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전쟁과 양민학살-
참전 유공자 <박 정환>
지난 4월23일, 태권도 월간지 발행인이며 나와 같은 무도인(武道人)으로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정우진 전우와 함께 고국을 방문해 베트남 참전 전우들을 만나러 서울 보훈 병원으로 갔다.
우리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1966년부터 철수한 1973년까지 약 32만명의 우리 젊은이들이 참전했으며, 파월된 민간 기술자들도 거의 맞먹는 숫자다.
20만명이 넘는 전우들이 국가 유공자로서 예우를 받고 아직도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나처럼 일찍이 해외로 나와서 국적이 바뀐 전우들은 국가 유공자 혜택을 받지못하고 그저 참전 유공자로서의 처우를 받는다. 이것은 우리 정부와 국민 정서가 아직도 세계화 하지 못한탓이 아닌가 하고 -자위하며-, 어쨌든 분명 이것은 형평성이 없는 처사라고 여겨진다.

나는 베트남전 당시 월맹군에 생포 되었다가 탈출에 성공해서 귀환한,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유일한 실종자 겸 포로였다.
사실 지난 45년동안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방문할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으나 포로생활의 악몽으로 영육이 황폐해졌던 과거의 기억속에서 벗어나기위해 몸부림쳐 왔기 때문에 숨은듯이 조용히 살아 가려 했다.
그런데 이번은 정우진 전우의 설득과 한국의 전우들이 나를 꼭 보고싶어 한다고 해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보훈병원에 간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수십명의 전우(戰友)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를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특히 경남 진주에서 우리를 만나러온 장세영 전우는, 내가 저술한 실화소설 "느시" 1,2권 10집을 가져와서 전우들에게 나누어 주며, 마치 애타게 찾던 혈육을 만난듯 눈물을 흘리며 나를 포옹했다. 그는 고엽제 환자로 백혈병에 피부암까지 발병해 치료받고 있는 터였다.
의외의 뜨거운 환영에 감격한 나는, 그동안 악몽과 싸워온 고통의 세월이 나만의 고독한 싸움이 아니라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늙어 제한된 삶을 꾸리지만, 인생의 황금기인 20대의 청춘을 베트남 정-글에서 살점과 땀, 피를 튀기며 조국과 가족을 위해서 싸웠다.

그래서 누가 뭐라해도 그때 우리는 순진한 전사(戰士)였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영웅이었다고 외치고 싶은 충동이 전우들을 만나니 가슴 밑바닥에서 부터 끓어 오름을 느끼었다.
그런데 배고픔과 헐벗음의 서러움을 겪어보지 못했고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소 영웅주의자들에 의해 우리가 용병이었고 양민학살자였다고 매도 당하고 있으니.. 그래서 나는 전우들을 위해서라도 침묵하지 않고 내가 겪은 베트남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누명에 대해 사명감을 갖고 소신을 밝히고져 결심했다.
"만약 베트남 전쟁당시, 박 선생님께서 대통령이었다면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 넣었겠습니까?"
2000년 7월20일경 MBC 라디오 방송프로그램 <토크쇼> 담당자인 유시민 진행자가 여류소설가를 배석시키고 내게 던진 질문이다.
유시민 진행자는 훗날 노무현 정권때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등을 역임한 노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실세 정치인이 된 인물이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결정이 바람직하지 못했다는듯, 내가 "아니요-"라고 대답했으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나는 주저없이 단숨에 대답했다.
내 대답에 의외라는듯 이들은 동그란 눈을 했다. 허탈감마저 느끼는듯한 공허한 눈빛이다.
"남의나라 전쟁에 우리 젊은이들을 보내 총알받이로 피를 흘리며 살상 당하게 한것이 옳았다고 여기십니까?"
이제 이들은 완연히 본색을 드러내 놓고 내 눈치를 살피면서 저들이 원하는 답을 얻어내고자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약 32년전, 베트콩의 포로수용소에서 월맹군 대령이 집요하게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똑같은 내용의 질문을 한것이 생각났다. 나는지금, 그때 그곳에서 대답했던 기억을 더듬어 - 그 당시의 상황이나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후배들에게 거의 유사한 내용의 답변을 제시 해야하는데 대해 혼란스러울 만큼 서글퍼 졌다.
"나는 6.25 동란을 겪은 세대다. 우리 민족이 미국에 많은 빚을 지는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우리가 꼭 간과해야 할 점은 현재의 관점으로 월남전을 조명하는것을 잘못된 잣대질이다 라는 것이다. 그때는 국내와 국제상황이 박 대통령께서 파병 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절박한 시기 이므로 그렇게 결정지을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이들은 1950년 6.25 동란때, 미국이 1백 80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3년간의 한국전쟁에 동원했으며 전사 5만 4천명, 부상 10만 3천명, 그리고 8천여명이 실종된 사실을 알고 있기나 한지.. 7천명이 포로되고, 행방불명된 8천여명의 실종자 가족들이 미국인 풍습에 의해 아직까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있는 처지다.
지난 5월 26일 헌충일(Memorial Day)에 한국전쟁때 실종된 계급이 상사(上士)인 흑인 병사의 유해가 송환되었는데 그 병사의 아내는 결혼한지 1년만에 출정한| 남편을 63년간 재혼하지않고 수절하며 살아와,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온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6.25동란때 부상당한 노병(老兵)이 지금껏 재향 군인 병원 병실에 누운채 치료받고 있다.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때 피를 흘리며 도와준 혈맹(血盟)인 이들은, 어떤 명분이던 간에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눈 동족보다 낫다. 그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 우리가 돕는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건가?|

베트남전에 우리만 참전했나? 아니다. 오스트렐리아, 캐나다, 필리핀, 타일랜드,터키군대도 참전했다.
