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예리코에 출현한 주님 군대의 장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예리코 정복을 앞두었던 시기, 여호수아기에는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일화 하나가 소개됩니다. “주님 군대의 장수”라는 존재가 칼을 들고 등장하여 여호수아에게 ‘그가 있는 곳은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고 명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예리코 가까이 있을 때,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손에 칼을 빼 들고 자기 앞에 서 있었다. 여호수아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적의 편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나는 지금 주님 군대의 장수로서 왔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물었다. “나리, 이 종에게 무슨 분부를 내리시렵니까?” 주님 군대의 장수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네가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여호수아는 그대로 하였다(여호 5,13-15).
당시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의 첫 걸음을 떼려던 참이라 이 장수의 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가 한 말이 호렙산의 떨기나무에서 나타난 주님의 천사가 했던 말(탈출 3,1-2.5)과 비슷해 더욱 그렇습니다.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주님 군대의 장수’는 누구이고, 어떤 임무로 등장한 것일까요?
우선, 그의 출현은 탈출 33,2에 나오는 하느님의 약속과 관계 있어 보입니다: “나는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가나안족,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몰아내겠다.” 다시 말해, 천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이끌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수는 주님께서 예고하신 천사이며, 그의 등장으로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된 셈입니다. 그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은 장차 예리코가 ‘주님께 성별될 곳’(여호 6,19)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주님 군대의 장수’는 하늘 군대에 속한 장수로서, ‘만군의 주님’이라는 하느님의 호칭과 관련된 존재입니다. ‘만군의 주님’은 하느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뜻하며, 동시에 군대를 거느린 용사이심을 암시합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하느님의 이미지는 탈출 15,3; 시편 24,8; 이사 1,24 등에 나옵니다. 이 호칭의 유래는 이렇게 추정됩니다. 천지창조가 마무리되었음을 알리는 창세 2,1의 “모든 것”은 히브리어로 [짜바]입니다. 그런데 ‘만군의 주님’이라고 할 때, “만군”은 [짜바]의 복수형인 [쯔바옷]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 단어가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호칭에 담겨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시편 103,21-22에도 “주님의 모든 군대들”과 “주님의 모든 조물들”이 대구(對句)가 되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나라를 세운 뒤 처음으로 패망을 맞은 곳도 예리코입니다.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당한 뒤, 유다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가 “예리코 들판에서” 적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2열왕 25,5-6). 예리코에서 일어난 이러한 역사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도 죄를 지으면 그 죗값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오히려 주님께 많이 받았기에 그만큼 청구 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학 교수, 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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