 어떤 때는 보리이삭이 따라 올라가 빙글돌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갈라진 이삭모개가 도리깨 끝에서 튀어가지고 당치도 않은 곳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수옥은 정의 부탁하던 말을 상기하고 이번만은 모든 것을 허수히 보지 않을 양으로 마루에 앉아서 타작마당을 주의 깊게 보았다.
부엌에서는 샛밥〔間食〕을 짓느라고 어머니와 이쁜 어머니가 바쁘게 날뛰고 아버지 유생원은 아홉시 십분에 목포에서 떠나는 급행차로 수진이가 올 텐데 아니온다고 앞등성이에 올라서서 정거장 쪽을 바라보며 안달을 하였다.
“허 이 자식 이 웬일인고, 그러기에 보리타작하는 때가 닥치면 반찬을 미리미리 사다두어야 하는 건데, 워낙 여편네가 날짝지근해놓으니까 그제 딱 당해야만 바삐 서둔단 말여.”
유 생원은 등성이에서 내려와 뒷짐을 지고 부엌에 있는 마누라를 들여다 보면서 또 소리친다.
“이 여편네야, 벌써 한 마당도 끝날 때가 되는데 수친이는 안 오니 놈들을 무슨 반찬에 밥을 먹일 텐가?”
“아이구 그것도 내 탓이오? 미리미리 사다둘 줄을 누가 몰라서 못 했는가? 원수놈의 돈이 없어서 오늘사 부랴부랴 사러간 결 글쎄 뉘 탓을 한단 말요?”
영감님보다 십 년이나 손아래 되는 마누라는 장독에서 고추장을 떠가며 마주 소리쳤다. 수옥이도 그 어머닐 닮아서 빛깔이 희고 눈이 크고 얼굴이 가름하곤 몸매가 어여쁘다. 오십 남짓한 여인으로는 아직도 늙은 티가 보이지 않고 중년미가 어느 데선지 나타나고 있는 아담스러운 부인이었다. 유 생원은 음성을 좀더 높였다.
“뭣이 어짜니? 누구 때문에 집안이 요 모양이 되어가는 줄 아느냐 말이다 응? 저 기집엔가 무엇인가 서울 보내서 공분가 막걸린가 시킨다고 우겨서 보낸 것은 누군데? 그러고 어린 아들놈 버는 돈은 몽땅몽땅 저 기집애 밑으로만 들여보내고 아들 장가 밑천까지도 논밭까지도 다 없어지고, 이 여편네야! 오늘 보리타작도 뉘 보리를 타작하는 줄 알고 공당거리느냐? 내가 보리타작하는 날이나 나락가슬하는 날은 화가 치밀어 못 살 지경이다. 으응 못된 년들 같으니!”
은근히 딸마저 끌어가며 담뱃대를 곧추 세워 마누라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욕을 퍼부었다. 마누라는 잠잠하였다. 딸 공부시킨다는 원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년 서울가서 공부하는 지가 몇 년이냐? 벌써 칠 년째여, 칠 년. 흥, 하늘 아래 나같이 딸년 밑으로 논밭 없애는 놈은 둘도 없을 것이다. 밥을 할 줄 아냐 바느질을 할 줄 아냐? 정갱이 닿는 몽당치마나 대롱거리고 말굽 같은 구둔가 뭔가만 대똥거리고 집이라고 오면 어디가 아프니 어디가 애리니하고 번번이 자빠라졌기만 한단 말여. 그러다가 이번에는 뭐 쇠약? 무엇이 쇠약했담서? 으응, 아니꼽게 늙은 애비 앞에서 쇠약이 뭐여? 그래 공부를 해가지고 인제 무엇을 할 거야? 어디 보자. 큰 덕을 본다니 어디 부원군이나 되는가…….”
영감님은 부채질을 할랑할랑 하며 마루에 앉아 있는 딸에게 눈을 홀기면서 다시 앞등성이로 향해 걷는다.
그런 영감님의 푸념도 도리깨 소리에 묻힌 채로 보리타작은 거진 되어간다. 상도리깨가 외따로 서서 도리깨를 모으로 몰아 보리를 뒤적이며,
“봐라!”
하면 다른 이들은 소리로 받아 그 자리를 내리친다.
“여깃다!”
하고 뒤적여 치면 또 그곳을 쳤다.
보리를 치는 그들의 토리깨 끝에서는 불이 일어날 듯 맹렬한 기운이 돌았다. 상도리깨가 보릿대를 한편으로 휙획 밀면서 일변 뒤적여 잦히면서 벼락치듯 주고받는 그들의 기술은 납량(納凉) 음악회에 출연하는 피아니스트의 피아노 건반을 울리는 그 솜씨 이상이 아닐 수 없다고 수옥은 생 각해본다.
한 마당이 끝났다. 보릿대는 한쪽으로 쌓여지고 거스렁 (빗자루 같은 것)으로 느정이를 긁어 한편으로 놓을 때 마당에는 보리알이 수북했다. 쌀보리다. 닭들이 우우 몰려와서 보리알을 쪼아 먹으려고 덤비다가 사람들에게 야단을 맞고는 저만큼 가는 듯하더니 다시 몰려오고, 개 세 마리가 이제 방금 쌓아놓은 금빛 나는 보릿대 위에서 뒹굴며 장난을 한다. 볕이 세게 나는 쉴 참 때이었다.
상도리깨는 외상으로, 다른 사람들은 넷 겸상으로, 밥상을 받았다. 그들의 밥상에는 고춧잎과 풋마늘 무침, 게젓, 상추얼지, 묵은 김치, 마늘장아찌, 그리고 고추장이 접시로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도 수옥 어머니는 걱정이다.
“수진이가 안직 안 와서…… 아가 반찬이 그래서 어짜끄라우?”
“이따 점심 때 걸게 먹으면 되지요.”
다섯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푸짐하게 대답했다. 막걸리 한 사발씩을 냉수 마시듯이 들이켠 그들은 안주를 집어 입에 넣고 적삼 소매로 입을 닦고, 이마의 땀을 씻고, 그러고 나서 밥 숟갈을 들었다.
그들의 수저에는 파르스름한 풋콩 밥이 주먹덩이만하게 올라앉았다. 그 큰 밥덩이를 흔연스럽게 입에 넣고도 다른 반찬들을 여러 가지 집어넣어서 힘들이지 않고 씹는 것을 보고 수옥은 처음보는 듯이 새삼스럽게 놀랐다.
목포에서 열시에 떠나는 완행차의 삼향(三鄕) 역을 지나는 기적 소리가 들린 후에 얼마쯤이나 되어, 이 집 그늘진 마당 멍석 위에서 샛밥이 한창일 때에, 조그마한 머슴애가 생선과 굴비와 자반묶음과 또 다른 것들을 잔뜩 지고 들어오고 뒤따라 유 생원이 과일채롱을 들고 왔다. 수진이가 사립문 밖에서 어른대며 누구애겐지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수옥은 목을 빼가지고 기웃이 내다보다가 반가움으로 극한 외마디를 지르고는 고무신짝을 끌고 문쪽으로 달려갔다.
“아이구 주희! 이거 웬일이야, 웅?”
수옥은 수진의 곁에 서 있는 주희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소리치다가 다시,
“아니 그런데 동경에선 언제 왔기에?”
하고 나머지 손을 마저 붙들었다.
“그저께 아침차로 왔어. 수옥인 어젯밤에 왔다지?”
주희는 수옥에게 손을 잡힌 채,
“신경쇠약으로 일찍 왔다면서, 그래두 얼굴은 괜찮어, 근본 미인이라 그런지…….”
하며 쾌활하게 웃었다. 몸이 좀 뚱뚱하고 키는 수옥이만 하나, 전체로 보아 수옥의 체격보다는 훨씬 발육이 잘된 건강미가 있었다.
“또 익살야? 풍자 시인이라 다르시군. 그건 그렇구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느냔 말야. 이 구석까지 글쎄 웬일야, 응?”
주희는 눈을 동그랗게 떠서 수옥을 마주보며,
“아니 반갑잖은 손님이라구 괄세하뇬 셈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주댁 영양이라구 비꼬는 수작인가. 일껀 찾아오니까 왜 왔느냐구만 하니 내 참.”
하고 수옥에게 잡힌 손목을 뿌리치며 눈을 흘겼다. 별안간 유 원생의 목소리가 쩡하게 울렸다.
“허어, 속창아리 없는 기집애새끼. 글쎄 손님이 왔으면 데리고 집 안에 들어가서 얘기를 해야지 볕이 쨍겡 나는 밖에다가 손님을 세워놓고 이거 무슨 도리야?”
두 처녀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뒷짐을 진 수옥의 아버지가 수옥을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갔던지 수진이가 다시 나오고 그 뒤를 따라 개 두 마리가 나와서 수옥과 주희의 치맛자락을 스치고 다니며 꼬리쳤다.
둘이가 마당에 들어서자 수옥의 어머니가 잦은 걸음으로 달려와서 주희의 두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세상에도 주회가 우리 집엘 다 오고…… 어서 들어가자. 해필 오늘이 타작날이라 어수선하니 그렇다.”
수옥 어머니는 주희를 대청마루로 끌어 올리려 했다. 주회는 공손하게 인사한 뒤에 수진이 깔아놓은 돗자리 위로 조심성스럽게 앉았다. 수옥은 부채로 주희에게 바람을 내어 보낸다. 동리 애들이 새로운 신기한 손님을 보기 위하여 사립문에서 쭝긋거리고 앞담과 뒷울타리 위로도 가끔 색시들의 머리통이 솟아올랐다. 타작꾼들도 마루 쪽을 힐끗거리며 수군댔다.
“김 부자 딸이라네. 남북악리며 삼향 일판이 다 그 집 논뿐 아닌가. 오늘 이 보리도 모두 그 집 창고로 들어갈 것이라네.”
“그래도 어디 부잣집 딸 같은가? 생원님 딸보담도 더 수수하네. 생원님 딸은 비단으로만 휘감고 다니는디, 그 처자는 모시 치마에 모시 적삼을 입었네그려.”
