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정치투쟁 MZ교사들 외면!” 얼마 전 동네 음식점에 갔다가 신문 1면에 커다랗게 적힌 헤드라인에 눈길이 갔다. 김용서 교사노조위원장이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이었는데, 전교조에서 분가한 교사노조가 출범 5년 만에 전교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직으로 성장한 인과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논지의 핵심은 정치투쟁을 지향하는 전교조와 달리 교사노조는 실사구시의 노선을 견지함으로써 젊은 교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보수 언론들은 걸핏하면 전교조에 정치색 올가미를 덮어씌운다. 도대체 ‘정치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사가 어떻게 하면 ‘정치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상투적인 답으로 ‘정치적 중립’ 운운하곤 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중대한 정치적 이슈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권력의 편을 드는 것일 뿐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다. 이를테면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했을 때 역사학계에서 찬반 양론이 들끓었지만 침묵했던 학자들도 있었다. 이들의 입장이 정치적으로 중립이었을까? 또한 교사들은 진실이 왜곡되건 말건 권력이 시키는 대로 가르쳐야만 하는 것일까? 이를 거부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교사는 ‘정치적’이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하는데, 정치적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명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적이라 함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 했다. 슈미트는 도덕적 영역에서 선과 악, 미학에서 미와 추에 대한 분별이 주된 이슈가 되듯이, 정치적인 문제는 적과 동지에 대한 구분을 본질로 한다고 봤다. 이 단호한 관점을 슈미트가 택한 것은 법학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것’을 배제하려 한 자유주의 사상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슈미트의 개념은 앞서 살펴본 ‘정치적 중립의 허구성’과 일맥상통한다. 슈미트의 정치 성향은 우익보수주의였지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적확하고 통렬한 그의 개념은 우파와 좌파 사상가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슈미트의 시대에 법과 정치의 분리를 주장한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은 일제강점기의 순수문학론을 연상케 한다. 순수문학론자들은 일제의 착취와 폭압에 신음하는 민중의 삶을 외면한 채 자연과 전원생활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이들은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참여문학가들을 비판하며 예술가들이 정치성을 배제한 순수한 창작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 송이 국화꽃의 숭고미를 노래하던 입으로 가미가제를 찬양한 서정주나 독재자 전두환에게 다가가 그의 꽃이 된 김춘수에서 보듯, 이들의 삶은 순수와 매우 거리가 멀었다. 물론 선한 삶을 살다 간 순수문학론자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들도 정치적으로 중립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예술가가 일제 침탈이라는 명백히 불의한 현실 앞에서 침묵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를 이롭게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예술가들이 정치색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 또한 정치적이다. 유신헌법을 미화하고 광주민주화항쟁을 왜곡하는 교과서를 그대로 가르친 과거의 교사들이 정치적으로 중립이었던 것이 아니다. 왜곡된 진실을 무비판적으로 가르치면 정치적 중립이고 문제제기를 하면 정치적인 교사로 몰아가는 것은 말이 아니다. 지금 그런 시대는 가고 없다고? 아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교사에게 정치적 중립을 강요하는 현실 자체가 교사노동조합에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을 위한 정치투쟁 명분을 부여하고 있다.
끝으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문학과 교육이 존재하지 않듯이 중립적인 언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용서 위원장은 수구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전교조를 폄훼하는 기사를 생산하게 한 자신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처신이었는지 성찰하기 바란다. 김 위원장의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교사노조가 전교조의 벗인지 동지인지, 심각하게 회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