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25 망해사 답사
자유인 조동화는
4/25(음3/17) 어머님 기일날이라 형제들이 모여 점심을 같이하고 어머님묘역에 들러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추모한후, 날씨가 화창하여 아우의 승용차로 부안 변산반도-새만금 남북도로-동서도로를 거쳐 심포를 지나 망해사를 답사하였다.
망해사에 들르니 4/13 대웅전이 불에 탄 모습으로 천막이 쳐져 있었다.
망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1년 671년 부설거사가 창건하고 그 후 중국 당(唐)나라 승 중도가 중창(重創)했으나 절터가 무너져 바다에 잠겨졌다고 한다.
그누가 인생은 나그네라 말했던가?
한세기를 풍미했던 사람들도 떠나가고 인생무상 아니던가?
2024년도4월을 질주하고 가정의 달 5월을 향해 달리고 있구나.
어떻게 사는삶이 잘사는 삶일까?
인생무상 화무십일홍 그려려니 긍정적으로 살면 되야.
덧없고 부질없는 삶의 여로에서 좋은일 많이 많이 하시고 그려려니 즐거운 시간 됩시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하지요.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살아볼만한 세상, 기왕지사 이세상에 왔으니 즐겁고 행복을 꿈꾸며 그낭 저낭 살아야 하지요.
이리도 한세상 저리도 한세상 세월은 흘러갑니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감사합니다.
<망해사에서 서해바다 지평선을 배경으로 1964년생인 14살 적은 여동생과 사진을 남기었다.
조동화의 여동생은 군산대학 음악과를 전공하였으며 각종악기에 소질이 많은 외삼촌의 천재적인 재능을 닯아 음암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여동생은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지적공사에 다니고 있다.>
<망해사 대웅전이 4/13 저녁11시경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의 흔적이 없어지고, 임시로 천막을 설치한 모습이다.>
망해사(望海寺)
●주소 :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소속 말사이며,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렇게 서해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이어서 절 이름이 망해사이다. 절의 역사는 영호 정호(映湖鼎鎬, 1870~1948) 스님이 지은 「망해사중수기」에 자세하게 전한다. 먼저 창건은 통일신라시대인 754년(경덕왕 13)에 중국 당나라에서 건너온 중도법사(中道法師)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른 문헌을 보면 창건주는 중도법사가 아니고 도장법사(道藏法師) 혹은 통장화상(通藏和尙)으로 말하기도 한다. 도장법사 외에 중도법사, 통장화상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어떤 스님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세 스님의 법명이 비슷한 발음을 지니고 있어 어쩌면 도장 스님의 이름이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절의 창건에 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전하다. 즉 백제 때인 642년(의자왕 2)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처음 창건하였고 이어서 중도법사가 중창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건의 이야기는 모두 후대의 기록들이고 또 창건 당시의 흔적을 전하는 유물도 전혀 남아있지 않아 분명한 창건 시기나 과정은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는 1073년(문종 27) 심월대사(心月大師)가, 그리고 고려말인 1371년(공민왕 20) 지각선사(智覺禪師)가 중창하였다.조선 초기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매우 쇠락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절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나름대로 법등을 이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1624년(인조 2)에는 김제 출신의 고승 진묵 일옥(震默一玉, 1562~1633) 스님이 낙서전(樂西殿)을 새로 짓는 등 절을 중창하여 사세를 크게 넓혔다. 또한 18세기에 편찬된 『범우고』와 『가람고』에도 절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이후 쇠락과 중건을 몇 차례 거듭하다가, 조선 후기에 만화 관준(萬化寬俊, 1850~1919)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 이어서 1915년 계산(桂山) 스님이 중창하였으며, 1924년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1933년 정희(整禧) 스님이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새로 짓고 낙서전을 중수하였다. 한편 1884년(고종 21)의 읍지를 토대로 해서 일제강점기인 1910~1945년 사이에 편찬된 『김제군지』에, ‘망해사는 (읍에서) 서쪽으로 5리에 있으며, 진봉면 진봉산 아래에 자리한다. (현재) 승려 한 명이 주석하고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하여서도 망해사는 19세기 후반에 중창되어 비록 소규모나마 근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IT강국 스마트폰 컴퓨터 대한민국 만세
IT천재 스티븐잡스와 빌게이츠의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발명으로 한국에는 세계속의 경제 10대강국으로 될수 있었지요.
