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2일 재의 수요일
사순 시기 사순 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이다.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저녁 미사 전까지 사십 일 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4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숫자이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으며, 모세는 십계명을 받으려고 40일 동안 단식하였고, 엘리야 예언자는 40일 동안 걸어서 호렙 산에 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단식과 기도를 하시며 40일을 보내셨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정화의 기간을 뜻한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기쁘게 맞이하려면 사순 시기 동안 외적인 준비와 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사순 시기 동안 신자들은 단식과 금육이라는 외적인 준비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재의 수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있다. 단식은 만 18세부터 60세까지, 금육은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한다. 내적인 준비란 회개와 보속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고 쇄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준비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사순 시기 동안에 거행하는 전례는 신자들이 예수 부활 대축일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사순 시기 동안 미사 때나 말씀 전례에서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제가 입는 제의의 색깔은 회개와 보속을 상징하는 자주색이다. 신자들은 금요일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침으로써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에 동참한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기념 없음 사순 시기는 대죄를 범한 죄인들이 공적으로 회개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죄인들은 속죄의 베옷을 입고 몸에 재를 뒤집어썼다. 마치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처럼 교회에서 쫓겨난 모습이었다. 그러한 속죄 의식을 마치고 예수 부활 대축일에 다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옛 예식이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11세기에 이르러 재를 뿌리는 예식이 도입되었고, 이제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받아 보관했던 성지를 태워서 만든 재를 머리나 이마에 받게 되는데, 이 재는 『성경』에서 참회를 의미하였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오늘은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 재의 수요일인 오늘은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고자 사십 일 동안 삶의 광야로 나가 긴 여정을 걷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와 묵상 가운데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우리 영혼과 육신의 성화를 위해 단식과 선행을 할 것입니다. 광야로 떠나는 우리의 영적 여정에 필요한 은총을 하느님께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오 6,1-6.16-18)
"Take care not to perform righteous deeds in order that people may see them;
말씀의 초대
교회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우리의 행실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회개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 단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 모든 것을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재의 수요일인 오늘부터 거룩한 사순 시기가 시작됩니다.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사순 시기에는 특별히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됩니다. 제 자신을 살펴보면 허물과 상처투성이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무거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제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해야지. 그리고 새사람이 되어 달리 살아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사순 시기가 은총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죄와 허물투성이인 우리에게 새롭게 태어나서 기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주시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순 시기는 또한 기쁨의 축제인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파스카 축제를 기쁘게 맞이하고자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을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일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받아들이려고 세상이 주는 달콤함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를 변화시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나로써 세상이 밝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밝아야 내 마음도 밝아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밝아야 세상도 밝아집니다. 우리는 오늘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 2,12-13) 하는 요엘 예언자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자선이나 단식과 같은 회개의 행위들은 단순히 외적 행동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행실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긴 사순 시기의 여정을 함께 걸어갑시다. “내 아들들아, 자네들이 나를 프란치스코 아버지라 부른다면 이렇게 말하겠네. 자네들 수도회의 개혁을 믿지 말게. 자네들 각자 자신의 개혁을 믿게. 나의 형제들아, 자네들이 나를 프란치스코 형이라고 부른다면 이렇게 말하겠네. 거룩해지게, 그러면 세상이 자네들에게 거룩해 보일 걸세”(『프란치스코 저는』에서).
