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은 날
아내의 고무장갑은 푸른색이거나 초록색이었다.
그럴 때 나는, 아내가 머리모양을 달리 하거나
유난히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때처럼 불안하다.
쏴쏴쏴, 수돗물소리 거칠고 발자국 소리 쿵쾅거릴 때
술잔 기울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오입질하고 오던날
현관문을 여는 아내의 낡은 스웨터처럼 안쓰럽다.
구멍난 양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신고 TV 리모컨을
돌리는 아내에게서 나는 쉰 김치냄새에는 약수터를
오르며 스친 비구니의 웃음같은 향기가 뭍어있다.
메마른 가시 같은 여자
볼품없이 드러난 가슴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여자
그러나 품안에 안으면
군불 덥혀진 아랫목 같이 따뜻하고 아늑해서
금방이라도 평온한 잠속을 빠져들게 하는 여자
아내의 젖가슴이 비릿해질 무렵 잦아든 수돗물 소리 들린다.
실로 옭아맨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쌕쌕 숨소리 어깨 들먹이도록 집어 삼키는
주방 빨래 집게에서
파란 고무장갑 초록 고무장갑이 들숨 날숨으로 흔들리고 있다.
큰맘먹고 화장품 사다 주던 날
숨겨 논 애인이 화장품 아가씨냐며
시큰둥 한 얼굴로
내 뜨신 마음 냉장고 속에 넣는 여자
돈 좀 많이 벌어 오라고
바가지 긁다가도
풀죽어 있는 내 모습 안쓰러워
콩나물국 뜨끈하게 끓여 아침상 차리는 여자
둘이 같이 걷다
마주 오는 젊은 여자 곁눈질에
매몰 차게 째려 보는 눈이
도다리 같아서
잘근 잘근 씹어 주고싶은 여자
누이 같아서
엄마 같아서
함부로 쏟아 놓은 말에
상처의 웅덩이 깊어도
언제나 두레박엔 거친 것 가라앉힌
맑은 샘물 퍼 올리는 순하디 순한 여자
여자 팔자
뒤웅박이라는 데
그 여자 지지리 복도 없다.
배필이라는 것이
태어나기 전 이미
하늘의 연으로 짝 지워진 것이라면
전생에 업보가 태산 같았을 여자
그 여자
이번 생 나 만나 하 고단하였으니
다음 생은 좋은 인연 만날듯 싶다.
---------------------------------------
구두
구두끈을 묶는다 힘껏, 너덜 하게 풀어지는 내 삶의 모양새처럼 기어코 풀어지고야말 구두끈을 묶으며 코앞에 닥쳐온 처조카의 결혼을 생각한다 구로공단 건널목 모퉁이 S기업 부도난 정리물품 차량에서 허연 침밥 마르도록 떠들어대는 사내의 목청이 달콤하게 젖은 오수를 흔들어 깨운 때문만은 아니다 가쁜 호흡을 견디지 못하고 풀려버린 구두끈, 열려버린 항문으로 쉬임 없이 삐질 대는 묽은 변, 억척쇠골에도 가족만을 생각했다 사시사철 없이 슬리퍼 짝을 벗을 줄 모르는 아내와 유명상표 없이 구겨신은 아들의 운동화 뒤축 새까만 기름때, 절둑이는 하루 하루의 고단한 노고에도 좀체 내어 줄 수 없었던 휴식, 초겨울 햇볕이 초췌하게 얼굴을 디밀고 있는 길모퉁이에 낡은 점퍼 차림의 우악스런 손들이 유명메이커라는 상표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눈물로 내놓았다는 s기업의 수출품들, 마누라 벙긋한 웃음 잡아줄 빨간 삐닥구두와 부유층 아이들이 즐겨 신는다는 운동화 이제는 편안히 그의 생을 보살펴줄 새 구두끈이 묶여 있는 검정구두, 앞가슴 살 같은 수표 뒷면에 이름을 적는다 착한 일 하는 어린애 마냥 가슴이 뛰고 있다 퇫퇫 두어 방울 침을 뱉어 점퍼 옷소매로 쓱쓱 문지른다 착한 아내는 검은 분가루 치덕 뿌려 아침마다 나의 구두를 반짝이게 해줄 것이다 처조카의 드레스가 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걷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겠다 다시 새구두끈 바짝 조여 매고 신나게 악세레다를 밟겠지 아니다 구두끈이 느슨하게 풀릴 때마다 내 마음의 통로도 그렇게 풀어 두어야겠다 내 삶의 곳곳 마른곳 질은곳 험하고 힘든곳을 동행해 주었던 낡고 헐은 구두, 자숫물 찌꺼기 질척한 쓰레기 봉투에 아내가 두 손 탁탁 털어 처박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두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
개 같은 하루
출근 없는 내일은 혀끝을 아리게 하는
값싼 담배의 쓴맛으로 냉골의 아랫목을 파고든다.