유시민 진행자는 수년뒤, 여당의 실세 국회의원이 되었을때,우리 군대가<이라크> 전쟁에 파병되는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월남전에서 우리 군인들이 양민을 학살 했지요?"
"뭐요?! 하지 않았습니다."
"................."
이들은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인지 서로 쳐다보며 크게 실망한 눈치다.
전쟁이 무슨 장난인줄 아나?
베트남 전 처럼 적과 양민의 식별이 여의치 않는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 동서고금의 어떤 전쟁이든 민간인 희생은, 직접 전투하는 군인들 보다 더 크기 마련이다.
2차대전을 종료시킨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수십만명의 민간인이 순식간에 떼 죽음을 당했는데 -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미군이 양민학살했다고 누구도 지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당시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더라면, 미군이 일본본토에 상륙 했을경우, 수백만명의 일본인들은 물론, 미군들이 전쟁의 제물로 살상되었을 것이라고 두둔한다.
이틀분량의 방송프로를 마치고 복도를 통해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나를 이들은 따라와 전송하면서
"오늘 방송은 참 재미있게 잘 진행되었는데 박 선생님께서 양민 학살문제를 좀더 진솔하게 말씀해 주셨더라면..." 하고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그런일 없었습니다." 였다.
안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몹시 불쾌했다. 참전한 32만명의 나의 전우(戰友)들을 감히 양민학살자로 몰고가다니...그 저의가 못마땅하고 아주 어이가 없었다.

2000년 7월 MBC TV 방송국에서 제작한 <이제는 말할수 있다>라는 특집 프로그램에서 <월남전의 포로와 실종자>라는 타이틀의 다큐멘터리가 방영 되었다.
내가 월남전 포로였기 때문에 제작진의 간곡한 청에 의해 상당한 방영공간의 활애를 약속받고 출연했다.
전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도 출연 하였으나 각자가 각기 다른 편리한 장소에서 녹화했기 때문에 사령관과 재회할 기회는 없었다.
"주월 한국군은 수색작전만 수행했기 때문에 실종자는 물론 포로도 없었다"
채 장군의 주장이었다.
"아군과 적군의 식별이 용이치 않는, 월남전의 특수성인 게릴라 전 임을 감안 한다면 우리 병사들이 수색나갔다가 매복한 적으로 부터 기습공격을 받으면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다. 도시의 외곽지역과 지방 농촌의 다섯살배기 꼬마 들로 부터 70세의 노인네들까지 모두가 베트콩이 아니면 그들 동조자여서, 전면전(全面戰) 보다 더 포로될 확률이 높다." 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주월 한국군은 8만번의 대소접전(大小接戰)을 치뤘고, 그중에 대규모 전면전도 여러차례 있었다는것을 나는 상기시켰다.
또 다른 TV 방송국 인터뷰에서 채명신 사령관은 월남전에서 우리 한국군이 | 저질렀다는 양민학살의 문제가 일부 몰지각한, 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불거졌을때 극구부인으로 일관했다.
물론 나도 채 장군과 동감이다.
전술했듯이, 고대(古代)나 현대(現代)의 전쟁사를 고찰해 보면 어떤 양상의 전쟁이든 비 전투원인 인간인의 살상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경우 적에게는 양민학살로 묘사되는 것이다. | 채 장군이 양민학살을 전면부인한 한달뒤인 2000년 8월, 김종수 소위 사건이 신문기사화 되어 불거졌다. 이 사건으로 베트남전에서 양민학살에 대한 실상에 의구심을 증폭 시켰다.
비둘기 부대 소속 소대장이었던 김종수 소위는 1968년 7월15일 소대원들을 이끌고 야간에 예정된 매복지점이 아닌 (국방부 보고서)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자정이 넘은 새벽 1시경, 그곳을 통과하는 베트남인 7명을 검거, 체포했다.
적이 출몰하고 활동하는 작전 지역에 집단을 이루고, 그것도 한밤중에 움직이는 이들을 체포했으니 몸수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몸 수색때 그들이 갖고 있는 시계를 포함한 모든 소지품들을 압수 했는데 나중에 시계를 강탈했다는 죄목도 김소위에게 추가 될줄이야...
이 와중에 갑자기 한명이 도주했다. 김 소위는 즉각 소대원을 시켜 추격,사살하게 했다. 아무런 죄가 없다면 도망칠 이유가 없었기에 그건 응당한 조치였다.
나머지 6명을 끌고 이동하는중에 이번에는 두명이 도망쳤다. 그 둘은 그만 놓쳐버렸다. 나머지 4명도 거세게 반항하며 도망치려 하자 다급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사살할것을 명령했다.
지금은 충남 공주에서 서울로 오가며 목회를 하고있는 김종수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5명은 총기를, 2명은 무전기까지 소지하고 있어 베트콩임을 확신했다고 했다.
그 다음날 도주한 두명이 그 지역 군수에게 사건 내용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보고했다.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동에 편승한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이 한국군 부대앞에 몰려와 대대적으로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당시 주월한국군사령부 채명신 사령관이 예하부대에 하달한 전투 개념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백명의 적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양민도 다치지 말라."이고 또 하나는 대항하는 적은 강력하게 응징하고, 평정된 지역과 우호적인 촌민들에게는 각종 대민봉사 사업을 통해 그들의 생계를 돌봐주고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당근과 채찍의 양면 작전이다.
<게릴라 (빨치산)는 고기이고 농민(주민)은 물이다>라는 모택동 게릴라 전술논리에 근간을 둔, 물과 고기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려는 베트남전의 특수성에 대한 궁여지책의 일환의 발상이다. 이런 작전개념은 크게 주효 했다.
