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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아침 산을 향했다. 아홉마리의 용이 샘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름에서 비롯한 구룡산이었다. 아이들의 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지난 봄에 학교 뒷산을 올라갔다고 했다. 염통골 학교를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작은 암자가 하나 서 있었다.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 쓰여진 팻말을 지나 절 앞바당을 지나치다 산길을 몰라 보살 한 분에게 물었다.
"산으로 오르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요?"
몸빼를 입은 보살은 빨래를 널다 말고 깜짝 놀란듯 나를 쳐다봤다.
"아이구 깜짝이야."
정말로 아주머니는 산속의 정적 속에서 반짝 깨어나는 사람처럼 몸서리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인적인 드문 곳에서 가까이 사람이 오는 줄도 몰랐다가 사람을 보니 그럴만도 했다.
"다시 그 산밑으로 내려가면,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을 거예요."
"이쪽 절 지나서는 길이 없나요?"
"그쪽으로 가면 길이 험해서, 자꾸 나무들이 붙잡아요."
산길을 오르는데 낙엽이 쌓여서 그런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나무들이 없어 보이는 곳으로 향하니 길이란 생각이 든다. 바람에 불 때마다 낙엽이 휘리릭 흔들리면서 척 하고 이미 떨어진 낙엽들 위로 내려앉는다. 아침 집을 나서면서 생각한 건 세상의 풍경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는 것이었다. 처음 이곳 마을에 왔을 때 지명이며, 혹은 집 한 채, 나무 한 그루까지 얼마나 낯설었던가. 시간이 지나고 나니 조금씩 익숙해지는 게 내가 이전에 살았던 곳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앞에서는 조생종 귤이 한 박스에 오천원... 하면서 확성기 소리가 작은 마을을 울려왔었다.이미 낙엽들은 떨어지고, 그저 휑하게 비인 숲에서 희미한 초겨울 햇살과 함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산으로 오르는 길, 묘지 부근의 이랑 사이로 물을 받는 통이 보였다. 그 가파른 곳에도 자리 잡은 묘지의 잔디 너머로 비닐하우스들이 반짝거렸다. 세상을 내려다 보는 것만큼 사람에게 시원한 마음을 주는 것도 없다. 그저 내가 바라보기만 하던 뒷산을 올라보고 싶었다.사실 그곳에 오르면 끝없이 펼쳐지는 강남의 모습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능선만 넘으면 바라보일 것 같았다. 평소 바라보던 고속도로변을 내려다 본다. 창호시스템, 효성, 하이마트, 그리고 우미건설과 고려은단, 자이와 같은 광고탑이 쭉 이어져 있는 고속도로였다. 고속도로를 따라 갈 때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곳이지만 내가 그곳에 살면서도 부터는 광고탑에 관심이 갔다. 내가 사는 곳은 고려은단 광고탑이 서 있는 곳이고, 김영애 사진이 실사출력된 광고탑이 서 있는 곳은 경기도와 서울이 맞닿아 있는 달래네 고개 부근이다.
얼마 전부터 마을 입구에 견인차량 보관소가 생겼다. 이전 공영주차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새로 간판이 내 걸린 이후부터 수없이 많은 차들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마치 포도청 뒷마당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저 한적한 마을에 불과했던 곳의 작은 변화였다. 여전히 고속도로로 차 지나가는 소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폭포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버스를 타기 전 청소장군이 옛골에서 하이마트 광고탑을 향해 달려가다 마을 초입에 멈추는 걸 봤다. 청소장군이란 이름은 내가 오토바이를 탄 사람의 모습이 하도 독특해 붙인 이름이었다. 흰 핼맷을 쓴 오십대의 남자는 왼편에 마법의 빗자루를 거꾸로 세우고 또 오른 편에는 구청 깃발을 휘날리면서 쌩하고 달려갔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 그 사내의 앞 바구니를 보았더니 그 앞에는 쓰레받기를 거꾸로 쳐박은 채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해 두고 있었다. 이렇게 청소장군을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내내 마음 졸이게 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좋은 날들은 너무도 쉽게 지나고 마는 것일까. 며칠 전부터 주말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했었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다만 언제부턴가 별렀던 건 저 구룡산 꼭대기를 오르는 일이었다. 