☆☆☆
“나이가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의 일화 속에 나오는 유명한 말입니다. 사람은 40세까지는 부모에게서 타고난 얼굴로 살지만, 40세가 넘어서면서부터는 스스로 자기 얼굴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이 40이 넘어가면 육신의 얼굴보다 내면의 얼굴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본디의 외모와 관계없이 내적인 마음가짐에 따라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첫인상은 좋지만 점점 갈수록 싫증이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인상과는 상관없이 만날수록 정이 가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면의 얼굴 때문입니다. 내적으로 풍기는 이런 아름다운 얼굴은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성형 수술로도 만들 수 없는 얼굴입니다. 그렇다고 겉으로 착한 사람 흉내를 낸다고 선한 얼굴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오로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선하고 바른 생각을 하고, 선하고 바른 행동을 하며 살 때 이런 아름다운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면의 얼굴은 향기로써 그 사람의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착한 일을 하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과 내밀히 만나고 기도하며 바르게 살고 착한 일을 하면 선한 얼굴이 됩니다. 그 얼굴이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의 우리 얼굴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선한 얼굴을 가지고 살면, 어떤 마귀도 감히 범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
올바른 자선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올바른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주님만이 보시는 곳’에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올바른 단식 역시 머릿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단식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고 단식하고 자선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남의 이목은 생각하지 말고, 돌아올 이득도 계산하지 않으며, 거저 주고 잊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순 시기를 살라는 당부입니다. 해마다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나누고 베풀자는 외침을 듣게 됩니다. 먼저 가족을 떠올려야 합니다. 자주 만나는 이웃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달라는 삶’으로 바뀌어 가기 때문입니다. 얻어먹는 사람을 거지라 하지만 진짜 거지는 얻어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달라는 사람입니다. 주지 않는다고 늘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베풀어야 합니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물질이든 시간이든 애정이든 그렇게 주고 잊어야 합니다. 늘 만나는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늘 만나는 주님과도 올바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서양인의 묘지 비문에 종종 등장하는 라틴 말 문구입니다. 우리는 언제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이 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가장 살아 보고 싶었던 바로 그 내일이다.”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명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아니면 불평불만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흙에서 나온 존재입니다. 라틴 말에서 ‘흙’(humus)이라는 단어는 ‘겸손’과 ‘인간'이란 용어의 어원입니다. 곧,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죄에 떨어지기 쉬우며 자신이 최고인 것처럼 교만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의기양양하고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본모습을 깨닫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
옛날 연나라에 활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활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연나라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연나라 사람이 주울 것인데, 굳이 찾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이야기를 듣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연나라라는 말을 뺐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노자께서 공자의 말에 토를 다셨습니다. “사람이라는 말까지 뺐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자선은 아무도 모르게 하는 행동입니다. 남이 알게 하면 자선이 아니라 ‘자랑’입니다. 그런데도 자선이란 명분으로 ‘자기를 선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복음 정신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자선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갚음을 바라지 않고 베풀면 하늘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밝아지는 인생을 체험하게 됩니다. 속담에도 “적선하는 이는 귀신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만큼 하늘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먼저입니다. 무의식중에라도 좋은 생각을 자주 해야 합니다. 선한 마음이라야 조건 없이 베풀 수 있습니다.
어느 백인 교사가 인디언 보호구역 내 학교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사는 아이들에게 오늘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낼 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 아이들이 갑자기 책상을 가운데로 끌어당기더니 한데 모여 앉는 것이 아니겠어요? 교사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부정행위는 안 된다고 훈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도리어 선생님이 이상하다는 듯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지금껏 어려운 문제는 함께 힘을 합쳐야 해결할 수 있다고 배웠는데요?”
이 인디언 아이들의 말이 크게 와 닿습니다. 사실 지금의 시대는 ‘나 홀로 최고’만을 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모든 것을 다하려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기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으며, 더 큰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힘을 합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함께라면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혼자서 만이 무엇을 하려하고, 혼자서 만이 모든 것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바로 욕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우리 주님께서 이천년 전 수난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들은 속죄와 보속의 시기라고 불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지난해 ‘성지주일’에 사용했던 성지를 태워 만든 재를 머리에 바르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흙에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함께 하지 못하게 만드는 내 안의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또한 기쁜 소식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갈 때,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여 가장 은혜로운 순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사순시기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가장 특별한 가장 의미 있는 사순시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말은 인간이 사용하는 약 중에서 가장 약효가 세다(루디야드 키플링).
아무것도 아닌 우리
-신대원 신부-
재의 수요일, 사순절의 시작입니다. 사순절은 40일 동안의 여정을 통하여 주님의 수난하심과 죽으심을 묵상하고,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기입니다. 동시에 그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도 주님과 함께 걸어가기로 결심하는 은혜로운 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흙으로 빚어내신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지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해야 하지요.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당신을 ‘닮았다’고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기왕에 주님의 모습을 닮았으니, 삶 또한 주님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혹은 단식을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아버지께만 보여야 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께서도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위하여 수난하시고 묻히신 주님을 생각하며, 열심히 그분의 뒤를 따라갈 것을 약속해 봅시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단식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고 계시는 만큼 묵상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며 ‘위선자’ 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속된 평가와 인정을 중시하고, 그에 좇아 가치 질서나 계급 질서를 구축하려는 이들이 범하는 작태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묵상의 배경 삼아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추태를 일별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어서 사고를 좀 더 깊게 진전시켰으면 하는 점은 인간 이해에 대한 층위입니다. 위선자들도 나름대로, 인간은 이런 거야, 하고 이해하며 자리매김하는 지평이 있습니다. 그 지평이 어떤 것인지 깊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도대체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알아들으며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피며, 그 관점의 한계를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곤 인간 존재의 더 큰 성장을 위해 어떻게 그 한계를 돌파해 나아갈 수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는 끝없는 성장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한테 주어진 성장을 향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지표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잣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대하시며 움직이셨는지 깊이 알아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셨던 그 인간 이해의 깊이에까지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묵상 중에 예수님의 그 깊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일입니다.
