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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음성’ 비판적 읽기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는 하지만 결국 <왕의 음성>은 '내가 들은 음성'에 강조점을 둔다
유튜브에 재정강의를 올려서 1,400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는 김미진 강사가 홍성건 목사(한국예수전도단대표)와 함께 <왕의 음성>(부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2015년, NCMN 규장刊)을 썼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강조한다. 이에 대해 시비를 걸 마음은 전혀 없다. 기독교 역사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 가운데 살아온 증인들의 얘기들이 넘쳐난다. 저자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 아니라 그대로 사는 삶이 중요하다고도 강조한다(40페이지).
달라스 윌라드도 <하나님의 음성>(IVP)이란 책에서 “성경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단지 한쪽에서 다른 쪽의 필요를 책임지고 채워주는 사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친구나 가족관계로 묘사하고 있다”(27페이지)고 썼다. 고금을 통틀어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웨슬리, 스펄젼 등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와 대화를 일생을 바꾸는 사건이자 매일의 양식으로 떠올렸다고 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에 대한 체험담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가운데 적잖이 나온다. <왕의 음성>도 사실 그 전제하에 그분과의 교제를 강조하고 있다.
그 방법론도 적잖이 다뤘다. 특히 세븐업(7up)으로 정리해 놓은 저자의 하나님의 음성듣기 연습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제시됐다(102페이지). 저자의 세븐업은 “하루에 2시간씩 기도하자”는 식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하루 7분, 내 상태가 최고조에 있을 때, 30분만 일찍 일어나 7분의 시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새벽기도를 하라는 게 아니라 “오늘도 주님 제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과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103페이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강조하고는 있지만 이 책에는 '이래도 되는 걸까'라고 의아심을 자아내게 하는 내용들이 다수 등장한다. 홍성건 목사와 김미진 강사가 공동저자이지만 특별한 분류를 하지 않고 이하 ‘저자’로 표기해서 <왕의 음성>을 비판적으로 살펴봤다.
저자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음성의 개념
홍성건 목사와 김미진 강사의 <왕의 음성>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절대적인 요소를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했을까? 아쉽게도 책 서두에 정확하게 밝혔으면 좋았을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정확하고 선명한 개념이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저자 서문 15페이지에서 저자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뭔지 표현돼 있긴 하다.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고, 에녹과 아름답게 동행하시고,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시며, 사무엘을 부르시어 앞날의 모든 일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런 일들이 정말 기독교 역사에서 지극히 예외적이고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난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획하신 정상적인 생활의 모습일 것이다.”(15페이지).
지금 저자는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이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하며 ‘모든 일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음성’의 정당성을 찾는다.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하는 삶은 예외적이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계획하신 정상적인 ‘생활의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 인물들처럼 저자들은 다른 인격체가 나에게 말하는 듯한 ‘하나님의 음성’을 개념화하고 있다.
▲ 성경의 인물들처럼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다고만 한다면 비판을 비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일상생활, 설교·상담·강의를 통해, 매스컴을 통해, 타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포괄적 해석을 하기도 한다(229, 230페이지). 그렇더라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이 책의 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성경의 인물들과 성경에 나오는 방법을 내세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환상 등을 지속적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잠깐 소개했지만 하루 7분, 하나님과 교제하라는 세븐업이란 방법도 결국 직접 하나님께 어떤 음성과 말씀을 듣고 기다리는 시간으로 따로 떼어놓으라고 제시된 것이었다(103페이지).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인물들과 동일하게 음성을 듣는 방식으로서의 ‘하나님의 음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게 자명해진다. 이런 음성을 듣는 삶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31, 33페이지)는 게 저자의 신념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뜻, 성령의 감동하심, 내적 감화 등 그리스도인이라면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인도와 뜻을 표현하는 무수히 많은 용어를 선택하지 않았다. 논란이 될만한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용어를 선택해서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이런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대한 실례보다는 이론적 바탕에 강조점을 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이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그것을 듣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유익 등이 아주 구체적으로 정리돼 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이론서 같은 이 책자는 어떤 점에서 주의가 필요할까?
▲ 왕의 음성의 공동저자인 홍성건 목사와 김미진 강사
성경계시를 사적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근거구절로 오용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쳐보자.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나타나 제 자식을 남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쳐보자. 그리고 “미쳤냐?”고 사람들이 말리자, 그가 창세기 22장을 근거로 들며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처럼 내게도 나타나 말씀하셨는데 뭐가 문제냐?”며 반박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우리가 그에게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뭔가?
▲ 성경에 나오는 사건이 다시 반복된다고 한다면 벌거벗고 북한의 침략을 외치는 신도들이 나올 수도 있다(해당 사진 왕의 음성과 무관).