그런데 김종수 소위사건의 돌출은 주월사 작전의 큰 그림에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낭패가 된 사령부 지휘부는 부랴부랴 사건 수습책 마련에 부심하게 됐다.
"김 소위! 사건현장의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의 신변을 위해 자네 혼자 책임지는것이 어떤가?"
"네 - 그렇게 하겠습니다."
25세의 순진한 초급장교인 김소위는 조사관의 유도심문에 고분고분했다. 스스로 책임지는 차원에서 사실 상황과 다르게 꾸며진 진술서에 서명했다.(김종수 증언)
사건 다음날이 1968년 7월16일, 현지 군 감찰부에 의해 전격 구속 기소되고 5일후인 7월21일 1심인 보통군병 회의에서 양민학살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한국으로 이송된후, 다음해 2월12일 국방부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그후 형(刑)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모든 절차가 고속도로 질주하듯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포로로서 베트콩들과 함께 기거한 나의 경험을 토대로 평가한다면, 도시 외곽에 한발자욱만 나가도 지방 농촌의 남녀노소 전부가, 민족통일을 열망하는 베트콩, 즉 민족 해방 전선군(民簇解放前線軍 FLN)의 일원이 아니면 동조자 내지 부역자들이다.
야간에 단체로 정-글속을 배회한 이들은 분명히 베트콩 집단임이 틀림없다.
나의 관점으로는, 김종수 소위야말로 월남전쟁이 파생한 주월한국군 참전용사 가운데 최악의 비극의 희생양이라 할수있다. 그는 15년간의 긴 세월을 옥살이로 마쳤다.
"박 전우님, 왜 내가 그때 그런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했는지요?"
"김 목사님, 첫째는 베트콩 두명을 놓친것이 화근이고, 둘째는 그 당시 주위 인척 가운데 소위 빽 즉, 힘있는 사람이 없었다는것이...."
"아하, 맞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전라도 가난한 농촌에서 성장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후 갑종간부 후보생 훈련 과정을 이수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친 인척들은 모두가 농민으로 -, 만약 사건당시에 그의 주변에 막강한 분이 있었더라면 사건발생 하루만에 전격적으로 중형을 판결받는 억울함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은 <정치(政治)는 생물(生物)이다> 라고 한다,. 전쟁은 정치보다 더 펄펄한 생물이다. 변화무쌍하고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녹색 군복에 살상무기를 거머쥐고 방향 감각마저 혼미한 캄캄한 낯선 이역땅 적 지역 정글 속에, 생사기로에 서 있는, 긴장으로 번득거리는 병사의 눈망울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자는, 그 현장에서 발생한 사건의 참된 진상에 대해 이런저런 식으로 평가할 자격이 없다.
전쟁에 숙달된 군인은, 발끝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온 신경이 곤두선 긴장감속에서, 핏빛으로 충혈된 눈동자는 야수처럼 야광을 발하고 코 끝은 승냥이의 후각처럼 적군의 살 냄새를 맡을 만큼 예민해지는 - 인간 본질의 변화를 가슴 서늘하도록 체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다만 적을 죽이던가 내가 죽임을 당하던가 하는 양자택일만이 있을뿐이다.
김종수 소위는 매복중에 걸려든 분명 베트콩을 사살한것이다. 도망친 두명의 베트콩의 궤변은 저들을 양민으로 둔갑시켜 민족의식이 도도한 종족의 자존심과 동족애를 자극하여 시끌벅적되며 큰 물의를 일으키자, 당황한 한국군 지휘관들은 김종수 소위를 희생양으로 삼은것이 아닌가 싶다.
국방부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에 참전한 주월 한국군 가운데 561명의 장사병 (將士兵)이 범죄에 연류되어 전범(戰犯)으로 구속, 처벌되었음이 발표 되었다. 범죄 내용은 항명(抗命), 명령위반, 상관구타 및 살해, 무단이탈, 탈영등 주로 하극상이 최다로 우리 한국군 자체 내부의 문제에 연류된 사건이다.
현지 베트남인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베트남인들과 연계된 사건가운데 소위 민간인 즉 양민학살 사건에 연류되어 처벌받은 숫자는 우리 군(軍) 내부의 기강해이로 발생한 사건에 비하면 극 소위에 불과하다.
그것도 김종수 소위처럼, 정말 억울한 케이스로 간주되는 사건도 있어 실제 보고 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양민학살의 주 요인이 될수도 있는 상황을 예를 들어본다면, 적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마을을 공격할때는, 포격으로 그 지역을 초토화 시킨후 병사들이 진격해 들어가는 것이 군사작전의 기본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그 지역 양민들의 희생을 최소화 하기위해 적에게 완전 노출된 허허벌판같은 논바닥위로 병사들을 일렬횡대로 도열시켜 걸어가 공격지점에 접근하다가, 마을의 은폐된 지형지물을 이용해 몸을숨긴 베트콩으로부터 막강한 화력의 집중공격을 받고 중령인 대대장을 위시한 많은 병사들이 희생 당한적이 있다.
결국 치열한 격전 끝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우리 병사들이 그 부락에 진입했을때, 이성을 잃은 우리 병사들은 누가 적인지 양민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살상당한 전우들이 동족이기 때문에 더했다.
그러나 그 당시 엄격한 군기아래 훈련받은 우리 장병들은 지엄한 사령관의 작전개념을 잘 따라주어 의도적인 양민학살은 없었다. 전지(戰地)강간 사건은 17건으로 보고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최하 10년에서 무기 징역까지 선고받고 길게는 20년까지 복역하는 중벌을 내렸다.
역설적으로 기술 한다면, 그 당시 우리 국방부와 주월 사령부가 우리 병사들이 월남인들에게 어떤 피해나 범죄행위도 범하지 않도록, 철저한 사전 조치에 고심했다는 흔적이기도 하다.
