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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 20세기 전기에 일본에서 간행된 남부 사할린 관광엽서첩 ‘가라후토 16경’. 일본 관할 지역인 남부 사할린의 선주민인 오로크인 여성이 전통복장을 입고 아기에게 젖 먹이는 모습이 보인다. 식민지 시기 조선을 테마로 한 관광엽서에는 아들 낳은 조선 여성이 가슴을 드러낸 모습이 종종 실려 있다. 새로이 일본국의 영역에 편입된 지역에 대한 일본 남성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김시덕 |
지난 회에는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과정에 아무르강(흑룡강) 유역에서 청·조선 연합군과 충돌한 나선정벌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후 러시아와 만주족의 청이 맺은 네르친스크조약으로 인해 러시아 측은 아무르강 연안과 연해주 지역으로의 진출을 19세기 중기까지 포기하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 세력은 쿠릴열도와 사할린을 남하하며 일본 세력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번 연재는 이제 독자분들께 가장 낯설게 느껴질 영역에 이르렀다. 유라시아 동해안 북부의 오호츠크해 연안에서 전개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충돌이 그것이다. 오늘날의 쿠릴열도 남부 섬들에 대한 일본 측의 영유권 주장이 상징하듯이, 18세기 후기에 이 지역에서 시작된 양국의 저강도 분쟁은 울치인·니부흐인·오로크인·아이누인 등의 선주민들을 희생시키며 20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일본은 현재 4개의 영토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일본 민관(民官)이 가장 해결에 열심인 곳이 바로 이 러시아령 쿠릴열도 남부이다. 중국·대만과 충돌하고 있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는 일본 관할, 독도는 한국 관할, 북태평양의 오키노토리섬(沖ノ鳥島)은 일본이 관할을 주장하고 있지만 영유권 인정을 받지 못하는 환초(環礁)이다. 일본 정부는 쿠릴열도 남부 도서를 분쟁지역으로 국제사회에 부각시키려는 반면, 센카쿠열도가 분쟁지역임은 부정하는 상충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이 처한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독도 문제를 고찰하는 데 참고가 될 터이다.
캄차카반도, 사할린, 홋카이도, 쿠릴열도로 둘러싸인 거대한 내해(內海)인 오호츠크해에 대해 현대 한국인이 지니고 있을 거의 유일한 이미지는, 한반도에 장마철을 가져오는 오호츠크해 기단 정도가 아닐까? 한반도인은 역사상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들과 적으나마 관계를 갖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강제노동을 위해 사할린에 징집되었던 조선인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1945년 8월에 옛 소련과 일본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학살되었고, 일부는 오늘날까지 사할린에 남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과 함께 러시아 한인의 일대 세력을 이루고 있다. 또한 1983년 9월 6일에는 대한항공 007편이 캄차카반도 상공에서 소련군에 의해 격추되었다. 구 냉전의 끄트머리인 1983년에 소련에 격추된 한국의 민항기와, 신 냉전의 초입인 2014년 7월 17일에 아마도 러시아계 반군에 의해 격추되었을 말레이시아의 민항기. 30여년의 간격을 두고 러시아의 동쪽과 서쪽에서 냉전의 결과로 민항기가 격추되었다는 것은 우울한 역사의 우연이다.
조선시대에도 드물지만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을 경험한 사람이 있었다. 1757~1758년 사이에 사할린 또는 홋카이도에 표류한 이지항(李志恒)이라는 무관(武官)이다. 그가 남긴 ‘표주록(漂舟錄)’이라는 기록은, 앞서 살펴본 바 있는 문순득(文淳得)의 ‘표해시말(漂海始末)’과 함께 한반도 주민이 유라시아 동해안의 남쪽과 북쪽을 관찰한 가치 있는 증언록이다. 4월 13일에 부산을 출발한 일행은 동해에서 조난하여 아이누인의 영역에 표착한다. 아이누인은 사할린·홋카이도·쿠릴열도에 거주하였는데, 이지항이 표착한 곳은 사할린이나 홋카이도의 서해안일 터이다.
‘표주록’에는, 표류 끝에 육지에 가까워지자 “앞길에 태산과 같은 것이 비로소 보였는데, 위는 희고 아래는 검었다. 희미하게 보이는데도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점점 가까이 가 살펴보니, 산이 푸른 하늘에 솟아 있어 위에 쌓인 눈이 희게 보이는 것이었다”(‘국역 해행총재 III’ 408쪽)라는 대목이 보인다. 여기서 언급되는 눈 쌓인 산은 홋카이도 서북쪽의 리시리섬(利尻島)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섬은 동해 연안에서 특히 눈에 띄는 존재였던 듯하다.
