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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수도회] 견디다 보면 어느새 서늘한 가을 바람이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제1독서 : 창세 41, 55 - 57 ; 42, 5 - 7ㄴ. 17 - 24ㄱ
† 복음 : 마태 10, 1 - 7
★ 야곱의 아들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으로 있을 때, 이집트를
비롯하여 가나안 땅에까지 기근이 심하였다. 그래서 곡식 걱정이
없었던 이집트의 요셉에게 온 세상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윽고
요셉을 팔아넘긴 그의 형들도 이집트에 찾아온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낼 권한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게
하신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사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들며
이들이 교회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일러 준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열두 제자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두 사람을
눈여겨보고자 합니다. 바로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입니다.
그 시대의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 두
사람이 한 공동체에 머물 수 있는지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한데 어울릴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제국의 이름으로 수탈하는 세금은 백성의 피를
말렸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의 반역자’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 속에는 로마가 결코 나쁜 나라도 아니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선진화시키는 좋은 나라일 따름입니다.
그 반면 열혈당원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독립군’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권한이 있다고 여겼던
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무장 투쟁을 하는 이들입니다.
조국을 위하여 어떤 형태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며, 로마에게서
자유를 얻고자 암살까지도 계획하는 극단적인 애국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 세리와 열혈당원이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열혈당원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세리 마태오를 만났다면 단칼에 죽이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함께 먹고사는 형제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서로 다른 사람이라도, 아무리 서로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따르고자 하면, 함께할 수
있고 서로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된다."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아침에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비가 금방이라도 올 것 같은
하늘이었습니다. 비가 오고 있다면 비가 그치길 기다리겠지만,
아직 비가 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었지요.
다행히 한참을 갔는데도 흐릴 뿐 비가 오지 않더군요. 그런데
염려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더군다나 마침 비 피할 곳이
전혀 없는 한적한 곳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 피할 곳을 찾을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비를 흠뻑 맞고 보니 이제는
비를 피할 이유가 없어지더군요. 잠시 뒤에 비 피할 곳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다 젖었는데 그냥 가지 뭐.’라는
생각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비를 맞기 전에는 비가 올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비를 맞고
보니 비 오는 것이 그리 걱정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내가 걱정하는 것들이 아직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지, 막상 부딪히고 났을 때에는 그 걱정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한 고승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열어 보라면서 편지 한 통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에 정말로 이 제자들에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해도 문제의 해결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자신들의 스승님이 주신 편지가
생각났지요. 그리고 커다란 기대감에 그 편지를 펼쳐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된다.”
성인은 걱정을 가져오는 고통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매일 구토증, 두통, 이명증이 있었다고 하지요.
이러한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아마 큰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녀는 그러한 괴롭힘 속에서도 기도에
항구했으며, 고통 중에서도 활발히 봉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12명의 제자 중에서 4명은 보잘 것 없는 어부였고, 또 두 명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였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나중에
팔아넘길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파견을 받았을 때 얼마나 두렵고 걱정되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권한을 주시고 보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에 힘입어 하늘나라 선포를 충실하게
수행하지요.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걱정의
순간에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또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행동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랑의 삶만이
우리의 삶을 걱정 없이 풍요롭게 만들 것입니다.
금이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되면 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독일속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내 마음 안에 있는 나만의 공간
저의 어렸을 때의 소원 중에서 하나를 말한다면 바로 제
방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육남매나 되는 대식구였기 때문에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늘 제 바로 위의
형과 방을 함께 써야만 했습니다. 외아들로 방을 혼자 쓰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학교 1, 2학년
때에는 한 방에 14~16명씩 함께 살아야만 했었거든요. 또
군대에서도 독방은 없지요.
이렇게 내 방 없이 살다가 드디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했던
3학년 때 저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신났는지 모릅니다. 늦게까지 책을 읽을 수도 있었고, 제가
듣고 싶은 음악도 마음껏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방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더 저를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저의 방을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저만의 공간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함께 공동생활을 할 때에는
방 꾸미는 것에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나의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그때의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에도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실 나만의 공간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지나친 관심들이 내 마음 안에 있는 나만의 공간을 조금씩
침범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기 보다는
욕심과 이기심에 지저분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만의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히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을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내가
사용하고 있는 나만의 공간이 내 마음, 혹시 세상의 지저분한
것들로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둠으로 가득 덮여있는
마음, 나쁜 냄새로 뒤덮인 내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환한 빛으로 가득 찬 내 마음, 좋은 향기가 가득한 내 마음을
만드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수도회] 견디다 보면 어느새 서늘한 가을바람이
2013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마태 10,1-7
견디다보면 어느새 서늘한 가을바람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선택된 열두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하며
저 역시 부르심 받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신다는 느낌에 마음은 온통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부풀어 오른 마음은 큰 기대와 설렘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그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깨달음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억만금을 준다 해도 그
마음 바꾸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흥분되었습니다.
하루 빨리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본격적으로 걷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다보니 매일이
천국이요, 매 순간이 구원 그 자체였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길을 떠나보니 현실은 어떠했겠습니까? 꿈꾸어온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기대와는 다르게 와 닿은 현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배워야 할 것은 너무 많았고, 갈 길은 너무 멀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서 이리 저리 좌충우돌하면서 기가 많이 꺾였습니다.