“허어, 이 사람 너무 감복 말게. 그 집 아들을 봐! 어짜고 다니던가? 저 처자도 수수해서 그런당가? 비답이 하도 흔하니께 모시옷을 입어야 더 멋이 나거든. 다 그렇다고, 그런 거여.”
상도리깨가 담뱃대 대통에 썬 담배를 담으며 아는 척한다.
“아따 김 부자가 누구라고 비단이 그리 많은 줄 아시오? 어떤 꼼냥인데 바로 비단옷에 고기반찬에 식구들을 먹여 기르겠소?”
“흥, 작인들한테나 꼼냥이 깍쟁이 호랭이 여수 노릇을 하지 저희 첩들이나 자식한테도 그런당가? 모르는 소리 말고 보리 지러나가세.”
상도리깨가 콤방담뱃대블 입에 물고 일어서며 담배를 뻐금뻐금 빨면서 사립문으로 나간다. 다른 일꾼들도 뒤따랐다.
지주의 딸을 손님으로 모신 수옥의 부모는 점심 대접할 준비에 매우 분주하였다.
유 생원은 그늘진 곳에서 생선을 다루고, 수옥 어머니는 풍로에 불을 피웠다. 그리고 수진은 어린 감자를 캐러 뒷밭에 갔다.
주희를 위함도 한 조건이 되나 어제 온 딸이며, 닷새 만에 하루씩 쉬는 날에야 겨우 집에 오는 아들 수진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정성은 지극하였다.
수진은 중학교 삼학년에서 가세가 무너짐을 원인으로 퇴학하고, S역의 역부가 되어 외삼촌 댁에서 근무하며 쉬는 날에만 오 리 밖에 있는 자기 집에 다니러오는 것이다.
유 생원은 생선을 다루면서도 마음이 슬펐다. 전에는 논섬지기나 착실히 가진 호농(衰農)이었는데, 아무리 부지런히 일을 하고 절약을 하여도 점점 빚을 지게 되어, 금융조합에니 척식회사에니 논을 저당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친분이 깊은 김 부자에게. 전답 전부를 저당하고 돈을 얻어 조합과 회사에서 논문서를 찾고 막대한 이자를 물었다.
수옥의 학비 문제도 파산의 한 큰 원인이라 생각하고 유 생원은 굳이 수옥을 귀향시키려 했으나 수진의 강한 반대와 용단으로 수진이 퇴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유 생원은 수옥을 미워하게 되었다. 외아들의 월급은 수옥의 학비로 모조리 들어가고, 금비니, 암모니아의 얄궂은 비료를 살 때는 강변을 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될 때마다 유 생원은 마누라와 다투고야 말았다.
김 부자와의 약속기한이 지나 전답이 넘어가게 될 때 유 생원은 친히 김 부자에게 가서 사정하였다. 그러나 거절을 당하였다. 최후에는 빌다시피 하였다. 김 부자는 부자답지도 않게 바싹 여윈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며,
“영감님도 딱하시지, 천하사를 다 잘 알으시면서 어찌 경위 없는 짓을 아랫사람 데리고 하시려고 하시오? 그건 도무지 안 될 일이니 그저 작인 노릇이나 착실하게 하시오. 그러면 나도 속쯤은 있을 테니까.”
하고 고개를 싹 돌렸다. 유 생원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호령을 하였다.
“이노옴! 네가 뉘 것으로 부자가 됐어. 네 애비 일을 생각한들 나를 괄시할까? 네 ,애비가 원 노릇할 적에 긁어 모은 돈인 줄 알면, 이놈 무죄한 백성을 수백 명 어긋나게 한 그 재산이거늘 네놈은 백 배나 더 흉악한 놈이로구나. 의리도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 네 할애비가 우리 집에 대한 은혜가 얼마나 큰지 네까짓 돼지 같은 놈이 목이 잘룩해서 사람 명색이지 견마보다 못한 놈이 어찌 알랴더냐? 보자! 대대로 두고 보자! 얼마나 잘되 는가…….”
침을 탁 뱉고 왔던 것이나, 이 년이나 지난 오늘에도 자기가 빚만 더 졌고 그놈은 점점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을 생각할 때 눈에서 불이 나는 듯하여 생선 다루던 칼을 여러 번 헛잡았다. 그놈의 딸을 위하여 한다는 것보다 자기의 귀한 아들 수진 때문이라 고쳐 생각하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김 부자는 삼향 일대에서 제일 욕심나던 유 생원의 기름진 역사 깊은 옥토를 최후로 삼키고 완전한 소작촌의 한 제왕(帝王)으로 군림하여 있었다. 그의 궁궐 같은 첩의 저택들과 별장들은 해마다 불어만 갔다. 주희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김 부자의 정실의 딸이었다.
주희는 정성어린 점심과 저녁을 대접받고 서늘한 뒤뜰에 멍석을 깔고 누워서 반짝이는 별하늘을 쳐다보며 수옥과 도란도란 얘기를 펼쳐 갔다.
“그저께 집에라구 오니깐 글쎄 구역이 나서 일신들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대 부르조아의 집안엔 둘째 넷째 또 몇 째 첩들의 방안쟁의가 쉴새없이 일어나는군그래. 남편 독점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갖은 전술과 각색 투쟁방법이 전개된단 말이지.”
“요런, 주횐 그저 입만 벌림 비꼬기라니깐. 자기 집안 말을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
“이건 무슨 소리야? 집안커녕 아버지 말이라두 그른 건 그르다구 해야지. 설령 내 일이라도 옳지 않은 것이야 언제든지 부정해야지 않아?”
“그야 그렇지만.”
“그렇지만이 뭐야? 이 숙녀 수옥 씨! 당신은 언제까지 아름다운 인형이 되시렵니까?”
주희는 수옥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수옥의 눈은 감겨 있었다. 주희는, 수옥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별빛에서라 알아볼 수 없었다.
내일 수옥을 자기의 별택에 데리고 가겠다는 조건에서 주희는 수옥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 컷이다. 마당에 모은 모깃불 연기가 마루를 거쳐 대청 뒷문으로 솔솔 기어나왔다.
“과실들 먹어라, 주희가 사왔단다. 칼 갖다주리?”
수옥 어머니가 마루 뒷문에서 말했다. 주희가 발딱 일어나며 대답했다.
“잡수세요. 그것 사느라구 아홉시 차두 놓쳤어요. 아버지께서 야단치셨다지? 수옥이, 우리 마루로 가서 과일 벳기자구.”
둘이는 대청으로 나와 배와 사과를 모양 있게 깎고, 바나나 껍질을 벗겨서 접시에 담아 쟁반에 놓았다. 그것을 수옥이가 들고 아랫방 마루에 걸터 앉은 아버지께 가져다드렸다.
“수진이나 주어라. 수진아! 이리 와서 이거 먹어라. 먹고 어서 자야 동틀 때 또 일어나서 정거장에 가지 않냐? 앵……참.”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서 수진을 찾으러 밖에 나갔다. 수옥은 과실 그릇을 마루에 놓아두고 다시 마루로 올라와서 바나나 한 개를 집어 주희에게 주었다.
주희는 수옥 어머니에게 사과 한 알을 통으로 깎아드렸다. 수옥 어머니는 맛난 듯이 먹으며 주희의 동그스름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이 주희 얼굴은 훠언하기도 하다. 불빛에 보니 달덩이 같구나. 살비슴도 좋기도 하고…… 왜 우리 수옥이는 빼빼하니 살기가 없는지 몰라.”
하고 수옥의 청초한 얼굴을 돌아본다.
“그러니까 신식 미인이랍니다. 서울서도 유명한 미인이랍니다. 그러기에…….”
수옥은 주희의 다리를 꼬집으며 말꼬리를 가로챘다.
“정작 신식 미인은 주희같이 건강미가 있는 여성이라야 현대적 이래.”
이번에는 주희가 수옥의 입을 틀어막았다.
“쉬이, 쓸데없는 말 그만두자구. 저거 봐. 저인 캄캄한 데서 방아를 찧느라구 혼자 애를 쓰구 있잖아? 공연한 시간을 버리느니 방아 찧는 것이나 거들어줄까?”
주희는 느정이를 찧어 키에 까불고 있는 이쁜 어머니에게로 갔다. 이쁜 어머니는 오늘의 품값으로 얻은 느정이를 찧어 보리알을 내가지고 다시 밤동안에 두 번을 찧어야 내일 아침 여섯 식구에게 보리곱쌀밥을 먹이게 되는 것이다. 밤이 깊도록 절구질을 하는 그를 첫새벽의 삯일은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러나 미리 품값을 내다가 먹은 집의 일을 하는 동안은 겨우 두 끼의 죽으로 연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식구는 굶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쁜 어머니는 주회의 조력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주희는 지지 않고 고집했다.
“내가 무슨 장난삼아 해보려고 그런 줄이나 아시오? 그렇게 몹시 거절할 게 뭐 있어요? 밤은 깊어가는데 얼른 찧어버리구 당신도 쉬셔야지요.”
주희의 말이 너무나도 진정 이었기 때문에 이쁜 어머니와의 맞절구질은 시작되었다. 유 생원은 그것을 보았다.
“허어, 언제 해보았기에 곧잘 하는구나. 우리 수옥인 밥버러지여.”
수옥 어머니도 혀를 두르며 주희의 익숙한 방아질을 칭찬하였다.
목포로 내려가는 막차의 소리가 들린 다음에야 그들의 방아질은 끝이 났다. 주희의 뺨에는 홍조가 올랐고 탐스러운 손길에는 힘줄이 보였다. 속적삼은 땀에 흠씬 젖어서 겉옷에까지 스며들었다.
주희의 언어와 체격과 표정과 행동에는 힘이 넘치고 열정이 흘렀다. 싱싱한 원기 그대로가 주희의 전신을 흐르는 듯하게 보였다.