타서 재가 되도록
-김찬선신부-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왜 교회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할까? 이왕이면 산뜻한 이름, 예를 들어 “은총의 수요일”, 이렇게 이름붙이면 안 될까?
그제는 신문을 읽는데 여성들끼리 대담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 여배우가 진보진영에 대해 따끔한 한 마디를 하였는데 “찡그리고 분노하는 사람 곁에는 아무도 가고 싶지 않다.”는 너무도 지당한 말에 뜨끔하여 저도 우리 교회도 이러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고, 우리의 사순시기도 너무 어둡기만 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저의 육신의 형제들은 늘 저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는데, 저보고 늘 하는 얘기가 사람들을 만나면 손도 잡아주고 제발 좀 자주 웃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 살 땐 거기 풍습이 만나면 포옹하며 인사하기에 저도 잘 웃고 포옹을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딱딱하고 심각한 저로 바뀌었습니다.
저뿐이 아닙니다. 신자들도 비슷하여 처음 성당에 온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내가 오는 것을 싫어하나?”하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다 성당에서 노상 하는 얘기가 십자가이고 도저히 천국과 은총을 살아가는 사람들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단식하며 오만상을 짓고, 우리는 십자가로 은총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만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는 달리 우리의 십자가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형틀일 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가 타서 재가 되도록 사랑하는 것이면 은총이 될 것입니다. 그 재가 그저 有가 無로 돌아가는 虛無가 아니고 뜨겁게 타버린 사랑이라면 재도 은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의 수요일에,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단지 인생의 허무함만을 마음에 새기지 않고 어차피 허무로 돌아갈 육신을 불태워 사랑이 되자고 마음 다지는 날이 되도록 합시다.
자신의 선행을 밖으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일반적인 욕망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회사 사장 비서가 이웃돕기 성금을 가지고 서울 시내 모 일간 신문사를 찾아 갔습니다. 이웃돕기 성금을 기탁한 그 비서는 “이 성금을 내신 우리 사장님 사진을 신문에 실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지요. 이에 신문사에서는 신문에 얼굴을 낼 수 있는 성금의 한도액을 말해주며 이 액수가 되지 않으면 사진을 실어 주기 어렵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비서는 “그러면 그 성금을 돌려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다시 되찾아 갔다고 하네요.
아무리 명예가 귀중하고 본능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기탁한 불우 이웃돕기 성금을 다시 찾아갔다는 이 사실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이 정말로 기분 좋을까요? 보이기 위한 행동은 결코 나를 편하게 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11년 동안이나 숨기고 살았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11년간 매일 아침 읽지도 못하는 신문을 펼쳐 들고 읽는 시늉을 했답니다. 남의 눈에 그럴 듯해 보이고자 했던 그 사람의 눈속임은 과연 자신에게 어떤 만족감을 줄 수 있었을까요?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도 모르는 신문을 펼쳐들고서 있는 시간은 그에게 고통의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 모습이 슬프게도 우리 각자 안에도 있습니다.
겉치레 말, 겉치레 선행, 겉치레 기도, 겉치레 웃음, 그 밖의 많은 겉치레들……. 이러한 것들이 나의 신앙생활 안에 없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선적인 신앙생활이 정말로 나를 기쁘게 했었는지도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위선을 정말로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신앙심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장 가까운 증인의 상징인 ‘왼손’까지도 자신이 행한 행위를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대신 하느님께 더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선, 기도, 단식은 유다인들이 종교적인 신심을 발휘하는 선행으로서 예부터 지켜오던 의무였습니다. 이는 율법을 넘어선 한 단계 위의 선행이기에, 이러한 선행을 하면 특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잘못 지킨데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마지막 심판 때 이 공로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요. 즉, 나중에 받는 보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는 열심히 한다는 인정이라는 보상을 먼저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부터 우리들은 회개와 속죄를 행하는 사순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사순시기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께 인정받는 은총의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신의 인격이나 인품이 아닌 것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사실 그대로 자신을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안전하며, 즐겁다(리챠드 세실)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전삼용신부-
매미의 알에서 나온 유충은 3년에서 어떤 것은 17년이 넘는 세월을 땅 속에서 지냅니다. 그러다가 성충, 즉 매미로 우화한 후에도 1달 이상을 살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매미들은 보통 7년 정도 땅에 있다가 매미가 되어서는 10일 정도 지내다 죽습니다.