어느 순간 ‘이게 뭔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하는 생각이 들 무렵 같은 꿈을 꾸던 형제들이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보십시오. 그 옛날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난 이
시대 제자 후보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갈등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열렬한 기도가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젊은 혈기에 의기양양한 자세로 모든 것 뒤로 하고 새 길로 접어들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아마도 그 옛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섰던 열두 사도들의 상황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부단히 의미로 충만했던 첫출발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또 다시 ‘이 길’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봉헌생활의 길을 위협하는 무기력, 나태함, 의욕상실, 좌절을
떨치고 수시로 일어서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을 바라보면 참으로 마음이 너그러워집니다.
일 년 내내 삼복더위만 지속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혹한만 계속되지
않습니다. 혹한을 견디다 보면 화사한 봄날도 다가옵니다. 한증막 같은
삼복더위 참다보면 어느새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옵니다.
혹한의 겨울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끝난 계절은 아닙니다. 봄이 잠시
쉬는 계절입니다. 꽃들이 잠시 휴식하는 계절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모진 게 사람 목숨이라고 쉽게 죽지 않습니다.
견뎌내다 보면 웃음거리도 생깁니다. 삶이 죽어라죽어라 하는 것만은
아니구나,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인내하는 일 같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모욕도 견뎌내고, 정말 참기 힘겨운 수모도 그러려니
하고 이겨내다 보면 분명히 살만한 날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죽음과도 같은 세월 속에서도 작은 행복꺼리들을 찾는 일입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지속적으로 고통에 대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족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가족이란 많은 것을 품어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족입니다.'
2013년7월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마태오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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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제자들의 그 구성이 한마디로 십인십색(十人十色)이다.
친 형제 관계를 가진 이들도 있고, 어부도 있고, 친구의 소개로
예수님을 알게 된 이도 있다. 순수하고 우직한 이도 있고, 계산이
빠른 이도 있고, 거짓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예수님께 직접
들은 이도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말이 앞서는 사람도 있고, 입이
무거운 이도 있고 의심이 많은 이도 있다. 같은 민족에게서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고 그 수수료로 부를 축적하던 세금징
수원도 있고, 무장 투쟁을 마다 하지 않았던 독립군도 있다.
어떻게 보면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은 이들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구심점이라면 단지 예수님밖에는 없었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이 다양한 이들을 당신 제자들로서
부르셨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서로 다름은 적지 않은 갈등도
있었음을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다를 제외한 모두는
사도들의 대열에 들어섰고 그 이름값을 다 하였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다양한 차이를 가진
이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이르며 서로를 형제
자매라 표현한다. 사제들간의 성격도 수도자들간의 성격도
신자들간의 성격도 그리 다양할 수가 없다. 그러니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당연히 갈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구심점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언젠가 소개해드린바 있지만, 내 본당은 적을 때는 28개국의
사람들이 많을 때는 삼십여 개국의 신자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문화와 언어, 심지어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경제력에
의해서도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같은 신앙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어우러져 형제이자 가족처럼 지내고 있음을
고백한다.
교회 안에서는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시고 그 활동으로 인해
교회공동체의 모습은 유지되고 발전되어 간다.
다르다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
다르다는 것에 서로불편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다르다는 것은 풍부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유다처럼 반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최선을 다해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의지하고 함께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 역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심을 믿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의 가족으로 살아간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
2013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정정당당히 대담하게 정면 돌파하라는 말이 용기를 돋게 합니다,
때로는 신도 나고 힘과 의욕까지 불러일으키게 하는 게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수룩한 시골 어부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나서라는 겁니다.
하늘 나라가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를 하는 겁니다.
세상에 이거야말로 죽음을 불사하고 당당히 알릴 빅뉴스라는 거지요.
하늘 나라의 힘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죽음과 부활을 보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오 10,5~7)”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신다.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데 협력자를 필요로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느님의 도우심도
청하지 않는가? 자율성은 오늘날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
같다. 그러나 만능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철저히
상호의존적인 존재다.
제자 공동체의 구성도 묵상해 보자. 다혈질인 베드로에서 시작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 열혈당원과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다.
이 사람들이 한데 모인 근거는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다. 가톨릭 문화의
특징인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는 예수님에게서 유래한다. ‘중요한
일에서는 일치를, 나머지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가족과 본당, 수도 공동체는 어떠한가? 생각이 다른 가족, 역사와
문화가 다른 사람이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에서는 가족이, 본당이나
수도회의 형제자매가 나와 다르고, 내 뜻과 달리 행동할 때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때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자. ‘공동체 중심에 계셔야 할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이 집의 가장이고
주인이시다.’ 그러면 우리 공동체의 다양성이 보편성의 표지가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신다. 이는
폐쇄적인 국수주의가 아니라 활동의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많은 경우 배척과
박해를 겪었다. 그래서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버려라.”(마태 10,14)는 권고도 필요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로마 11,11) 이제 예수님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고 하신다. 복음은 애초부터 온 세상을 향한 것이지만, 나에게
가까운 사람들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복음은 땅끝까지 전해져야
한다.
- 정제천 신부(예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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