사건 발생시 가차없이 엄중하게 신속히 처벌,처리 했음이 여실히 입증하는 것이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1998년 8월1일 까지도 미 사면자 4명, 미 복권자 36명이나 된다. 전범자들이 지어진 형기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상관 살해, 살인, 특히 전지(戰地)강간 등은 죄질이 중하다는 사유를 들어 국방부에서는 이들 전원이 형집행 종료 내지 특별 가석방으로 출옥했지만, 종전된지 30년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사면 및, 복권(復權)에서 도합 40명을 제외 시켰다.

"그때 굶어 죽을수 밖에 없었던 우리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고 도와준 고마운 은인인 <따이한> -."
"우리에게 태권도란 위대한 무술을 무상으로 가르쳐준 고마운 교관님....."
베트남과 국교가 트이자, 조심스레 베트남을 방문한 우리 전우들은 현지 베트남인들이되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반기어 주는것에 너무 감격하고 고무되어, 10번, 심지어는 27번까지 베트남으로 왕래하며 그들과 우애의 정을 나누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전우들은 그 당시 근무했던 지역의 주민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금도 지원 봉사 하고 있으며, 장세영 전우는 고엽제 환자로 투병하면서도 남몰래 베트남 어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기탁하며 온정을 나누고 있다.
이제 우리 참전 용사들은 70을 넘었거나 문턱에 이르러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다. 이들 가운데 많은 전우들이 고엽제 환자이고, 온갖 전쟁 증후군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속에서 힘들게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우리 참전용사에 대한 평가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중에 하나였던 대한민국을 세계 경제 10위권에 진입하게한 원동력인 역할을 했고, 우리 국군의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공헌을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우리 민족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 파병하여 의리있는 민족의 군대로 용맹성을 전 세계에 떨친 우리 전우들 -
베트남 그 뜨거운 정글속, 빗발치는듯한 포화속에서 조국만세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빛살처럼 명멸해간 5000여명의 꽃다운 우리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어떤 명분과 이유에서든 욕되게 해서는 안될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백발이 된 우리 참전 용사들을 용병이니 양민학살자로 매도하는 이기적인 소영웅 주의자와 반 민족 주의자들에게 한가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 전쟁에서는, 용맹스러운 적을, 그 상대는 잔인하다고 평가 한다는 것이다 - .
글: 박정환 (미국 플로리다 탐파 / 태권도 9단)) (미국 Florida주 지역신문 한국군 양민학살 시리즈 연재에 반박하여 투고한 기사)

※ "느시" 줄거리 보기 ---> 클릭!
최진사: 이 기사를 올리게 전달해주신 미국 정우진 전우님 감사합니다.
일생을 월남전 악몽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오신 박정환 전우님! 이제 그 악몽속에서 벗어나기를 우리 파월전우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박정환님의 고통을 이해하는 많은 베트벳 전우들이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06/21-11:13]-
김원식: 먼저 글내용의 주인공 박정환 장교 전우님과 사지에서 함께 했다는것이 자랑스럽고 영광입니다. 이 훌륭한 글을 본 싸이트를 통하여 전해주신 최진사님께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 자랑스러운 내용입니다. 박정환 전우님 타국에서 늘 건강 하시고 행복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또한 기회 되시면 이곳 베트남에서 뵙기를 희망 합니다. -[06/21-11:46]-
김종선: 곱씹고 곱씹으며 읽어본 내용 틀린점을 찾아볼 수 없읍니다.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일이 발생할 지언정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 "
지엄한 사령관님에 명령을 위반한 사실이 없고 또한 교육에 교육을 실시했으며,
교육받은 병사들 또한 명령을 위반 한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06/21-12:12]-
장영호: 글을 읽으며 생각지 못한 일들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박정환 전우님 김종수 목사님의 고통을 누가 알까요 어디서 줏은 말들을 실제화 하려는 사람들
괜시리 눈가에 눈물이 흐릅니다.어찌 하던진 참전한 군인의 입에서 양민 학살 했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싶고 꾸미려 하는 자들 그들은 전쟁을 알까? 내 부족한 생각이지만 그들은 군대도 가지 않은 자 일꺼다 군인에 길을 걸었다면 전쟁에 관해 이해를 할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양민 학살은 없음을 밝힌 지금에도 아직 양민 학살을 주장하는 넘들 아~~~ 그냥 확 몇십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악몸을 꾸고있는 전우님들 모두가 건강하길 기원할 뿐이다
-[06/21-13:27]-
연구원: 고국에 대한 애국심과 전우들을 향한 애정이 항상 가득찬 박정환 전우님의 글에 전적으로 공감 하는 바입니다. 늘 건승 하시리라 믿습니다. 언급하신 김종수 소위 전우님의 사건에 좀 부연해 말씀 드리면, 도망간 베트콩들이 그 지역 해당 마을 주민들을 위협,한후 관청을 매수하여 월남 민병대로 둔갑, 따이한이 무고한 민병대를 죽였다고 사이공 신문들에 보도케 하고 한국군 부대 앞에서 항의 데모 하므로서 사령부가 사건 수습을 위해 그 당시 엄청난 돈과 물자 배상을 지속적 약속하고 간신이 마무리 한 시실이 있습니다. 때로는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고 그들 인민의 이익을 챙기는 특유의 민족성 때문에 한국군 조사 감찰기관 에서는 진상의 진위 여부를 가릴수 없어 미군 미라이 사건의 케리 중위 처럼 김종수 소위가 희생양이 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06/21-14:21]-
연구원: 김종수 소위가 근무하던 비둘기부대는 현재 베트남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김원식 전우 회사가 있는 빈증 옆 지안(디안)이라는 곳,지금의 철도청 자리에 있었으며, 구찌 지역과 연결되는 이 일대의 베트콩은 악랄 하기로 유명해 비둘기 부대 바로 뒤에 미 1 사단이 주둔하며(지금의 싱가폴 공단) 한국군과 함께 수색 정찰등의 작전을 펼쳤습니다. 조국을 위해 큰 고초를 겫으신 김종수 전우님에게 하나님의 평안 하심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06/21-14:49]-
조 영옥: 박 전우님 상세한 증언 에 감사하며 겪은고초 얼마나 힘드셨을까? 위로의 말씀 전하고 싶네요 또 김종수 전우 지금 어찌되셨을까? 억울하고 분통이 터저 괴로워 하실텐데 -[06/21-16:25]-
서건작: 악의적으로 월남 참전자들을 매도하고 비하하는 못된 인간들이 있다는건 알았지만
유시민이란 망나니가 그런짓거리를 했다는건 이 글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박전우님 이국땅에서 많이 힘들었겠지만 이렇게 고국의 전우들에게 털어 놓으시면
다소나마 속이 시원하시리라 생각도 됩니다만 힘내시기 바랍니다.