강남과의 경계인 저 산 정상에 오르면 강남의 끝없는 지평을 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저 푸른 두개의 젖무덤처럼 생긴 기묘한 산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처럼 생긴 산, 그래서일까 그 옆엔 대모산이란 이름의 산이 자리해 있었다. 대모산 자연공원. 개포동 사람들은 그 대모산 자연공원을 많이 이용해 운동을 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주 5일근무라지만 휴일 이틀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렸다. 워낙 일을 못학 두려워하는 편이라서 그런지 쉬는 날보다는 일하는 날들이 금세 돌아오곤 했다. 글을 쓰려고 덤벼들면 어느 새 시간은 가버리고 말았다. 일 자체가 조금씩 부담은 적어진다고 하지만 글에 집착하면 할수록 일은 더 버겁게 다가왔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휴일이 너무 짧게 느껴지는 것이. 서울이란 곳은 그저 사람과 사람이 너무 가깝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곳곳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그 규모도 규모지만 그 도시를 걷다 보면 한 개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작아 보인다. 세상에 비해 한 개인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
이 거대한 도시, 그 매커니즘 앞에서 한 개인으로서 그저 제 몫을 가지고 산다는 건 무엇일까. 아침 아이들은 재량휴일이라고 했다. 휴일 같이 청량리에서 춘천행 열차라도 타고 한적한 강촌역, 혹은 김유정역이라도 내려서 막국수라도 한 그릇 먹고 오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지난 번 주말도 그저 백화점에 다녀오느라 제 시간을 못가졌다면서 생떼를 쓰듯 거부를 한다. 그래 별 수 없이 혼자 산을 향했던 길이었다. 내게는 그편이 더 간절한 일이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한 번이라도 하려면 아이들의 반대를 설득시키는 것이 일이다. 미리부터 예고를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절대 따라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벌써 아이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걸까. 아내는 아침부터 밀린 청소를 하면서 무심코 방안을 어질러 놓는 아이들을 신경질적으로 나무랐다. 큰 아이는 나를 따라나서는 대신 엄마와 산으로 가기로 했다.
산에도 오르고 서점에도 들를 계획으로 구룡산으로 향했다. 누가 산을 넘어 서점에 가는가. 하지만 그 도시의 경계를 보고 싶은 마음에 마음이 설렜다. 구룡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보니 우리가 김지하의 똥바다를 은장옥에서부터 막걸리 한주로 삼은 이후 항시 우리의 모임 이름이 구룡회였기 때문이었다. 용띠 아홉 명이 모여서 만들었던 구룡회였는데 이곳에 와 구룡산을 만나다니,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길다운 길의 모습을 보이더니 용두사미 격으로 산을 오를수록 사라져 버렸다. 오직 참나무와 밤나무 잎들이 발목까지 빠지는 비탈뿐이었다. 숲길을 따라 가는데 떨어지는 낙엽들 속에 도토리와 밤들이 보였다. 낯선 비탈에서 나는 길도 아닌 곳을 푹푹 빠져가면서 산을 올랐다. 서울에 처음 왔던 날처럼 그 산 또한 낯선 곳이었지만 이제는 낯설음 또한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빨빨거리면서 어딘가를 돌아다니기를 좋아했었다. 낯선 마을에 가보고 또 친구의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와 다음날 집에 들어갔을 때 한바탕 소동이 일듯 매를 맞곤 하던 기억이 있을 정도였다.
호기심을 앞세우다 보면 곳곳에서 복병을 만났다. 이곳에 와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서 깨졌다. 어차피 깨질 일이라면 먼저 매를 맞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그리 높지 않은 구룡산이었지만 돌아가는 비탈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숨이 차올랐다. 길도 아닌 길을 따라 오른 까닭이었다. 용 아홉마리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름처럼 그저 갑진년 태생의 친구들 또한 하늘로 오르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가끔 초등학교 사이트에 들어가 안부를 묻곤 하는 사이였다. 일년이면 두 번씩 명절에 만나 서로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무며 서로 늙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곤 했다
어느 날인가는 그 아홉명의 용띠 친구들이 반지를 만들어 끼고 다녔다. 아마도 결혼을 하기 전이었다. 그 멤버들 중에 한 친구는 사업이 부도가 나 모임에 나오지 않고 무슨 카지노 딜러 일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고 다른 한 친구 앙드레 리는 그저 서울에서 조명일을 하는데 명절 때도 일이 바빠 고향에는 내려올 시간이 없어 그 친구의 긴 턱이나 그 턱에난 수염을 구경할 수 없었다. 아직도 결혼을 하지 못한 채 늙어가는 친구는 여대생을 만난다는 소문이 들렸다.
