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룡사지(玉龍寺址)
임병식 rbs1144@daum.ner
보이지 않는데도 보이며 형체가 없는 데도 보고 있는 듯 느낌이 드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일까. 옥룡사지(玉龍寺址)를 찾아 현장에 서니 드는 느낌이 바로 그랬다. 광활한 폐사지(廢寺址)는 예전 이곳이 절터였다는 증표인양 돌우물 하나와 기왓개미 몇 무더기만이 있을 뿐, 다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느낌이 남달랐다.
마치 삼태기처럼 생겨서 널직한 공간은 비워두어 적막하기만 한데, 빙 둘러선 산자락과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은 여느 곳에서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고풍스러운 기운이 묻어난다고 할까. 고적한 기운이 대번에 옛날을 거슬러 올라 회상에 젖게 만들었다.
나는 거기서 눈을 감지 않고도 어떤 형상이 바로 머리속에 그려졌다. 과거에 이곳에는 17동이나 되는 대규모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파른 산자락을 제외하고서 온통 산사(山寺)로 채워지지 않았을까. 그것을 상상하니 가슴 속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감동이 뭉클하게 올라왔다.
이곳은 바로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禪國師. 827-896)가 중창하여 머물렀다는 곳이다.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우리나라 비보사상(裨補思想)을 정립하여 풍수지리설을 정착시켰다고 전해진다. 자연을 해치지 않는 가운데 부족한 기운은 나무를 심어서 보(補 )를 하도록 한 것이다.
예전부터 도선국사가 이곳 옥룡사에서 불법을 전하다가 열반에 든 이야기는 전설로 전해오고 있었으나 그간 실증자료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2002년 당국에서 5회에 걸쳐 폐사지(廢寺址) 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도선국사의 부도탑이 발견되었다. 당시는 다비를 하지 않았는지 유골이 그대로 나왔다. 그것을 새로이 승탑(僧塔)을 조성해 모시고 발굴지에서 출토한 유물들을 함께 수습해 놓았다.
패사지에 이르기 전 먼저 인근의 운암사(雲巖寺)를 들렀다. 광양 옥룡계곡에 들어서니 어마어마한 대불(大佛)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금빛 찬란한 형상을 따라 들어오니 아담한 사찰이 나왔다. 그러나 비대칭으로 조성된 대불의 크기는 압도적이었다. 관음전 지붕위에 올라앉은 대불의 높이는 10미터쯤 될까. 손에 호리병을 받쳐 들고 계시는데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 불상이었다.
크기에 감격하다가 이정표를 보니 인근이 바로 옥룡사지였다. 그것을 보기 위해 오솔길로 접어들면서 또 한번 감동을 받았다. 뜻 밖에도 천연기념물 동백숲(489호)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보니 대번에 이 숲이야말로 도선국사가 비보(裨補)을 위해 조성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인근에는 없는 동백나무나 집중적으로 한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한참 동백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고개에 오르니 패사지가 지척에 나타났다. 걸어 오르며 직전에 대불(大佛)을 보고, 동백나무 숲을 헤치며 와서인지 눈에 들어오는 패사지가 황량하게 보이지 않았다.
1,20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도선국사가 사찰을 지키면서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땅에서 물이 많이 솟아서 건물을 짓기에 부적합한 땅이라고 한다. 실제로 중앙에 들 샘도 보였다. 그런걸 보면 도선국사는 이러한 습지를 비보의 방책을 써서 사찰을 짓지 않았나 생각된다.
기록을 찾아보면 도선국사는 말없는 말(無說說), 법 없는 법(無法法)을 설파한 분으로 선승(禪僧)의 길을 걸었던 것 같다. 연보를 보면 전남 영암 구림에서 태어나 화엄사에서 수계를 받고 태안사 해철스님으로부터 깨달음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국사께서 영암구림에서 태어났다는데 대해 어떤 신비감을 느낀다. 바로 그곳이 앞세대에 살다간 왕인박사의 출생지인데 큰인물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국사께서 우리나라를 위해 공헌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국토보존에 이바지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외국은 묘지조성에 자연을 많이 훼손하고,그렇지 않으면 인공적으로 거대 묘지를 조성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렇지 않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크게 손대지 않고 산세가 생긴 대로 이용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수목을 심어서 비보를 하는 선에서 장지 문화를 정착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잘한 것인가.
이날 나는 폐사지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건물이 한 채도 없어 배경이 될만한 게 없는데도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뒤에 생각해보니 내 의식속에는 대찰(大刹)이 여전히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의식은 어떻게 발현된 것일까. 그것은 따로 설명할 것도 없다. 바로 도선국사가 거기에 계셔서 불법을 전하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면 고종때인 1878년 화재로 소실되기 까지 천년을 존속해온 절을 마냥 폐사지로 남겨놓아서는 안될것으로 생각된다. 불교계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이만한 역사성을 지닌 절터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발길 돌려 나오면서 아쉬운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것은 탐방자가 느낀 생각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는 모르겠다. 부실하게 지어놓고 관리를 못하면 아니 짓느니만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2024)
첫댓글 옥룡사지를 돌아보신 감회가 새롭습니다.
도선국사는 승려이면서도 풍수지리설의 대가로서 전국에 걸쳐 사찰의 터를 잡아 가람을 이루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인입니다.
장엄했던 천년 고찰이 조선 고종임금 때 소실되었다니 안타깝기만 한데 선생님께선 대찰의 터에서 옥룡사를 중건하고 계셨군요
제 어린 시절부터 저의 모친은 다달이 광양의 절로 공을 들이러 다니셨는데 얼핏 옥룡이라는 지명만 들었을 뿐 절의 이름을 여쭤본 적이 없어 어느 절을 찾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네요 요즈음 여러 고을의 명승과 고찰을 섭렵하시는 선생님의 활기찬 모습이 참 좋습니다
주위의 배경때문인지는 몰라도 옥룡사지 절터는 신비감을 자아냈습니다.
대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뒤의 산세며 탁트인 전망이 누가 보아도 절이
들어섰음직해 보였습니다.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국사께서 당연이 지나쳐버리지는 않았겠지요.
주변의 동백숲 또한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스님이 비보를 위해
조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