이것을 바라보는 수옥은 씩씩한 주희와 가냘픈 자기를 비교해보며 스스로 부끄러워하였다. 애인 정찬에게서 느끼던 열정을 주희에게서도 볼 때, 확실히 그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정찬의 말을 상기하였다. 그가 언필칭 말하는 참된 의미에서의 현대여성이란, 즉 현실이 요구하는 여성이란 주회 같은 여성일 것이라고 수옥은 생각하였다.
‘정찬 씨가 요구하는 여성도 물론 이런 여성일 테지.’
여기까지 상상이 미칠 때, 수옥은 문득 가벼운 질투를 느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들은 수옥의 집을 떠나 삼향역과는 반대 방향으로 북악리 주희의 별택을 향하여 논밭길을 걸었다.
논에서 김매는 부인들은 손을 놓고 이 두 꽃송이를 구경하였다.
“흥 저들은 누구의 밭을 매며 저 농군들은 누구의 벼를 심느냐?”
주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수옥이가 톡 쏘았다.
“주희네 논밭에 일해주지 뭐야? 다 주희네 일만 하느라고 저 고생이지.”
“그래그래 맞았어. 일년 열두 달 내내 김 부자 한 사람만 위해서 이 지방 사람들이 죽도록 일만 해주니 김 부자만 더 큰 부자가 되고, 밤낮으로 뼈가 닳게 일만 하는 그네들은 먹을 게 없어, 입을 게 없어, 굶어서 병들어. 이게 무슨 기막힌 모순이냔 말야. 수옥이네 집에서도 일년내 농사진다구 해도 그게 다 김 부자네 농사란 말야.”
“알긴 자알 알았군.”
“그러니 수옥 씨. 내가 이번에 일찍 동경에서 나온 것도 내 의식에 큰 변동이 생긴 데 대한 해결을 지으려고 그런 거랍니다. 수옥 씨도 응원해주세요, 네?”
주희는 익살스러운 말소리를 내어 수옥을 돌아보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수옥은 잠잠히 그의 뒤만 따랐다. 십 리 길을 걸어올 때 수옥은 병인인 만큼 퍽 괴로워하였다. 그러나 짙은 숲속에 표표하게 솟아 있는 궁궐 같은 주희네 저택을 보자 수옥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 별장이 얼마나 장엄하며, 근처의 경치가 얼마나 절승이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칭찬이라기보다 오히려 그지없이 부러워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주희는 수옥의 태도가 도무지 마땅치 않았다. 주희는 약간 증오와 멸시의 빛이 움직이는 시선으로 수옥의 초각같이 선이 곱게 진 얼굴을 쏘아보았다.
손님이라서 수옥이가 먼저 목욕을 하고 나왔다.
주희의 방 경대 앞에서 화장을 하는데 주희는 바스켓에서 타월을 꺼냈다.
“내 얼른 하구 올게 혼자 좀 있어, 응?”
하며 난간마루로 쿵쿵 걸어갔다. 밖에서는 저녁 준비를 하느라고 둘째 어머니란 이의 억센 말소리와 며느리의 가느다란 음성이 섞여 들렸다.
수옥은 주희의 바스켓 속을 들여다보았다. 방금 주희가 타월을 꺼낼 때 얼핏 책들이 있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제일 위에는 일기책이 있었다. 수옥은 호기심에 끌려 가만히 펴보았다. 일어로 영어로 국한문으로 그의 날마다의 생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일기책 갈피에 편지 한 장이 끼어있었다. 부심코 들추었던 수옥의 눈이 둥그렇게 되고, 얼굴은 새빨개졌다. 수옥은 재빨리 편지 알맹이를 꺼냈다.
한 페이지의 원고용지였다.
‘건전한 벗 주희 씨! 열정에 넘치는 글월 기쁘게 읽었습니다. 뭣보다도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무지한 자를 그만큼 신임하시는 본의를 저버리지 않겠으니 안심하시고 동무 삼아주십시오. 귀향하신 후 자세한 말씀드리겠기로 이만 줄입 니다. 오빠 문안 드려주십시오. 정찬’
편지를 든 수옥의 손은 바르르 떨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편지를 꼭 쥐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편지를 방바닥에 던지고 푹 엎드러져 신음 같은 숨소리를 냈다.
바로 그때이다. 난간마루를 걸어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수옥은 얼른 일어나 편지를 주워서 일기책에 끼어 바스켓 속에 넣어버렸다. 미닫이가 사르르 열리며,
“뭐 하세요?”
하는 소리와 함께 며느리의 가름한 하얀 얼굴이 나타난다. 수옥은 애써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서,
“좀 들어오시죠.”
하였다. 그는 살며시 들어와 살포시 쪼그리고 앉았다.
“글쎄 아가씨가 댁에 가신 걸 누가 알았어야죠. 계집애년이 손가방만 대롱거리고 오겠죠. 어디 가셨느냐구 해도 가르쳐주지도 않아요.”
며느리는 수옥의 몸맵시를 곁눈으로 훑어본 후에 행주치마에 붙은 무엇인가를 집어내면서,
“그래 어머님께서 야단을 치시구 그러셨어요. 아가씬 언제나 맘내키는 대루만 하는걸요.”
하고 수옥을 정면으로 쳐다본다. 수옥은 이 여인이 무슨 까닭으로 일부러 찾아와서까지 이런 소리를 하는지 잠깐 당황하여 말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순 서울 말씨와 듣기 좋은 목소리며 고운 손가락과 단정한 태도라든지가 다 맘에 들어서 마주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다.
“어쩜 이렇게 이쁘세요? 아가씨 사진첩에서 댁의 남매님 사진을 보았죠. 그렇지만 본 얼굴은 사진보다두 몇 배나 더 미인이신데요.”
말이 끝나자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며느리는 영리한 대답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며,
“나오셔서 경치 구경이나 두루 하세요.”
하고 올 때보다도 급한 발소리를 내면서 가버렸다. 수옥의 얼굴은 다시 흐려졌다. 수옥은 어젯밤 잠자리에서 주희의 하던 말을 생각해보았다.
“여름마다 뒹굴고 놀며 보냈지만 이번 여름만은 좀 값있게 지내볼까 하는데 수옥이 좀 도와줄 테야?”
하다가 급히 말꼬리를 돌렸다.
“오 참, 병중이지? 그럼 딱하다. 이를 어째? 상의할 만하고 지도받을만한 상대자야 있긴 하지만…….”
몽롱한 졸음에 들려진 수옥의 정신은 이 말에 반짝 눈떴다. 그래서 물었다.
“상대자란 이가 누군데?”
수옥은 주희의 누워 있는 쪽으로 돌아누우며 잼처 물었다.
“누구야 그이가, 웅? 유어 러버?”
“글쎄 러버까지야 안 되겠지만. 인제 차차 알게 될거야. 수옥이도 아는 사람일 텐데 뭘.”
주희는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다. 짙은 의심과 가벼운 질투를 주희에게 향하여 가지고 있던 수옥은 편지를 본 후에 완전히 주희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그 계집애가 우리 사이를 알고 일부러 찾아왔던가 봐. 나 좀 곯려주려구…… 어떻게 우리의 연애관겔 알게 됐을까?’
수옥은 눈을 깜박이다가 주먹을 쥐어 무릎을 탁 쳤다.
“옳지. 정이 가르쳐주었지 뮐. 아이 분해 죽겠네. 이를 어쩌면 좋아?”
수옥은 몸을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깊고 가쁜 숨결 때문에 가슴은 불룩거리고 어깨도 오르내렸다.
그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한 번 흔들며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된 듯하였다. 가슴에서 뜨거운 무엇이 올라오다가 좁아서 못 나오는 듯 목에 탁 걸려가지고 목구멍 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팠다. 그리고 심창은 거의 평형을 잃은 듯이 심히 동요되었다.
연거푸 무리하게 길을 걸었던 피로는 목욕 후인 만큼 전신의 맥을 풀리게 하고 극한 분노의 불길은 그의 약한 호흡기를 격렬히 충동하였다. 가슴에서 이는 뜨거운 김이 입 안을 거쳐 밖으로 풍겼다. 불같이 뜨거운 숨결이었다. 머리가 아찔하며 눈이 아물거리기 시작하였다.
수옥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모든 물건은 뱅뱅 돌았다. 그는 방바닥에 엎드렸다. 전에 하던 경험으로 반듯이 누우려 하였으나 기침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주희는 수옥의 증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문을 훨씬 열어 극기를 유통하게 하고 베개를 없이 하여 반듯이 눕게 했다. 기침이 가라앉아서 수옥은 눈을 감고 고요히 누울 수 있었다.
앞바다를 거쳐오는 서늘한 석양의 바람이 이 방에 누운 수옥의 머리를 시원하게 하여주었다:
그 이튿날 수옥은 맑은 정신으로 잔잔한 물결에 그림자를 지으며 섬 그늘로 돌아가는 흰 돛대를 바라보며 난간에 나앉아 있었다. 주희는 수옥이 새 정신이 드는 것을 보고 이웃 마을에 다녀오마고 나가고 없었다.
일주야 동안 주희의 수옥에 대한 정성스러운 간호는 수옥의 격앙된 감정을 얼마큼 부드럽게 하여주었다.
주희와 수옥은 보통학교와 여자고보시대의 동급생이었다. 남국의 두 재원은 항상 수석자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주희는 수석을 수옥은 그 다음 자리를 차지했건만 그들은 제일 가까운 친구이었다.
그들의 외모도 급중에서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외모와 성격까지가 정반대로 대조되어 있었다. 이것으로도 학교내에서는 유명하였고, 타교 학생들에게까지 이 두 학생은 알려졌던 것이다.
졸업 후 주희는 봉건적인 굳게 얽힌 글레를 깨뜨리고 멀리 동경으로 달아났다. 주희는 일본여자대 학교 사회사업과에, 수옥은 전문학교 영문과에 각각 입학하게 된 이래 삼 년간 그들의 편지는 한 달에도 몇 번씩이나 현해탄을 건너서 왔다갔다하다가, 수옥이가 정찬과 알게 된 금년부터 편지는― 적어도 수옥이가 주희에게 하는 편지만은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설마 주희가 알고서야 내 연인을 뺏진 않겠지. 그럴 애가 아닌데 내가 지나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부인하기에는 너무나 증거가 불충분하였다.
