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과 20111561 이승현 개별 답사문.hwp
인물로 보는 조선시대사 개별 답사문
반천년 서울의 수문장 서울성곽
역사학과 20111561 이승현
목차
1. 들어가며
2. 서울성곽 축조와 보수
3. 4대문
1.들어가며
나에게 서울 성곽은 단지 서울 야경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뷰를 제공하는 둘렛길이었다. 서울 4대산을 따라서 지금은 정리가 잘 되어있어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출입이 가능하고 북악산 서울성곽도 미리 허가만 받으면 들어갈 수 있다. 단지 연애와 데이트 코스 중의 하나였던 서울 성곽을 이번엔 혼자! 답사를 위한 유적지로써 다가가보기로 하였다.
2. 서울성곽의 축조와 보수
조선 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서울 4대산의 능선을 이어 축조된 한양도성은 동·서·남·북에 4대문과 그 사이에 통행이 편리하라고 4개의 4소문을 만들어 도성과 전국 8도를 상징적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사직을 건축한 후 한양도성은 태조5년(1396) 1월 9일 부터 2월 28일까지 49일간 전국의 백성 118,070명을 동원하여 축성하였습니다. 공사구간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어 축성하였는데 구간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구간명으로 새겨넣어 즉 북악의 동쪽에서 천(天)자를 시작으로 서쪽의 조(弔)자 구역에서 끝막음을 하였답니다.지금도 한양도성 성벽에는 구간명을 기록했던 흔적이 남았는데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불리는 돌 표면에 '崗字六百尺(강자구간 육백척)', '李字終柰字始(이자구간이 끝나고 내자구간이 시작됨)' 라는 글자들이 잘 남아있습니다.
그 후 조선 태조가 49일 간의 짧은 기간과 추위로 흥인지문의 공사를 끝내지 못한체 중단했다가 그 해 가을 2차 공사를 거쳐 전 구간의 축성을 완공했고 태조 7년(1398) 숭례문의 완성으로 한양도성 공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조 때 짧은 기간의 도성 축성으로 인해 세종 때에 이르러 보수할 곳이 많아졌고 세종 3년(1421) 농번기를 피한 12월 부터 이듬해 2월 23일 까지 전국 백성 322,400명을 동원하여 도성 전구간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답니다. 이 때 지역별로 구간을 책임지게하여 각자성석에 지역을 새겨 이후 그 구간이 무너지면 축성에 동원됐던 지역을 소환해 보수토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태종때가 아닌 세종 때 실질적으로 완성된 한양도성은 두 차례에 걸친 큰 전란을 거치면서 파괴되었지만 청나라의 간섭으로 한동안 보수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숙종 때에 이르러 '도성수비론'이 등장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하기시작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번에 모든 것을 보수하지 못하고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보수를 진행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제에 의해 이런저런 핑계로 한양도성을 훼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한양도성은 태조 때 축조되어 세종 때와 숙종 때에 걸쳐 보수 되어왔는데 이 세차례의 축조와 보수는 그 방법과 돌의 모양이 달라 쉽게 구분 됩니다.
태조 때는 1척(약30.30cm)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난 작은 돌로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이 수직이었고 세종 때는 아랫부분은 비교적 길고 큰 네모꼴의 돌을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을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약간 튀어나왔답니다.
숙종 때는 가로세로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비교적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랍니다.
3. 서울의 4대문
유교를 숭상한 조선은 사람의 다섯가지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방위(方位)에 맞추어 4대문을 설치하였습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 불리는 흥인지문은 오행 중 동쪽을 가르키는 목(木)에 해당되는 인(仁)을 넣었으며 풍수지리적으로 지기가 약한 동쪽을 보완하기 위해 지(之)를 넣어 넉 자로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그 후 고종6년(1869) 옹성을 쌓아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돈의문(敦義門)
서대문(西大門)이라 불리는 돈의문은 서쪽을 의미하는 금(金)에 해당되는 의(義)를 표시하였고
서쪽의 중국과 통하므로 중국과 의리를 돈독히 한다는 의미였다합니다. 돈의문은 '신문(新門)', '새문'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현재 서대문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신문로'나 '새문안길' 등의 이름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의문은 1915년 일제 강점기에 경성도시개발계획에 따른 전차의 복선화로 강제 철거 되었고 현재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라는 표지석만 남아 있습니다.