국운이 따라 주었다고 봐야지요.
박정희대통령의 산업화정책이 부를 이루었고, 김대중대통령의 정보화정책이 IT강국이 될수 있었지요.
한국의 반도체기술은 어느나라도 한국을 따라잡을수 없지요.
오늘날 한국사회가 편리한 스마트폰세상속에서 사는 것은 김대중대통령의 임기5년동안 10조를 초고속 인터냇망 구축사업(인터냇고속도로)에 투자한 공로가 있지요.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대통령의 공로를 이끈 것은 인정하고, 김대중대통령이 민주화를 이룩하고 세계속의 한국이 IT강국으로 우뚝설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부해도 될만한 나라가 되었지.
IT강국 대한민국 만세.......
사실상 대한민국 대통령중 공로를 세운 인물은 박정희와 김대중이여.
스마트폰 세상 즐겁고 행복한 세상 편리하게 살아갑시다.
이시대의 필수품 스마트폰
세상의 변화속에서 스마트폰은 우리생활에 필수품이 되었지요.
좋든 싫던 이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수 없습니다.
모바일이란 이동통신 혹은 이동통신 기술을 기반으로 한 무선 인터넷 기술을 통칭하는 단어로, 이제 개인간, 기업간 또는 개인 대 기업간의 거래도 인터넷을 이용하는 무선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스마트폰시대는 인간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속도, 편의, 효율’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기에 디지털 혁신은 계속된다. 이말이지.
속도, 편의, 효율은 한 번 경험하면 되돌리기 힘든 불가역적 속성을 가졌다.
우리한국은 스마트 IT 정보통신기술이 김대중 대통령시절 비약적으로 발전했지요.
모바일(Mobile) 무선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경제.문화.정치.사회 등 각 분야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말았다.
휴대폰의 역사
➡1세대(1G Generation)이동통신
아날로그와 벽돌폰으로 기억되다
1세대 이동 통신(一世代 移動通信)은 음성통화만 가능한 아날로그 통신 시대를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부터 상용화되기 시작되었으며, 다이나텍 8000x는 무게가1kg, 길이33cm 로 우리에겐 '벽돌폰' 으로 불렸었다.
➡2세대(2G Generation)이동통신 디지털시대
1996년 드디어 이동통신 기술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
2세대의 또 다른 특징은 디지털 통신 방식을 사용하게 되면서 음성뿐만 아니라 문자와 같은 데이터 전송도 지원.
➡3세대(3G Generation) 스마트폰의 세상
2002년에 국내에서 시작
휴대폰 화면에 LCD기술이 적용되면서 사진, 게임, DMB 같은 멀티미디어 기술이 가능하게 됨.
DMB,MP3,카메라 기능까지 기본으로 사용가능
➡4G(4G Generation) LTE
국내 4G 서비스는 2011년 7월 LG유플러스와 SK텔레콤이 경쟁적으로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서비스가 시작
3세대 스마트폰보다 5배가량 전송속도 빠른LTE
휴대전화에 인터넷 통신, 정보검색등등 핸드폰으로 컴퓨터 지원 기능을 추가한 지능형 단말기!
➡5G(5G Generation)
4차 산업혁명 기반 되는 5G 2019.4월 5G시대 개막
5세대(5G) 이동통신시대…VR·AR 무인차 등이 생활 속으로5G는 초고속, 초연결, 초저지연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5G 시대가 열렸지만 서비스가 안정 궤도에 오르려면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비싼 요금제와 단말기 요금도 5G 보편화에 장애물로 작용할 것으로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