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10대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요절가수 배호님에게 목숨을 걸고 모든 인생을 배호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
그 이름은 김영관 현재 나이 만 56세<경기도 의정부시 금호동>
온통 집안을 배호장식물로 완전 도배를 하면서 배호님을 모시고 사는 광적인 골수팬이다.
해방뒤인 1947년(호적엔 1951년생으로 기록)에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6.25를 맞고 전쟁중 아버지가돌아가시고 친척들에 손에의해 자랐다.
어릴적부터 가난하고 힘든 집안에서 태어나 가족들의 사랑을 받지못하고 학교 문턱도 제대로 넘지 못하고 가난때문에 초등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로 살았던 험난한 인생여정.
중국집 종업원에 막노동자의 인생을 살면서 오로지 배호님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고있으니.......... 만일 이세상에 배호님이 다녀가지 않았고 아니 배호님에게 미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의 인생은 어떤 삶을 살고있을까. 아마 백만장자는 되었을 것이다.
배호님을 위해 가족까지 버리고 자신이 모아둔 전재산으로 배호 기념관을 짓고 자신이 죽으면 신장기증과 시신을 화장을 해서 뼈가루를 배호님 산소옆에 묻어달라는게 마지막 소원이라 한다.
이제 그사람이 들려주는 추억속의 여행을 떠나 보기로하자.
1.가수 배호를 처음 알게된 동기.
어릴적 10대중반쯤 1960년대 초중반 옛날 라디오에서 배호의 데뷔곡<두메산골>이 흘러나와 이 노래를 듣고는 감명을 받게 되었고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배호라 알게되었다. 그러나 아직 배호라는 가수를 제대로 모르고 그때 당시 배호가 세간에 알려진 가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노래와 음성이 아주 좋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된것이다.
그러다 몇년뒤 1966-7년 봄에 당시 자기가 일을하고 있던 서울 창신동<배호씨가 옛날에 이곳에서 살았음>의 중국집에서 배달부로 일하던 어느날 왠 남자들이 손님으로 왔었다. 그때 배호와 그 동료들이 이 식당에 찾아온 것이다.
이때 중국집 주인이 저기 검은양복에 안경쓰고 중절모를 쓰고있는 사람이 두메산골을 부른 가수 배호라고 알켜주어 자신이 마음속으로 상상했던데로 환상에 빠져버리게 된것이다.
큰키에 갸름한 체격 준수한 외모에 남자다운 매너에 흠뻑빠져버린 것이다.그것도 남자가 남자에게 미쳐버린 것이다.
이때 음식을 바로 배호님 앞에 갔다주었지만 배호는 아무말없이 식사만 하고 갔다는 것이다. 그는 이때 배호에게 싸인도 못하고 서로껴안지도 못한 큰 아쉬움에 젖어있다. 이때부터 그는 배호님에게 점점 미치기 시작했다.
2.식당일도 포기하고 배호 출연 극장에 찾아다니기.
1967년 중반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가 전국에서 폭발적으로 대 히트하면서 각 라디오나 TV방송에서도 오로지 배호의 노래만이 계속 흘러나왔다고 한다. 최고의 인기가수로 발돋움한후 배호가 서울에 어느 어느 극장에 출연만 한다면 배달간다하고 정신 없이 극장으로 도망을 갔고 극장앞에 들어서면 극장에 음식배달을 온지알고 그냥 무사통과 무임으로 극장쇼를 보고 나왔다는것.
이때 수많은 가수나 배우들이 출연했다한다.배호는 물론 이미자/남진/백야성/김정구/이상열/최희준/김상국/차중락/나훈아/장동휘...
이밖에도 많은 연예인들이 출연했고 당시 최고 인기여자가수 이미자와 최고 인기남자가수인 배호가 끝에 출연하여 극장은 그야말로 관객들 모두 정신이 나간 흥분의 도가니 였다한다.
특히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배호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가수였다.
다른가수들은 자기 차례가 오면 바로 무대뒤에서 달려 나오곤 했는데 배호는 사회자(MC)가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 저음의 왕 불세출의 가수 멋쟁이 신사가수 배호씨를 모시겠습니다.하면 장안이 떠들썩했고 노래 전주곡이 한참 흘러나오고 노래 첫소절이 시작될때쯤 무대뒤어서 멋지고 화려한 의상 차림에 그의 특유의 음색을 내며 천천히 걸어나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한다.