이사야 20:2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했다는 말씀이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 동안 그렇게 다녔다고 한다. 이처럼 누군가 벗은 몸으로 다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역시 “미쳤다!”며 말리자 그가 이사야 20:2을 근거 구절로 제시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면 성도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김정일이 남침한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십자가 형상을 차에 달아 놓고는 나체로 길거리를 다니던 사람들이 경찰에 붙잡혀 간 건 우리 사회에서 아예 없는 일이 아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호세아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라는 말씀을 따라 고멜을 아내로 맞이한다(호세아 1:2~3). 여기서 음란한 아내는 אֵ֤שֶׁת זְנוּנִים֙(에세트-a wife 제누님-of prostitutions)으로서 매매춘하는 여성을 가리킨다. 이 말씀을 근거로 누군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매매하는 여성을 아내로 맞으라고 말씀하셨다”면서 결혼을 하려 한다면, 정말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이유로 ‘NO!'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왕의 음성>을 비판적으로 읽으며 위의 황당한 예부터 먼저 언급한 것은 성경을 대하는 가장 큰 오류가 발생해서다. <왕의 음성>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의 계시 사건들을 개인의 하나님의 음성 듣기 행위의 실제 예들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다윗과 블레셋이 전쟁을 치를 때 다윗은 하나님께 치러 갈 것인지 아닐지에 대해 물어보고 음성을 듣는다(대상 14:10). 전쟁할 때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인 것을 두고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제한하지 말라!(34페이지)고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기독교는 자연 종교가 아니라 계시종교다”며 “하나님께서 직접 스스로를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말도 한다(45페이지). 계시종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할 때 말씀하셨고 역사하셨던 방식 그대로 지금도 내게 말씀하고 음성을 들려 주실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정당성을 위해 저자는 이외에도 수많은 사례들을 성경에서 찾아서 제시한다. “성경속의 인물들에게 말씀하신 방법으로 오늘날도 말씀하신다!”(179페이지)는 전제에서 나온 이 주장은 책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호렙산에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듯이(186페이지), 다메섹에서,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듯이(187페이지), 느브갓네살이 본 환상을 다니엘에게도 보여주셨듯이(221페이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듯이 현재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넬료(환상, 219페이지), 아브라함(환상, 220페이지), 야곱(꿈, 222페이지), 요셉(꿈, 223페이지), 사가랴 제사장(천사의 메시지, 226페이지), 예언가 아가보(예언, 228페이지, 행 21:10) 등이 실례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나님과 대면하듯 이야기를 나눈 모세(239페이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고 부름받은 사무엘(260페이지) 등을 언급했음은 물론이다.
이 말씀들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근거 구절이 될까? 이 구절이 차라리 포괄적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류가 가능함을 설명하는 범위였다면 논란 소지는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 하나님과 대화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매일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별계시인 성경에 나타난 계시적 방편들인 꿈, 환상, 천사를 통한 전달, 하나님과 대면하듯한 대화, 이런 성경의 사건들을 사적 하나님의 음성듣기의 근거 구절로 사용해도 괜찮은 걸까?
먼저, 성경에서 계시적 방편들로 사용했던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계시를 전달했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날의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저자들의 주장은 즉각,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최종적 계시이며 그 후에는 구원을 위해 사용했던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서의 계시 사건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는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구약 시대와 신약 초기에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을 전해주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환상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죠. 그런데 이 모든 계시의 방식이 요한계시록을 완결함으로서 이제 그쳐졌다. 중지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건전한 신앙의 고백입니다”(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음성을 들려 주시는가’, 바른미디어, https://youtu.be/Sq80MDzOUrI 2017년 4월 12일).
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방편들은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특별계시의 수단이었다. 인간 구원을 위한 계시사건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로 완성되었고 완료됐기에 더 이상 이런 방편을 사적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근거 구절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 방법들은 모두 특별계시의 수단으로서 그쳤다는 설명이다.
장운철 목사(만나교회, <이단들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 33가지 성경이야기> 저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정경이 형성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거나 꿈, 환상, 천사들을 통해 계시를 전달하셨으나 지금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하게 들을 수 있다”며 “만일 지금도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음성을 듣고 환상을 봐야 한다며 근거 구절로 성경의 사건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계시 방법이 현 시대에도 반복될 수 있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장 목사는 “하나님과 직접 만나 음성을 듣고 환상과 꿈과 예언을 받는다면 목회자들이 수많은 시간을 들여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 준비를 하는 의미가 뭔가”라며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을 꾸짖을 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고 하신 의미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은 되새겨야 한다”고 비판했다.
만일 <왕의 음성>의 저자의 말대로 성경에서 제시하는 계시의 방편들이 지금 현재에도 계속 반복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동으로 옮긴 계시적 행위들도 현재 반복돼야 마땅하게 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은혜가 아니라 한없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서두의 황당한 예를 통해 언급했다. 심지어 자신이 받았다는 ‘계시’를 글로 써서 ‘새로운 시대의 성경’이라고까지 과장·왜곡하는 현상까지 이런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새로운 선지자, 예언자가 없으며, 사도들이 주신 말씀으로 그친다는 것은 결국 현재 우리가 받은 성경을 최종계시로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개혁주의 성령론>, CLC, 375페이지).
“인간의 타락과 부패에 대해서 철저히 파헤치지 않으면서, 계시연속을 주장하게 되면 그저 탐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질 수 있다는 신앙은 인본주의적으로 참담하게 변질되고 만다.”(위의 책, 382~383페이지).