좋은 정보의 글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06/21-20:12]-
김영배: 저는 지금 집에 도착했습니다.
"양민학살"이라는 제목을 보고 불길한 마음에 긴장감을 갖고 끝까지 읽었습니다.
"월남에서 우리 군인들이 양민학살을 했지요?"
아니 세상에...이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그 질문한 사람이 월맹에서 온 쫄짜도 아니고...북한에서 데려온 첩자도 아니고...
나중에 우리나라 삼천리강산의 보건복지를 담당했었던 장관님의 질문이라니...그게 방송이 됐다니...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후, 월맹에 가서"잘못했다고."했다니까...그 뉴스에 억장이 무너지고..너무도 억울해서...
월참자들이 뭘 잘못했습니까?
왜 우리편끼리... 없는 잘못을 파혜치고 닥달을 하는지...그렇게 했던분들..이젠 그러지 마시길 바랍니다. -[06/21-21:38]-
정우진: 박정환 전우님 악몽을 45년 동안 혼자서 질머지고 몸부림 치며 살아오신 전우님은 영웅 이심니다. 이젠 악몽의 짐을 내루어 놓으세요. 우리전우님들이 나누어 가지겠습니다. 이시간 이후 우리들의 마음을 해아려 주십시요. 양민학살 했다는그자들 주둥이는 제가 세멘트 바닥에 문질러 버리겠습니다. 전우님들 건강 하십시요. -[06/22-03:58]-
장세영: 존경하는 박정환 전우님 일생동안 잊을래야 잊혀질수 없는 한맺힌 20대의 이국전선에서 죽음의 고비 고비와 32만 우리참전 전우의 유일무일한 전쟁포로이며 실종자로 전우의 산 증인으로 우리 전우 모두의 아픔과 슬픔의 유일한 대표입니다. 지금도 정의롭고 파월전우 명예를 욕되게 하는 것들을 보고 울분을 토하며 바로 수정하는 역사의식과 애국하는 그마음에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06/22-05:40]-
장세영: 미국에 계시는 박정환님 이명우님 정우진님 그외 많이 거주하시는 전우님과 해외에서 함께 하는 모든 전우님도 박정환님과 한결같은 마음 일것입니다. 고인이 되신 채명신 사령관님을 기리는 말씀도 새삼 떠오름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박정환님.이명우님.정우진님.월남전의 사연들 평생 가슴속에 한맺인 암울했던 그사연들 서로 격려와 따뜻한 위로로 차츰 잊어시도록 전우 모두가 나누가졌으면 합니다. 이곳 베트벳전우 모두는 박정환님과 기쁘고 보람된 전우님들과 기억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모든 전우님 늘 하시는일 잘 이루시고 건강에 유의하십시요. -[06/22-06:08]-
이종욱 : "느시" 아직 못본것 죄스럽습니다. 박정환전우님과 김종수 목사 그리고 정우진 전우님! 겪어오고 당한일 눈물겁고, 불의와의 전쟁을 하시며,못된늠들의 양민학살 운운하는 놈들과 큰 일을 하시는 당신들은 우리들의 참영웅이십니다. -[06/22-06:37]-
최성영: '65년 주월사 창설요원 으로 참전 했읍니다. 지난번 둔촌동 만남때 동갑내기로 인사를 나누엇습니다. 진주의 장세영 전우가 전해준 "느시"를 정독 했습니다. 모진 역경을 헤치고 살아나온 박전우님을 우리세대의 영웅으로 가억 허고 싶습니다. 김종수목사(소위) 와는 몇차례 상면이 있었으며 비록 월남 근무 기간이 다르긴 해도 (저는 '65~'66) 김종수 소위는 희생양이 된것이라 판단 됩니다. 전쟁에서는 만들어진 영웅도 있고 희생양도 있게 마련 이나 김소위의 경우 매우 안타갑게 생각 합니다. 저는 주월사 합동헌병대 소속 이여서 김목사의 주장을 이해 합니다.박전우님과 정우진 전우님 건강 하시고 존경받는 Grand Master로 우뚝 서시기 바랍니다. -[06/22-09:52]-
김 영균: 베트남 그 열대의 작열하는 태양볕에 숯불처럼 벌겋게 달구어진 땅위를 맨발로 꽁꽁묶인채
걷는 내 모습이 보인다. 지열로 발이 쇼빵처럼 부풀어 오르고 가시가 발톱 사이로 끼어들어
한발자국 옮길때마다 칼로 난도질당하듣 고통스러웠던기억.........