그러나 김씨는 당시 배호씨가 지병을 앓고있는 환자라는걸 잘몰랐다한다. 극장쇼에 나온 배호는 몸이 아플때면 별동작없이 서서 노래만 부르고 들어갔지만 건강할때는 이목구비가 아주 수려한 외모와 멋진의상에 멋진음율로 관객들을 사로 잡았다고 한다.
건강할때는 그의 특유의 힘차게 넘어가는 음색과 화려하고 멋진 제스쳐와 감정처리로 무대를 한껏 돋보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현역가수는 별 할말이없고 뮤지컬가수나 성악가수들이 노래를 하는것보다 더 율동감있고 생기있게 관객들을 숨을 죽였고 최고의 인기 톱가수로 통했다. 이밖에도 극장에서 잊지못할 추억들이 아주 많다고한다.
그가 배호쇼를 본것이 모두 합쳐서1967년에서 1971년까지 줄잡아 총25-30회정도로 서울과 다른 지방에서 극장쇼를 보았다한다. 극장쇼를 보고나서 아주 늦게 식당으로 돌아온 김영관씨는 주인에게 야단을 많이 맞곤했는데 월래 사람이 성실하고 좋아서 다시는 이런일을 하지말라고 주의를 주고 넘어갔다고 한다.
3.평생 얼굴에 남을 배호상처.
김영관씨 자신이 평소에 생업에 종사하는 중국집에서 일을 하고있을때 점심시간 느닷없이 서울 시내극장에 배호 출연소식을 전해들은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몰래 극장으로 도망가버렸다. 점심 식사시간 중국집에 아주바쁜 시간에 뺑소니를 쳤으니....
극장에 가서 배호의 공연을 보고 해질무렵 가게로 들어와 식당 주방장이자 가게주인의 아들이 김영관씨에게 주먹으로 거세게 날려버린 일이있었다. 그리하여 얼굴 눈밑이 찢어지고 치아3개가 나가버린 큰사고가 있었다.
그날밤 주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김군의 상처에 대해 깊은 위로를 해주었다.
김군을 때리고 도망을 쳐버린 주방장은 다음날 돌아와 주인인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나면서 김군에게 크게 용서를 빌었고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아직도 김영관씨의 얼굴엔 큰흉터가 아직도 남아있어서 그때의 아픔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김영관씨는 이 상처가 배호님과 평생 연을 맺을 배호상처라고 말하고 있다.
4.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아온 130여장의 배호LP앨범 화재로 유실.
김영관씨가 일을하면서 척척 모아온 월급으로 60년대 초중반부터 타계이후까지 나온 배호의 모든LP음반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구입을했다. 당시 LP앨범 가격이 400-500원<당시 인기가수 음반 가격,현재로는 4-5만원정도>정도였다한다. 꾸준히 빠뜨리지 않고 모은 앨범수가 모두 1백30여장이었다한다.
당시 할머니께서 불교신자여서 할머니가 기도하는 방 제단에 배호님의 LP사진들을 모셔놓고 배호님을 위해 불공을 드려달라고 할정도로 배호님에게 지극정성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김영관씨의 어머니가 사고로 촛불을 엎어뜨려 집에 불이 나면서 1백30여장 앨범을 모두 불태워버린 대형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때 화가난 김영관씨는 어머니에게 큰 욕을 하면서 폭력을 행사해 몇달간 경찰서 감옥살이까지 하고 나왔다한다. 그리고 이 사고 때문에 정신병원에까지 입원을 할 정도로 큰 시련과 아픔이있었다.
배호님이 돌아가신뒤 다음으로 겪는 그의 큰고통이었다.
사고후 LP앨범을 다시 사모은것이 약 30여장정도다.지금도 헌신적으로 LP판매상을 돌며 배호님 옛판을 구하고있는 중이다.
5.갑자기 접한 배호님의 부음소식.
1971년 여름 영등포 연흥극장에서 배호님의 마지막 공연 모습을 보았다한다. 당시 부른 노래가<비내리는 명동거리>였고 이 노래 1절만 부른뒤 '오늘은 제가 몸이 많이 아파서 1절만 들려드렸습니다,고 말한뒤 무대뒤로 들어가버렸다한다. 이때가 그가 본 마지막 배호님의 모습이었다.
그뒤로 배호님 공연소식이 있어도 극장에 가지도 않고 식당일에만 전념하다가 1971년 11월에 중국집 주인이 신문<동아일보>을 보면서 김영관씨에게 '야 김군아 배호씨가 죽었단다.라고 말을해 김군은 갑자기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이때 배호님이 돌아가신것 때문에 완전 광신도적인 배호팬이 되어버렸다.
그는 지금도 배호님에게 달려가려고 굳게 마음을 먹고 늘 술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있다.