“캔사스 예언가 집단에 소속한 폴케인, 마이크 비클, 밥 존스 등의 예언이 어떤 내용인가를 들여다보면, 분명히 성경적인 예언과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청소년의 죽음,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 어느 교회의 혼란과 대립, 어느 목회자의 앞날, 지진현상, 대통령의 회심 등이다. 대부분 공포와 두려움의 선포였다. 그런데 이런 예언들도 정확성이 별로 없었다. 마이크 비클은 크게 잡아도 예언 성취율이 20% 정도 될 것이라 짐작했다.”(김재성, 위의 책 386페이지).
"어떻게 되어서 교회는 성경이 종결되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가? 유일한 증거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기록으로 주신 계시 등은 항상 역사적으로 전개된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영원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구원사역을 완성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말씀도 역시 단번에 영원하도록 주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자들에게만 그러한 특별계시를 기록하고 전파하게 하였고 성령의 권능을 부어 주셨다(히 1:1~2; 2:3, 4; 마 16:15~19; 요 14:26;엡 2:19~2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면서 계시의 중단이 단행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오직 성경으로만’을 권위의 원칙으로 세워서 지금까지 구원의 소식을 전파해오고 있다.··· 다시 날마다 주어지는 계시를 따라야 한다면, 무엇이 기독교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인가? 지금 예언을 받는다는 자들은 복음의 충분성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 계시의 최종성과 완결성에 완전히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김재성, 위의 책 393페이지).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계시와 관련, 다음과 같은 지침을 준다.
“주께서는 여러 때에 여러 방식으로 자기의 교회에 대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며 자기의 뜻을 여러 방식으로 자기의 교회에 대하여 자신을 계시 하시며 자기의 뜻을 선언하시는 것을(히 1:1∼2, 갈 1:11∼12, 신 4:12∼14), 그리고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며, 또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설립하시고 위안하시기 위하여 그 동일한 진리를 전부 기록에 맡기시기를 기뻐하셨다(눅 24:27, 딤후 3:16, 벧후 3:15∼16).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한 것으로 만드니(눅 16:29∼31, 히 2:1∼3, 딤후 3:15∼16, 벧후 1:10),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신 이전의 방법은 지금 정지 되었다(이 진술은 주로 교회의 경험과 관찰로부터 인출되나,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도 있다(눅 16:29, 요 20:29, 31).”
▲ 제목은 왕의 음성이지만 결국 내가 들은 음성을 믿으라는?
신구약에 나오는 계시적 사건을 무분별하게 개인의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근거 구절로 삼고 있는 <왕의 음성>은 계시론적 오해를 불러 일으킬 내용으로 넘쳐난다. 마음으로 깨닫든, 귀로 듣든, 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있어 내가 들은 음성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278페이지)고 말한다. 결국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믿고 가라는 의미다. 이쯤되면 저자들이 과연 믿음의 대상을 ‘왕’이신 하나님으로 삼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
▲ 개인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해석학적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CBS 낸시랭의 신학펀치 갈무리)
왕의 음성인가, 내가복음인가?
‘내가복음’이란 말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하고는 ‘복음’을 붙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왕의 음성>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말하면서도 결국은 내가복음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내가 들은 음성’을 강조하는 저자들은 성경까지도 그 본의와는 상관없이 그냥 내가 좋아하고 깨달은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포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책 전장에 걸쳐 강조하면서 성경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뿐 아니라, 환상, 꿈, 대면·대화 방식 등 직접 음성듣기를 언급할 뿐 아니라 성경의 중요성 또한 역설한다는 것이다. ‘제 4장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다’(121페이지)에서 그 부분이 특히 강조된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시고, 그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을 기록하신 목적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분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124페이지)고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멋진 표현이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누가 문제 삼을까? 독자들은 이런 요소 때문에 <왕의 음성>이 신앙에 유익이 된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자. 저자가 성경 말씀을 강조하면서 끝까지 내려놓지 않는 게 있다. 저자는 성경의 본의를 살피고 고민할 것을 말하기 보다 성경을 통해 ‘내게 말씀하시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왕의 음성>이 갖고 있는 문제는 ‘내가 깨달은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단정한다는 점이다. 결국 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과연 저자들은 ‘왕’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려는 진지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인가? 의아해지기까지 한다. 다음 글을 보자.
▲ 왕의음성 167페이지 내용
“말씀 묵상할 때 좋은 질문이 필요하다. ‘성령님,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제게 말씀하소서.’ 그러고 나서 말씀을 천천히 읽는다. 처음에 읽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다시 읽는다. 그러다 어느 한 단어, 한 구절, 한 단락에서 마음에 무언가 주어지는 게 있다. 마치 누가 옆구리를 콕 찌르듯이, 아니면 살짝 어깨를 두드리듯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게 있다. 이 구절을 통해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 부분에 집중하여 처음의 질문을 다시 하라. ‘주님,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제게 말씀하소서.’ 성령께서 지금 내게 응답하는 중이다.”(167~168페이지).
“내게 감동이 되는 말씀이 있다면 주님이 내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주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이다.”(168페이지).
성경을 읽다가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 있다면 그건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인 구절에 집중해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제게 말씀하소서”라는 부분에 이르면 고개가 절래 절래 저어질 수밖에 없다. 내 마음에 ‘콕!’찌르듯 다가온 말씀은 주님이 내게 말씀하는 것이며, 그 기록된 말씀, 사실상, 내 옆구리 찌르듯 콕 다가온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를 ‘레마’라고 표현한다(128페이지). 그 레마의 말씀에 집중해 다시 보고 또 보는 방식이 저자들이 추구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을 통해 성경의 본뜻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들은 내게 ‘콱’하고 꽂히는 말씀에 집중하는 황당한 방법을 아주 당당하게 제시한다.