진주 장세영전우 때문이 갑장 전우님의 느시를 격정속에 눈물을 흘리며 읽었습니다.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동안 처절했던 기억 때문에 고통을 겪으시다 용기를내어 둔촌호텔을
방문하여 우리 베트벳 전우들과 상면후 그동안 악몽과 싸워온 고통의세월이 나만의 고독한
고독한 싸움이 아니라는것을 새삼 깨달랐다는 갑장 전우님의 소회에 다시한번 같은시기에 베트남의
정글을 누볕던 전우로서 항상 전우님의 곁에 우리 베트벳 전우들이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06/22-21:29]-
바비 킴 사범: 콜로라도에 바비 킴 사범입니다, 박정환 관장님의 글 가슴 뭉쿨하며 감명 깊이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은 대한민국 온 국민이 볼수 있서 월남전에 대해서 사실 을 알수 있도록 하는 바람 입니다.. -[06/23-04:50]-
홍석진: 우리 병사들은 월남전 종전후 살기가 힘들엇던 그시절 생활고에 시달려 세상 돌아 가는줄 전혀 모르고 살았지만 번쩍 번쩍 빛나는 별 출신들의 무관심과 그들만의 편고 함이 이렇게 악으로 발전을 초래 했다 생각이 듭니다. 또 먹고 사는데 걱정 없는 파병 출신 지식층 들은 이런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인데 나 몰라라 했다는 것에 나 개인으로서는 분개가 치밀어 오릅니다. 우리 희생물인 병사들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그당시라도 나 자신 그냥 일만 한다고 바라보구 있었지는 않았습니다. 어떤때는 희생물은 우리 병사들이 였는데 왜 그들(별)을 영웅을 만드는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도 파병 역사 교육 정책을 제대로 만들어 후세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만들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저세상에 가서있는 전우들 영혼이라도 달래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언제인가 여기 사진에 내측근에 파병출신(별)이 나온 것을 보구 저사람이 무엇을 잘하고 잘났다고 여기에 나타 났을까(분통) "나는 그사람을 잘 알거든요." 청치에 끼여 들려고 눈치 보다가 나가리 도니 사실을 ... -[06/23-13:34]-
박정환: 전우님들께서 저의 글을 읽으시고 공감해 주시니 저는 외롭지도, 그리고 그 악몽들과의 싸움의 세월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것을 깨닫고ㅡ 저의 형제같은 전우들이 계시다는 생각에 행복합니다. 우리가 베트남전에서 수행했던 과거는 훗날 조국의 민족 정서가 바로 세워지는날, 민족사에 보석처럼 빛날것을 확신합니다. 전우님들 ㅡ 붉고 찬란한 황금빛 노을의 빛살을 내뿜으며 , 이글거리는 서쪽하늘의 태양처럼, 우리의 남은 삶을 조국을 위해 싸운 전사답게 장엄하게, 조국과 전우들을 사랑하며 마감하기를 기원합니다. -[06/24-05:59]-
최진사: 박정환 전우님 글 고맙습니다. 먼 이국에서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06/25-07:56]-
장세영: 존경하고 사랑하는 박정환 전우님 정우진 전우님 말씀을 몇번이고 읽고 또읽고 "느 시" 포로 수기 소중히 느끼고 간직합니다. 비록 미국에 계셔서 자주 뵙지 못해도 박정환 전우님 말씀과 위 댓글 함축된 말씀에 귀 귀울려 듣고 항상 감사하게 여기며 늘 하시는 일상에 축복이 있길 기원합니다. -[06/25-08:53]-
이명우: 1968년 1월 구정공세 당시 베트공이 제일 많타던 월남 남부 델타지역의 월남군 4군단 예하부대에서 임무를 수행중이던 태권도 교관단의 고 최범섭 중령을 비롯 하사관 2명이 전사 그리고 박정환 소위 실종의 뉴스를 접하고 우리 태권도 교관들이 얼마나 가슴이 아펏던지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특히나 나하고는 67년 12월 사령관 숙소에서 년말 크리스마스 파티에 함께 참석하고 헤여진지 한달여 만에 ...............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사일생 생환해서 제2의 생을 살고있는 친구 전우에게 행복한 나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06/25-13:40]-
정우진: 이명우 전우 관장님 67년 뉴스 찡함니다 아들이 하버드 대학 박사를 따고 5개국어를 하며 몆백명의 경쟁을 뚤고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았다니 축하함니다. 보훈병원에서 짜장 사야겠습니다. 어제 전화약속을 지키는 멋진 개척자 사나이 입니다 -[06/25-23:25]-
장세영: 68년 1월 구정 공세시 월남군 4군단 예하부대 태권도 교관단의 고 최범석 중령님과 하사관 2명이 전사하시고
동시에 박정환 소위님의 실종 뉴스를 접하는 가슴아픈 소식입니다.
