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운/박목철
아래에 소개하는 글은 이영자 님의 수필이다.
이영자 님은 소운이 살던 서울 면목동에서 -장원 곱창-이라는 꽤 유명하던 곱창집을 운영하던 분의 부인이다.
골목을 이웃하여 건물주 8명이 모여 8인회라는 친목 단체를 만들고, 종종 모여서 술잔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곤 했는데,
이영자 씨의 부군은 회원이자 이런 모임에 장소를 제공하고 푸짐한 안주로 우리 입을 행복하게 하던 분이다.
이영자 씨는 바쁜 와중에도 사회 교육원에서 문학 강의를 들으며 문학에 꿈을 키우셨다.
"부장님 부러워서 글 하나 썼어요, 좀 봐 주세요," 수줍게 내게 건넨 원고를 무심하게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얼마 전 짐을 정리하던 중 잊고 있던 원고가 발견되었다. 20년이 지났으니 늦긴 했지만, 원고를 정성껏 읽었다.
연락도 끊기고 글에 대한 평을 하기보다는 그분의 순박한 글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지금쯤은 등단한 여류문인으로 활동하실지도 모른다. 그분도 이글을 보시면 옛일이 생각나실 것이다.
또, 웃으실 것이다. 꾸밈없는 담백한 글을 쓰던 그때가 그리우실지도 모른다. (박 부장은 소운의 옛 호칭이었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이영자
우리 집 앞집은 박 부장님 댁이다. 박 부장님 내외가 작은 따님과 함께 주말 외식을 우리 식당에서
하신다고 밖에서 돌아오는 내 남편이 전한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어서 박 부장 님댁 식구들이 오셨다. 작은딸이 곱창을 먹겠다고 해서 오셨다 하며
마루에 놓인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않는다. 곱창 불판을 주방에서 달구어 오기로 하고 향긋한 오이 냄새를 풍기며
식탁을 준비했다. 박 부장님은 우리 남편과 작은 방에 들어가 이웃 사촌으로 구성된 8인의 계원을 불러 모은다.
아마도 내일 일요일에 등산을 갈 모양 같다.
박부장 님댁 모녀가 앉아있는 식탁 위에 불판이 얹어지고 기다란 소 곱창이 불판 위에 원을 그리며 놓인다.
불판 위에 놓인 소 곱창은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잘도 구워진다.
식탁 앞에 앉아있는 모녀는 곱창이 구워지는 모양을 바라보며 빨리 먹고 싶은 모습이다.
잘 익은 곱창을 한입 크기로 자르고 있는데 곱창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불판 위에 흘러 내리니 저녁을 못한
내 입안에는 군침이 돈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곱창 하나를 박 부장 님댁 부인이 집어서 딸에게 먹으라고
딸 앞에 놓인 빈 접시 위에 놓는다. 딸은 "엄마 잡수세요," 하며 엄마 입에 넣어준다.
두 모녀의 주고받는 모습은 행복해 보인다. 우리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던 박 부장님도 두 모녀 사이에 앉는다.
박 부장 님댁 주말 외식은 즐겁다.
우리는 식당업을 갖고 있으므로 모든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기 힘들다.
한 사람은 항상 가게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임대해 영업하던 장소가 새 건축으로 헐리게 되므로
지금 영업하고 있는 살림집으로 왔다. 큰 길가에서 잘 보이는 집이기에 식당으로 꾸미니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려
동분서주하지 않아도 된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잠을 자는 방이 되고, 해가 뜨고 밝아 오면 손님 받는 방이 되니
열심히 쓸고 닦고 일만 잘하면 된다. 부지런히 일하다 보면 음식 냄새가 안 나는 작은 그림 같은 집을 하나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 올 행복이다. 하얀 노타이 남방 웃 저고리를 입고 어제 내가 대려 놓은 줄 잘 세워진 바지를 입고
까만 작은 서류 가방을 들고 나서는 큰아들에게 신장에서 구두를 꺼내 놓으며 마루 전에 서 있는 내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출근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다가올 행복에 젖어 본다.
가슴 속으로 말한다. 아들아 조금만 더 참아라, 인천에 있는 대학에 유학 중인 작은 아들이 졸업 하면 음식 냄새
나지 않는 언덕 위에 그림같 은 하얀 집을 장만할 것이니라, 그 집에서 파아란 하늘을 보며 파아란 꿈을 꾸고 파아란
행복에 젖어 보자꾸나,
긴 마포 걸레 자루를 들고 더러워진 현관을 닦고 있는 건강한 내 남편을 바라보는 내 눈은 행복하다.
레인지 위에 올려진 오색 전골 국물에 간을 맞추는 내 입은 즐겁다.
입이 즐거우니 몸 또한 즐겁고 마음은 행복에 젖는다. 밤 11시가 되면 손님은 들지 않는다.
손님 받던 상을 한데 모으고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를 시킨다. 비눗물 걸레도 방바닥을 닦고 마른 걸레질을 한다.
눅눅함을 없애려고 왕골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잠자리를 편다. 내일은 얼마나 많은 손님이 오시려나,
알 수 없는 행복을 갖다 줄 꿈을 꾸려고 눈을 감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박 부장님 댁처럼 잘 꾸며진 정원이 있는 집을 가질 것이다. 가을이면 빨간 대추나무, 노란 감나무
내가 좋아하는 배나무를 심을 것이다. 담장 너머로 늘어진 박 부장 님댁 대추나무는 파아란 대추가 다닥다닥 달려 있다.
설익은 대추 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잘 다듬어진 정원 잔디 위에 하얀 식탁을 놓고 정원에서 따 올린 과일을 먹으며 행복에 젖어 있는 나를 그려본다.
1995, 3, 이영자,
잘 읽고가요~
감사합니다
글이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