이런 깨달음을 하나님의 음성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근거에 대해 저자들은 성도의 내면에는 ‘새 영’, ‘영’이 부어졌기 때문에 그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니 성령의 음성을 영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 삼분설(여기서 삼분설의 문제점은 거론하지 않겠다)에 근거해 사람이 영·혼·육으로 구성됐다(180페이지)고 하고는 이 중 ‘영’이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필요한 기능이라고 한다(181페이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내 영을 통해 알려주신다는 것이다(182페이지).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처럼 내 영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190페이지).
즉,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한다 -> 성경을 읽으며 내게 주시는, 옆구리 찌르듯 ‘콕’하고 다가오는 말씀(레마)을 찾는다 ->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음성이다 -> 이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관인 ‘나의 영’으로 깨달아진다는 4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방식이다.
▲ 왕의 음성 171페이지
조금 더 살펴보자. 저자는 “성경을 읽을 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오늘 내게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124페이지)고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내게 하시는 말씀의 내용에 귀를 기울인다”(125페이지), “믿음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거나 들을 때가 아니라 내게 개인적으로 하시는 그리스도의 레마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130페이지), “성경을 대할 때마다 ‘성령님,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제게 레마로 말씀해주소서’라고 요청해야 한다”(138페이지).
일견 옳게 보이는 요소가 있긴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이유, 문장을 통해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지,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맥락, 시대적 배경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게 핵심이 아니라 ‘내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말씀’이, 저자들이 추구하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핵심이다.
“성경을 대할 때 우리가 무엇보다 집중해야 하는 건 성경의 내용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관점을 살피고, 내게 말씀하시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다.”(124페이지). 결국 ‘왕’이 아니라 ‘나’ 개인이 중심이다.
진정 왕이 말씀한다고 쳐 보자. 그런데 그 왕이 말하는 전체적 메시지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내 마음에 ‘콕’ 들어오는 말에 집중하는 신하가 있다면 그는 왕과 인격적으로 교류하는 참된 ‘왕의 신하’인가, 아니면 왕의 위엄과 권위를 무시하는 신하인까?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속내는 여기저기 조금씩 드러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음성을 들을 수 있다던 그들은 결국 ‘문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도 수차례 강조한다.
“아이 사무엘 당시에 말씀이 희귀했다는 의미는 이와 다르다. 성경책도, 성경공부하는 그룹도,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지만 문자를 넘어서서 지금도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62페이지). 사무엘의 시대 상황을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었지만 ‘문자를 넘어서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고 전혀 해석학적으로 맞지 않는 얘기를 한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진리를 가르치시는 걸 넘어서서 진리를 만나게 하신다. 문자를 넘어서서 레마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다.”(139페이지). 자꾸 문자를 넘어서서라고 강조한다.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을 넘어서서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레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171페이지).
▲ 왕의음성 139페이지
결국 저자들에게 ‘문자’, ‘로고스로서의 성경’은 넘어서야만 하는 무엇인 거였다. 저자들이 과연 기록된 성경말씀을 ‘왕의 음성’으로서 귀하게 받아들이려는 겸손한 마음이 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결국 저자들이 <왕의 음성>에서 지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나’다. ‘나의 깨달음’, ‘내게 들려온 음성’이다. 문자를 넘어서서 내 옆구리를 ‘콕’찌르듯 다가오는 나의 감동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포장을 하라고 독려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내게 주시는 깨달음이 없다면 그날 하나님은 내게 아무런 말씀도 안하신 걸까?
권연경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는 큐티의 귀함과 소중함을 전제하면서도 ‘내게 깨달음을 주는 구절을 찾는’ 큐티식 성경묵상의 가장 큰 문제로 ‘해석학적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성경읽기를 굳이 구분하자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읽기도 있을 테고, 기본적으로 이해한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지금 나에게 적용하는, 보통 우리가 큐티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작업을 한 후에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셨나. 그걸 찾고 싶은 거거든요. ··· 제가 쓰는 표현 중의 하나가, 큐티는 사실, 아주 긍정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통해 나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그 메시지를 통해서 지금 내 삶에 필요한 말씀을 받는 것은 지극히 긍정적인데, 우리가 성경을 읽고 적용하려면, 하나님께서 직접 내 귀에 대고 속삭여 주시는 말씀이라면, 그냥 ‘네!’하고 적용하면 되는데, 2천년 전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갈라디아교회의 사람들에게, 거기에 문제가 있어서 할례와 관련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쓴 편지가 갈라디아서예요. 그걸 내가 큐티를 한단 말이죠. 그걸 지금 나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이상한 오해가 생기겠죠.
그래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느냐 하면 기본적으로 원래 맥락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러면 그 메시지가 지금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를 따져야겠죠. 그런 절차가 귀찮잖아요. 귀찮으니까 어떻게? 그러니까 바로 내게 주시는 말씀처럼 읽고 싶은 거죠. 본래 맥락을 무시하면 자기 마음대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문제예요. 이게 그냥 사적 대화 같으면 자기가 좀 오해해도 괜찮지만, 문제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하는 거거든요.