경황이 없었을까 버스를 탈 때는 현금을 내고 탔다가 버스에서 내릴 때 나는 카드를 찍고 내렸다. 이중으로 요금을 낸 후에 오른 산이었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자면 모든 일이 너무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 보다는 산에 오른다는 상쾌함을 떠올리기로 했다. 항시 바라다보기만 하던 뒷산을 오르는 일은 그야말로 새로운 활력을 주리라 싶었다. 신석정 시인의 고택이 있던 곳, 부안의 바닷가가 바라다 보이는 산처럼 그렇게 자신이 살아가는 마을의 풍경을 내려다 본다는 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다. 집착하는 세상의 지붕을 바라다 보는 일처럼 무언가 세상의 일들로부터 초탈해지고 싶었다.
나는 수첩을 하나 들고 산을 올랐다. 무슨 조사위원처럼 수첩을 들고 펜까지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바라봤다. 조사? 무슨 조사? 이전 새마을 운동에 대한 고향 마을의 의식조사를 나갔던 때 외삼촌이 물었던 말이었다. 조사란 말에 대해 사람들은 무슨 수사관이 사건에 대한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조사처럼 받아들였다.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 날, 하늘색 와이셔츠에 남색의 양복을 입고 지하철 전동차를 타자마자 부리나케 우산을 팔던 아저씨가 자신의 물건을 안 보이게 한 쪽으로 치우던 생각이 났다. 어찌나 빠른 동작이던지 나는 고양이를 본 쥐가 어느 순간엔가 사라져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산골에 살다 조금만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와도 사람들이 반가웠다. 형님, 우리 아이 병원에 들렀다 바로 갈게요. 양지바른 담장에 기대어 어떤 처녀 둘이 대화를 나누던 모습도 기억났다. 전화를 하면서 잇몸을 내놓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처녀의 모습도 보였다. 하수도 물 흘러가는 소리, 방앗간 떡방아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짹짹 참새소리도 들려왔다.아이의 학교 뒷산에 은진미륵처럼 서 있는 석조입상을 지나 올라온 길, 허름한 부동산집 남자는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늙어가고 있었다. 사람 사는 모습들이 각양각색 만화경처럼 좁고 좁은 곳에 밀집해 있었다.염통골, 그곳은 세상의 심장인데 하나도 북적거리지 않았다. 그저 새로 집을 수리하는 사람들의 망치소리만이 들려왔다. 돌을 쌓는 인부들은 돌 사이에 콘크리트를 부으면서 돌을 고정시켰다.
瑞日祥雲이란 글귀가 쓰여진 빨간 벽돌 집이 독특했다. 미루 나무 한 그루가 낙엽을 다 다 떨구고 거꾸로 꽂아둔 청소장군의 빗자루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만히 보니 나무 줄기가 마치 샛강이 큰 강물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푸르던 잎새들은 다 어디로 흘러가 버린 걸까. 사람들은 뒷산에 가지 않는 것일까. 뒷산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고양이만이 숲에 숨어 나를 바라보다 도망을 갔다. 나는 멧돼지라도 출몰할까봐 나무 가지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런 나뭇가지가 멧돼지를 막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뱀은 동면에 들어간 것일까. 아니라면 뱀이라도 막기 위해 나뭇가지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도 사람의 인적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마른 잎새 떨어지는 11월의 마지막 주말, 이제 가을은 끝자락에 걸려 있었다. 마치 그 낙엽들이 거의 다 떨어져 겨울을 향하고 있듯 나무의 잎새가 떨어지고나면 완전한 동면의 계절이었다. 멀리 청계산이며 이름 모를 산들이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새로 지은 절엔 바위 곳곳에 불상이 서 있고 또 용상이며, 나한상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간절한 사람들의 기도처럼이나 곳곳에 수많은 배신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또 서울로 와서 얼마나 많은 상심을 배웠던가. 수없이 작은 일로 배신당하고 상처를 받으면서 보내온 시간이었다. 그건 매정한 세상을 배우는 일일뿐 그들이 내게 상처를 주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으리라. 어쩌면 그건 그들을 위한 일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내게 느끼기에는 매정한 일처럼 받아들여졌다. 약한 모습이리라. 사람들에 상처받지 않는 한 사람들 속에 살아갈 자격이 없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 속의 검은 고양이 눈빛이 자꾸만 사라지지 않았다. 