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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1일(주일) 주일설교 스바냐 3:8~20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새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새찬송가 621장 찬양하라 내 영혼아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전심으로 기뻐라고 즐거워하라’(14절)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 가지 “뻐”가 있어야 한답니다. 기뻐, 이뻐, 바뻐 입니다. 제일 중요한 “뻐”는 ‘기뻐’ 입니다. 먼저 기뻐하면 이뻐지고, 바뻐집니다. 하늘의 것을 먼저 구하면, 땅의 것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두 번째가 ‘희락’ 입니다. 희락은 ‘기쁨’입니다. 희락은 다른 말로 하면 희열입니다. 희열의 반대는 ‘분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분노’를 품고 사는지 모릅니다. 분노가 자라면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사실 세계에서 판매되는 약 순위에서 우울증 치료제가 10위 안에 들 정도로 '우울증'은 매우 흔한 병이 되었습니다. 현대인 100명 가운데 15명가량은 일생에 한 번쯤 우울증에 걸린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우울증은 흔히 '마음의 감기'라고 부르는데, 우울증을 초기에 잘 대처하면 감기처럼 치료하기 쉽만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우울증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하거나, 발견하더라도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아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울증의 핵심증상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우울한 기분’과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환자들은 이러한 증상보다는 소화불량, 두통, 과호흡, 흉부의 압박감 혹은 불편감, 피로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신체증상을 먼저 호소하면서 ‘정신과’보다는 내과나 신경과 등을 찾아가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는 '신경성'이란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기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기쁨의 위대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울한 시인, 우울한 화가, 우울한 음악가는 혹 있을 수 있어도 ‘우울한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짜증내는 주부, 불안해 하는 자녀, 낙담한 가장, 경제 문제로 염려하고, 건강 문제로 우울해 하고, 죽음의 문제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어도, 짜증내고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우울해 하고 낙담하고 슬퍼하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울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 아니 온 우주에서 가장 큰 기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혹독한 현실을 통과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과하는 동안에, 이 모든 우울과 불쾌와 슬픔과 낙망과 불안과 염려와 짜증을 압도하는 기쁨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로 인한 위로와 감사와 기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이것들을 더욱 많이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14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씀하면서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처럼 성도가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성도가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입니다(12절)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12절) 하나님은 온 땅이 여호와의 불에 소멸되는 ‘여호와의 날’(8절), 즉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구스 강 건녀편에 있는 이방 나라까지 구원하십니다(9절).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머나먼 구스 땅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들이 돌아와서 여호와께 예물을 바칠 것입니다(10절). ‘여호와의 질투의 불’(8절)로 교만한 자들이 제거될 것이고,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은 여호와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을 위한 심판이며, 여호와의 질투의 불은 악과 거짓을 태우는 불입니다. 심판 때에 자기 교만과 자랑을 제거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는 가난한 자만이 남은 자가 되어 주의 품에서 두려움 없이 먹고 누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려운 환경과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신명기 32:10에 보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황무지에서, 또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했던 광야는 사람이 기거 하거나 지나 가기가 아주 힘든 곳이었습니다. 낮에는 일사병으로 쓰러질만큼 폭염이 계속되다가 밤이 되면 추위가 몰아 닥칩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이 없으며, 또한 독사와 맹수들이 들끓기 때문에 언제 그것들의 기습을 받아 죽을런지 모릅니다. 참으로 공포스러운 환경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험난하고 위험한 광야를 통과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단 한 명도 목말라 죽었거나 일사병으로 죽었거나 배고파 죽었거나 추위에 얼어 죽었거나 맹수에 물려 죽은 일이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었지만, 그들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한 죄 때문이었지 황무지와 짐승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새의 왕인 독수리가 새끼를 키우는 방법을 보면서 우리가 교훈을 받습니다. 새끼가 어릴 적에는 어미가 잘 돌봐 주고 먹여 주지만, 어느 정도 크면 둥지를 흩뜨려서 새깨들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무서워서 안 떨어지려고 몸부림치겠지요. 위에서는 어미가 날개를 너풀거리며 바라보다가 새끼가 떨어지면 즉시 내려가서 받아 새끼를 보호합니다. 모진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끼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새 중에 왕을 만들려는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는 일이 힘들어 지고 고생이 가증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 버리셨는가 라고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하나님은 나를 훈련시키고 연단 시키는구나’ 라고 용기와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둥지에서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삶의 ‘아픔과 놀램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휘관이 부하들을 훌륭한 군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하게 훈련시키듯이 하나님께서 마치 어미 독수리처럼 우리들을 둥지에서 떨어뜨리고 연단시키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단코 파멸이나 종점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되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적용) 나는 나를 보호하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습니까? 적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2. 성도가 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둘째로, 나의 왕이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14~17절).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15,16절)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냐면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가 나의 하나님이 되어 나의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걱정하니?”라는 글이 있습니다. “세상에 걱정할 건 딱 두 가지 뿐, 건강한가 아니면 아픈가, 만약 당신이 건강하다면 걱정할게 없다. 만약 당신이 아프다면 걱정할 건 딱 두 가지뿐이다. 아픈게 나을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만약 당신이 낫는다면 걱정할 건 없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걱정할 것 딱 두 가지뿐이다. 천국으로 갈 건가, 천국으로 간다면 죽어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왜 걱정을 합니까? 그 분이 나의 왕이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면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제부터라도 예수 믿기로 결심하고 그 분의 나의 주님을 영접하고 예배의 자리로 나오면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 분은 나의 존재만으로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전능자 하나님은 성도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십니다. 17절 “너의 하나님이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를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했던 그 시대, 나라는 주변 열강들에 의해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이미 북쪽은 앗수르에 의해 망해 버렸고, 남쪽 유다는 강대국인 바벨론에 의해 침탈당하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바냐서는 시작부터 매우 과격하고도 단호한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습 1:2).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 멸망받고, 심판받아 마땅할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부족한 부분이 많은 진노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저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부모 된 자로서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1)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여기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라는 말씀은 ‘고마워한다’라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같이 추악한 죄인, 보잘 것 없는 자식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신답니다. 아니 고마워하신답니다. 자녀들을 바라보며 그 무엇보다 먼저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부모들이 됩시다. 자녀들이 있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2)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여기 ‘잠잠히’는 ‘은근히’라는 뜻도 되지만 직역하면 ‘그가 그의 사랑으로 침묵하시리라’는 뜻입니다. 즉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자녀들에게 물을 주는 자일 뿐입니다. 자라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 참 힘들게 자라가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필요한 믿음으로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부모의 눈빛입니다. (3)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자녀를 향해 어떤 말을 할 때에, 또 이름을 부를 때에 노래하듯이, 환호성을 지를 때의 감정을 담아서 말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여기에 더 깊은 뜻이 있는데, 그것은 자녀를 향해 칭찬하고 축복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음을 말씀해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 말씀인 시편 16편 3절에 보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라고 합니다.