찢긴 이력서 위로
노오란 타액, 끝까지 피워진 담배꽁초들
개 같은 하루가 가고
개 같을 하루가 오고
쓴맛조차 날려버린 재탕 되는 하루 하루의 역사
다시 쓰마
이력서 위에 늘어놓는 글자의 배열이 흐트러진다.
이제는 이미 쓰지 않는 낡은 수법의 문자들
혀끝으로 말아 올리는 니코틴의 독성으로 파괴되는
차디찬 열정의 늪
혈맥을 통과하지 못하는 동맥경화의 날을 앓는다.
곤두선 삶의 자맥질을 서서히 멈추고
써 내려가지 않은 이력서에 구겨버린 개 같은 날의 하루
사냥에 서툰 짐승처럼 어슬렁거리는 도시의 쪽방
냉골 낀 아랫목에 들어앉은 아내의 분첩 만한 달빛에
그리운 살 냄새
아내의 입술처럼 짙게 빨아본 담배꽁초에 쿨럭 이는 밤
출근하지 않는 내일의 여명이 달빛을 지우고 있다.
-----------------------------------------
아버지의 시계
그것은 아버지의 심장이다
쩡쩡 강심을 울리며 숨 쉬고 있는
삐뚤어진 틀니에 박혀있는
소실한 자존심보다 자랑스러운 자화상이다
노동의 힘보다 풍류를 즐겼던 아버지에게
분칠한 계집을 기다렸을 중요한 도구였으리라
그것은
추종자를 은닉한 권모술수의 웃음
나누어 마신 술잔의 객기였으리라
아니 그것은
금장 벗겨진 아버지의 세월을 끌고 가고 있는
마지막 완력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잠 든 머리맡
고요한 심장을 일깨우듯
철컥 이며 시간을 넘기는 소리
힘에 겨운 아침이 오고 있다.
-------------------------------
도시의 반달
아픔도 없다.
칼날은 뭉뚝한 새끼손가락 끝을
사정없이 지나다 멈췄다.
원단 쪼가리로 싸맨 손가락은
쉼없이 쏟아져 나오는 붉은 피로
흥건하다.
발은 병원을 향해 걸어 가는데
나는 집으로 달려간다.
선물을 기다리며 생일상 미루고 있을
아들놈 얼굴이
반쯤 잘려나간 달빛에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
버스를 타다.
버스를 탄다.
천원짜리 한 장을 박스 안에 넣자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를 내며 잔돈을 토해 낸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내려야할 곳을 알려주는 여자의
기계성 멘트가 흘러 나오면 벨을 누르고
세상 밖으로 통하는 출구에 서서
내릴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길 양편에 늘어선 건물 수 만큼 부자들이 사는 천국
옆으로 달리는 고급 승용차의 번호를 합쳐
짓고땡을 한다.
지금은 힘들게 달려온 다리에게 쉬는 시간과
미안한 마음이면 충분하다.
아직 목적지는 멀고 잠이 온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풀리는데
힘든 하루를 잠시 내려 놓고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엔
미동도 없다.
네온이 열사 하는 도심의 불빛을 질주하며
토해내는 거칠은 함성이
내 눌린 심장의 포효처럼 뜨겁다.
