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 정서의 원류(源流)
임병식 rbs1144@daum.net
보성의 분청사기는 잠시잠깐 꽃을 피우다 사라졌다. 그 연대는 1470년에서 1500년까지로 조선이 건국하여 한창 도약하던 때였다. 이때는 성종연간으로 나라기틀이 바로 세워지고 성종의 치세가 펼쳐졌다. 이 무렵 전라도 보성 도촌에 분청사기 가마가 세워졌다.
주변에 화목으로 쓸 나무가 풍부할 뿐 아니라 일대에 주재료인 맥반석이 많았다. 이것으로 그릇을 구우면 때깔은 화려하지 않지만 좋은 성분이 나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것은 서민들이 주로 막사발로 사용되었지만 궁궐에 납품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생산이 중단되고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제작과정이 다른 도기에 비해 까다로워 세벌 구이를 해야만 해서 번잡한 것이 그 이유인지 모른다. 아무튼 보성분청사기는 이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그런 그릇들은 투박함 때문에 개밥그릇으로나 내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릇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태어난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이 그릇을 보성 호조고비끼(三好粉引)라 명명하여 다완으로 애용하다가 사후에 일본 국보로 지정이 된 것이다. 세상에 이런 반전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만 한동안은 잊혀 져서 오백년 동안이나 맥이 끊기고 말았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관심을 가진 분야가 있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것인데 그것은 1951년에서 1960년까지의 한정된 시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되살려 놓겠다는 사명감이다. 나는 그 시기, 그 시절을 보내며 순수 무구한 농촌, 법 없이도 살던 순박한 농민들의 삶을 생각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나는 1946년생으로 해방 다음해에 태어났다. 내가 자라며 어느 정도 지각이 생긴 시기는 대략 여섯 살에서 10년이 지난 열여섯 살 사이이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로 그때 보고 느낀 것들이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이다. 그것을 글로 재현해 놓고 싶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세시풍속에서부터 애경사, 그리고 이웃과 인정의 나눔과 애환 깃든 삶의 모습들이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다른 이들의 글과 중첩을 피하면서 나만이 표현해 낼수 있는 생생한 글감이 아닐까.
당시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 가장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 것은 누가 돌아가실 때였다. 망자가 세상을 떠나 웃 가지가 지붕위로 올려 지면 마을은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최소한의 출입을 자제하고 음주가무를 멈추고 반딛고리에 꽂힌 바늘하나도 손을 대지 않았다. 최소한으로 들판에 나가 물꼬를 돌보는 이외는 삼일동안 모든 노동을 멈추었다.
상가 앞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상여를 만들고 널을 맞추었다. 한편으로 상여꾼을 점검하고 소리를 매기는 상두를 교섭하며 소리도 맞춘다. 무엇보다 상여를 맬 때는 발을 잘 맞추어야 해서 예행연습 때는 실제처럼 점검을 한다. 좁은 논둑길을 가정하여 양편으로 나누어 잔걸음을 떼며 버티면서 균형 잡은 연습을 한다.
그러면서 삼삼오오 모여 고인에 대한 덕담을 나누고, 발인 시에는 노자 돈을 걸게 하여 질펀하게 한바탕 놀이마당을 펼친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슬픔을 떨쳐버리도록 한 것이다. 마침내 마을 밖으로 상여가 나감으로서 마을사람들은 일원으로 살던 고인과 작별을 한다.
당시는 결혼풍속도 독특했다. 봄가을 두 차례 농번기가 끝나면 외지인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그 발길에는 중매쟁이도 포함 되어 있어서 매파를 놓은 일이 성사가 되면 곧장 결혼으로 이어진다. 나는 고모나 이웃집 누나들이 첫날밤을 보내고 출가를 하면서 가마에 올라 서럽게 울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모습을 보면 따라서 슬퍼졌다. 20여 년간 부모 형제들과 함께 살다가 헤어지니 서운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눈물바람을 할 만큼 슬픈 일이었을까. 당시만 해도 한 마을 사람끼리 결혼은 드물고 외지로 시집을 가게 되니 섭섭하고 막막하기는 하겠지만 어린 마음에 지켜볼 때는 썩 수긍이 가지 않았다.
나중에야 시집살이가 ‘고추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만 할까’ 라는 말을 알았고, 시집가면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장님 3년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눈물의 의미를 깨달았다.
가마꾼이 광목으로 짠 밧줄을 어깨에 엇갈려 걸고 나서면 부모님은 마루에서 내려서지도 않고 망연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걷혀있었다.
어느 댁에서 제사를 지내면 이튿날은 동네잔치가 벌어진다. 음식을 넉넉하게 마련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웃에 살면서도 밥 한끼 나누고 살지 못하는 지금의 풍속으로 보면 매우 이색적인 풍경이다. 모여든 사람 중에는 찾아와 인정을 먹고 가고 배고파 허기진 사람은 이때 배를 채우고 고기반찬을 맛보았다.