수옥이가 정을 만난 것은 작년 동기방학 때였다.
수옥의 집 뒤 언덕에서 눈 온 새벽에 산보 나왔다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전부터 안면만큼은 익히 알았다. 정찬과 주회의 오빠인 철주와는 동급생이었고, 수옥과 주희는 그들보다 한 해 아랫반이었으므로 보통학교 시절부터 중등학교, 전문학교의 시대를 통해 내려오면서 얼굴만큼은 십 년 고우의 익숙함이 있으나 통화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정찬은 아주머니 집에서 동기방학을 보내며 수옥과 자주 만났다. 삼학기에 상경할 때와 춘기휴가의 왕래는 물론 동행이었고, 수옥은 가끔 정찬의 숙소도 방문하였다. 이러는 동안 그들은 상사의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옥은 정이 항상 자기에게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구나 그와의 긴 대화 후에는 정의 훤듯한 이마에 완연히 나타나는 우울한 표정을 예민한 감정을 가진 수옥이 모를 이치가 없었다.
‘나야 정과 사귄 지가 얼마 안 되지만 주희야 다르지. 한곳에서 살고, 오빠의 친구이니까 물론 교제의 정도가 깊었을 텐데, 왜 주희와는 연애가 되지 않았을까? 주희가 부르조아의 딸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추상을 하고 있을 때 주회가 땀을 홀리며 돌아왔다. 점심은 닭죽이었다.
“형님이 특별히 수옥이를 위해서 쑨 것이라니 많이 먹어.”
주희는 방긋이 웃으며 수옥에게 권했다. 수옥도 마주 웃다가 주희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짖궂은 표정의 미소를 느끼자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수옥은 그제야 그 며느리란 여인이 철주의 부인인 것을 직각적으로 알았던 것이었다. 수옥은 그젯밤 주회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던 것이다.
“오빤 말야, 방학에 나오지 않는대. 와이프가 저렇게 예쁜데두 그 꼴 보기 싫어 안 오겠다구…….”
“…….”
“그렇지만 누가 아나. 보구 싶은 사람이 있으면 뛰어나올지도 모르지.”
“보구 싶은 사람이 어디 있길래?”
“가르쳐줄까? 오빠의 항상 사모하는 여왕이 계신 곳을…….”
주희는 수옥의 뺨을 꼭 찌르고 나서 그 손가락으로 벽에 걸어놓은 수옥의 사진을 가리켰다.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던 수옥은 주희의 그 손가락을 잡아다가 비틀어댔다.
“요런 심술꾸러기 못 할 소리가 도무지 없으니 이런 말괄량이가 어디 또 있어?”
그젯밤 그때의 눈과 입모습에서 흐르는 미소 그대로를 이 자리에서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수옥의 발그스름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다가 슬쩍 자기 올케의 뒷모양올 건너보았다.
사실 수옥에게는 이 조롱이 싫지 않았다. 차라리 그것이 사실이었으면 하는 생각은 별택이라는 이 집을 보고 나서 한충 더하였다. 이 집의 구조와 장치는 김 부자 독특한 명안이요, 목수를 하루에 오 원씩이나 주고 서울에서 불러다가 쓰리만큼 이 건물은 기이하고도 웅장하며 기묘하고도 우미한 기교가 전체에 잠겨 있었다.
철주는 이 집의 전 재산을 상속받을 외아들이고, 김 부자는 젊어서부터 병이 있어 각종 선약도 무효하여 서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의 여러 부인과 첩에게는 딸들만이 있었다. 그러나 주희 외에는 아무도 보통학교 이상 정도의 학교를 가본 일이 없었다. 주희는 어려서부터 고집세구 억세고 영리하기로 집안에서 뿐 아니라 동네에서도 유명하여, 김 부자로도 주희에게는 이겨본 적이 없었다. 정실의 딸이라는 것도 한 조건이 되긴 하지만…….
철주는 주희와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주희가 일마다에서 김 부자를 이겨내는 반대로 철주는 극히 아버지에게 충실하였다. 얼굴이 곱고 체격이 호리호리하며 몸전체에서 귀족적 향내가 풍기는 듯싶은 미남이었다.
수옥은 철주를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정찬이상으로 좋아할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본 조대(早大)영문과 이년이었고, 정은 경성제대 법과 이년이었다. 수옥과 방향이 같고 성격이 공통되고 체격이 비슷한 점에서 만일 가까이할 기회가 있었다면 그들이 연인관계를 맺는 것이 어울릴 일일지도 모를 것이다. 더구나 한없는 허영심을 가지고 있는 수옥에게는 그 허영심을 만족시킬 만한 재력이 필요한 것이매 더욱 그러할 것이다.
수옥이가 주희의 집에 온 지 사흘이 되는 날 오전에 용쇠가 수옥을 데리러 왔다. 그들이 거진 집 가까이 왔을 때 등성이 모퉁이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가 야단치시더라. 잘못됐습니다고 빌어라. 더 큰 야단나기 전에…….”
어머니는 수옥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들이 마당에 들어서자 유 생원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호통쳤다.
“이 계집애새끼! 계집애가 남의 집에를 가서 사흘이나 있다니. 하룻밤이나 자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뭘 먹겠다고 그놈의 집에 가 자빠졌어? 에잉 속창아리없는 것 같으니라고, 으웅 집안이 망할라니까…….”
더 말이 계속되려는 것을 수옥의 어머니가 가로막고 부드럽게 말했다.
“가서는 그냥 아팠다지 않소? 아픈데 어찌 올 것이오? 보시오. 얼굴이 저렇게 못되었구만 그라요?”
얼굴이 못해졌다는 소리에 유 생원은 고개를 딸에게로 돌렸다. 소곳하고 서 있는 수옥의 겉모습이 수척 해보였다.
“아프면 더구나 남의 집에서 편찮지. 기별이나 했으면 교군이나 얻어보낼 것을 그랬구만.”
그는 밖으로 나가다가 하늘을 쳐다보고,
“허어 날쎄가 그냥 궂어지는구나. 막 모심고 나서 큰 물이 지면 탈인데…….”
하고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논에 나간다.
쉬는 날을 당하여 들어오는 아들을 밤중이라도 반드시 중도까지 맞으러 가는 유 생원은 이날도 우산을 받고 마중 나갔다. 막차까지 보고 들어오는 수진이가 비를 맞으며 집에 들어서자 작달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며 번개가 번쩍하고 뇌성이 우르르 딱하였다. 시계는 열두시 십분이었다.
수진은 수옥의 방으로 들어가서 편지를 내주었다.
그것은 수진의 이름으로 역으로 보낸 정의 편지였다. 수옥이 편지를 받을 때 이상스럽게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끝은 가늘게 떨렸다.
‘내 사랑하는 수옥 씨. 왜 소식이 없습니까? 그날밤의 감정을 아직도 품고 있음인가요? 병 증세는 어떠하며 요새는 뭣으로 소일하시오? 즉시 가려던 것이 시험이 연기되어 늦어집니다. 일주일 후면 만나겠지요. 아주머니에게로 전보할 테니 그렇게 알아두시오. 나의 부탁하던 말을 잊진 않았겠죠. 부디 견강하기 바라며 그만둡니다.
정찬‘
수옥은 읽기를 마친 후, 편지를 얼굴에 대려고 가져가다가 수진이가 있는 것을 깨닫고 손을 멈췄다. 정에게서 이런 다정한 서두의 편지를 받아 본 것이 처음이라 수옥의 가슴은 높직이 뛰었다. 그는 주희에게 온 정의 편지 내용과 자기의 것과를 비교하여 보고 정의 애인이라는 자존심에 만족해하였다. 정찬이 온다는 날이었다. 며칠 두고 쏟아지던 비두 개이고 하늘에는 구름덩이가 솜처럼 피어서 뭉개뭉개 떠다니는 맑은 날이었다. 새로 심은 논 중에는 물이 너무 많아서 보가 녹아버린 곳도 있었다.
수옥은 정의 아주머니와 함께 오 리나 되는 정거장에 나왔다. 대합실에는 의외에도 주희가 머슴과 계집애를 데리고 나와 었었다. 그들은 깜짝 놀라 마주 소리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주희! 웬일야? 누가 오기에 응?”
수옥의 말소리는 질투로 인하여 날카로웠다. 수옥의 입술에서는,
“정의 전보 받고 마중나왔지?”
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려고 하였으나 애써 그것을 삼키고 나니 삼키지 못할 것을 넘긴 듯이 가슴이 뭉클하고 답답했다.
“수옥이는 웬일야? 난 오빠가 오늘 온다기에 나왔어. 수옥인 누구 마중나왔지?”
주희의 음성은 여전히 명랑하고 쾌활하였다. 수옥의 포정도 따라 밝아졌다.
“아니 임성에서 내리 잖구?”
“내려올 때는 삼양에서, 올라올 때는 임성에서 내려야 더 가깝거든. 그러기에 긴 부자가 만능주의 아닌가베.”
주희는 스스로 제 말이 재미있다는 듯 생긋 웃었다.
기적이 뛰이하고 울며 목포로 가는 급행열차가 헐떡거리고 달려와서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고는 덜커덕 땅에 붙어버렸다.
몇 사람 내리는 승객 중에서 수옥은 손쉽게 정찬을 발견하였다. 그는 교복에 맥고모자를 쓰고 손에 큰 가방을 들었다. 수옥이와 정의 아주머니가 그쪽으로 달려가려 할 때, 제일 앞객차 승강구에저 철주가 훌떡 뛰어 내리다가 수옥을 보자 깜짝 놀라며 멈칫했다.
“수옥 씨!”
그는 하얀 파나마 모자를 벗었다. 푸른 기가 도는 머ㅢ 칼이 이마에 내렸다.
“참 오랜만입니다. 더구나 일부러까지 나와주셔서…….”
말이 끝나기 전에 주회가 달려와서 철주의 손을 잡으려다가 마주보는 사람과 마주치자 주회는 앗 소리를 치며 물러서다가 다시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정찬이 주회의 손을 잡아 흔들며 말했다.