------------------------------------------
공친 날
마수라도 하고 나서
국시 한 그릇을 먹으려고 했다.
야무진 꿈 무너지고
뱃속엔 허기진 물소리만 고였다.
양떼구름은 어디로 가는 걸까
하릴없이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넘어가지 않는 자판기 커피
붓듯이 넘기며 들여다 본
시집의 글자가 회충처럼 꾸물 거린다.
양떼구름 서녘 하늘을 물들이고
뛰어든 바다에 노을이 붉다.
집에는 가야 하는데
집에는 가야 하는데
노을보다 붉은 마누라 웃음에
천둥 한번 되게 치겠다.
------------------------------
백화점 옆 인형가게
느릿한 걸음으로
골 깊은 주름살의 여자가
백화점 옆 골목길을 들어선다.
아직은 달이 부끄러워
숨어 있는 초저녁
고향집으로 못가는 인형들이
진열장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은밀한 수작은
골 깊은 주름살의 여자로부터 시작되고
인형들의 춤은
굽 높은 신발이 아슬하다.
외눈박이 가로등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졸다가
후드둑 떨어지는 빗방울에
불빛을 씻는다.
유리문 너머 포장 마차
화덕 위 꼼장어는 익어 가는데
아직 팔리지 않은 인형들은
밤이 더 깊어가야 팔리겠다.
-------------------------------
눈의 환영
흰 쌀 알갱이같은 눈이
백지수표같은 눈이
징 하게 내리는 밤
산들은 모두 눈을 가렸다.
솥 단지에 물을 부어
수셋물을 준비하고
참나무 장작 쑤셔 넣어 여물을 쑤어낸다.
대문이 열리기 전
광에서 꺼내온 여문 싸리 빗자루로
쌀 알갱이를 쓸어
죽은 듯 엎디어 있는 백지수표를
쓸어 포대 자루에 담는다.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아무도 못 본 듯이
송아지 문우 드리는 아침
문득
세수 대야에 넣은 하늘이 온통 하얬다.
----------------------------------
문 패
내리 삼 년 병치레에
늘그막 자존심 파시던 날
대문 옆 걸린 문패
도려낸 가슴에 품으시며
너 못 줘 미안하다
아들 첫 집 장만에
도움 못 줘 쓰려 하시더니
신문지에 돌돌 말아
불쑥 내미신 문패 하나
아비는 집도 없다.
그 날
내 이름 석 자 위로
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
비듬을 털면서
1.
펼쳐논 신문지 위에
눈이 소복 쌓인다.
덕지 앉은 머릿속을
손톱으로 긁어내면
허옇게 가루가 되어
내려 앉는 너
털고 또 털어 가볍자 하나
이밤 지나면 새롭게 돋아 올라
또 다른 무게로
짓누를 너
2.
나무는 잎새를 떨구고
나는 비듬을 턴다.
내 삶의 하루가 입자로 부서져
신문지위에 쌓이고
내 생의 날들이
날마다 죽어 가고 있다.
3.
하수구에
소복한 너를 버리고 긴 잠에 든다.
멈춰진 시간에도
새롭게 돋아 올라 있을 너,
무겁게 살기 두려워
오늘도 나는
삶의 가장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까마귀도 울지 않는밤
꽃상여가 온다
꽃상여가 온다
퀭한 살쾡이 눈빛 어슬렁 거리는
회색 도심의 깊은 골짜기를
곡도 없이
영혼이 지고 있다
-------------------------------
나에게
눕지마라
하나 되는 시간
정오의 태양이
초라하게
나를 누른다.
복종하듯
낮게 엎디어
무릎 꿇는 너는
해체할수 없는
또하나의 나
네가 땅에 자복하고 누울때
그러나 나는
세상을 한번
이기고 싶었다.