밤에 저 눈빛을 보았더라면 더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나무 숲에서 도토리 하나를 주워 손가락 사이에 넣고 톡 덮개를 벗겨냈다. 썩은 도토리였다. 산길을 오르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낙엽진 비탈을 대하는 것이 얼마만인가 생각했다. 언젠가 박범신씨가 어둔 밤 산골의 산길을 걸었던 적이 있는데 처음에 그 어둠이 어찌나 무섭던지 모골이 송연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 지나고 나니 오히려 그 산골짜기 위로 떠오르는 별빛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그 원시의 하늘을 대하는 것처럼이나 산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항시 새로운 곳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금세 내일은 오고 만다. 내일의 희망을 위해 오늘을 준비해야 한다지만 그건 끝없는 과정일뿐 결과는 쉽지 않다. 그저 두려워하지 않고 내일을 맞이해야 한다. 낙엽도 떨어지고 또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도 툭 들려왔다. 부러진 가지들이 썩어가는 숲이었다. 발목을 덮는 낙엽,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남은 잎새들, 거의 떨어지려는 듯 마른 나뭇가지를 보았다. 나무 우듬지에 걸린 파란 하늘, 대롱거리는 힘없는 나뭇잎들, 아이는 학교 뒷산을 가자는 말에 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가끔씩 무너진 곳이 보였다. 붉은 흙 안에 퇴적된 돌부리들을 보았다.
숲에서도 메모수첩을 놓지 않았다. 어쩌면 지독한 조사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떤 때는 며칠 동안 하루에 한 권씩 수첩을 산 적도 있었다. 메모광이 된 걸까. 그저 천원짜리 기자수첩 한 권을 사면 단편 하나쯤 쓰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런 보장도 없으면서 나는 그저 묵묵하게 메모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병에 걸려버렸다. 자랑이 아니라 그저 일종의 정신질환처럼 집착하는 습성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쓰지 않으면 불안해졌다.
사람다니는 길은 사람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낙엽도 다니고, 또 비가 오면 물도 흘러가리라. 어쩌면 푹파인 길을 따라 사람들이 다니듯 물과 낙엽도 흔들리며 걸을 것이다. 산사에서 길을 물었을 때 나뭇가지들이 붙잡지 않는 길을 가려면 요 아래로 내려가라는 보살의 말이 비탈길을 오르는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팔랑팔랑 떨어지는 낙엽 하나, 둘... 언젠가 아들이 올랐다는 길도 이 길일까. 지금은 길이 사라진 길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길이 없는 길을 간다는 건 지표 없는 길을 가듯 막막한 느낌을 주었다. 능선이 바로 앞에 있다가도 산을 오르면 또 저만큼 달아나 있었다. 다가가면 달아나는 능선처럼 그저 하루하루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생활도 쉽게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렇게 매일매일의 길을 갈 뿐이었다.
나는 산길을 따라 걷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산사에 올라가던 초파일 연등 불빛, 할머니가 들고가던 시주 쌀자루와 수없이 가시나무를 젖히며 어두워지는 산길을 열여가던 날이었다. 할머니의 머리칼은 흰 머리칼로 흩어져 있었다. 항시 흰 옷을 즐겨 입던 할머니의 무명옷과 검은 치마, 그 황톳길처럼 또 나는 막다른 산길을 따라 걸었다. 한 번은 모악산에서 길을 잃고 새로운 능선을 따라 내려왔던 기억이 났다.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 아득한 경계를 따라 불빛 앞세우면서 산길을 넘었을 조상들의 도로자락이라도 따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곳곳에서 해금가락에 고개 넘어가는 사람들의 환영이 보였다.
마지막 능선을 넘었을까 사람들이 나타났다.. 도시에서 반대편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난 후에서야 비로소 그 너머로 도시가 있음을 알았다. 도시와 근교농촌,개발제한구역의 접경이었다. 노인 등산부대처럼 노인들이 군장을 하고 산정을 향해 올라갔다. 군사보호시설이란 이름처럼 지하 방공호가 보였다. 그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안개에 쌓여 있었는데 희뿌연 안개 너머로 끝없는 도시의 건물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가끔씩 넓은 학교 운동장이 어느 지역인지를 알려주었다.황순원 선생의 작품처럼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떠올리게 하는 비탈을 따라 잎들을 떨군 나무들이 서 있었다.