“주회 씨, 반갑습니다.”
철주의 시선과 마주칠 때 얼굴을 붉혔던 수옥은 고개를 돌려 이 광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찬은 수옥을 발견하자,
“아 수옥 씨!”
하고 수옥에게 급히 다가서서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수옥은 정의 눈을 쳐다보다가는 살짝 돌아서며 잡힌 손을 빼내려 하였다. 정의 큰 가방은 멀써 아주머니의 손에 있었고,
“야, 정 군!”
“오, 김 군!”
청년들의 인사가 시작되는 동안에 기차는 볼일 다보고 뺑소니를 쳐버렸다.
수진이가 철주와 정찬의 차표를 받으며 그들에게 인사하였다. 정찬은 일행의 앞에 결어가며,
“아니 한차를 타고 오면서도 서로 모르고 오다니, 거짓말 같은 참말일세 그려.”
하고 말했으나 이등과 삼등의 거리 관계란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철주는 머리를 숙인 채로 따라오며,
“글쎄…….’
할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옥색 양산을 높직이 받은 주희의 얼굴은 혈색 좋은 처녀의 최고봉을 보였으나, 어디엔지 적막한 기운이 끼어 있었다. 정은 주희를 향하여,
“바로 댁으로 가시렵니까?”
하였다. 주희는 미색 파라솔로 몸을 가리고 따로 떨어져가는 수옥을 보며,
“글쎄요.”
하였다. 쓸쓸한 그림자가 정열적으로 빛나는 주희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옥은 기어코 그의 외삼촌 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도회지에서는 영남 지방의 수해에 관한 신문호외와 태풍경보가 몇 번이나 돌고 돌았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참혹한 수해지와 이재민의 형언할 수 없는 참상에는 눈씹 한 번 찡그리고만 말아버리던 도회지의 사람들도 태풍경보에만은 눈을 둥그렇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지주들은 자기의 전답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여 이맛살올 찌푸리고, 어장주(漁場主)들은 어장배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바다가 뒤집혀 고기떼가 없어질 것을 염려하였다.
목화장사들은 모처럼 잘된 목화 다래가 떨어질 것을 애달파하고, 사람들은 각각 자기 지붕에 새끼줄을 더 놓고 울장에 못질을 하였다.
유달산 허리에 닥지닥지 붙은 오막살이집들과 호남정 근방에 즐비하게 있는 움집 사람들까지 지붕을 손보고 양철지붕은 큰 돌멩이들로 눌러놓기까지 하였다.
태풍경보는 이렇게 전국 방방곡곡의 인심을 골고루 뒤집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온 동네를 다 털어야 신문 한 장 보는 집이 없는 한숫돌, 샛돌, 다너밋돌이며 남북악리와 같은 궁벽한 농촌의 농민들은 이런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영산강이 넘었다더라. 나줏들이 바다가 되었다더라.”
어디로선지 누구의 입으로선지 오는 곳 모르게 퍼져오는 소문에만 가슴을 졸이며 근심하였다.
몇 번씩이나 물에 잠겼던 벼들도 태풍이라는 시련을 겪고야 말았다. 죽은 듯이 쓰러졌다가도 부스스 일어나고야 마는 벼들에게는 극한 형벌 중에서도 기어코 살아서 결실을 해야만 되겠다는 굳은 헌신적 정신이 있는 듯이 보였다.
주희는 땀을 흘리며 다너밋재로 향하여 올라갔다. 다너밋재란 달이 넘어가는 언덕이라서 동네 사람들이 지은 명칭이었다.
주희는 언덕 위에 올라서서 땀을 들이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물과 바람의 시련을 이기고 이제는 제법 큰 키로 짙은 검푸른 빛을 가없이 이어있는 들판에는 황혼의 서늘한 바람에 잔물결치며 개선가를 부르는 벼들의 움직임의 소리가 있었다. 생의 속삭임이 있었다.
매미 소리가 그친 울창한 나무숲은 깃잡아드는 참새들의 바쁜 듯한 지저귐을 관대하게 안아주면서 눈뜨는 초저녁 별들에게 높은 가지들이 목례 하는 듯했다.
두 번째로 이 자리에서 정찬을 만나게 되는 주희의 가슴은 정각의 삼 분 전을 남기자 그윽히 설레어짐을 느꼈다. 맘을 진정하기 위하여 심호흡을 계속하고 있을 때 뒤로부터 풀숲을 헤치고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벌써 오셨군요.”
하는 말소리도…….
심호흡은 원망스럽게도 주회의 뜻을 저버리고 가쁜 숨결로 변해버렸다.
주희가 정에게로 몸을 돌렸을 때 그의 얼굴은 능금처럼 싱싱한 붉은 빛을 내고 있었으나, 황혼의 검회색이 정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감춰주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난 정각인데…….”
“아뇨. 저도 곧 왔어요.”
두 사람이 자리를 정한 후에 교환한 대화였다.
“다섯시 차로 떠나셨나요?”
주희가 물으며 머리를 돌려 정을 바라보았다.
“네. 그래 바로 이리로 왔죠. 그래 경과가 어때요.”
그 대답은 없이 주희는 고개를 숙이고 이윽고 말이 없다가,
“전 선생님을 이렇게 뵙게 되니깐 수옥에게 미안하단 맘이 들어요.”
하고 곁에 서 있는 풀잎을 만지작거렸다.
“천만에, 그런 것이 오히려 주희 씨의 부족한 생각입니다. 주희 씨와 내가 이렇게 만나는 것은 단순히 일을 위하여 만나는 것이니까 수옥 씨도 그것쯤이 야 이해하겠죠.’
정의 입은 이렇게 말했으나 맘은 사실 괴로웠다. 정이 오던 날 수옥이가 외삼촌 집으로 들어가버린 후에 그 이튿날 정이 두 번이나 편지를 보냈어도 오지 않다가 사흘째 되던 날에야 새벽 산보 길에서 서로 만났다.
“나는 속은 것이 분해요.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낀 방해물이 된 게 원통해요.”
정은 그때의 형편을 말하고 진정으로 양심을 호소하였으나 수옥은 곧이듣지 않고 울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 후로 주회를 두 번이나 만나서 얘기한 것을 수옥이가 안다면 얼마나 지극한 질투의 불길로 수옥 자신을 태우게 될까를 상상할 때 정의 가슴은 아팠다.
‘아아 수옥 씨가 좀더 고상한 뜻을 가진 높은 정열을 가진 여자라면…….’
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 감정을 헤아린 주희는 갑자기 말투를 쾌활하게 음성을 명랑하게 하였다.
“제가 바로 큰일이나 같이 선생님께 자랑할 때 선생님께선 그저 노는 것보다는 훨씬 값있는 일이니 부디 힘껏 해보라구 하시잖았어요? 실지로 체험이 된다구요. 그래서 한 달 동안 정말 전 침식을 잊다시피 하고 정성껏 해봤어요.”
그는 잠깐 숨을 돌리느라고 허리를 펴면서 손수건으로 콧둥의 땀을 닦았다. 멀리 어둠 속으로 농가 마당에 피운 모깃불이 보이고, 언덕 아래서 반딧불 하나가 불티처럼 날아와서 빙빙 돌다가 다시 언덕 아래로 가라앉아버렸다.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지날 때마다 주희에게서 풍기는 땀내 비슷한 처녀의 체취가 정의 코에 스칠 때, 정은 가슴에서 이상한 감정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주희의 경과보고는 대개 이러하였다. 주희는 다섯 마을을 합하여 계몽반을 조직하고, 그 마을의 보통학교 졸업생 세 명을 청하여, 교원 넷이서 네 반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들의 향학열은 눈물겨울 만큼 열렬하였다. 집에서 아이도 보고 논에 밥을 날라주고, 김도 매고, 방아를 찧고 하기에 편리할 만큼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반올 만들었으나, 대개는 오전에 왔던 아이가 오후에까지 있으려 하고, 오후에 올 아이들이 오전부터 와 있으려고 하였다.
처녀들과 부인들은 야학으로 하려 했으나 보리방아 찧을 시간이 밤이어서 그것은 성립되지 못하고 말아버렸다.
그러나 워낙 굶주리는 아이들이라 원기가 없고 얼굴이 노래서 두 시간만 거푸 배우고 나면 픽픽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 아이가 한 달 동안을 꾸준히 계속 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라 그 효과란 극히 적은 것에 지나지 못하였 다.
그들 중에는 도망질을 쳐서 배우러 왔다가도 부모에게 되끌리어 사내애들은 풀베러, 나무하러 가게 되고 계집애들은 집과 애기를 보러, 소 뜯기러 가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부모들은 주희에게 허리를 굽혀가며 사과하였다.
“우선 살라니께 요 모양이오. 언제나 좋은 세상이 되어 우리 새끼들도 맘놓고 공부하게 될 끄라우?”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아이들을 데려간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옥수수를 삶아다가, 바람에 떨어진 감을 우려다가, 보리개떡을 만들어다가 네 선생을 먹이려 하였다. 종이가 없으매 호박잎이나 박잎에다가 꿍쳐가지고 와서 선생들 손에 가만히 쥐어주고, 어떤 아이는 봉숭아꽃을 따다가 시금치를 넣어서 찧어가지고 피마자 잎사귀에 싸서 주희에게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이것 보세요. 그래서 요렇게 새빨갛게 물들었어요. 정말 그들의 순정에는 눈물이 나요.”
주희는 어둠 속에 하얀 손을 내밀며 자랑하였다. 정은 양복 주머니에서 회중전등을 내어 주희의 손에 대었다. 화안한 불빛에 투명체처럼 곱게 보이는 열 손가락에 네 손가락이 피와 같이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정은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던 시선으로 주희를 바라보았다. 마주 쳐다보는 주희의 눈에는 피빛 같은 정열이 억지로 웃으려는 미소의 엷은 맘속에서 어른대고 있었다. 정찬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별들도 찬란한 눈짓으로 몸을 떨면서 영겁의 신비를 속삭이고 있는 듯하였다.