정우진님 께서 이명우님의 아주 기쁜 희소식 아드님이 하버드대학 석사 박사와 5개국 외국어에 능통 세계인의
로~망의 꿈인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말씀, 이명우님 가족의 영광일뿐만 아니라 세계속에 대한민국의
긍지요 훌륭한 뿌리입니다. 미국 이민세계에 멋진 개척의 선구자인 한편 영광의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기회가 되면 서울보훈병원에서 베트벳 전우님과 상면을 고대합니다. -[06/26-05:11]-
이명우: 장세영 전우님 축하의 말씀 감사합니다. 아시갰지만 이민1세들은 현지생활 정착에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2세들 한테는 부모세대의 희생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행히 부모의 바램을 조금 이나마 이루어준 아들이 대견할 뿐입니다
장전우님 항상 건강하시고 인정과 의리가 넘치는 장전우님을 보고 싶어서라도 다음 한국 방문시
그 유명한 둔촌동 보훈병원 짜장면 맛보러 가겠습니다 -[06/26-08:23]-
장세영: 파월 장교님 태권과 민사심리대장님으로 3회나 파월하셔서 수많은 공훈을 세우시고 또한 잊지못할 아름다운
순애보적인 애뜻하고 슬픈 로맨스 운명적인 그시대의 역사적인 배경들...이남원님이 노력하고 수많은 참전 전우님이 숨죽이고 마음아파 슬픔의 눈물로 지새운 그날들이 잊지않고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이명우님 말씀처럼 짧고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셨지만 당시 이민1세로 낮설고 물서른 이국풍토에서 정착생활 내면에
수많은 어려움을 잘극복하시고 성공하셔서 감사드리며 아울러 박정환님 정우진님 모두 경애스럽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자랑스럽고 경사스런 아드님을 두시기 까지 부모님의 헌신과 희생적인 뒷바침으로 생의 전부를
바친점 그피눈물나는 인내의 수십년 각고의 울고 웃은 부자 모자의 사랑의 결실앞에 저또한 가슴에 용솟음처럼
기쁨의 환희로 대합니다.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얼마나 대견하시겠습니까, 현지 교포사회나 한국의 뜻있는
일간지 방송에 보람된 내용이 매스컴에 특필(종) 내용이라고 여깁니다.
그곳에 계시는 세분의 전우님 모두 성공하신점도 공통점이며 대한민국을 더욱 빛내 -[06/26-16:20]-
장세영: 빛내주시고 더욱 건강하셔서 베트벳 이홈창으로 호흡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베트벳 전우분들 이다음 베트남 방문이(10~11월) 예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투이호아 푸옙마을 호치민 델타지역 등등 방문이 기대됩니다. 서울둔촌동 보훈레스토랑 짜장면 파티의 날도
기대됩니다. 헌출하며 타고난 미남 호쾌하신 그모습 뵙고 싶습니다. -[06/26-16:34]-
신용봉: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이 훈령은 오음리 교육장에서 훈련 받을때부터 귀에 익게 들어서 아예 몸에 배여 있는데 양민학살 어쩌구 하는것을 보면 이가 갈립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런 주장을 하는 놈들의 이면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하면 깎아내릴까 별별 수단을 다 쓰고 있는 놈들로서 구성되어 있는것을 볼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물에 빠진것을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내 놓아라 하고 악을 쓰는 놈들이라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나저나 자랑스런 한국인의 긍지를 이국에서 심고 계시는 선배 전우님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06/27-09:46]-
정우진: 최진사님 다시 올렸군요 잘했어요. 박정환pow전우님 읽는 저희는 속이 후련하고 박전우님은 한맺힌 심장의 응어리 입니다. 최진사님 편집 너무 잘하였습니다. 전우님들 가능하면 " 느시"실화 수기 꼭한번 읽어 보시길 권장함니다. 양민학살 했다고 떠드는분들 주둥이님은 제가 세멘트 바닥에 갈면서 오랜만에 더러운 피 손에 좀 묻혀 보겠습니다. 전우님 건강합시다 -[06/27-09:48]-
권신기: 느시 책을 살려고 어제 교보 문고에 가보니 책이 품절 이라고 하네요 출판사 전화번호도 교보직원 한테 물어서 적어 왔는데 전화가 연결이 안되고 전우님중에 느시 다 보신분 계시면 책좀 빌려 주십시요 010-3744-7469 권신기 입니다 -[06/27-11:02]-
장세영: 권신기님 느시 책 종전부터 품절이며 출판사에도 재고가 몇건 없었는데 지금 서울대병원 진료후 내려가 담당출판사 전화 주문해 있다면 몇권구입후 드리겠습니다. 꼭 필독을 권합니다. 우리 참전전우들의 특별관심과 위로 격려사항 입니다. 고맙습니다. -[06/27-11:36]-
쌈지: 예전엔 내 자신이 긴 글을 썼는데
요즘은 읽는 것도 긴 글은 피하는 편이라 지금에야 읽어 보았습니다.
얘기로 들었든 내용들이지만 읽어보니 또 다른 느낌으로
우리의 가슴 아픈 얘기들입니다.
느시를 아직 못 보았는데 구해서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06/27-17:51]-
장세영: 박정환 전우님 포로수기 책 "느 시" 구독을 원하시는 전우님은 위내용 보시고 여기에 기록을 남겨주세요.
저가 노력해 지금 품절이라 재고 남은 몇권 부탁해 두었습니다.
지난번 13절 상하 26권 보급해 드렸지만 부족해 신청해 따뜻한 관심과 전우애를 나누실분 마지막 절판
남은것 파악 부탁했습니다. 여기 기록 남기신 전우님 보훈레스토랑 짜장파티시 드리겠습니다. -[06/27-19:23]-
장영호: 장세영 전우님 여러모로 베트벳에 도움을 주심에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참전 기장을 비롯 느시 책 잘 받고 잘 보았습니다 느시책 사랑방에 있습니다 보시고자 하는 전우님 같다보시고 반납해 주시면 됩니다 -[06/27-23:17]-
김병장: 18개월 참전하면서...포로는 포로수용소에 보내고 사살한 적군도 적군 묘지에 매장시킨걸 보았는데...정말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입니다...항상 건강하시고 가족과 함께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06/28-04:42]-
정도: 월남전 참전 국가발전 일등공신.참전용사를 학살자로 호도하려한 자들은
조국이 존재하는 한 대대손손 그죄를 월남참전용사의 물어야 한다.