따라서 그 오랜 세월을 기다려 드디어 맞게 된 짧은 며칠은 그들의 모든 삶의 에너지가 집결되는 때입니다. 생물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종족보존입니다. 매미는 그 짧은 시기에 짝을 짓고 알을 낳는 것입니다.
재의 수요일 미사에선 신부님께서 머리에 재를 얹으시며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라고 합니다.
본래 인간이 흙에서 났지만 흙으로 돌아갈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첫 조상이 죄를 짓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벌이 바로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썩는 이유는 바로 그 몸에 죄가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로 성모님은 원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이 승천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물론 예수님의 몸도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원죄 없이 깨끗한 육체였지만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 죗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늘은 하느님께서 사시는 곳이고 땅은 인간의 죄로 저주받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서 땅에 묻히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 즉 저승(지옥)에까지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 나뭇가지로 물장난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면 당연히 물에 뜹니다. 어린 마음에 손으로 그 나뭇가지를 물 더 깊숙이 집어넣으면 나뭇가지는 물 위로 더 높게 치솟습니다. 물 바닥까지 닿았던 나뭇가지는 물 위로 올라가려는 에너지가 극대화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까지 내려가 바닥을 쳤지만 다시 솟아오르려는 에너지가 극대화 된 상태가 성 토요일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례란 바로 지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솟아올라 하늘까지 다다르심을 의미합니다. 세례란 옛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사순은 바로 이 신비를 몸소 체험하는 때입니다. 마치 매미의 유충이 매미로 태어나기 위해 땅 속에서 몇 년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또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자신에게서 실을 뽑아 누에고치가 되어 어둠 속에서 죽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죽이는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선 사순절에 행해야 할 그 유명한 세 가지 권고사항이 나옵니다. 바로 기도, 단식, 자선입니다. 인간이 죽여야 할 것은 세 가지 죄의 뿌리, 즉 교만, 성욕, 돈입니다. 즉, 기도는 겸손의 표지이고 단식은 육체를 이기기 위한 것이며 자선은 돈의 욕심을 이기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기도 할 수 없고 육적인 사람이 단식을 좋아할 이유가 없으며 욕심 많은 사람이 자선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의 나쁜 경향을 죽이기 위해서 조금 더 기도하고, 육체의 욕망을 절제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에 묻히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이것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행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온전히 죽었을 때에야 새로 태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순은 단순히 극기하고 기도하고 자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다시 태어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죽여나감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즉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자신을 죽여 땅에 묻지 않으면 부활이 오더라도 어떤 부활의 기쁨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체험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의 신비는 항상 남의 것으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순절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머리에 재만 얹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정말 우리 자신을 땅에 묻어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김찬선신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고린토 2서 6,1-2)
지금까지의 저를 보면 사순 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늘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순시기를 기꺼이 잘 맞이하지만 어떤 때는 사순 시기가 다가온 것이 영 부담스럽습니다. 사순 시기를 거룩히 지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이들하고 노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는데 그 지루하고 긴 미사와 교리 공부를 하러 가야 하는 그 어린이 마음입니다. 미사를 드려도 괴롭고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더 괴롭습니다. 결국 미사를 드리지만 은총의 시간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은총을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산기슭에서 평생 수도자처럼 혼자 사셨습니다. 사시는 곳이 지대가 높아 물이 솟지 않았습니다. 하여 비가 오면 그 빗물을 받아 아껴 써야 하는데 비가 와도 항아리를 비워놓지도 않고 뚜껑을 열어놓지도 않으면 그 귀한 비를 그냥 흘려보내고 맙니다.
이번 사순절 그렇게 될까봐 저는 어저께 서둘러 고백성사를 봤습니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 은총의 때가 되기 위해 지금 나는 회개를 해야 하는데 이 회개를 미루려는 저의 마음을 족치고 죄기 위해 준비가 덜 되었는데도 서둘러 고백성사를 본 것입니다.
주님, 회개생활을 잘 시작하게 하시고 이 사순절 은총의 때가 되게 하소서!