시계는 나무들에 의해 가려졌다. 확 트인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앞에는 안개가 자욱해 산에 올라와도 날짜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는 날이 장날이었다. 하지만 메모지에 스케치를 하면서 겨울숲을 바라봤다. 척박한 땅에서 오히려 잘 자란다는 노간주나무 옆에 나무를 소개하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이전엔 농기구를 마드는데 쓰이던 나무였다. 대모산 자연공원 임야에 꽃이나 나무를 심는 행위를 처벌한다는 플래카드가 나붙어 있었다.
가끔씩 드러나는 전망, 오래된 바위는 강남에서 날아왔을 많은 먼지들로 희뿌옇게 변해 있었지만 공기는 상당히 맑았다. 도시를 내려다 보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산이 도시를 내려다 보듯, 숲의 나무들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항시 도시를 지나다 바라보았던 산의 푸르름 속에 들어와 다시 내가 살아가던 도시를 내려다 보는 일이라니, 그 뒤바뀐 시선이 주는 시원함이 좋았다. 빌라촌들의 빽빽함, 그리고 타워펠리스와 주상복합 아파트들의 즐비한 마천루, 그리고 끝없이 솟아 있는 저 강남의 높은 빌딩들을 바라봤다. 대로를 따라 흐르는 차들의 물결, 도시는 마치 지도를 펼쳐 놓은 것처럼 눈 앞에 다가왔다. 이런 것이 도시로구나. 나는 사회교재에 나오는 도시의 모습처럼 산 아래를 내려다 봤다. 항시 도시는 올려다 보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 사람 위에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살았구나. 산 위에서 보이지 않던 풍경도 서서히 산을 내려오자 더 세밀하게 보였다. 높은 아성처럼 치솟아 있는 대기업의 건물들, 그곳에 앉아 있을 재벌 총수에 부럽지 않는 후회없는 인생이란 무엇일까. 세상에 태어나 한 번 사는 인생, 태산에 오른 것처럼 세상을 내려다 볼 그 호연한 기운이란 무엇인가. 나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문호란 이름을 들을 때 느껴지는 그 거대한 산과 같은 기상을 생각했다. 인간세상, 인류의 역사, 그 안에서 소설을 바라보는 일이란 것이 아마도 그렇게 등태산의 기운은 아닐까. 우리가 살다 가는 인생, 저 풀의 꽃과 같이 사라져 버릴 영광이 아니던가. 그 안에서 인생을 그리는 일처럼 절박한 일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도시를 내려다 보기 위해 등산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세상에 짓눌려 자신이 살아가는 곳도 바라보지 못한 채 분주하게 살아가곤 하니까. 이전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구룡사 절을 나는 산에 올라가서 너무도 쉽게 찾았다. 구룡사는 강남이 끝나는 빌라촌 사이에 있었다. 그곳은 또한 개발제한구역이 시작되는 구룡산 북쪽이었다. 내가 집착하는 것이란 얼마나 작은 것일까. 산에 오르면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산길을 통해 절실하게 느끼곤 했다.
4층의 도시적 건물 위에 서 있는 삼층의 목탑 형식의 건물이 이색적으로 눈 앞에 다가왔다. 건물 위에는 하늘로 솟구쳐 올라간 옥개석 모양이 마치 버스를 탔을 때 잘 늙은 노인네의 예술가 모자 꼭대기처럼이나 신기하게 보였다. 절을 스케치 하고 있을 때 나는 썩어죽는 물박달나무를 봤다. 자작나무과. 가구재, 조각재로 쓰임. 지도를 보는 듯 산 아래 펼쳐진 도시의 모습은 서울의 밀집도를 한 눈에 보는 듯 했다. 진달래, 두견주를 담금. 우린 뭘 먹고 살아요. 알밤과 도토리를 주워가지 마세요. 글귀는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오는 초입 부근에 붙어 있었는데, 그 아래 무어라고 작은 글씨가 써 있었다. 나는 그 글귀가 궁금해 앞으로 다가가 글씨를 읽었다. 다람쥐 가족일동.
물푸레나무. 물에 넣으면 물이 푸르러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총대, 운동기구의 재료. 서서히 익숙해지는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바라본 건 저 도시의 껍데기였구나. 길거리에서 바라보는 겉모습뿐, 버스의 가로선 이상의 곳들을 바라보지 못한 것이었다. 설계도면으로 보면 측면도만 보았을 뿐 정면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기야 이전 우면산에 올라 바라봤던 그 낯선 빌딩의 숲이나 남산에서 보았던 도시의 전망또한 대단했지만 내가 사는 곳을 바라본 이번의 조망은 그야말로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치 초등학교 이학년을 위해 만든 교재의 지역 지도처럼 세밀했으니까.
