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지산의 추억 / 유종수
지금으로부터 사십여 년 전의 일이다.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기 전까지, 우리에게 해외여행은 지금처럼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여권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고, 여행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관광을 목적으로 한 해외여행은 더욱 쉽지 않았다. 공무나 유학, 해외 취업, 사업상 출장, 학술·문화 교류, 해외에 거주하는 가족 방문 등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여권을 발급받는 과정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경찰과 관계 기관의 신원조회를 거쳐야 했고, 중앙정보부에서 실시하는 출국 및 반공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어렵게 여권을 손에 넣고도 다시 출국 허가 절차를 거쳐야 했으니, 해외여행은 말 그대로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먼 길이었다.
그런 시절인 1987년, 나는 일본 도쿄에 있는 도시바(TOSHIBA)에 장기간 파견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POSCO 광양제철소 1기 공사의 전기 제어 시스템을 도입하는 업무를 맡으면서였다.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일터에서는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휴일이면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들떴다. 평소에는 쉽게 갈 수 없었던 곳들을 찾아다니며 일본이라는 나라를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요코하마를 거닐고, 하코네를 찾고, 도쿄의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모든 곳 가운데서도 내 마음을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곳이 있었다.
후지산이었다.
어릴 적부터 사진과 책에서 수없이 보아 온 산이었다. 일본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산, 눈 덮인 정상과 완만한 능선을 가진 그 산을 나는 언젠가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마침 도시바 직원인 나카노라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휴일, 그는 흔쾌히 자신의 차를 내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코네를 지나 후지산으로 향했다.
도쿄를 벗어나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도시의 빌딩들이 뒤로 물러나고, 산과 들이 가까워졌다. 길가의 나무와 마을, 낮은 지붕들이 한 장면씩 스쳐 지나갔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보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서 더 많은 설렘을 안겨 주기도 한다.
그날이 그랬다.
하코네에 이르자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래전부터 온천 휴양지로 이름난 하코네는 자연과 사람의 시간이 고요하게 포개져 있는 곳이었다.
아시노코 호수 위로 배가 지나가고, 산자락에는 안개가 낮게 내려앉았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호수 너머로 후지산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오와쿠다니에서는 화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땅속에서 올라오는 유황 냄새와 하얀 연기가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내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어서 후지산을 보고 싶었다.
마침내 후지산 5합목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구름보다 가까운 곳에 서 있는 거대한 산.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아 왔던 후지산이 눈앞에 실제로 서 있었다.
사진 속에서는 한 장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던 산이, 그날은 하나의 생명처럼 다가왔다. 말없이 우뚝 서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산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그 산에 대한 예의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살면서 수없이 많은 풍경을 만난다.
그러나 모든 풍경이 마음에 남는 것은 아니다.
어떤 풍경은 눈으로 보고 지나가지만, 어떤 풍경은 마음속에 들어와 오래 머문다.
그날의 후지산이 내게는 그런 풍경이었다.
산기슭으로 내려와 찾아간 곳은 오시노 핫카이였다.
맑은 샘물이 마을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은 너무나 투명해서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물 위로 하늘이 내려앉고, 멀리 후지산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잠시 숨을 멈춘 듯했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물 흐르는 소리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그날따라 유난히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맑은 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여행을 떠나면 우리는 많은 것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은 오히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저 바라보고, 걷고, 잠시 멈춰 서 있었던 시간.
오시노 핫카이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가와구치호에 이르렀을 때는 또 다른 후지산을 만났다.
잔잔한 호수 위에 후지산이 비치고 있었다.
하늘에 하나, 물 위에 하나.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그림인지 잠시 분간하기 어려웠다.
호수의 작은 물결이 산의 모습을 조금씩 흔들어 놓을 때마다, 후지산도 함께 흔들리는 듯했다.
나는 호숫가를 천천히 걸었다.
바쁘게 살아온 일상에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그곳에서는 하나둘 떠올랐다. 지나온 시간, 만나온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
여행은 때때로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이 아니라, 잊고 있던 나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이기도 한 모양이다.
여행의 마지막에 찾은 곳은 아라쿠라야마 센겐공원이었다.
붉은 오층탑 너머로 후지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사진으로 수없이 보아 온 바로 그 풍경이었다.
하지만 직접 바라보니 사진과는 전혀 달랐다.
붉은 탑과 푸른 하늘, 그리고 그 뒤에 묵묵히 서 있는 후지산.
그 풍경 앞에서 나는 일본 사람들이 왜 오랫동안 후지산을 사랑해 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후지산은 단순히 높은 산이 아니었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복잡했던 생각들이 하나둘 가라앉았다. 거대한 산 앞에서 인간의 삶은 작아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오히려 넓어졌다.
그날 이후 후지산은 내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삶의 어느 한 시절에 우연히 만났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한 사람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세월은 참 많이 흘렀다.
1987년의 그 여행도 이제는 아득한 기억이 되었다.
그때 함께 차를 타고 후지산으로 향했던 나카노라는 친구의 모습도, 낯선 일본에서 보냈던 젊은 날의 시간도 이제는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후지산의 모습만은 아직도 선명하다.
아마도 사람의 기억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 장면이 있는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젊었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좁았다.
해외여행 하나가 커다란 사건이었고, 낯선 나라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바라본 후지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내 젊은 날의 한 페이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바라볼 때면, 혹시 후지산이 보이지 않을까 하고 무심코 하늘을 살핀다.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후지산을 만나는 순간이면 오래전 그날의 기억이 다시 돌아온다.
젊었던 나와 나카노가 달리던 길, 하코네의 산길, 오시노 핫카이의 맑은 물, 가와구치호에 비친 산 그림자, 그리고 붉은 오층탑 너머로 말없이 서 있던 후지산.
시간은 모든 것을 데려갔지만, 그 풍경만은 내 마음 한구석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다시 가 보고 싶은 산이 어디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주저 없이 후지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그 산 앞에 서고 싶다.
젊은 날의 나를 만나러 가듯,
그날의 하늘과 그날의 바람을 다시 만나러 가듯.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오래 바라보고 싶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산을.
내가 지나온 시간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리운 후지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