쇼를 해라, 쇼
-이인옥-
어떤 결혼식에서 주례자가 삼종기도를 바치고 나서 주례사를 했다. 마침 12시였기 때문이다. 가톨릭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그분은 무슨 일이 있든 정해진 기도 시간은 어김없이 지키는 분이다. 팔을 쳐들고 기도해야 더 효과가 있다며 심심하면 팔을 들고 묵주기도를 하자고 제안하는 자매가 있다. 그 자매는 두 시간 정도는 가볍게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팔이나 발이 저려 쩔쩔매면 평소에 기도를 안 하니까 그런다고 무섭게 몰아붙인다. 헌금 봉투에 넣어서 봉헌할 때와 헌금액이 보이게 봉헌할 때, 주일헌금 총액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헌금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헌금봉투 사용을 금지시킨 신부님도 있다. 금육재를 지키지 못했다는 고백은 하지 말라는 신부님이 있다. 단식재와 금육재의 의도는 음식을 절식함으로써 그것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라는 것이지, 단순히 음식을 먹었는가 아닌가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나누었는가 아닌가를 고백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외적 신심 행위도 내면의 자세만큼 중요하긴 하지만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 신심의 깊이를 나타내려고 쇼를 벌이기보다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재의 수요일, 이마보다는 마음 깊이 숨어 있는 허세와 허례와 위선에 재를 발라야 할 것이다. 그 모두도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 아닌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어떤 신부님의 차를 타고서 함께 어디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여행을 통해서 크게 느낀 것이 하나 있었지요. 저희는 빨리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 고속도로로 진입했습니다. 그리고 톨게이트를 지나갈 때 그 신부님께서는 조수석에 있는 제게 말씀하십니다.
“귤 좀 꺼내봐.”
그리고는 톨게이트에서 통행료를 받는 분에게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하면서 귤을 드리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러한 행동을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 하시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저 좁은 곳에서 얼마나 힘들겠니? 그리고 매번 똑같은 행동을 하니 얼마나 지겹겠어? 따라서 나 같은 사람이라도 있으면 똑같은 일의 반복에서 조금 힘이 나지 않을까?”
저는 그때까지 톨게이트에서 통행료 받는 분들이 그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었지, 그 안에서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는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면을 보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뒤 저 역시 바뀌게 되었습니다.
차 안에 무엇인가 먹을 것이 있다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드리면서 “안녕하세요?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만약 아무 것도 없더라도 최대한 친절하게 인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 그분 역시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받아주시지요. 그렇게 인사하는 저를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이 보시는 분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저를 본 다른 분들도 저처럼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 대한 배려.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에 배려할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배려를 통해서 상대방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나의 기분도 역시 무척 좋아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러한 배려를 하지 못하고 서로를 힘들게 하는 행동인, ‘나’만을 생각하는데 최선을 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재의 수요일로, 바로 오늘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매년 찾아오는 재의 수요일이며 사순시기이지만, 올해만큼은 전과는 다른 재의 수요일이며 사순시기로 지내보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그런데 이제까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형식적인 모습으로가 아니라, 진실 되고 정성된 마음을 가지고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모두 갚아 주신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작은 배려들을 이번 사순시기에는 적극적으로 행해보면 어떨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되고 정성된 마음을 가지고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작은 배려를 보고서 사람들이 또 다른 작은 배려를 하게 되고……. 이러한 배려가 가득한 세상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고속도로 톨게이트 지날 때에는 꼭 먼저 인사합시다.
빠다킹신부
사순
-이정호신부-
사순은 우리말로 40이라는 말입니다. 40은 성경에서 정화의 기간, 속죄의 기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lent라고 하는데 이 말은 봄을 의미하는 영어의 옛말이라고 합니다. 봄은 겨우내 얼어붙었던 생명이 소생하고 약동하는 때입니다. 부활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순시기는 우리 영혼의 새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이 태어나는 봄의 시간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기 위해서 죽음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하느님의 기운을 되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하며 몸과 마음에서 죄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생명의 기운으로 채워갑니다.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품고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의 고백이며 자선은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주님을 따라 사랑하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내놓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단식은 죽음을 넘어서는 그 사랑의 결심을 곡기를 끊음으로써 몸과 마음에 깊이 새기는 행위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머리에 재를 받으면서 죄로 물든 지난날의 우리 자신은 하느님의 생명의 숨결에 날아가버리고 참된 사랑을 품은 진실한 인간만 남기를 청합시다.