목포로 향하는 최종 열차가 힘찬 기적을 울리며 월암산 모퉁이를 돌아갈 때 수진은 신호의 ‘리이브’를 황망히 틀어 올리고 나서 선로 가에 바짝 들어선 사람들을 손으로 잡아끌었다. 이때였다. 손에 작은 가방을 들고 황황히 걸어오던 수옥이가 수진을 보자 휙 돌아서면서 저편으로 가버렸다.
수진은 내려오는 사람들의 차표를 받으면서도 눈은 차칸으로 빨리 들어가는 수옥의 뒷모양을 놓치지 않았다. 수진은 달음질로 따라 들어갔다. 수옥의 얼굴은 창백하였다.
“큰아버지댁에 가시오? 왜 별안간 밤중에 간단 말요?”
수옥의 입술이 경련하듯 떨리면서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움직이는 기차에서 뛰 어내리며 수진은,
“내일 내가 가겠어요.”
하고 소리쳤다.
내일이 휴일이라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오는 수진은 가끔 별하늘을 쳐다보면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수옥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오히려 남자답게 잘생겼다는 수진의 얼굴에는 요사이 숨걸 수 없는 우울한 표정이 떠돌았다. 그는 발길을 우뚝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그에게서는 조용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들판에는 잠이 와
죽은 듯하고
날새들은 집잡아
꿈이 짙으다.
뒤진 나의 외로운
피리 소리에 .
반짝이는 별들만
굽어 다본다.
그것은 시인 조운(曺雲)이 지은 노래의 끝절이었다.
수진은 두 번이나 이 노래를 부르고도 ‘뒤진 나의 외로운 피리 소리에’의 끝대목을 거듭하다가 깊은 숨가락을 내뿜었다. 그는 문득,
“바보처럼 이게 뭐야?”
하고 스스로 부르짖으며 힘있게 발소리를 냈다.
집 가까이 왔을 때 아버지의 대신으로 어머니가 마중나와서 수진의 손을 잡으며,
“누님 목포로 가더냐? 꼭 보았냐?”
하고 초조하게 물었다.
“네, 갔어요. 그런데 왜 별안간에?”
“형순네(정의 아주머니) 집에서 오라고 해서 갔다오더니만 갑자기 큰 아버지댁에 간다고 아버지가 야단치셔도 그냥 갔단다. 그래 아버지가 지금 끙끙 앓으시면서 야단여. 아이구 참.”
어머니의 걸음걸이에는 완전히 기운이 빠져 있었다. 그 이튿날 수진이가 목포 큰댁에 도착되었을 때는 볕이 한창 이글이글 타는 듯이 뜨거운 열한시 반이었다. 수옥이는 집에 없었다. 수진의 사촌동생 수영이가,
“누님이 철주하고 배타러 갔어.”
하고 알려주었다. 수진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는 듯하였다. 수진은 급히 해안통으로 달려가 용당리에 가는 선표를 사서 발동선에 올랐다.
용당리에서 철주의 별장이 있었다. 수진은 두 사람이 그곳에 갔으리라는 추측에서 뒤따라가는 것이다.
수진의 추측은 어김없었다. 별장 뒷산 바닷가 바위에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목포가 바다 하나를 격하여, 유달산의 측면인 솔숲속에 솟은 붉은 지붕의 문화주택들을 비롯하여 공장의 높다란 굴뚝들이며, 온금동 비탈의 구멍만 보이는 초가집들을 보이고 있었다. 과연 신흥도시의 양면을 잘 보이고 있었다.
‘저곳에는 오죽이나 뒤꿇는 소음이 있으랴마는, 허덕이는 피곤한 몸뚱이들이 있으랴마는, 푸른 바다를 격한 이곳에서 들리는 것은 잔잔한 물결 소리! 보이는 것은 갈매기의 날개! 다만 저곳의 하늘이 몽몽하여 흐리기 짝이 없구나!’
수진은 목포시가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람결에 철주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수진은 가만가만 발소리를 죽여 그들의 뒤에 있는 솔밭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수옥 씨! 난 수옥 씰 모시고 온 것을 후회합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사 년 동안이나 나 혼자서 연모하던 수옥 씬 내 친구의 애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수옥은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괴로울 줄이야…… 난 한 달 동안 줄곧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였으니까요. 사람이란 왜 이리 어리석은지…… 내게 명색만이라도 아내라는 것이 있어, 수옥 씨에겐 진짜 애인이 있어, 현실이 이런데도 고통을 받고 번민을 하고…… 아아 내가 왜 수옥 씰 모시고 왔을까?”
철주는 가슴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불길을 못 이기는 듯이 벌떡 일어나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그리고 부르짖듯,
“후우…….”
긴 숨을 내쉬었다. 수옥이 머리를 들어 철주를 쳐다보다가 도로 머리를 떨어뜨렸다. 한참 만에 수옥이 나직이 말했다.
“이거 보세요. 여기 좀 앉으세요.”
수옥은 철주의 양복바지를 살짝 잡아 당겼다. 철주는 덜퍽 주저앉았다.
“정찬 씨에겐 다른 애인이 있답니다. 전 정찬 씨의 애인될 자격이 없는걸요.”
철주는 이마를 번썩 들어 수옥을 쏘아보았다.
“철주 씨의 그 심정 저두 자알 알구는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떻단 말입니까?”
철주의 손이 수옥의 등으로 돌아가서 가냘픈 그녀의 어깨를 흔들며 재촉했다.
“부인이 계시지 않으셔요?”
의외에 수옥의 어조는 또렷하였다. 그리고 철주를 정면으로 쳐다보기까지 하였다.
“네,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거든요. 민적에도 적히지 않은 아내가…… 그것보다는 정 군과 수옥 씨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수옥의 고개는 다시 수그러졌다. 철주는 수옥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분명히 말씀해주십시오. 수옥 씬 정 군을 사랑하시죠? 네? 그렇죠?”
철주의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가는 듯하였다.
수옥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전 정씨의 애인될 자격이 없어요. 그 사람에겐 딴 애인이 있어요.”
철주의 뜨거운 손이 수옥의 손을 덥석 쥐었다. 음성도 정열에서 떨리는 듯했다.
“수옥 씨, 그럼 난 수옥 씰 사랑해도 되겠지요. 네? 그렇죠?”
수옥의 대답 소리가 막 나오려 할 때는 큰 돌멩이 한 개가 바닷물에 풍하고 떨어졌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잔물결은 의외의 침입 자 때문에 후다닥 놀래 깨뜨려겼다. 그들은 돌땡이의 날아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수진이가 씁쓸한 미소를 띠고 호젓이 서 있었다.
“누님, 누님의 오늘 가진 태도가 옳다고 생각하나요?”
집에 돌아온 수진이 정색을 하고 수옥에게 물었다.
“옳구말구가 뭐 있어? 정찬이가 딴 여성을 사랑하고 나를 배반하는데야…….”
“아니 누님. 정씨가 누님 말고 또 누굴 사랑한단 말입니까?”
“가르쳐주리? 흥 김주희 양을 사랑하더라.”
수옥은 날카롭게 쏘아 뱉었다.
“그건 누님의 오햅니다. 정씨가 그럴 남성이 아니요, 또 주희 씨가 그렇게 야비한 여성이 아니니까요.”
“얘! 친구의 애인을 가로채는 계집애가 야비하지 않음 뭐란 말어냐,”
“글쎄요. 주희씬 현대여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생각과 인격을 가진 여자라고 나는 생각하는데요.”
“옳지 너두 주희에게 반했구나.”
수옥은 얼굴이 새파래서 부르짖었다. 그의 입술도 바르르 떨렸다.
“그러니깐 정찬이두 주희에게 반해 떨어졌단 말야. 자기가 내게 말한 걸 어째? 어젯밤에도 주희 만나러 일부러 목포에서 와가지군 다너밋재에서 실컷 둘이 만난 후에 글쎄 나더러 오라는구나. 그런 것들도 인격자야?”
“누님, 누님은 그들이 무슨 일로 만나는지 이핼 못 하거든요. 누님은 누님 스스로가 부족한 것을 아직 못 깨달으면서 그들의 인격만을 의심하고, 누님이 오늘 같은 자포자기의 태도를 취해 나간다면 결국 누님은 스스로가 전락의 비탈로 굴러 떨어지고야 말 겁니다. 타락의 비탈로요.”
“아니 그럼 정찬이와 주희 사이에 아무런 애정 관계는 없단 말이지.”
“그렇겠죠. 비록 애정의 충동을 받는달지라도 그들에게 애정은 둘째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야 주희 씨 같은 여성을 누가 사랑할 맘이 생겨 나지 않겠소마는…….”
수진은 말을 끊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건강한 뺨에 약간 붉은빛이 돌았다. 수옥은 수진을 주목하였다. 이윽고 수진은 머리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며 몸을 벽에 기댔다.
그의 검실검실한 큰 눈에는 청춘의 희망과 정열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널따란 가슴이 불룩 하도록 깊은 호흡을 하였다. 수옥에게 아우의 청춘과 희망을 빼앗은 후회의 아픔이 일어났다. 수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는 정열의 불꽃 속에서 시퍼런 빛을 내고 있는 이지의 광채가 있었다.
“느리고들 있지 말고 얼른얼른 서둘러서 열시 차로 꼭들 와. 늦어만 봐라 큰일이 날 것이니…….”
유 생원의 소리가 쨍쨍 울리면서 수옥 남매의 곤한 잠을 깨워주고 말았다. 수옥의 큰아버지의 대상날이라, 유 생원은 새벽 첫차로 목포에 가면서 몇 번이나 늦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찰떡을 두 말이나 치고 돼지와 닭을 잡아서 밤새도록 지짐질과 반찬 만들기에 수옥이까지도 밤을 새우며 조력하다가 새벽이 다 돼서야 잠깐 눈을 붙였지만 수옥 어머니는 그대로 꼬빡 날을 밝히고 말았다.