------------------------------
배설
허기를 면하려
천원에 6개 하는 만두를 먹은 날
변기통 깔고 앉아 밤을 보냈다
토막토막 잘려나가는 창자를 끌어안은
밤의 고통은 길고
여의도를 건너는 원효대교 다리 위
휘황한 불빛들이 강물에 젖었다
어둠을 수뢰한 도시의 침묵
불면한 대지의 열기가 하루를 토해 놓는 시간
둥지를 뛰쳐나온 어린 새들이
굉음을 울리며 아스팔트에 곤두박질치고 있을 때
비대한 창자의 검은 탯줄을 가르는 백정들의 빠른 손놀림에
아침이 오기전 강물 위로 안개가 피어 올랐다
먹성 좋은 불가살이의 밥통은
흔적없이 모든 것들을 소화하고 비대해져 가는데
만두 6개가 전부인 가난한 밥통은
침묵하기를 강요하는 도시의 빈 둥지에서
먹이를 주우러 휑한 몰골의 아침이 일어선다.
ㅡ 2003년 겨울 ㅡ
------------------------------
마흔 그리고 혼돈
마른뼈 앙상하게 드러내는 십일월의 숲
비와 바람이 아귀다툼으로 마흔의 늪을 건너온다.
구두 뒷축을 갉아 먹는
거대한 도시의 회충들
삶이 드나드는 문턱에 내려진
셔터에 굳게 채워진 자물쇠
30촉전구 헐렁하게 풀어져
흐릿한 문지방을 타고
철커덕 거리며 어머니는 재봉침을 돌리신다.
구겨진 양복 안단에 말아 넣은
노비문서에 갈구 하지 않았던 자유
신이 허락지 않은 날개짓이
마감 뉴스를 통해 추락하던날
도시의 불빛이 하나 둘 태어나고 죽어갔다.
경비구역 안 1423동
쇠창살 틈을 헤집고 쿨럭이는
일흔 노파의 늦은밤의 기도가 혼돈을 관통한다.
------------------------------
달의 침묵
거드름을 피우며
달이 구름을 밟고 올라서면
도시는 참았던 봇물을 쏟아낸다.
도시를 씻겨낸 오물이
강으로 흘러가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잔 속에 술을 채우고
조명에 몸을 흔들며
참아온 한낮의 헐떡임을
달을 향해 내 던진다.
뒤섞여 흐르는 강은 말이 없는데
혼탁한 물 위로 반쪽 된 달 하나 빠져
허우적거리다, 이내 잠잠하다.
-----------------------
그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물을 채운다.
욕조는 깊이 벌건 몸뚱어리를 담근다.
코끝에 풀리는 달콤한 비누 향
안개처럼 부드럽게 적시는 따스함에 발을 디민다.
커지는 떨림
미끄러지듯 욕조에 몸을 담으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오르다
이내, 숨고르기를 한다.
아 따스하다.
눈을 감는다.
귀를 간질이는 달콤한 밀어
물장구질로 희롱하며 장마 끝난 후
찾아오는 열대야 라 생각했다.
스멀스멀 기생충 같은 땀이 기어 나온다.
허연 두개골을 감싼 이마로부터
얼굴 온몸 전체를 소름 돋아 세우며
울컥거리는 현기증에 눈을 감는다.
그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적나라한 나의 분신들
욕망의 불덩이가 몰락하고 있다.
-----------------------------
새벽 풍경
아직은 별들이 떠나기전
새벽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
허연 입김 두 손에 담아 든 사람들
하나, 둘씩 모여 드는 시장통 네거리
저마다 짊어 지고 온 사연들로
지피는 불길 속에
두런두런 타 들어 가는 이야기
땀 절은 작업복 만지작거리며
빛 밝은 달이
둘러멘 가방 속으로 들어 와 있다.
하나, 둘 사람들 제 이름자에
희어지는 웃음으로 떠나고 나면
사연은 과한 것일수록 좋아
타닥타닥 모닥불 사그라져 가는 모퉁이
아픈 가슴은 아무리 쓸어도 한숨으로 시린데
빈 담뱃갑 철렁거리는 동전 몇 닢의
가난한 아침이 찾아든다.
첫댓글 좋은글에 한참을 머무릅니다...출판기념회 축하 합니다.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