누구의 시선인가?
-정순옥 수녀-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 주님 그분 앞에 자신을 열어 보이십시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3년 전 5개 수녀회 수녀들이 이주민을 위한 공동사목 ‘국경 없는 친구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쁨보다는 성공에 대한 불확실, 그리고 겪어야 할 많은 어려움이 예견되어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이미 살고 있는 수도생활도 쉬운 일이 아닌데 사도직까지 공동사목을 한다는 것이 ‘미친 짓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그것은 같은 수도회 회원들이 같은 일을 함께해도 어려운데 수도회가 다른데 함께 일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작용한 것 같았습니다. 한순간 저는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임해야 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결과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공동사목에 투신하는 우리 수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고통 받는 이주민들에 대한 사랑으로 인간적인 한계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함께 기쁨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이주민을 위한 봉사에 관심있는 모든 선한 평신도와 수도자들에게 열려 있는 장으로, 서로간의 다름과 차이로 인해 어느 정도 어려움은 있지만 우리 모두에게 회심으로 초대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도자로 살면서 내 삶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닌, 내가 주인으로 살 때 내 안에 부자유와 불편함이 발생되었고 사람 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관계가 아무리 어려워도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 문제 안에서 내가 어떻게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할 때 이것은 은총입니다. 이미 자신한테서 벗어난, 변화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를 향해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라고 외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루카 22,`61 참조) 우리도 예수님의 시선을 의식할 때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허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사순시기 주님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알고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향하여 우리의 발길을 되돌리는 시간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도 지난주에 이어 복음관상보다는 묵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되는데, 들머리에서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 그리고 올바른 단식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씩 짚어 가며 생각을 가다듬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겠네요.
어쩌면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 가르침의 내용을 쉬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올바른 것과 위선적인 것의 대비, 그 차이를 쉬 간파할 수 있을 듯하니까요. 그 결과 복음의 가르침은 더 자세히 캐물을 필요도 없이 이미 다 알았고, 열심한 신자라면 그에 비춰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으로 잘 미끄러지는지를 점검하면서 성찰하고 반성하고 고치려고 애쓸지 모르겠습니다. 그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만 뭔가 2퍼센트가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자선?·?기도?·?단식을 실마리로 해서 우리 인간 존재의 깊이의 층위들을 더듬어 보는 것이 더 큰 유익을 길어 올릴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며 과시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외적 평가 따위 애당초 염두에도 두지 않고 존재의 깊은 차원에서 그저 좋아 자선하고 기도에 몰입하고 단식을 통해 조화를 일궈내는 움직임을 함께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로 내 안에 이 양자의 움직임이 다 있음을 보면서 어떻게 조화와 균형 그리고 활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를 깊게 알아듣는 게 더욱더 긴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그렇다면, 숨은 것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뭘 갚아 주시느냐 않느냐는 것조차 이미 관심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 것입니다.
한 부자가 하느님께 자기 재산을 하늘나라로 가져가겠다고 졸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자가 너무나 조르기에 마지못해 허락하시면서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네 재산을 가져오되 가방 하나에 담을 만큼만 가져와야 하느니라.”
부자는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금으로 바꾼 뒤 가방 하나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생각했지요.
‘하느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할 줄은 미쳐 모르셨을 거야.’
부자가 하늘나라 문에 다다르자 문지기가 소지품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하느님께 허락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정 의심이 가면 하느님께 전화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문지기는 “아니 도대체 어떤 것이 들었는데 하느님께 허락을 받았는가?”라면서 가방 안을 보자고 말했지요. 부자는 이 말에 자랑스럽게 금이 가득 채워져 있는 가방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지기는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도로포장 재료는 무엇 하러 이렇게 가져 왔소?”
금이 하늘나라에서는 도로포장 재로로만 쓰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긴 이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이 과연 하늘나라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나의 이 몸조차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몸도 놔두고 오직 영혼만이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다 더 깨끗한 영혼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이렇게 말하지요.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영혼의 정화야 말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사순시기야말로 나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은혜로운 때이며 구원의 날이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행하는 나의 회개와 보속이 바로 나의 영혼을 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됨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자선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며, 기도할 때에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단식 역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남이 알아주고 칭찬을 한다면, 이것으로 받을 상을 이미 받게 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남모르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내 영혼이 정화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사순시기가 정말로 은혜로운 구원의 날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서로에게 힘을 북돋우며 열심히 생활했으면 합니다.
