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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주둔지.
42.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그리고 다낭과 호이안
하필이면.... 베트남 전도를 펼쳐 보며 내가 한 첫 말이다. 우리는 38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 앞서 미군 군수기지가 몰려 있는 곳이 판랑, 나트랑, 그리고 다낭이라고 이미 말했었다. 나트랑 미군 해군기지는 나중 전쟁이 끝난 후는 러시아 해군이 접수를 했다. 당연 베트콩들이 눈엣 가시로 생각할 곳들이 바로 그곳들이고 이를 지키고 근거지로 삼는 것 또한 중요한 임무이고 당연한 것이다. 우리 군인들 부대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캄란, 나트랑, 난호아, 뚜이호아, 송카우, 뀌년, 푸캇, 빈케, 추라이, 호이안, 다낭까지 해안선을 따라 길게 포진하였다. 주력부대 말고는 남쪽으로 지안에 비둘기 부대, 붕따우에 외과 병원 그리고 호치민에 주월 한국사령부와 해군 수송전대인 백구부대가 위치했을 뿐이다.
북위17도선 DMZ에는 동하와 꽝트리가 있고 그 아래 후에가 위치하고 있다. 베트남을 대표하는 왕궁이 있는 후에나 호이안등 전통적 명소가 하필이면 최전선 길목에 있으며 모든 군수물자나 기지가 밀집한 다낭이 또 바로 이웃이라는 게 나의 ‘하필이면’의 첫째 이유다. 명소가 망가질 것은 불보듯 뻔한 상황이다. 뭐 베트남은 우리와 달리 호치민 루트틀 통해 두루 침입이 가능하다는 특성으로 굳이 최전방과 후방을 나누기는 그렇지만 우리 한국군이 주둔한 것으로 보아서도 후에나 다낭 호이안은 전쟁의 한복판임에 틀림이 없다. 추라이 공군기지, 지방 1번국도변 미군이 사용하던 추라이 공군기지는 한국군 해병대가 처음 투이호아 에서 주둔하다 이 지역을 백마28연대에게 인수인계하고 중부지방 추라이 공군기지로 공수되어 추라이 지역에 처음으로 청룡여단 본부가 생긴 지역인데 바로 그 옆이 호이안이다.
그런데 국경을 유심히 살펴보면 기다란 베트남영토에서 잘록하게 들어가 라오스 국경에서 최단거리에 해당되는 곳이 바로 다낭부근이다. 이 말은 국경에 붙은 호치민 루트로부터 돌격 개시하여 베트콩들이 죽자 살자 달라붙으면 이동거리가 짧아 호전성으로서 아주 안성맞춤인 곳들이 바로 이곳들로 잘만하면 북위17도 경계가 무너지고 군수지원도 무기력하여 전세를 바로 뒤집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내가 ‘하필이면’ 하는 그 소리다. 그러기에 부온 마트옷, 쁠레이꾸(PLEIKUE) ,꼰뚬(KON TUM), 빈케등의 국경과 연결되는 중간에 낀 도시들 또한 무사할 수 없었고 이 고지들의 탈환이 또한 관건이었다.