적용) 내가 택함 받고 구원받은 내 존재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또한 나의 여러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며, 나와 함께 하심이 믿어지십니까?
3. 성도가 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세상에서 수치가 변하여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18~20절). 하나님은 심판으로 말미암아 포로로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서 그들이 그토록 참여하고자 했던 절기를 지킬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8절에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라고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을 괴롭게 하는 포악한 지도자들과 이방 대적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19절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또한 저는 자, 억압받고 쫓겨난 자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19절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에서 수치를 당한 그 분의 백성을 보아서 존귀한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19절 “온 세상에서 수욕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은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지 못해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시고 세상에서 수욕을 받는 자들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칭찬과 명성을 얻을 것인데, 이것은 성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이들은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주님을 예배하기를 원하고 예배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저런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 초대 가운데는 우리의 일생 가운데 잊을 수 없도록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생각되는 추억을 남기는 초대들이 있습니다. 시편 95: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 초대를 가리켜서 보통 우리는 ‘예배로의 초대’라고 부릅니다. 혹은 ‘예배에의 부름’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저와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 하셔서 우리를 예배의 장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무엇 때문에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십니까?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어서 부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예배의 장’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은 “참되고 진정한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고귀한 활동이다.”라고 예배를 정의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예배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에서 생각해 내는 온갖 활동들을 다 쉬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도록 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95편은 ‘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도 동일하게 ‘오라’는 단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라, 빨리 와서 함께 예배하자!’ 그 예배의 장에서 너를 만나고 싶다고, 너를 축복하고 싶다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그 예배의 장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배의 축복은 기쁨으로 살아가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기쁨으로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힘들고 곤고한 가운데 지친 몸으로 주 앞에 나온 심령도 예배를 드리게 되면 기쁨이 회복됩니다. 왜냐하면 예배 자체가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엄청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영광을 아는 사람들은 예배의 자리에로 나올 때마다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옵니다. 설레이는 기쁨을 가지고 나옵니다. 예배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나의 창조주를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그 창조주를 만나는 기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감격이요,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두 번째로, 예배의 축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축복을 제공해 줍니다. 예배는 우리를 기쁨으로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보내라!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었습니다. 세계 선교가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숱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받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치유를 받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명을 받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생에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저도 예배드리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혹시 지옥에 갈 자가 아니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그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 지금까지 쭉 주님을 향해서 예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때가 1990년 7월 2째주부터니까 지금까지 올해 7월이 되면 만 33년이 되네요.
적용) 하나님은 온 세상에서 수욕받던 나에게 어떤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셨습니까? 내가 근심하는 것은 주님을 예배하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예배의 자리에서 기쁨을 누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나요?
‘약속의 말씀’, 오재석 큐티인 간증
결론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전심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을 빼앗겨 버리셨나요?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우울해 하시나요? 빌 2:17-18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명했던 사도 바울은, 다시 빌3:1에서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라며 또다시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4장에 와서 두 번 더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 없는 명령인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 기뻐하는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다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갖고 싶은 휴대폰이나 자동차 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기뻐합니다. 나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반대로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는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은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는 것, 기쁨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현재형의 표현으로, 그것을 계속해서 선택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가 기뻐하지 않기를 선택할까요? 누구나 기뻐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사도 베드로도 같은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1-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이런 명령을 하고 있을까요? 상황이 좋지 않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성경은 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어려움이 있어도 억지로 웃으면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저 낙천적인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명령의 근거가 어디 있으며 그것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일까요? 이 명령의 타당성은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젊음이나 특출난 외모에 기뻐합니다. 승진이나 선물, 자녀들, 손주들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기쁨을 두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돈은 있다가도 쉽게 없어지고 젊음과 외모도 순식간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명예 역시 작은 실수 하나에 무너져내리고, 귀엽고 예쁘던 자녀들, 손주들은 커가면서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는 자녀가 있을까요? 그러니 이 “기뻐하라”는 명령은 공허한 말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즐거운 감정이 기쁨이라면, 우리는 상황에 따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 항상 기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라는 곳에서 ‘주 안’이라는 곳으로 기쁨의 장소가 옮겨진 것입니다. 전에 세상에서 기뻐했다면 이제는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님들이 내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12절). 또한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며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17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받은 수치와 모멸이 변하여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시기 때문에 기뻐하시길 바랍니다(18~20절). 내가 처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