영원히 남을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렌즈다(카슈).
순례의 길
-김성웅신부-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마다 사제는 머리에 재를 얹어주며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예식을 통해 인간 본성의 유약함과 한계를 돌아보게 하고, 더 나아가 현세의 삶이 순례의 종착지인 본향을 준비하는 시간임을 상기시켜줍니다. 평생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살았던 한 남자가 죽기 전에 자신이 죽으면 가장 비싸고 화려한 수의를 입혀달라고 유언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죽자 생전에 고인을 알던 한 사람이 다가와 고인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습니다. “이토록 잘 차려입고도 갈 곳이 없구려!” 오늘 우리가 머리에 재를 얹는 것은 우리가 결국 가야 할 본향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가야 함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실상 살아가는 동안 ‘본향을 향한 순례의 여정’은 허위와 기만 등으로 치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이르십니다. 자신의 참 자아로부터 소외된 거짓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부단히 다가오는 유혹임을 깨닫고, 겸허한 순례자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회개로의 초대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김찬선신부-
며칠 전서부터 이번 사순시기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봤습니다.
단식을 할까? 사실 며칠 전서부터 사순시기를 어떻게 지낼지 생각하게 된 것은 제가 사순시기를 잘 지내려는 열망이 남달리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셔서는 이제 나이도 먹었으니 제발 단식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시니 어떻게 지낼지 자연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순시기에는 단식을 할까 말까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고민을 했습니다. 전에는 단식하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단식하는 것이 그렇게 녹록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단식을 하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순시기에 내가 무엇을 했다는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는 단식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낮기도 전 묵상을 하는데 단식을 하되 사랑을 위한 단식을 하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희생, 금욕, 단식, 이런 것들을 얼마든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을 위한 희생, 금욕, 단식입니다.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사순시기, 네가 제일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라.” 너의 사랑이 제일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너의 만족일 수 있으니 네가 제일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 어쩌면 네가 제일 싫어하는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누구를 싫어하는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몇 사람이 떠올랐지만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어떤 때 어떤 행위가 싫을 뿐이지 그 사람 자체를 싫어하고 그래서 사랑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은 나 중심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극복하여, “아, 나 저거 참 싫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좋고 싫음을 사랑으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번 사순시기 제가 매순간 해야 할 회개이고 매순간 제가 해야 할 단식이요 자선입니다.
오늘 우리의 전례는 사순시기의 우리의 회개에 대해서 말하면서 단식하고 기도하고 자선하라고 권고합니다. 회개에서 비롯된 단식, 기도, 자선이 되어야 하고 회개에 이바지 하는 단식, 기도, 자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란 나의 만족이 아니라 사랑을 구하는 것이니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에 이바지하는 단식, 기도, 자선을 이 사순시기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라”
- 서정웅 신부 -
독일 최대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괴테’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태어났는가-사랑에서, 우리는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무엇으로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사랑에 의해서, 우리들은 사랑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사랑함으로서, 우리들을 울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사랑, 우리들을 늘 결합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사랑.”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값비싼 보물입니다. 인간 삶의 모든 것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그것을 잊고 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Ⅰ요한 14.16)과 깊이 사랑을 속삭일 수 있도록, 인간의 본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특별히 은총의 시간인 ‘사순시기’를 배려해 놓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앞서서, 우리를 위하여 수난을 당하시고 고통받으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전례시기입니다. ‘사순시기’에서 사순은 본래 40일이라는 뜻으로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거치는 정화의 기간’을 뜻하는 성경의 상징적 숫자입니다. 즉 성경에서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그를 준비하는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시나이 사막에서 방랑 생활을 했었고,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전 40일 동안 재(단식)을 지켰고(출애 34.28), 엘리야는 호렙산에 갈 때 천사가 주는 음식만 먹으며 40일을 걸었으며(Ⅰ열왕 19.8),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태 4.2-3)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교회는 머리에 재를 얹어 주며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는 단지 허무한 인생임을 생각케 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처지, 죽어야 하는 처지, 고통과 비애로 점철된 처지의 인간을 십자가와 죽음으로 구원해 주시고, 죄 많은 인간의 처지를 돌보아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도록 신앙의 눈이 뜨이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면서 “이제라도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너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주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호소하십니다. 제2독서 고린토2. 5.20-6.2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애타게 하느님의 사랑을 찾으실 것을 부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칭찬을 받으려고 자선을 베풀지 말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 것이며, 침통한 얼굴로 단식하지 말며, 남들이 보지 않는데서 선행(의로운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왜 요엘 예언자는 ‘하느님께 돌아 오라’고 하실까요? 