그런데 이 지대들은 설상가상으로 중부 산악지대들로 은폐나 엄폐가 또한 용이해 장기전에서는 절대적으로 미군이나 우리에게 불리했다. 꼰뚬의 바로 위에는 해발 2598미터의 응옥린산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에 추라이 공군기지에 가까운 빈케나 라오스 국경 1마일 지점 아싸우 계곡의 압비아 산은 바로 고도 후에와 베트남 제2도시 다낭이 이어지는 전술적 요충지로 이곳은 실로 중요한 전략 지였다. 알다시피 후에는 구정공세 때 도시가 베트콩에 점령되어 엄청난 사람이 죽고 생매장된 곳이다. 그러니 아무리 수복 때 신경을 써 옛 고궁을 보호한다하였지만 고도의 도시가 온전 할 리 없다. 참파왕국의 수도였고 15세기부터 국제무역항으로도 이름을 날렸던 호이안은 또 아니 그럴까.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한 햄버거 힐이 바로 라오스 국경 1마일 지점 아싸우 계곡의 압비아 산에다가 미군이 갖다가 붙인 이름이다. 이곳은 원래 그린베레가 원주민 부대와 점령했으나 66년 북베트남군 2개연대가 점령했고 이후 몇 차례 주인이 바뀐 곳이다. 1969년 5월 미군 101 공수사단은 이곳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무자비한 폭격과 돌격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북베트남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서 미군은 애를 먹었다. 산 정상의 고지를 향해 소총을 쏘며 전진하는 육박전과 포탄과 수류탄이 오가는 끝에 많은 월맹군과 미군의 살점과 피가 땅에 얼룩지자 이곳을 햄버거 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6일간의 혈전 끝에 북베트남군 600명 미군 50명의 전사자를 내고 고지를 점령했지만 적들에게 둘러싸여 장기주둔하기 힘든 미군은 바로 철수하고 만다. 미군은 보병부대와 활약이 뛰어났음을 선전하려 했지만 이 전투는 오히려 역효과만 나았다. 영구 점령할 곳도 아닌 곳에 큰 희생을 감수하며 무리한 공격을 하였고, 이런 식의 허무한 전투는 베트남전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증거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참전용사들은 어떠했을까. 사생결단의 각오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한 우리의 용사들, 막상 글로 옮기려니 그만 마음이 뭉클해진다. 세계적으로 용맹을 날리던 우리의 장병들, 베트콩도 알아서 피했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니다. 해병대2여단 만해도 번개작전(1965년 카인호아성),비호작전(1966년)제퍼슨작전(1966년 1월)등으로부터 시작하여 피페스톤 계곡 작전, OPERATION HOANG DIEU (1970년 12월 꽝남성)등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를 다 소개할 수도 없고 아쉽지만 몇몇 전투에 대해서만 본고에 소개하기로 한다.
미국의 요청으로 1966년 8월 캄보디아 국경주변 200m ~ 300m 두코 고지로 간 맹호 기갑연대 3대대 9중대. 이 지역에는 산악 소수민족인 몬타나족과 약간의 월남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받은 명령은 광범위한 지역에 전술기지를 구축하고 적의 내륙침투를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미군과 함께 호치민 루트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구축한 진지 근처 인근 8km 옆에 미군 전술기지가 있었다. 부대 진지 형태는 한가운데 고지 정상을 두고 원을 그리며 둘러진다. 채명신 식 중대 전술기지 그대로였다. 우기가 왔다. 진지 안 어디서나 진지와 교통호를 매일 보수하는 삽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는 계속 오고 그에 따른 삽질은 허구한 날 계속되고 병사들 사기가 조금씩 가라앉을 무렵 소식 없는 베트콩이 수상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자고 연이은 행군을 실시한 후 피로가 극한으로 치달을 무렵 베트콩들이 출몰한다. 당시 미 공군의 조명 지원은 귀중했다. 기록에 따르면 적 사살 189명, 포로 6명, 61mm 박격포 5문, 중경기관총 11정, 개인화기 62정, 대전차 유탄포 12문, 기타 10여만 발의 실탄을 노획하였다. 아군 사상자는 전사 6명, 부상 42명이었다. 당시 승리로 채명신 장군이 만든 중대전술기지 방어개념은 미국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짜빈동 전투,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승리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짜빈동 전투’가 끝난 뒤 현장을 찾아온 한국·미국·월남의 고위 지휘관들은 한 결 같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한국군 1개 중대가 북베트남 정규군 1개 연대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기 때문이다. 1966년 9월 23일 제2 해병여단은 베트남 중부 꽝나이성 북부지역 추라이로 이동해 지역평정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베트콩의 활동이 상당히 왕성한 지역으로, 북베트남 정규군의 침투가 용이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해당 지역 일대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언제 어디서든 해병 2여단을 공격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고 1967년 2월이 되면서 기습공격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 징후 또한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2월 14일에서 15일 밤사이에 걸쳐 규모가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군이 짜빈동에 위치하던 11중대의 전술기지를 급습했다.