나는 두개의 젖무덤처럼 생긴 산을 내려왔다. 노인이 불을 피우면서 쓰레기를 태우고 있었다. 그 옆으로 쓰래기를 버리는 놈, 인간도 아님이란 글귀를 보면서 지하도를 따라 내가 가끔 걸어들어오곤 하던 길을 따라 걸었다. 낙엽진 길 위로 개를 데리고 나온 가족이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개들은 한 쌍이 나란히 개옷을 입었다. 커플티처럼 글씨까지 쓰여진 옷이었다. 개 쌍이었다. 바로 그곳에 서 있던 구룡사를 보았다. 수없이 버스에서 구룡사 입구란 말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지 않았던가.
동지 맞이 7일 기도. 봉행. 입재12월 16일, 회향 12얼 22일. 오전 3시 35분. 언젠가 청계산에서 음식점을 하는 아이가 다닌다던 곳이 바로 저 구룡사 유치원이었다. 만나면 항시 합장을 하면서 공손히 인사를 하던 아이였다. 영어와 함께 한자를 특히 잘하던 아이였다. 부처님 품안, 따뜻한 가정, 諸惡莫作, 衆善奉行. 수험생 여러분 고득점 합격을 기원합니다. 용이 그려진 법고며, 또 종이 나란히 보였다. 불서와 다구, 어린이용품을 파는 곳이 앞마당에 있었다.
사마리안이라 쓰여진 글귀, 전보선대처럼 생긴 곳에 곱하기 부호를 붙여놓은 로고엔 뱀이 나무를 감아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앰뷸런스, 대한응급환자 이송단. 사마리안. 천주교 성당이 절 앞에 있었다. 대림특강, 상처와 치유. 마지막주. 화요일 8시 가정미사. 고해성사 미사 30분 전. 혼인면담. 전입면담. 봉성체. 제 14회 눈높이 교육상 보육부문. 김정희 아가다 수녀님. 주최 대교 문화재단. 니꼴라오 어린이집. 종탑이 특이했다. 콘크리트 구조물엔 종탑 부근만 구멍이 나 있었다. 줄이 내려가는 곳에 또 하나의 구멍이 보였다.
산에서 내려와 전동차를 탄 후 한적함과 쓸쓸함을 느꼈다. 그 한적함과 쓸쓸함을 가지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을 때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벗어나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경계, 다시 나를 찾아올 수 있는 곳으로의 떠남이었다. 매일의 일상이 그렇듯 문학이란 것도 또한 자신의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던가. 서울을 벗어나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처럼, 끝없이 어딘가로 떠났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산에 다녀온 후 바라본 신문의 기사는 서로를 흠집내 자신에게 유익을 삼자는 발상이 다분했다. 남을 헐뜯고 또 자신에게 그 해가 돌아올 것은 생각하지 못하며 또 그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전동차 안에서 나는 간밤의 꿈을 생각했다. 타워펠리스에 산다는 여자의 연기처럼이나 한 여자의 비극은 가슴 아프게 내 꿈자리 속으로 무의식을 자극하며 들어왔다. 억눌린 욕망도 고개를 들었으리라. 그녀와 결혼을 했음에도 그녀는 스스로 물러나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난 그녀를 찾아다녔지만 그녀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떠나버린 여자였다. 사람이 바뀌었다. 뿌옇게 보이지 않던 도시의 끝처럼 무의식 속에 잠겨진 불안과 욕망 또한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 꿈자리의 균열을 타고 나타났다.
편안한 양육. 그 중앙시장에서 나는 마치 황소울음소리를 내는 듯 귤을 파는 한 사내를 만났다. 그 사내는 마치 살려주세요 하고 소리를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시장을 울리는 목소리로 사람들을 불렀다. 이 편안한 양육의 도시는 그래도 서민들을 위해 활력을 주는 도시였다. 만안. 역사 주변의 아파트, 그리고 도시 곳곳의 골목이 한국 어디에서나 봄직한 모습이었다. 집사님 안녕히 가세요. 골목의 인사는 도시적이었다. 어둠, 매운 고추가루 오뎅을 하나 베어물고 나는 그 흐릿한 도시의 경계를 떠올렸다. 그 도시로 퍼져가는 그 황소울음소리 같은 귤장사의 목소리 하나 귀에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