근세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문헌을 보면 1592년 여름에 함경도를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두만강을 넘어 ‘오랑카이’, 즉 오랑캐라 불리는 야인 여진과 싸웠다가 패하여 조선으로 돌아오던 중에 함경도 북단의 서수라(西水羅)라는 곳에 이른다. 이곳에는 홋카이도 남단의 마쓰마에(松前)라는 곳에서 함경도로 표류해 온 일본인의 안내로 바다 멀리 일본의 후지산(富士山)을 조망했다는 전설이 확인된다. 당연히 함경도에서 후지산이 보일 리가 없기 때문에, 가토 기요마사가 보았다는 이 산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다. 이때 거론된 후보 가운데 하나가 리시리섬이었다.
이 이야기는 전설에 지나지 않지만, 오호츠크해 연안 일대에서 특히 눈에 띄는 리시리섬과, 오호츠크해 연안에서 일본인이 활동한 최북단 영역인 마쓰마에가 이 전설에 등장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지항 일행 역시 리시리섬을 본 것 같고, 아이누인들이 이들을 귀국시키기 위해 보낸 곳이 마쓰마에로 보인다. 마쓰마에는 당시 아이누인의 땅이었던 홋카이도에서 유일하게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남쪽 끝의 지역이었다. 이처럼 이지항은 그때까지 한반도 주민 가운데 아무도 도달한 적 없는 오호츠크해 연안의 북방 세계 의 질서를 우연에 의해서이지만 경험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표류기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기록한 신유(申瀏)의 ‘북정록(北征錄)’과 함께, 한반도 주민이 유라시아 동북부에서 활동했음을 전하는 소중한 문헌이다.
유라시아 동해안 북부를 표류한 조선인 이지항이 사할린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연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사할린의 지배권을 두고 경합한 주요 세력은 아이누인과 몽골제국·명·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인이었다. 오호츠크해의 남쪽 경계를 이루는 사할린섬과 홋카이도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처음으로 수립한 것은 아이누인이었다. 원래 일본열도의 혼슈(本州)에 거주하던 아이누인은 일본인 세력에 밀려 점차 북으로 향했고, 13세기 중기에는 홋카이도에서 사할린으로 건너간 데 이어 아무르강 하구까지 진출하여 선주민들과 충돌하였다. 선주민은 몽골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몽골군은 타타르해협(Strait of Tartary) 건너 사할린을 침공하여 아이누인을 제압했다. 이 결과 아무르강 하류와 사할린에 대한 몽골제국의 지배권이 확립되었고, 이는 한족의 명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로 계승되었다가 19세기 중기에 러시아로 넘어가서 오늘날에 이른다.
이처럼 몽골군이 사할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르강 하구와 사할린 사이의 타타르해협이 매우 얕고 겨울에는 얼어붙어서 건너기 쉬웠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타타르해협으로 배가 지나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뜻이고, 사할린이 섬인지 대륙의 일부인지 혼란을 초래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우랄산맥 이외에는 외부 세계로 통하는 출구가 없는 ‘거대한 창고’(유리 세묘노프·‘시베리아 정복사’ 472~473쪽)와 같은 시베리아의 동쪽 출구로서 아무르강이 기능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래서 아무르강을 통해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항해에 사할린이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러시아 세력이 사할린과 쿠릴열도로 남하하기 이전까지 마쓰마에의 일본인은 청어와 연어를 잡기 위해 아이누인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러시아인이 사할린·쿠릴열도에 거주하는 아이누인을 유럽의 물산과 종교로 회유하며 남하한다는 소식을 접한 도쿠가와 막부는, 마쓰마에번(松前藩)에 아이누인 지배를 위임하는 기존의 방식을 폐기하고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에 탐험대를 파견하였다. 이는 아이누인을 일본의 영역에 포함시킴으로써 러시아에 맞서 일본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의 남진이 일본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는 일군의 지식인들은, 아이누인이 일본의 속민(屬民)이기 때문에 아이누인이 사는 사할린도 일본의 지배영역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할린이 섬인지 대륙의 일부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일본의 북쪽 경계를 확인하고 러시아인의 남진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였다.