제11 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짜빈동 마을은 꽝나이시(市) 북쪽 12km 지점에 위치했다. 기지는 둘레가 800m, 높이가 30m 정도 되는 구릉지대에 타원형으로 설치되었다. 1967년 2월 14일 밤에는 초승달이 떴으나 오후 10시 무렵부터 짙은 안개와 가랑비가 내려 시야 확보가 어려워졌다. 오후 11시 30분 경에는 베트남군 침투부대가 3소대 전방기지 외곽 철조망을 폭탄통으로 폭파시켰다. 중대는 즉각 81mm 조명탄을 띄워 적정을 확인했고 1개 소대 규모의 적들이 숲으로 도주하는 것을 발견, 집중사격을 가했다. 베트남군은 산발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중대의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리고 지난 밤 적과 교전한 바 있는 제3 소대 전방에서 은밀히 접근하는 적을 발견했다. 이에 따라 중대장은 즉시 전 병력을 배치했고 적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하도록 지시했다. 이어서 조명탄이 터지자 중대전술기지를 포위하던 베트남군은 기지를 향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11중대 역시 대응사격을 가함으로써 한 동안 포격전의 양상이 지속됐다. 그러나 베트콩의 공세는 상당히 강했다. 국군의 집중적인 포화 속에서도 3소대 정면에서 돌파를 시도하던 군 주력은 외곽 철조망을 폭파하고 3소대 진지를 돌파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날이 밝으면서 11중대의 역습은 성공했고 베트남군도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지는 못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병사들이 부상했으나 후송은 생각지도 못했고 전체적으로 난전이 벌어졌다. 이학현 상병은 교통호에 적이 진입하자 수류탄을 폭파시켰으나 본인도 산화했고 송용섭 일병은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뒤이어 사격을 지속하다가 본인도 전사했다.
확인된 11중대의 전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 등이었으며 확인된 전과 이외에도 다수의 적들이 포격 등으로 인해 사망 혹은 부상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확인된 베트남군의 시신 중에는 1연대 90대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장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11중대는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중대전술기지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국군의 전투력을 과시했다. 앞선 두코 전투에서 대두된 중대전술기지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전투였고, 이후 대한민국 해병대는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오작교 작전, 이 작전은 1967년 3월 8일~5월 31일까지 2개월간에 걸쳐 실시된 군단급 작전으로서 퀴논(퀴년)일대의 맹호사단(수도사단)과 투이호아~판랑까지의 해안선 일대의 백마사단(제9보병사단)이 북진하여 진출하여 중간지점인 호아다에서 만나는 1번국도의에 깔린 베트콩의 평정 및 개통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오작교 작전명은 말 그대로 견우와 직녀가 만나기 위해서 서로 은하 다리를 놓는다는 설화에서 따온 작전명이다.
1966년부터 제101공정강습보병사단이 투이호아~퀴논 사이 지역에서 작전을 펼쳤으나 뚜렷한 성과가 없는 지역이었고 1번국도 자체가 남베트남의 핵심 교통로였기 때문에 반드시 베트콩들을 소탕 평정하여 도로를 개통할 필요가 있었다. 도로가 차단당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고, 한국군 백마사단이 1966년 9월에 배치됨에 따라서 한국군으로서도 수도사단과 백마사단간의 상호 연계와 지역 안정화를 위해서 판랑와 퀴논간 사이 약 400km구간의 평정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남베트남이나 미국으로서도 1번국도의 개통은 남베트남의 물류수송 등이나 군사작전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문제였다. 미군들은 자신들도 못한 일을 한국군이 한다는 것에 우려감이 강했었다.
한국군의 오작교 작전이 1967년 5월 31일에 최종 종결됨에 따라서 남베트남 중부 해안도로가 완전히 개통되었고 야간에도 민간버스들과 트럭들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반이 확보되었다. 더욱이 한국군은 1번 국도를 중심으로 북쪽 봉선~판랑까지 총 6800㎢의 작전면적으로 작전활동이 확대되었다. 이 작전은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물류수송-경제-통치영향력을 강화하는 결정적 작용을 했기 때문에 당시 북베트남과 VC들에게는 매우 큰 타격이 된 작전이었다. 그 때문에 1968년 구정 공세가 진행될 때까지 안전지대로서의 역할이 되었을 정도로 VC들의 활동이 매우 저조했고 그 덕에 288명의 귀순자들이 나타날 정도로 확실한 평정지대를 확보하게 된다.