결과적으로 조금 어려운 표현을 쓰자면 제가 ‘해석학적 우상숭배’라는 표현을 써요. 결과적으로 뭐가 되냐 하면 자기 생각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키는 거죠. 왜냐하면 성경을 읽었는데 그걸 내 마음대로 읽었어요. 그런데 어쨌든 그걸 내가 성경을 통해 메시지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내 생각인데.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가 입혀지잖아요.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거죠. 결국은 우상숭배가 되는 거죠.”(권연경, '큐티(QT)식 성경읽기는 문제가 되나요?‘, CBS 낸시랭의 신학펀치, 2014년 2월 12일).
QT는 매우 귀한 신앙행위이지만 말씀을 읽으며 마음을 콕 찌르는 구절과 단어에 집착하다보면 자칫 성경의 본의와 맥락은 무시한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내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입히는 ‘해석학적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지적이다.
저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기록된 말씀인 ‘로고스’와 내가 깨달은 말씀 ‘레마’로 구분하며 기록된 말씀, 로고스, 즉 ‘문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로 성경 자체의 권위보다 내가 깨달은 말씀의 권위를 수시로 높인다. 문자를 넘어서라? 저자들에게 로고스인 성경은 넘어서야 할 산인가? 벽인가? 울타리인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왕의 음성]의 저자, 홍성건 목사, 김미진 강사
참고로 저자들이 워낙 레마를 강조(128페이지~171페이지까지, 거의 43페이지 분량을 로고스와 레마에 대해 설명한다)하니 성경이 과연 저자들의 말처럼 로고스와 레마로 날카롭게 구분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헬라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저자들의 말처럼 로고스와 레마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주장처럼 기록된 문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라는 단어만 사용한 건 아니다. 반대로 나에게 주어진 말씀, 깨달은 말씀을 뜻할 때도 레마라는 단어만 사용한 건 아니다. 때로 이 두 단어는 교차 사용하기도 했다. 다음 글을 살펴보자.
“로마서를 본문으로 문제를 한 번 만들어 보았다. 문제3) 다음 로마서 각 구절 중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해 보시오.
〚롬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면 네 마음에 있다 하였느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
말씀이라는 단어가 모두 6개다. 어떤 것이 로고스고 또 어떤 것이 레마일까? 정답은 10장의 말씀은 모두 레마고 9장은 모두 로고스다.
결론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성경에 쓴 ‘말씀’을 로고스와 레마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이 스스로 지지해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로고스와 레마를 특별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구분법에 따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기록된 말씀이라는 의미처럼 보이는 ‘말씀’이라는 성경구절에 로고스와 레마가 섞어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레마)을 가지라.”
레마가 일반적인 ‘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마 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레마)마다 증참케 하라.”
로고스와 레마가 한 문장에 동시에 사용된 재미있는 예가 있다.
행 10:44 “베드로가 이 말(레마)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와.”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위 행 10:44의 로고스와 레마는 순서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성경적 예가 얼마든지 있다. 성경이 이 두 용어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로고스와 레마라는 단어를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 용례도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두 용어를 구분하여 다르게 사용하려는 것은 비성경적인 행위다. “레마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옳지 않다.“(장운철, 교회와신앙, ‘레마사상, 여전히 우리 주변에?’, 교회와신앙, 2011년 2월 11일, 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80)
▲ 홍성건 목사, 김미진 강사의 [왕의 음성]
[왕의 음성 비판적 읽기 마지막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설명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단체에 전임강사로 위탁하여 사역을 시작한 첫해에 개인적으로 잘 아는 목사님이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내게 제안하셨다. ‘다 좋은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어떨까?’ 이것이 당시 우리나라 교회의 영적 상태였다. 감사하게도 지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당연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한다.”(63페이지).
저자의 말처럼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당연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할까? 저자의 현실인식과 달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과 주장에 대해 한국교회는 여전히, 아직도 매우 비판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교회는 질서와 평안보다는 혼란과 고통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님 음성을 듣는 신도들이 많아져서 교회가 평안해지고 은혜와 덕이 충만해졌다는 교회가 있으면 소개를 받았으면 좋겠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표현은 오해를 살 수 있다(내 삶을 변화시킨 성령, 그 위대한 힘, 53페이지)
성령 사역을 하고 있는 배본철 교수(성결대)조차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님은 나의 환경을 통해서, 어떤 사건을 통해서, 우연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성경말씀을 읽는 중에,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또는 열심히 일하는 중에, 심지어 휴식이나 잠자는 중에도 끊임없이 인도하심을 주신다. 이렇게 마음속에서 주님의 뜻을 깨달을 경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표현대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17세기 청교도들의 교훈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청교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은, 프라토적 신비주의라든가, 중세 신비주의 또는 ‘내적 빛’에 호소한 퀘이커파나 도덕률 폐기론 노선의 앤 허친슨과 같은 영적 신비주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수단으로 신자들의 주관적인 영적 체험보다는 객관적인 계시로서 성경에 중점을 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영적 기준이 없는 주관적 신비주의의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처럼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계시 그 자체였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요즘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교계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과 집단들을 흔히 볼 수 있다.”(<내 삶을 변화시킨 성령, 그 위대한 힘>(배본철, 넥서스 크로스, 2014년 4월). 53~55페이지, 요약).