여기에 한 술 떠더 월남천에 참전하여 전투수당을 받기로 하고 참전했으니
정부가 착복한 전투수당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전우호도하는 자들도 전우의 명예를 더렆힌 책임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나는생각한다.. 좋은글에 와-우한표! -[06/28-14:35]-
박정환: 최진사님께서 부족한 저의 글을 다시 재게해 주셨고 우리 전우님들께서 뜨거운 전우애로 과분한 칭찬과 관심을 베풀어 주셔서 한편 쑥스럽기도 하고 정말 고마운 마음 큽니다! 사랑하는 전우님! 명예롭고 가장 애국적인 전사였던 우리들은 베트남에서 귀국하던 그날부터가 덤으로 사는 우리의 생명이므로, 전사답게 남은 삶을 희망을 가지고 더불어, 하늘 나라를 믿어 그 소망을 갖는다면 세상에 무서울것도,두려울것도 없는 우리들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전우님들을 생각하면 따사하고 애틋한 정과 자랑스러운 마음이 가득 차 오름을 느낍니다. -[06/29-14:20]-
박정환: 우리 전우님들께서 저와 저의 책 "느시"에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심과, 특별히 장세영,최진사 전우님께 감사한 마음 큽니다. 사실 몇년전 "느시" 를 출간한 문예당 사장님이 2000년에 대통령 남북한 방문 등 여러가지 여건으로 큰 빛을 보지못해 안타까워 다시 다른 제명으로 개정해서 출판할것을 제의 했으나, 판권을 가진 제가 동의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영화 '탈출"(가제)로 영상화의 계약도 끝났고해서 베트남에서 귀국한 이후의 이야기와 함께 새로운 제명으로 출간하려는 계획입니다. 저의 새로운 책은 우리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 이고, 추억이기 때문에 함께 공유하는 마음으로 꼭 좋은 책을 만들겠습니다. -[07/10-04:52]-
박정환: 사랑하는 전우님,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살든 20대의 젊은 시절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애국적인 전사였고, 영웅이었다는 자긍심을 갖고 강건한 마음과 몸으로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07/10-04:53]-
최진사: 베트남전쟁 실전체험 인생역전 스토리가 영화화 된다니 기대가 큽니다. 물론 흥행도 해야되겠지만, 박정환 전우님이 타인에게 전하고자 하는 가슴속 깊은 속내음을 모두 비춰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금요일 보훈병원 미팅에서 장세영 전우님께서 출판사에 마지막 남은 느시 책(1,2군) 10벌을 주문하여 보기를 원하던 전우들에게 배분할 계획입니다. 이미 분배된 책은 서로 돌려보고 있습니다. 박정환님 미국에 계시는 정우진님, 이명우님과 서로 연락 자주하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 . -[07/10-09:24]-
장세영: 삼십 이만 전우의 유일 무일한 포로 수기 "느 시" 이제 출판사 재고가 없고 제2권 파본난것 8권만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박정환 선배전우님. 평생을 태권도 보급을 심어주신 이명우 전우님 지금도 끈끈한 의리와
돈독한 전우애를 베푸시는 정우진 전우님 다시금 많은것을 배우고 새삼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동과 사실에 접한 휴먼스토리의 감격적인 "영화"로 스클린에 잘 녹여서 대박 나시길 소망해 봅니다.
위에 말씀하신 박정환님 댓글 다시금 읽고 생각하며 세분의 전우님 면면을 그려봅니다. -[07/10-17:45]-
김영배: 월참자들중에서 보기드문, "딱지가 앉아 아문줄 알았던 상처에서 계속 피가나는"...잊혀지지 않는 지난날의 기억.
"밤이 아무리 길어도 날은 밝아온다"는 말이있지만,敵에게 포로를 당해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 신세.
그 것 보다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그야말로 저승의 문턱에 한발을 들여놓은 절대의 운명에서 탈출하는...
영화 빠삐용보다 더 영화같은..6.25 전쟁시, 軍則에,
(1)나는 포로가 되어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2)나는 전력을 다해 탈출하겠다.
(3)내 뒤에는 조국이 있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엄청난 힘과 勇氣가 반산 된다지만,
절대절명의 위기에서,그 어떤 망설임과 두려움도 없이 敵陣에서 탈출...정말 대한의 아들입니다.
실전체험의 영화가 만들어 진다니 국민 전체에게 알려지길 바라고 박정환 전우님!내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07/10-19:41]-
김 영균: 제네바 협정에의한 포로의 권리를 유린당한체 북한으로 끌려가지않으면 총살을 당할수밖에 없는
죽음의 터널에서 탈출하지 못하였으면 영원히 묻혀 버렸을 502일간의 피로쓴 포로탈출기를 영화로
제작되어 일반인들이 볼수있게되어 기쁨과 축하를 드립니다.
어제는 Grand Master 정우진 갑장 전우님과 박정환님 이명우 전우님 소식과 조국의 베트벳 전우들의 안부를전하며 둔촌호텔 짜장면 이야기로
30여분동안 통화를 하였습니다 내일은 진주의 장세영 전우의 연락을받고 짬을내어 둔촌호텔 로비로 전우들을 만나러갈 예정입니다 아마 미주 전우님들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겁니다 . 미주의 Grand Master 정우진 박정환 이명우 전우님들 항상 건강 하시고 가정에 행운이 깃들기만을 빌겠습니다 -[07/10-23:22]-
정우진: 박정환 전우님 한맺힌 월남전 포로의 고난의 실화를 영화로 만들기위하여 착수하였다니 우리 전우님들의 한을 풀것입니다. 책도 영화 타이틀에 같이 맞추어 다시 출판하다니 둘다 잘될것입니다. Taekwondo Times 사도 요번 이슈부터 연재로 나갑니다. 세계태권도 8천만 인구의 영원한 히스토리로 남을것입니다. 태권도를 하였기에 살아 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전우님 무도인 고맙습니다.-[07/12-06:12]-
|
첫댓글 엄성환 전우님 안녕하십니까? 부인을 통해서 안부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