당시 이 작전에 대해서 해외 언론들에 대한 호평일색의 작전이었을 정도로 매우 큰 작전술적인 성공 작전이었으며 베트남 전 이래로 한국군의 첫 군단 급 작전의 큰 성과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하지만 작전 중에 경계소홀에 의한 가장 큰 피해가 2차례나 발생했었다. 송꺼우 남쪽 무명고지에 주둔해있던 맹호사단 제26연대 1대대 2중대에서 경계근무자가 조는 바람에 베트콩들이 침투하여 아군의 전투식량과 물자를 약탈해갔다. 전투가 벌어져 아군 전사 20명 부상 38명이 발생하여 오작교 작전 이래로 가장 큰 아군 피해가 발생하였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더글라스 맥아더의 명언이 결코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한 셈이 돤 것이다.
참전 이래 단일 전투로는 사상 최악의 피해를 입은 전투도 있다. 일명 짜빈박 전투. 1967년 1월 5일부터 투망작전을 실시하는 와중인 1967년 1월 10일에 발생한 대한민국 해병대의 전투로 전사, 부상, 포로, 행방불명 등 전체적 병력 손실이 1개 중대를 넘었기 때문에 대대 궤멸판정을 받아 해병 청룡여단 전체의 작전이 한동안 중지되기도 했었다. 1966년 8월 꽝응아이성 쭈라이 지역으로 이동한 한국해병 청룡여단은 1967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지역평정작전에 들어가게 된다. 베트남 중부인 쭈라이 지역은 해방구(핑크빌)지역에 해당하는 베트남 중부지역이었기 때문에 VC(베트콩)들의 세도 컸다.
한국 해병대가 98고지와 대대 지휘소 그리고 안디엠 마을과 주변 작은 마을이었던 짜빈박 마을간의 교유와 왕래가 원활한 것을 VC들과 북베트남군(NVA)들은 계속 주시하여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병대 9중대의 보급라인을 공격하기 위해서 200여명의 단대호 미상의 부대를 소규모로 침투하여 9중대의 보급라인 근처의 40고지(197고지와 98고지의 사이)로 집결한다. 게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197고지에도 NVA들이 추가 침투함으로서 사실상 적은 197고지와 40고지에 매복한 상황이 된다.한국해병대는 지리적 불리함 속에서 싸워야했고 상대적으로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있던 적은 한국군을 공격하는데 매우 유리했다. 더욱이 한국 해병대는 개활지였기 때문에 40고지에서 날아오는 사격은 그야말로 한국 해병대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해병대 2소대와 대대지휘부 선두그룹이 조금이라도 이동하면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피해는 계속 커질 수 밖에 없었고 사실상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더욱이 쏟아지는 비와 197고지의 전파방해로 한국 해병대 3대대는 전술망내의 9중대 외에는 지원을 요청할 곳조차 없었다. 초기 포병지원사격을 통한 화력제압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197고지의 전파방해로 연결이 되지 못했다. 선봉의 경계소대가 사실상 전멸 상황에 처했고 대대역시 반수가 197고지의 일제사격에 피해를 입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대지휘부의 통신병들만 골라서 사격을 해대는 통해서 경계소대도 통신병을 잃었고 동시에 선두의 2소대와 대대지휘부간의 교신은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이었다. 사실상 단절된 한국 해병대는 전멸위기로 몰리게 된다.