우애가 극진하던 유 생원은 형님의 대상을 굉장하게 지내는 것이 살아있는 아우의 도리라고 생각하였음인지 빚을 내어서 음식을 마련하였다. 어제도 종일 큰댁에 가서 준비를 시키고는 막차로 떠나서 수진을 데리고 밤 열두시가 넘어왔건만 잠 한숨 안 자고 매사에 간섭하여 잔소리를 하고도 피곤한 기색이 없어 새벽차로 떡 짐을 지우고 떠납 것이었다.
수옥 어머니는 수옥 남매를 앞세우고 반찬 담은 석작들을 용쇠에게 지우고 오 리 길을 결어가면서 가끔씩 빙그레 웃었다. 그에게는 이 길이 퍽이나 유쾌하였다.
논밭도 마무리가 끝났고 지금 같아서는 농사도 잘된 듯하여 마음이 가뿐한 데다가 그의 자녀가 장성한 후 처음으로 그들을 앞뒤에 세우고 여행(가까우나마)을 하게 되매, 수진의 남자답게 벌어진 어깨 등어리며, 수옥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하게 훨씬 큰 키를 쳐다보고 가슴에 가득한 만족감을 느꼈다.
‘장가를 들여야 할 텐데…….’
하다가는 문득 얼굴이 흐려졌다. 그는 수옥을 힐끗 돌아보았다. 예쁘게 곡선이 진 몸매며 갸름한 하얀 얼굴이 요사이로 비록 수척은 하였으나마 그것이 더욱 수옥의 고움을 돋보이게 하였다.
‘시집을 보내야 할 톈데…….’
수진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도록 만족해 하던 그 기쁨은 이들의 결혼을 상상하게 될 때, 그의 가슴에서 싸늘한 무엇이 빠져나가는 듯 가슴이 비어짐을 느꼈다. 그는 다시금 수옥의 원기없이 걸어가는 태도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얘 수옥아! 얘기나 좀 하면서 걸어라. 수진이는 근본 말이 없는 애니 내버려두더라도 넌 좀 말도 하고 그라려무나.”
어머니가 수옥의 등을 도닥거리며 말했다. 밭 매는 여인들과 논에 있는 농부들이 이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대관절 논이나 밭을 몇 번씩 이나 매면 되기에 밤낮 매기만 하나요?”
수옥이가 어머니에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논은 세 벌도 매고 네 벌도 매고. 밭도 그렇지. 그건 알아 뭐 할래?”
“아따 내가 알켜드리리다.”
용쇠가 수옥의 곁으로 붙어 걸어가며 떠들썩하게 지껄였다.
“밭은 첫 벌 파고, 두 벌 매고, 군벌 넣고, 마무리한다고 한다우. 알었소? 어서 잘 배야만 시집가서 하지라우.”
“미친것. 누가 논밭 매먹고 살겠다나? 그러고 살려면 차라리 진작 죽어버리 지.”
수옥은 용쇠에게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아무 말없이 걸어가던 수진이가 이 말을 듣고 획 돌아서서 수옥을 잠깐 노리다가 다시 돌아서며,
‘어쩔 수 없는 여성이군.’
하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옥은 파라含을 휘휘 돌리면서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잡으려 하였다. 용쇠가 쫓아다니며 한 마리 잡아다가 수옥의 손에 꽉 쥐어주면서 손을 잡아 흔들었다.
“버릇 없는 놈. 저만큼 가!”
수옥의 어머니가 소리쳤다. 육 년 동안이나 수옥의 집에서 자라난 용쇠는 금년에 스물한 살이다. 용쇠는 수옥 어머니의 꾸지람에도 싱글벙글하면서 저만큼 물러서서 결었다. 어느 산 속에서인지 소쩍새 울음 비슷한 새소리가 청승맞게 울려 왔다.
팔월 삼십일! 하기휴가도 다 지나갔다. 저녁차로도 남녀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떠났다. 초아흐렛달이 고향을 떠나는 그들의 어린 가슴을 살펴주는 듯이 구름 속에서 봄의 달빚 같은 젖은 달빛을 몽롱하게 흘리고 있을 때 유달산 상봉을 향하여 올라가는 남녀가 있었다.
달성사 뒷산 깎은 듯한 절벽에 하늘로 잇닿은 사다리나 같이 놓아진 좁은 돌충계를 올라가려면 누구나 멎 번쯤 쉬지 않을 수는 없거니와, 그 여자는 쇠난간을 붙잡고 올라가면서도 숨이 차서 못 견딜 듯 쌔근쌔근 가쁜 숨소리를 냈다.
“내가 좀 부축해드리죠.”
남자의 손이 여자의 팔을 끼고 올라간다. 여자는 가끔 팔을 빼내려 하였다.
“왜 그러세요? 누가 볼까 봐 그러십니까? 원 천만에 누가 여길 오리라고.”
“왜요? 오지 말란 법 이 있어요? 우리도 이렇게 오지 않아요?”
여자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린다.
“흥, 이런 밤에 이 산봉에 올라올 만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목포에 있는 줄 압니까? 없죠 없어요. 그렇게 많이 다녔어도 그림자 하나 못 봤는데요. 저 유선각이 되면서부터는 혹 거기 와서 노는 사람들은 있더군요. 염려말구 어서 올라갑시다.”
남자는 다시 여자의 팔을 끼어 끌면서 올라간다. 그들의 둥에는 땀이 흘렀다. 그들은 상봉에 이르러 펀펀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남자는 양복저고리를 벗고, 여자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들은 면저 시선을 먼 곳에 보냈다. 몽몽한 구름같이 보이는 바다에 거무스름하게 서 있는 섬들 사이로 등대불이 번쩍 빛났다. 바다 밖에 산은 애수에 잠긴 듯 희미하게 보였다. 왼쪽으로는 불바다를 이룬 시가의 눈들이 깜박깜박 삶을 동경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 바위 아래 풀밭에서 쯔쯔이는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영어시를 읊는 듯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수옥 씨! 이 행복스러운 순간이 내게 영원한 영광이 되길 빕니다.”
그리고 남자는 수옥의 손을 쥐면서 거듭 말했다ː
“오늘 알려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러잖아도 꼭 어떻게 한 번 만날 기회가 없을까 바랐더니만 의외에도…….”
“어제가 큰아버지 대상이 되어서 왼 집안이 다 왔어요. 그래 오놀은 모두 가시는 걸 난 병원에 좀 가겠다고 핑곌 쳤어요. 인제 개학 때도 되구 아무래도 한 번은 뵈야만 될 것 같아서…….”
수옥은 말을 끊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참 어제 오다가 임성에서 주희를 만났는데요, 줄곧 목포에만 계셨다죠? 주희도 그저께야 촌에 나갔다가 도로 온다고 해요. 주희는 목포에서 대체 뭘하구 있나요?”
수옥은 정이 있는 이곳에 주희가 오래 있다는 것이 도시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간 좀 일이 있었습니다. 영감님이 경영하는 × ×공장에서 동맹파업이 있었어요. 원료도 오르고 아무래도 예산이 맞지 않으니까 직공들의 임금을 몇 푼씩 내릴려고 했더라나요. 그랬더니 그만 여공들이 동맹 파업을 하니까 남공들은 동정파업을 했거든요. 그래 이때까지 일을 못 하다가 이래선 도무지 운영이 안 되니까 다른 여공들을 모집하려고 했더랍니다.”
철주는 담배 한 개를 피워 물고 두어 번 빨아 연기를 마셨다.
“새 여공을 모집하는 날 전의 여공이 몰려와서 새로 온 여자들을 쫓아내고 사무실에 들이닥쳐 마구 야단이 났더래요. 전엔 이런 일이 있다가도 며칠이면 풀어지고 말았는데, 이번엔 어게 강경 한지 일주일이나 두고 날마다 몇 번씩 몰려와서 야단들을 치니까 나중엔 경찰의 힘을 빌렸죠.”
철주는 다시 담배를 빨면서 수옥의 눈치를 살폈다. 수옥은 흥미없다는 듯 무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래도 주모자도 선동자도 나서지 않고 백여 명 여공이 전부 한결같이 굳세게 나가니까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요구 조건을 승인하면서 그저 조그만 내리고 말았죠. 좌우간 이번엔 그들이 성공했습니다. 결속이 대단히 굳어요. 확실히 배후에 누가 있는 모양인데 그걸 약간 짐작은 해도 확실히는 모르니까 딱하죠.”
철주의 말투는 벌써 자기가 공장주나 된 듯한 기분에서 설명 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영감님 병이 바싹 더쳤지요. 인제 얼마 못 살 모양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두 팔을 뒤로 짚고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두 다리를 주욱 뻗으면서,
“용서하십시오. 다리 뻗습니다.”
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퍽으나 심려되겠습니다. 그럼 주희는 날마다 뭘하구 집에 있나요?”
수옥은 머리를 돌려 달빛에 더욱 희게 보이는 철주의 인형 같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집에 붙어 있나요? 새벽 공부만 끝나면 어딜 밤낮 쏴다니죠. 영감님도 그애 일에는 간섭을 하지 못하니까요. 저 드러눕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철주는 팔을 깍지 끼어 벼개로 베고서는 반듯이 눕는다.
“아마 정찬 씨 만나러 다니는 게죠.”
수옥이가 싸늘하게 빈정댔다.
“글쎄 더러 만나긴 하는 모양인데 하여간 주희는 씩씩 한 여성입니다. 어느 땐 극히 주희가 부러운 때도 있지요마는 난 그 애처럼 활동성도 없고 또 굳세지도 못하니 까요. 정 군과는 퍽 심지가 상합할 것입니다.”
철주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끝냈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가만히 살아 있던 수옥의 어깨가 들먹들먹 흔들리는 듯하더니 철주의 가슴에 던지듯이 머리를 묻으며 가느다란 히스테릭 한 울음소리를 냈다.
철주의 비단 와이셔츠를 통하여 수옥의 더운 눈물이 그러지 않아도 정열로 불룩이는 철주의 가슴팍을 적시었다. 철주는 천천히 일어나며 수옥을 안았다.
“수옥 씨!”
한참 만에 철주가 수옥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자기의 영원한 애인이 되어주겠느냐고 속삭였다. 수옥은 긍정하는 표시로 철주의 손을 가져다가 화끈 달아 있는 자기 뺨에 댔다.