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는 표현은 오해가 생길 수 있으며 그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과 집단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는 게 배 교수의 평가다.
저자의 글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꿈·환상 등을 봤다는 얘기들이 다수 등장한다.
“어느날, 내가 자고 있는데 누군가 ‘미진아!’하고 불렀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기에 무시하고 잤다. 그런데 또 ‘미진아’하고 불렀다.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다음 날도 자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본 세 사람이었다. 그들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 이틀 연속으로 꾼 꿈의 뜻을 나중에 주께서 알게 해 주셨다.”(74, 75, 76페이지 요약).
저자는 환상도 본다. 기도 중에 두 개의 나무토막에 ‘북한’, ‘남한’이라고 적혀 있는 게 보이더니 하나로 합쳐지면서 ‘통일한국’이란 글씨가 보였다고 한다. 주께서 통일이 된다고 말씀하셨고, 바로 이어서 황금으로 된 큰 산을 보여주셨다고 한다. 왕의 기업들을 통해 교회들에 큰 재물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받은 말씀이 있다고 한다. “너는 한국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들을 다니면서 왕의 재정 원칙을 가르치라. 개인과 가정과 기업과 교회의 주인을 맘몬(‘재물’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대립되는 우상을 일컬음)에서 하나님으로 바꾸라. 너는 내 교회에게 먼저 빚을 갚으라고 외쳐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177페이지).
1982년 말에 하나님께서 저자에게 홍콩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206페이지). 아시아 지도자들을 위한 선교훈련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려면 여권도 나와야 하고 비자도 나와야 하고 비행기표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여권 발급 받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고 한다. 아이와 함께 신청하려 했는데 여권 발급대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시 신청하라는 음성을 듣고 다시 신청했더니 놀랍게도 자신은 통과됐으나 아이가 걸렸다.
여권 담당자가 불가 판정을 한 것이다. 이 때 저자는 출 8장~10장을 예로 들며 “모세가 ‘내 백성을 보내라’는 주의 말씀을 바로에게 전달했을 때, 그는 즉시 거절했다. 하나님의 이적 베푸심의 강도가 높아질 때마다 바로는 타협했다.”며 출애굽기 말씀을 기록해 놓았다.
도대체 저자가 홍콩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은 것과 출애굽기 말씀, 양자 간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대한민국이 애굽이고, 홍콩은 가나안 땅이라도 된단 말인가? 엉뚱하기만 하다. 계속 여권 담당자가 여권 발급을 거절하자 저자는 출애굽기 말씀을 근거로 모세처럼 담대히 말했다고 한다. “아니요! 하나님께서 아이까지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당자가 어이없어하고 화를 내며 거절했지만 저자는 “그러나 나는 주의 말씀에 순종했다.”며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태도다.
담당자의 거절에도 불구 저자는 나중에 이사야서 42장 13절까지 근거로 들며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치시리로다.” 도대체 출애굽과 여권 발급이 무슨 관계이며 이사야서에 나온 메시아 예언 중에 ‘대적을 치시리로다’는 말씀은 여권발급자와 또 무슨 관계란 말인가? 졸지에 규정과 원칙을 준수하려한 여권발급자는 여호와의 ‘대적’이 돼 버린 셈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대형 승용차를 선물로 받았다고도 한다(195페이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계속 떠오르는 생각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면 우리는 놀라운 결과들을 볼 수 있다. (5백만원을 선교헌금으로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이후에 주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중고차 대신 대형 승용차를 선물로 주셨다. 나는 재물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왕의 재정>, 106쪽 참조). 저자의 체험은 성경이 추구하는 정신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맘몬이 우리의 주인이 돼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결국 추구하는 건 맘몬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함한 사람에게 '에스더서의 하만 사건'을 보게 될 거라고 하셨다고 주장하는 저자(264페이지)
나무에 달린 하만(에스더서에 나오는 사람으로서 에스더를 비롯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다 오히려 사형당한 인물)의 예를 들며 자신이 관계한 단체에 대해 모함하는 한 사람에 대해 비판하는 글도 나온다. 일을 하다보면 반대에 부딪히고 모함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법 아닌가? 나를 모함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을 성경에 나오는 하만에 빗대는 것, 그것도 사적인 감정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저술한 책에 기록하는 건 과장이요 오만함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에게 보냈다고 한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이 일은 당신에게 유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로 나는 너무나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대처하기 위해 금식하고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모르드개의 장대에 하만이 달릴 것을 보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주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당신에게 전함으로 당신이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일의 중심에 섰던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264페이지).