이리하여 사할린의 지리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들 가운데 선수를 친 것은 일본이었다. 막부의 하급 관리였던 마미야 린조(間宮林藏)가 1808~1809년에 사할린을 거쳐 아무르강 하류를 탐험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할린만 탐험할 목적이었던 마미야는 현지 사정이 불온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허가받지 않은 일본인의 해외 도항(渡航)을 금지한 막부의 금지령을 어기고 타타르해협 너머 아무르강 하안으로 건너갔다. 그는 외만주(外州·Outer Manchuria)라 불리는 이 지역에서 여전히 청나라 세력이 강하고 러시아의 진출이 미약함을 확인하였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 거주 지역에 고용되어 있던 독일인 의사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는 마미야의 업적을 기려서 아무르강 하구와 사할린섬 사이의 해협을 ‘마미야해협’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편 아무르강 하구의 사할린 접경 지역이 바다이며 태평양으로 항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유럽인들에게 널리 인지시킨 것은 1849~1850년에 러시아의 항해사 겐나디 이바노비치 네벨스코이가 수행한 탐험이었다. 네벨스코이에 의해 시베리아는 더 이상 거대한 창고이자 러시아인의 유형지가 아닌, 태평양을 향해 열린 ‘가능성의 땅’으로서 재평가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할린과 마주보는 연해주 일대의 가치도 높아졌기에, 러시아는 1858년의 아이훈조약(愛琿條約)과 1860년의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는다. 그리고 이전에 시베리아가 수행하던 유배지로서의 역할은 사할린이 이어받게 된다. 1894~1895년의 청일전쟁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사할린을 조사한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 체호프는 아무르강 하구에서 사할린을 바라본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눈앞에는 광활하게 아무르만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거의 안개 띠처럼 보이는 곳이 유배의 섬이다. 보기에도 이곳이 세상 끝이고 더 이상 멀리로는 항해할 수 없을 듯하다. 마치 오디세우스가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며 기이한 존재들을 만나리라고 예감하던 그런 마음이 내 영혼을 사로잡는다.”(배대화 역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121쪽)
이리하여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는 청·조선에 이어 일본과 조우하며 유라시아 동부의 주요한 플레이어로서 등장하였다. 13세기에 몽골·고려 연합군의 두 차례 공격을 받은 이외에는 별다른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던 일본열도의 세력은, 새로이 유라시아 동해안에 등장한 러시아 세력에 위기감을 느꼈다. 러시아 측은 1696년에 캄차카반도에 표착한 오사카 출신의 덴베(傳兵衛)를 러시아에 정착시켜 일본어를 가르치게 하는 등, 17세기 말부터 일본에 접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일본어를 말하는 러시아인과 조우하는 충격적 경험을 한 일본인은, 러시아가 왜 일본에 관심을 갖는지 알고자 필사적이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오호츠크해 연안의 아이누인과 일본 상인들로부터 러시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을 통해 유럽의 러시아 관련 서적을 입수하여 번역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178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에 대한 연구서가 다수 작성된다.
러시아에 대한 이들 연구서의 주장은 우호적인 입장과 경계하는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라는 경세가(經世家)는 ‘적이동정(赤夷動靜)’이라는 저서에서 우선, 러시아가 ‘이웃 나라를 정복하여 그 영토가 동서로는 경도 180도에 이르고, 남북으로는 북극 끝인 위도 30도에서 60도까지 이르니, 동서로는 이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는 큰 나라’(‘북방 미공개 고문서집성 3’, 現代編集同人社, 120쪽)라고 하여 그 세력이 강대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러시아가 일본에 접근하는 것은 네덜란드가 일본과 교역하여 부유해진 것을 부러워하여 자신들도 일본과 교역하기 위함일 뿐이라고 우호적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일본도 유럽과의 무역 상대를 네덜란드로 한정하지 말고 러시아와 정식으로 교역을 가지는 한편, 아이누인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자는 공세적 주장을 펼친다.
반대로, 러시아의 남진(南進)을 안보 위협으로 파악하고 무력충돌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독도 문제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의 저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위협론을 설파한 그의 대표적인 저술 ‘해국병담(海國兵談)’의 발문에서는 그가 ‘삼국통람도설’과 ‘해국병담’을 집필한 이유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내가 일찍이 삼국통람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의 세 인접국가인 조선·류큐·에조(아이누) 지도를 실었다. 그 뜻은 일본의 용감한 무사들이 군대를 이끌고 이들 세 나라로 들어갈 때 이 지도를 암기함으로써 현지에서 전개되는 상황에 대응케 하기 위함이다. 또 이 ‘해국병담’에서는 이 세 나라 및 청·러시아 등의 여러 외국이 쳐들어올 때 방어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논하였다.”(‘신편 하야시 시헤이 전집 I 병학’, 第一書房, 287쪽) 하야시는 일본이 해국(海國)이어서 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부나 지식인이 이 위협을 경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하야시의 세계관은 중국과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재무장을 추진하는 현 일본 정부의 태도와 상통한다고 하겠다.
하야시는 1787~1791년 사이에 자비(自費)로 ‘해국병담’을 출간하였다가, 근거 없이 사회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막부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막부 측은 러시아의 의도를 의심하면서도, 충분한 대응책이 마련되기 전에는 러시아 문제로 인해 일본 국내에 혼란이 초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이쪽의 준비 태세보다 한 발 먼저 다가오는 법. 마침내 1806~1807년에 러시아와 일본은 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무력충돌을 벌이게 된다. 앞서 마미야 린조가 사할린·연해주를 탐험한 것 역시 이 무력충돌에서 기인한 안보 위협이 그 배경이었다. 오호츠크해에서 열국지가 시작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 회에 이어진다.
<더 읽을 책> ‘안톤 체호프 사할린섬’ ‘아틀라스 일본사’ ‘시베리아 정복사’(경북대출판부·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