유일한 통신망이었던 대대 지휘부와 9중대간의 교신을 통해서 9중대가 아군 구출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106mm 무반동총과 81mm 박격포를 통해 40고지에 화력제압이 실시되는데 당시 시계가 워낙 안 좋았던 터라 명중률은 낮았고 탄착역시 계속 상탄이 나고 있었다. 더욱이 여단 예비전력인 2대대 7중대도 새진지로 이동 중에 부피트랩의 공격을 받아서 긴급헬기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 그야말로 한국군 해병대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때문에 3대대의 유일한 여단본부의 예비대였던 10중대가 출동하지만 이 출동 역시 악천후 문제와 미 해병간의 지원문제를 두고 잡음이 발생, 17시 30분이 되어서야 작전지역에 도착한다. 그러나 안개와 대공사격으로 인하여 10중대 전원이 제대로 전개를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18시가 넘어서야 한국 해병대 10중대가 20고지 부근에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상황은 반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적은 점진적 철수작업을 거쳐 197고지를 마지막으로 전 부대가 철수함으로서 다음날인 11일에 있었던 한국 해병대의 반격은 무의미하게 된다. 오히려 전사자 수습과 사후처리 중에 적이 설치한 부비트랩에 아군이 피해를 입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청룡여단 전체가 작전중지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참담한 패배였다. 당시 1/2대대는 아예 작전중지에 대기상태가 되고 10중대는 9중대 기지에서 있다가 12일 오후에 대대 지휘소 쪽으로 완전철수를 한다. 당일 전투로 1개 중대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은 전례는 당시 한국군에게는 존재하지도 않았기에 충격도 컸고 대대가 전투불능의 전멸판정을 받은 것도 파월 한국군 중 처음이었다.
이렇듯 세계 최강의 미군에게 쓰라린 패전의 상처를 안긴 전쟁이었던 만큼 국군도 때로는 악전고투를 경험해야 했다. 전사자 5099명에, 부상자도 1만1000명을 넘었다. 미군이 정글 제거와 시야 확보를 위해 사용한 고엽제 후유증은 지금도 9만 여명의 참전 군인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기에 베트남 전 파병은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는 현대사의 사건이라 할 것이다. 일각에선 냉전시대 부산물로 평가절하하거나 경제개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용병 파견으로 폄하한다. 미군의 베트남 전 참전 명분이었던 ‘통킹만 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판명 난 뒤에는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했다는 비판도 있었고 파병 장병들의 민간인 학살 등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 참전으로 한·미 동맹이 더욱 공고해지고 군의 현대화와 함께 경제성장의 발판이 됐다는 엄연한 사실은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해 알다시피 64년 9월22일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이 호찌민(옛 사이공)에 상륙한 이래 65년 10월 해병 청룡부대, 11월 육군 맹호부대가 속속 남베트남에 도착했다. 이후 전선 확대에 따른 미국의 거듭된 추가 파병 요청으로 국군의 파병 규모는 1968년에만 약 5만 명에 이르렀다. 64년 9월부터 73년 3월까지 8년6개월 동안 총 32만4864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태국·호주·뉴질랜드 등 파병국 중에서 미군을 제외하면 우리 규모가 가장 컸다. 한국군은 65년 10월 말 ‘빈딘성 풍선’ 전투를 시작으로 여단급 이상 30회, 연대 급 186회, 대대급 966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오작교·짜빈동(베트남 쩐꽝타인) 전투등은 우방군과 적군 모두에게 국군의 용맹함을 과시한 대표적 전투였다.
이를 입증하듯 외신 보도에 투영된 국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프랑스군과 월남군, 미군이 12년간 수백만발의 포탄을 쏘아대고, 수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공산군 요새를 한국 해병대가 단 2시간 만에 점령했다, 대체 우리 연합군에게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르몽드)
“한국군의 전술과 미군 전술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군은 적의 사격을 받으면 즉각 2개 내지 그 이상의 방향에서 공격을 가해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미군은 적의 사격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포병지원이나 공중폭격을 요청한다. 그다음에 공격을 하게 되니 적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만다.”(미국 하원 증언록에 실려 있는 하원 국방위원장의 증언)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라고 지시했다.”(뉴욕타임스)
누가 어느 시각을 갖든 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정치·외교·경제 등 전 방위 분야에서 빛을 발했다. 무엇보다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과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을 굳히는 계기가 됐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5·16군사정변 이후 껄끄러워졌던 한·미 관계는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혈맹으로 거듭났으며 6·25전쟁 이래 피 원조국의 처지에 머물렀던 한국은 파병을 계기로 자유민주진영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우리도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다는 국가적 자신감이 높아진 점도 큰 수확이었다. 바로 우리의 장한 용사들이 사력을 다해 이룬 쾌거였으며 그로 우리의 미래는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