철주의 뜨거운 입김이 수옥의 코 앞에 훅 끼칠 때 수옥의 정신은 아찔하여 몸을 남자에게 맡기고 있었다. 수옥은 처녀의 꽃다운 입술을 처음으로 철주라는 남성에게 바친 것이었다. 정찬과는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게 될 기회가 없었고, 기회보다도 그만큼 정의 태도가 대범하여서 수옥은 반감마저 가졌던 것이다.
철주의 가슴에 깊숙이 안겨 있는 수옥의 눈에는, 전날에 북악리 별택에서 친절하게 자기를 맞아주던 철주 부인의 고운 얼굴과 아담한 몸맵시가 떠오르고, 이어 정찬과 주희의 씩씩한 모습이며, 수진의 우울한 듯한 침착한 표정이 서언하게 보일 때, 웬일인지 가슴이 불안하여지면서 절대의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철주는 수옥의 가느다란 한숨 소리를 듣자 더욱 힘들여 수옥을 껴안았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나오고 벌레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바로 이때였다. 돌충계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희미한 사람의 몸이 나타나며 상봉 가까이 올라오면서 휘파람을 불기 시작하였다.
철주와 수옥이 얼른 바위 틈에 몸을 감추고 머리만을 내놓아서 그 사람을 엿보았다. 휘파람 소리가 가까이 들리며 밀짚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고의적삼을 입은 건강한 남자가 그들이 앉아 있던 바위 밑을 지나 으슥한 바위 옆으로 들어갔다.
“아이구 저 이가…….”
소곤대려는 수옥의 입을 철주는 급히 막으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다. 오분쯤 된 후 역시 차가 기적을 불면서 정거장에 닿을 때, 또 한 그림자가 상봉에 나타나며 휘파람을 불면서 올라왔다. 바위 밑에서도 휘파람이 마주 소리치며 마중나갔다. 하얀 치마 적삼을 입은 머리쪽진 부인이었다. 그들은 변장한 정찬과 주희였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아 흔들고 나서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수옥은 제비와 같이 날쌔게 몸을 솟구쳐 바위 위로 올라가서 바위 끝에 발을 걸치고 귀를 아래로 향하여 기울였다.
철주는 수옥을 잡아끌며 위험하다는 손짓을 하였으나, 벌써 나뭇잎 떨리는 듯 전신을 떨고 있는 수옥은 철주의 주의에도 아랑곳없이 모든 신경을 아래로만 보내고 있었다.
“성공하신 것 축하합니다. 정말로 이번에 주희 씨의 민첩한 활동과 헌신적 노력을 존경하여 마지않습니다.”
정찬은 다시 주회의 손을 쥐어 그의 성공을 치하하였다.
“한 달 동안 계몽반에서 노력하시던 것과 일주일 동안 이번 일에서 활약하시던 그 정성의 수확과 효과를 이번에 절실히 알으셨겠군요.”
“정말예요. 저번 계몽운동에서 한 달 동안의 결과는 국문 하나 깨친 아이가 없어서 슬펐었는데, 이번 일주일의 노력이 백여 명의 성공을 빚어내게 될 때 정말 기뻤습니다. 앞으로도 끝내 절 가르쳐주시고 지도해주세요.”
주희의 목소리는 감격에 차 있었고, 수옥 자신은 과도히 떨떨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수옥의 몸은 거진 아래로 떨어질 듯하였다. 철주가 몇 번이나 끌어오려 했으나 수옥은 소리를 지를 듯이 흥분하여 있는 까닭에 철주는 다만 그의 곁에서 주의만 시키고 있었다.
“주희 씨의 배반하는 날이 없는 동안 나는 주희 씨의 친구가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앗 위험해요!”
하는 철주의 부르짖음과 함께 수옥의 가벼운 몸이 낙엽지듯이 바위 아래로 곤두쳐 떨어졌다.
수옥은 부립병원으로 떠메어져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다못해 새파래지고 맥박은 거의 끊어질 듯이 약하였다.
당시 첫 손가락의 유력자인 철주의 알선이라 병원에도 예외가 있어 밤중이건만 원장까지 달려와서 수옥을 진찰하였다. 강심제를 세 번이나 주사한 뒤 수옥이 겨우 숨을 내쉬자 얼굴을 찡그리며 오른편 허리에 손을 대고 괴로워하는 표정을 하였다. 그가 떨어질 때 뾰즉한 바위에 허리를 찔리고 굴러 떨어졌던 까닭에 안면에는 작은 상처만 몇 개 있었다.
간호부들은 수옥의 상처를 붕산수로 닦고 가제를 감아놓았다. 진찰의 결과 간장(肝艤)이 파열하여 내출혈이 되었으니, 이 밤으로 개복수술을 하여야 된다는 선언을 하였다.
정찬이 자전거로 × ×역에 달려가 수진에게 급보를 전하고 다시 달려왔을 때 수술의 준비는 다 되어 있어 가족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수옥은 고통과 혼몽 중에서라도 주희에게서는 외면하였던 것이다.
수진이가 집에 달려가 부모에게 사실을 전하고 그들을 새벽차로 오게한 후에 최속도로 자전거를 몰아 달려왔을 때는 벌써 세시 가까이 되어 수옥의 복부가 내출혈로 인하여 약간 부어 오르기까지 하였다. 수진을 보자 수옥의 검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침착성을 잃지 않은 수진이도 너무 당황하여 몇 번이나 자빠질 듯이 정신이 착란되어 있었다.
유 생원 내외가 새벽차를 기다릴 수 없어 밤길 삼십 리를 결어서 병원까지 왔을 때는 짧은 여름밤이 환하게 밝은 새벽이었고, 수옥의 수술이 끝난 후에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였을 때이었다. 유 생원은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수옥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까닭을 모르겠다는 듯이 안간힘을 끙끙쓰면서 뒷짐을 지고 병실을 왔다갔다하고, 수옥 어머니는 딸의 발치에 앉아서 울고만 있었다.
의사와 간호부가 다녀간 후, 잠깐 집에 돌아갔던 정찬이 병실에 들어오며 유 생원에게 인사를 하자 유 생원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철주와 주희는 수술이 끝나고 일단 집에 돌아갔던 것이다.
수옥은 여러 번 물을 찾았다. 그러나 물은 절대로 주지 말라는 의사의명령 이었다. 수옥의 혼수상태는 수술 전과 조금도 다름없으면서 갈증으로 오히려 더 괴로워하게 되었다. 경과는 악화하기만 하였다. 오후 다섯시가 되자 수옥은 갑자기 눈을 뜨며 가느다랗게,
“정찬 씨!”
하였다. 정찬이 조용히 수옥의 베갯머리로 갔다. 수옥은 입속의 말로,
“찬 씨, 날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철주 씨!”
겨우 철주를 부르고는 입술의 경련이 나면서 말을 끊었다. 철주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의사가 와서 식염주사를 놓고 가족들이 수옥의 침대를 에워싸고 서 있었다. 주희는 가족들의 뒤에서 소리 없는 눈물을 홀리고 있었다.
의사는 다시 수옥의 맥으르 살피더니 머리를 좌로 흔들며,
“인제는 회생의 가망이 없습니다. 주사의 효과가 나거든 유언이나 들어두시오.”
하고 뒤로 물러섰다. 수옥이가 소스라치는 듯 눈을 감으며 입 속의 말로,
“철주 씨, 난 당신의…….”
하였다. 철주는 한 걸음 다가섰다. 수옥의 입술이 두어 번 움직거리더니,
“아버지 어머니, 절 용서해주세요. 수진아, 날 욕하지 말아라.”
하는 말을 겨우 마치고 다시 눈을 떠서 무엇을 찾는 듯 힘없는 눈동자가 천장에서 헤매다가 두 번째 경련이 일어나며 그의 눈은 고요히 감기고 말았다. 어머니의 이때까지 참았던 울음소리가, 터져나오면서 그는 몸부림을 쳤다.
정찬과 수진은 수옥의 묘비 앞에 서 있었다. 수옥의 꽃다운 몸이 한 줄기의 연기로 사라진 후 닷새되던 날 새벽이었다. 수옥의 무덤은 그들이 항상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던 수옥의 집 뒤 언덕 위에 있었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 서 있던 정찬의 눈은 새로 입혀진 떼 위에서 떠졌다. 무덤이라도 뚫을 듯한 그의 시선은 묘비의 후면 붉은 글자를 더듬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젊음을 맹세한다고 나의 별에게 속삭이던 한 송이 붉은빛 코스모스! 내 별은 밤마다 반짝이는데 너는 가고말았구나.
1933. 8. 31. KCC
그것이 철주의 글임을 알 때 정찬은 결코 유쾌하지 못하였다. 그는 수옥의 오해를 끝없이 저주하고 싶었다. 묘비 앞에는 한 묶음의 코스모스가 있었다.
“정군!”
부르는 소리에 머리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철주가 수척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정 군 용서해주게. 난 모든 것들 다 이해하고 자넬 존경하게 되었네. 만일 내 누이 주희에게 큰 결점이 없으면 끝까지 주희의 지도자가 되어주는 동시에 또한 나같이 약한 자를 이끌어주게!”
철주의 말소리는 간절하여 거진 애원하다시피 들렸다.
“만일 김철주 자네가 우리의 적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정 군! 그 점만은 날 믿어주게. 아니 앞으로 나의 실천이 그것을 증명하여주겠지. 수옥 씨가 굴러떨어진 전락의 비탈을 나는 한 걸음에 뛰어올라갈 용기와 힘을 기르고 있겠네. 자아 정 군, 유 군, 내 손을 잡아주게.”
철주는 정찬과 수진에게 그의 두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철주의 손을 각각 잡아주었다.
동천에 솟는 붉은 햇발이 세 청년의 얼굴을 고루 비추어주고 있었다.
묘비 앞에 꽂아놓은 몇 송이의 코스모스가 미풍에 한들거리며 햇볕을 가득히 받고 있었다.
(1937년)
2016년12월 1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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