상대를 성경에 나오는 하만과 동일시하며 그에게 메시지까지 보내고, 그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고 한다. 표현이 순화돼 있지만 자신이 들었다는 음성으로 상대를 협박하고 저주할 수도 있는 경계선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을 정리해 놓은 바 있다(277페이지). 내가 들은 음성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일치하는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가’,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인가’,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인가’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하나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속삭임인지 분별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기준을 저자가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과 관련해서 들었다는 음성에 대입해 보았으면 좋겠다. 양자는 별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나를 모함하는 사람에 대해 장대에 달린 하만의 사건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응답으로 받았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우리는 왕의 음성 비판적 읽기(1)편에서 계시적 사건과 개인의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그대로 응답 받았다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만 사건 또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계시적 사건 중의 하나이지 한 개인을 모함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하만처럼 장대에 매달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말씀은 아니다. 만일 그런 음성을 들었다면 저자 자신이 제시한 기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유익과 대입해 볼 때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기준을 287페이지에 한번 더 제시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나는 사탄의 음성을 식별했다. 연합을 깨뜨리는 것, 권위에 대적하게 하는 건 하나님의 음성과 기록된 말씀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한번도 업그레이드 된 적이 없다.”(287페이지).
사탄의 음성을 식별하는 저자의 방법은 별로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만일 어떤 공동체가 비진리로 연합된 것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연합을 위해 만들어진 권위라면 저항하는 게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탄의 음성을 식별하는 방법으로서 저자는 그 두가지 예를 들었다. 여러모로 저자의 ‘왕의 음성’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회를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저자(왕의 음성 41페이지).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박영돈, IVP, 2011)에 나오는 말을 저자는 물론 독자들이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길지만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인용해 본다.
“최근 들어서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예언훈련학교에서 선무당 같은 어설픈 예언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 또는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다. 자기 머리 속에서 떠오른 생각이 주님의 말씀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마귀적 음성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위장되기 일쑤다. 순진한 교인들은 그들이 직통으로 계시된 말씀을 전파하는 것 같아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에 더 솔깃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의 진리에 의해 전혀 입증될 수 없는 온갖 허튼 소리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한다는 점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인들이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에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에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가 있는 셈이다”(31~32페이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성령 뿐 아니라 육신의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곳이기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된다.”(33페이지).
▲ 예언은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성 안고 있다고 주장하는 박영돈 교수(<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37페이지)
“이런 식으로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 않아 무당종교로 변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자기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나 마음속에 일어난 감동을 말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그 누구도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35페이지).
“확실한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이와 유사한 예언을 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예언적인 의견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자신의 예언적인 통찰을 꼭 말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이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나 인상을 떠오르게 하시는 것 같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솔직하고 진솔한 태도이며 많은 혼란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이다”(36~37 페이지).
“사람은 자신이 가장 의존하는 것에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더 의존하게 되면 예언자의 오류와 부패를 통해 역사하는 거짓의 영이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언은 교회를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역사하는 영역이며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37페이지).
박영돈 교수의 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예언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다 △교인들이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에 더 의존하게 만든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 않아 무당종교로 변할 것이기에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예언은 교회를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역사하는 영역이며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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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재정-내 삶의 진정한 주인 바꾸기]
- 김미진지음, 홍성건감수
베스트셀러라지만 매우 문제있다고 여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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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최근 [왕의재정] 책 읽으면서, "삶의 주인이 돈이되면 안된다" 뭐 이런 말을 하길래, 돈은 우리 삶에 의식주와 같은거고 반드시 필요한 건데 (저자는)무슨 그런 말을 하냐로 시작해서 비판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꽤 전에 이 책 초반을 읽다가 그닥 와닿지 않아서 말았었는데, 최근 위와 같은 대화로 인해 다시 한 번 보게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뭐 이런 이단 교주같은 책이 다 있나 싶다.
잠깐 읽은 부분만해도 그냥 넘어갈수 있는 페이지들이 없이 책을 팔아먹기 위한 이야기들, 되려 물질적 탐욕을 부추기는 말들 투성이고..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몰기 딱 좋은, 신앙인으로써 가지지말아야 할 잘못된 편견을 심어줄 글들에 진심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 읽진 않았다. 차례를 보면서 간증, 스토리 이런 부분말고, 진짜 하고 싶은 말, 가치관, 저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제목들에 표시를 해서 해당 부분만 읽기로 했다. (간증, 경험 등의 스토리는 들어서 알고 있다)
책에 코멘트를 적은 모든 부분을 나열하고 싶지만, 굵직한 3가지만 적어보려 한다.
1. 저자가 "주께서 내게 ...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부분이 굉장히 많은데 이것부터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성경에서 많이 등장하는 표현인데, 과연 지금도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게시하시며 말씀하실까?
신천지 이만희, 천안 박은숙권사를 비롯한 이단 교주들이 하나님께 직접 게시를 받는다고 한다.
전에는 '진짠가...?' 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대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절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사라져야 할 표현이다. 이 표현에 거부감을 가지지 못하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다보니 이단이 생겨나고, 이단에 빠지고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데 이런 마음을 주셨어", "하나님이 원하시는게 이거인 것 같아" 이런 의도로 편하게 사용되는 표현인데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표현이다.
순수한 사람들을 꾀기에 진짜 좋은 표현이다. 그리고 다른 신앙인으로 하여금 '왜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을까' 라는 잘못된 신앙정체성을 줄수도 있다.
게다가 책은 불특정다수가 보는거고.. 이런 표현은 '진짜 하나님께 음성을 듣나봐', '부럽다, 신실하시다, 멋지다, 이분 글은 믿을만하다' 는 잘못된 인식을 줄수 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그 의견에 반박할 수가 있을까? 왜 그 권위를 자신이 가지려 하는가!
