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끝은 언제일까?(시13:1-6)
2025.1.26,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나무가 잔잔하려 해도 바람이 그쳐주지 않으면 소용없듯이(樹欲靜而風不止), 대부분의 고난은 우리(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닥쳐와서 힘들게 한다. 고난 중에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찾아오는 일반적인 풍파들도 있고, 자신이나 가족 등에게만 특별하게 찾아온 개인적인 고난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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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해 보면, 풀무불 같은 고통보다 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고난의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끝이 언제인지 알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괴로움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바닷물로 갈증을 해결해 보려는 것 같은 시도들을 하기도 한다(술, 마약, 도박, 방탕, 로또, 무속을 의지함 등). 심지어 어떤 사람은 좌절감으로 인해 극단적인 상상을 하기도 하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건강과 영혼을 헤칠 뿐만 아니라, 가족들(특히 자녀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와 상처를 유산으로 남겨줄 뿐이다.
만약 나에게 닥친 고난의 끝이 언제인지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능히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고난의 끝이 언제인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며,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희망의 깨달음을 찾고자 한다.
고난의 끝은 언제인가? 어떤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죽으면 끝인 경우도 있지만(천국), 또 어떤 사람에게는 또 다른 영원한 형벌의 시작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시간에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죽음 이후에 관한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내)가 처한 현실에 관한 것이다. 우리들이 만나는 각종 형태의 고난에 대해서, 그것이 끝나는 때가 몇 개월 후 또는 몇 년 후라고 콕 찍어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부분이고, 그때는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굳이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때(카이로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콕 찍어서 어느 때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성경 속에 나타난 사례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언제쯤인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부분들은 있다.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고난이 끝나는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결론을 미리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준에 충족되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Only God) 의지하는 순금 같은 믿음의 상태이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저에게는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직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진심으로 드릴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 모든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더 견고한 믿음을 갖게 하고(또는 영적침체로 부터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크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더 나아가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실례들이 많이 있다. 요셉, 욥, 다니엘, 다윗, 하바국, 사도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13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도 그러한 좋은 실례들 중의 하나이다. 먼저 오늘 본문인 시편 13편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함께 읽어 보자.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1-2)
이 말씀을 보면, 우리들만 고난의 끝을 몰라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하의 다윗도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끝이 언제인지 몰라서 힘들어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느 때까지”라는 말을 반복한다. 게다가 우리들이 옆에 있는 사람들의 말이나 비웃음 때문에 더 힘들어 하듯이 다윗도 그랬다.
“실패란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추락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What we call a failure is not the falling down but the staying down)”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20세기 전반에 ‘미국의 연인(America’s Sweetheart)’으로 불렸던 메리 픽포드 (Mary pickford)라는 여배우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과거의 삶을 돌아보면서 했던 말이다.
이 말과 유사하게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도 바로 추락한 자리에 자신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고통과 두려움을 찬송과 기도로 바꾸었다. 그가 어떻게 바꾸었는지, 다 같이 다윗의 심정으로 읽어 보자(시13:5-6).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 13:5-6)
이 말씀에서 “오직(Only)”이라는 표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가 이토록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송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의지하는(=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과 성품이 어떠한지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윗의 고백 속에서 우리(나)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우리(나)에게 사랑의 하나님이시다(5절). 또한. 그 분은 우리(나)에게 은덕을 베푸시는 하나님(후대하시는 하나님)이시다(6절). 여기서 다윗이 의지한다고 고백했던, “주의 사랑”(베하스데카)이란, ‘약속을 지키시는 사랑’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서 쓰인 “은덕(가말)”이라는 단어는 ’충분히 보상해 주신다, 넘치는 혜택을 주신다‘, ’숙성시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다윗이 믿었고, 오늘 우리들이 믿는(또한 믿어야 하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나)를 숙성시키시는 하나님이시고, 더 나아가 결국은 약속의 말씀대로 충분한 보상과 넘치는 혜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지금은 우리를 숙성시키는 기간이다. 이것이 우리(나)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은 순간에 다윗이 처했던 고난의 자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의 자리로 변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아직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수많은 기도와 시(詩)들을 보면, 아직 이루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진 것처럼 찬양하며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어 가셨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고 확신한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다윗의 고백과 깨달음을 통해서, 지금 내가 만난 고난의 끝이 언제인지에 대한 통찰(insight)을 얻을 수 있다. 그때는 몇 년 후, 몇 개월 후가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그 하나님을 다시 깊이 만나고 체험하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Now-Here)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상태가 되었을 때, “아!” 소리와 함께 눈이 번쩍 뜨이고,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스위치가 올라가는 순간에 어두운 방이 환해지는 것처럼, 마음이 밝아진다.
그래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 주님은 일하고 계심이 깨달아진다. 아직 응답이 나에게 도착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응답은 오는 중이고, 곧 도착할 것이라는 것이 믿어진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주님만 보인다. 이렇게 되며,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심지어 거름더미 같은 상황도 나를 숙성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래서 지옥 같던 가정이 천국으로 변한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탄식이 변하여 확신의 찬송으로 변한다(“기쁜 날에도 고통 중에도 주가 일하심을 믿으며 감사”), 이것이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다. 이때부터 꽉 막혔던 축복의 문이 열리고, 기적이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상태이고, 하나님이 원하신 때이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깨달았던 하박국 선지자는 온통 “없을지라도”, 자신은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겠다고 찬양했다(합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다윗은 끝을 알 수 없는 고통 중에서도,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나)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가 그 약속과 성품을 붙잡고 기도할 때, 그의 눈이 밝아졌다. 지옥 같은 삶이 천국으로 변했고, 탄식이 변해서 찬송이 되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였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깨닫고, 다윗처럼 또는 하박국처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자.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찬송하며, 기도로 고난을 이겨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