-숭례문(崇禮門)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리는 숭례문은 오행중 남쪽을 가리키는 화(火)에 해당되는 예(禮)를 표시하였고 남쪽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 다스린다는 의미로 불이 잘 타오르도록 현판을 세로로 하였답니다. 몇 년전 사고로 현판을 제외한 대부분의 목조 구성물이 불타버렸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 숙정문(肅靖門)·숙청문(肅淸門)
숙청문은 연산군 10년(1504)에 폐쇄되고 원래 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의 자리(삼청터널 위쪽)로 옮겨져서 그 때부터 숙정문(肅靖門)이라 불렸습니다. 숙정문의 뜻은 홍지문과 비슷하게 지혜를 공경한다는 뜻이지만 정(靖)은 지(智)보다는 낮은 단계의 꾀를 뜻합니다. 원래 지(智)를 써야하나 의미가 상통하는 정(靖)으로 대체하여 표시하였는데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이 문을 열어놓으면 북쪽의 수기(水氣) 즉 음기(陰氣)가 많아 도성의 부녀자들이 풍기가 문란해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엄숙히 음기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지어졌답니다. 하지만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대문을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도전이 구상했던 홍지문은 숙정문이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숙종 때 1715년(숙종 4년) 지금의 세검정 길가 홍제천 위에 세운 수문인 한북문(漢北門)을 숙종 임금님께서 친필로 홍지문이라고 이름을 써붙여서 홍지문이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도전의 구상에 따른 원래의 홍지문은 현재의 숙정문(肅靖門)이고, 현재의 홍지문은 서울의 정북문은 아닙니다.
-보신각(普信閣)
유학 5대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중 4방위에 해당하는 인(仁)·의(義)·예(禮)·지(智)를 딴 4대문을 세운 후 그 중앙을 의미하는 신(信)을 도성의 중심에 위치한 종각의 이름에 넣어 보신각(普信閣)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4. 답사를 마치고
이번 답사는 여러 가지로 신선한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인 일로 인해 정기답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점은 아쉬웠지만 자주가던 장소를 놀러가는 것이 아닌 다른 의미로 무언가 탐구해보고 사전에 어떠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찾아보던 것도 흥미로왔다. 특히나 3번의 축조, 보수를 통해 달라진 점에 대해서 직접 그 돌들을 비교해보고 찾아보던 나의 모습이 신기하였다. 서울 안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유적지가 존재한다. 경주처럼 아예 도시 자체가 문화유적지로 알려져있기도 하지만 서울도 경주 못지않게 문화유적이 많은 것 같다. 단지 경복궁이나 여러 박물관, 서울 성곽 등등 너무나 우리에게 친숙한 문화유적이라서 학창시절에 한번정도 가는 경주와 다가오는 느낌이 다른 것 뿐이다. 아마 집앞에 유적지가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 고층 건물의 숲에서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번 개별 답사를 통해서 그러한 서울의 문화유적 숨소리를 느낄수 있었고 그에 대해 찾아보는 시간이 있어서 오랜만에 서울이라는 현대 문명속의 한양이란 문화유적도시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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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등. 서울의 사대문을 잘 보면 각각 인의예지에서 한 글자씩을 넣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양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에는 '지(智)'자를 넣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사대문의 이름을 정할 때 문 이름에 지혜로움을 의미하는 '지(智)'가 들어가면 백성이 지혜로워져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지(智)'자 대신에 '청(淸)'자를 넣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부터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것은 원래 북쪽이 음양오행설에서 음기와 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북대문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이런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서 시장을 모두 닫을 정도로 고요함을 중요시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양의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청문'의 이름에도 '청(淸)'대신 조금 더 조용한 의미를 지니는 '靖(편안할 정, 조용할 정)'을 쓴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첫댓글 서울,현대 문명 속의 한양이라는 말이 인상깊네요. '답사'는 멀리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