2. 성부의 부르심에 응답하라 p.286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시2:8)
이 구절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 성경에서 말하잖아요, 달라고 하세요. 복을 받아야합니다!"
딱 봐도 이상하다. 근데 생각없이 책을 읽어가다보면 잘 느끼지 못한다.
나는 예배에서 설교가 사라져야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설교가 '성경'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목사 '자신의 말'을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주지 못할 바에야 '설교시간'을 없애고 성경을 함께 '읽는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위에 적은 시편2:8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많은 소유를 주시려는 거구나!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자!" 라는 적용이 말이 된단 말인가?!
거짓가르침이다. 이단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단이 이와같이 성경 구절을 마음대로 해석해서 적용시키려 한다.
위에 저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셨던 내용(=다윗 왕조를 견고케 하리라)에 비롯해서, 이방나라들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다.
부자를 만들어주겠다는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나라를 지키시겠다는 선포인 것이다.
(짧은 시편 2편을 읽어보기만해도 뭔가 어긋나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 인물들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길 바라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발견해나갈 필요가 있다.
저 구절을 통해 우리가 탐욕을 가지길 바라실까?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할 수 있을 것이다.
뒷부분으로가서 p.293 페이지를 보면,
(갈라디아서 3:7-10)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위 말씀을 적어놓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 복을 취하라"고 한다. 저자 자신은 이 말씀에 무릎을 꿇고 믿음으로 약속을 받겠다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복이란 뭘까?
책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땅,자손,복의근원됨)을 주셨는데, 특히 창13:2 를 보면 재물축복(가축,은,금)을 가장 처음 주셨고 이것이 우리가 받을 복이라 한다.
아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복은 구원의 복이다.
성경책에서 갈라디아서 시작하는 부분의 summary 부분을 보면 핵심주제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확인시키기 위한.." 이라고 나와있다.
위에 성경구절을 적었다시피 8절을 보면, 복이라는 것이 '의로 인도해주는 구원의 복' 이라는 것을 매우 잘 알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교인들에게 "부자가 되세요!" 라고 말하는 부분이 아니란 말이다.
이 즈음부터 화가 좀 많이 나기 시작했다.
신앙서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많은 신앙인들이 읽었을 것이다.
너도나도 [성부]가 되어, 그렇게 이룬 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자! 라는 큰 뜻을 품게해줬을지 모르겠다만, 이것은 분명 거짓 가르침이다.
성경을 잘못 알려주는 것. 하나님을 잘못 알려주는 것. 책을 팔아먹기 위해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 내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팔아먹는 것.
다 죄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자세 p.294
2번 내용을 이어가는 부분인데,
"자,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도록 이런 축복의 약속들을 주셨으니 다음의 5가지를 기억하셔서 약속을 여러분것으로 만드세요!"
1) 내 믿음을 결부시켜라
2) 부지런함과 소망을 주님께 두어라
3)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으라
4)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한다
5) 인내하라
생각없이 글만 보면 다 좋은글 같고, 신앙서적에 담기에 매우 좋은 글들 같다고 여겨진다. 어찌보면 흔한 "설교제목" 같기도 하다.
저 내용이 '하나님과 약속을 체결하는 방법' 이라고 한다. (이것이 내가 설교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A라는 사람이 이 글을 "믿음으로 받아"(책에서 하는 표현) 저 글들을 이행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시간이 흘러흘러 몇년이 지났다.
결과를 따져보고자 하는 시점이 됐을 때, [성부]가 됐을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저자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성공한 경우라면 "거봐~ 잘됐지? 맞다니까!" 말할 수 있을테지만 실패한 경우라면 어떨까..?
저자는 이 책에서, 몇십억 왔다갔다하는 거래나, 자신의 부요함이 "자기의 능력이 아니고 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라는 말도 안되는, 비성경적이지만 멋있어보이는 말들을 하는데..
"하나님은 이렇게도 신실하시니 A 당신이 하나님 약속을 받지 못한 겁니다" 라고 말할 것냐는거다.
저자는 자신이 책임지지도 못할 말들을 하는 것이다. => 이게 왜 중요하냐면 기독교 신앙을 뒤틀어 버리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성경 잠언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너의 선택이 곧 너의 인생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선택으로 인해 우리 인생을 달라지게 된다.
쉽게 말해 내가 공부를 안해서 대학을 못갔다면 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근데 위에 나열한 저 다섯가지를 지켜행하면 '대학'에 보내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니?!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학에 가질 못했는데, 그 이유가 저 다섯가지 비법에 있다니 이게 뭔 개소리냔 말이다.
저자는 [성부=성스러운부자]라고 좋게 표현하지만 "부자되셔서 교회 일을 돕는 역할을 감당하세요."를 주장하고 있는데
첫째, 하나님께서 부자를 찾고 부르시고 만드신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둘째, 부자가 되기위한 다섯가지 비법도 저자가 성경을 가지고 끼워맞춘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자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책에 담긴 간증처럼 선한 영향력을 전하기 위해 무슨 학교를 만들고, 하나님께 받은 큰 축복(돈)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 했다면...
왜 이 책의 가격을 15,000원으로 정했을까..??
정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