그런 일이 빈번하니 어느 집의 사는 형편, 당면한 문제를 서로들 훤히 꿰뚫어 알아서 뉘댁의 숟가락이 몇 개까지도 알고 지냈다.
그런 과정에서 마을 내부는 별문제가 없는데 밖에서 내정돌입하는 사람들이 마을 분위기를 가끔 뒤집어 놓았다. 첫째는 세무서에서 출동한 술 단속반이다. 가정에서는 제사에 쓸 제주, 농번기에 쓸 막걸리를 사사로 담그는 일이 더러 있는데, 이를 단속한답시고 줄뒤짐을 하여 온통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 바람에 삼밭은 쓰러지고 보리밭은 짓밟혀졌다.
산감(山監)의 출동은 어떤가. 소나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가정에서 솔가지 몇 개라도 나오면 가차 없이 처벌을 하였다. 갈퀴로 소나무 잎을 모으자면 지게 밑자리에 솔가지를 올려놓지 않으면 아니 되는데, 그것조차도 용납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완장을 차면 제 세상인양 날뛰게 되는 인간의 비정함을 보았다. 하기는 여순반란 때도 완장을 찬 가담자들이 상사여탈 권을 쥐고 죽이기도 하고 살려주기도 했으니 완장의 위력을 알만하다.
그런 기억만 걷어낸다면 내가 겪는 10년의 기억은 아주 특별하다. 그 이전은 해방이 되고 6.25를 맞기 까지 생존하는데 경황이 없었고, 60년대를 넘어서서는 5.16이 발발하여 급격한 변혁을 맞게 되었다. 정든 고샅길은 없어지고 지붕개량사업이 이루어지고 통일벼의 출현으로 만년 쌀 부족 시대가 마감되었다.
풍속 또한 크게 바뀌어 닭서리가 용납이 되지 않고 장발단속이 이어지며 새마을 모자, 새마을 복을 입는 능률중시의 획일화 시대가 도래 했다. 이후부터는 함께하던 개구리의 떼 창, 무논을 건중 거리며 걷던 황새도 자취를 감추어져 버렸다.
그러니 내가 보낸 유소년기가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시절의 애환은 기억하는 이가 없다면 영원히 잊혀 질지 모른다. 하지만 잊혀 진 보성분청사기가 오늘날 일본의 국보로 되살아나 우리의 기억을 새로 소환하듯이, 글로 써 놓으면 잊히지 않고 기억되지 않을까.
내 문학의 정서 원류를 더듬어 보면서 새삼스레 채록하는 기분으로 렌즈에 포착된 기억을 이끌어내어 더듬어 본다.(2025)
첫댓글 보성의 도촌 분청사기가 맥반석으로 만들어 일본에 건너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왜놈들의 국보가 되었으니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요즘 국민의힘 국회의원 작자들을 떠 올리면 왜놈들이 오버랩됩니다. 왜놈들은 우리의 좋은 것들을 모두 약탈해 갔기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을 얼마나 많이 잔인하게 죽였습니까! 국민의 힘 국개의원 놈들 어제는 탄핵 되었던 박근혜를 국민들이 부끄럽지도 않는지 낯짝을 보이고 윤석열탄핵 판결에 앞서 무슨 농단을 모의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청석님이 50~60년 대의 세시 풍속, 애경사, 이웃과 인정 나눔, 애환 깃듯 삶에 대하여 주옥같은 글을 남김은 후세에도 두고두고 값진 기록이 되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 시대가 가고 나면 이런 미풍양속을 어떻게 속속들이 알겠습니까! 이런 기록을 통하여 우리 농촌 미풍양속을 계승한다면 아름다운 전통이 계승되고 백의민족의 찬란한 역사가 빛날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이 풍요해도 情이 없고 이기주의만 난무한다면 그런 민족은 빈껍질에 불과 할 것입니다. 오늘 날 그리스, 로마가 관광 대국이 된 것은 當時 문화유산을 잘 간직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
나이먹어 생각하니 내가 다른이와 차별화 하는 글을 쓰는것만이 나의 존재의미와 문학의 생명력을 불어 넣은
일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몇편 더 내가 감수성 예민할때 보고 들은 것들을 채록하는 기분으로 글로써서 남겨둘까 합니다.
깊이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50~60년대의 시대 풍속은 어느 결에 잊혀진 이야기가 된 듯합니다.
아련하고 정겨웠던 시절, 사람 냄새 나는 부모 형제와 이웃들의 그리운 삶의 면면은 선생님 작품 곳곳에 배어있는 서정인가 합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자상하게 베푸는 것은 특히 요즘 세대에게 오히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내가 겪은 50년대는 특별한 기간이 아닌가 합니다.
해방이 된후 채 자리를 잡지못한 상태에서 6.25를 겪고 모두들 신산한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60년대는 5.16혁명이 일어나 이전과는 다른 대 변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그때의 정서보다는 우리의 전통문화가 그대로 이어오던 50년대의 기억이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