그리고 꿈속에서도 배호님과 교감을 나누고 있으며 언젠가 배호님이 우리곁으로 다시 돌아올거라고 믿고있다. 배호님은 돌아가신게 아니고 지금 쉬고계시고 하늘나라로 공연을 떠나신거라고 수줍은 어린아이같은 생각으로 살고있다.
그도 배호님을 잊기위해서 많은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지만 배호님을 절대 잊을수가 없었다한다.
오로지 배호님의 노래만이 최고라 칭하고있다. 다른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 질색이라한다.
때론 술을 마시면 배호님의 추억과 슬픔때문에 운다고한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배호님 곁으로 가기위해 여러번 자살을 하려고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는 아주 굵은 인생을 살고있다.
또 늘 배호님의 산소에 찾아간다고 한다.
6.배호 사후일과 배호님을 모시는 전용 단칸방.
배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의 광적인 행동은 점점 무르익기 시작했다. 배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몇년간 큰가방안에 배호님 사진과 LP음반 그리고 음식등을 넣고 모시고 다녔다한다.
그리고 그의 광적인 행동은 더욱 심해져 19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신이 살고있는 집에 배호님 전용방을 차려놓고 온통 방 전체를 배호님 사진과 브로마이드 각종 장식물로 완전히 도배를 해버렸다.
아무리 손재주가 있는 디자이너도 할수가 없는 정말 멋지고 환상의 배호 전용방을 만든것이다.
거기에다가 자신이 모아온 LP앨범과 배호 관련자료들과 배호 동영상이 담긴 TV수상기 3대와 컴퓨터 턴테이블이 딸린 전축들까지 정말 배호 방송국이나 기념관을 연상시키는 분위기 이다.
또 배호님의 재단을 차려놓고 늘 음식을 바치고 늘 배호님께 기도를 올리고 배호님 사진을 보고 늘 이야기도 한다.
이건 정말 완전 정신이상자가 아닌이상 할수없는 가히 천재적 배호 광신도 팬이다.
자기 자신도 배호 또라이라 하며 배호님에게 나처럼 더 미친사람은 없을 정도라며 배호님에게 충성심이 강하다.
또한 지금껏 배호님 때문에 이혼을 3번이나 했고 법정에선 이세상을 다주고 백만장자나 대통령을 시켜준다고 해도 배호님을 모시고 살지 않으면 못살것 같으니 이혼을 한다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다.
이제는 가족을 모두 버리고 혼자서 평생 배호님 만을 모시고 산다고 했다.
앞으로 이 같은 광적인 행동은 그가 세상을 떠날때 까지 계속될것이다.
7.그의 마지막 소원.
평생을 배호님을 알고 배호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김영관씨에게 큰 소원이 몇가지있다.
그건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호 앨범 자료들과 그외 관련물품을 모두 배호님을 좋아하는 젊은사람에게 모두 물려준다는 것이다.
자신의 배호님 모시는 후계자를 찾기위해서 수년간 찾아 헤멨지만 적합한 자가 없어서 크게 고민을 하던중 지난 2002년 1월 배호 기념사업회 월례모임에서 나 <이정재>를 만난 순간 큰 기쁜 마음으로 배호님이 아주 좋은 후계자를 점쳐줬다면서 큰 행복에 쌓였다한다. 드디어 그의 꿈이 이루어진것이다.
나를 보면 때론 배호님을 만난 기분같다며 아주 기쁜마음이다.
자신이 보관하는 자료들을 젊은사람에게 물려줄려고 했고 배호님을 좋아하는 젊은사람이 바로 내가 되었을줄 어떻게 알았을까.
또 나에게 그가 가진 자료를 물려받아 배호님을 모셔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있다. 그는 늘 배호님의 대한 아픔때문에 하루 하루 술로 끼고 살고있다. 건강 또한 좋지 않지만...
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모아 배호기념관을 차리고 배호님을 후세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게 큰 소망이다.
배호님이 신장병으로 돌아가셨고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서명해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신을 화장을해서 배호님이 잠들어 있는 산소 옆에 묻어달라는게 그의 마지막 소원이다.부디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시기를 기원해본다.
자신의 후계자를 찾은듯이 꿈은 꼭 이루어져 큰 건물에 배호기념관을 차릴수있기를 기대해 본다.
첫댓글 이분의 스토리를 들은 적이 예전에 있었는데 정말로 배호사랑에 남다른 분이시며 대단한 분이시구나
대단한 분이시네요 ....
이 글을 읽고 나의 가슴에도 멍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