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기를 간곡히 부탁할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선행을 하라고 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큰 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가 하느님의 영(축복)을 받은, 하느님 당신의 외아들의 목숨까지 내어 줄 정도로 참으로 귀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잊어버리고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도나도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3.16-17)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Ⅰ요한 4.10-11)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찾는) 그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시 지나가는 사라져 버릴 것에, 세상일에 모든 마음을 빼앗겨 버린 애청자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의 참된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196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 켄트 케이스란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도 개인이 변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지침으로 삼을 만한 제안을 모아 ‘역설의 진리’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신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라.’ ‘정직하고 솔직하면 공격당하기 쉽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해져라.’ ‘세상은 결국 힘 있는 사람 편에 선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분투하라.’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탑을 쌓으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덤빌 수도 있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우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헌신해도 칭찬을 듣기는커녕 경을 칠 수도 있다. 그래도 헌신하라.’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그의 제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갔고 테레사 수녀님이 운영하던 인도 캘커타의 어린이집 쉬슈 브라반 벽 게시판에 새겨진 작자 미상의 글로도 유명해졌습니다. 몇 년 전 국내에 ‘그래도’란 제목으로 소개된 그의 외침은 모순과 불합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살면서도 우리 삶의 목표는 언제나 올바르고 진실 된 길을 걷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자신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여건이 어떠하든 나로 인해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세상,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아 멘
- 조욱현 신부-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서에서 40 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 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고,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 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간 인간의 죄, 그 죄에 대한 보속을 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그리고 이 재의 예절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시오 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듯한 삶에서 회개와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로 돌아서게 하는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사순절로 들어가기... - 정호 신부-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의 수요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기다리는 40일간의 긴 여행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세상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살펴보며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를 때 어떤 수고와 또 어떤 영광의 삶을 살게 되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마에 성지가지를 태운 재를 얹습니다.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은 참회, 곧 잘못을 뉘우침으로써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아파하는 그리고 우리 자신을 모든 것이 타고 남은 재처럼 겸손함으로 준비시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에 재를 얹은 모습으로 출발하여 기도로 주님께 감사와 함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선행과 자선으로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며, 단식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주님과 함께 나누는 극기의 삶을 살게 됩니다.
40일 간의 여행을 시작하는 오늘, 출발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복음으로 우리의 이 길고, 어렵고, 고된 길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은 기도와 선행과 자선과 단식 등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주님은 복음 속에서 이들 덕에 대해 열심히 하라는 말씀 대신 모든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시도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계십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선행, 스스로 나팔을 불며 자신의 선업을 자랑하는 자선, 사람들이 바라보는 기도를 즐겨하는 일, 침통한 얼굴로 고통을 드러내며 하게 되는 단식을 주님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행은 모든 삶에 있어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삶의 태도와 방식입니다. 또한 자선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그 사람의 대인관계의 기본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드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하느님과의 고유한 대화 방법이며 단식은 자신의 생명을 걸어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의 정성을 드러냅니다.
이 덕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큰 덕을 품은 사람에게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예수님이 세상을 사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 이런 덕들로 생활하는 것은 주님의 길이 바로 이런 참된 사랑의 삶이었음을 기억하고 우리 또한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노력이라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모두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그 목적을 삼는다면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과 어떤 면에서건 연관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리 우겨댄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욕심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 그 어떤 것도 좋은 것이라 사랑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사순절, 그 사순절이 각자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는 모두 다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 사순절은 오늘도 미사를 통해 계속되는 당신의 실제 죽음의 시간들입니다. 우리는 연습 삼아 조금 경건하게 사는 날이라 우리의 불성실을 위로할 수 있다지만, 그리고 많은 정성들을 천국에 가는 수단처럼, 또 사람들 앞에 보이는 자랑으로 여기지만 우리 주님께 이 시간들은 세상에 마지막 힘을 다해 죽기를 각오하고 내어 놓는 사랑의 실제 삶의 기간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주님을 우리 이기심과 욕심의 도구나 방법으로 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복음 속에 주님 앞에 드러나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들처럼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분명 이용하는 것입니다.
대신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그 작고 소중한 마음 하나를 품는 것이 이 시기에 모든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진심어린 선행, 자선, 기도, 단식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제 일어나서 길을 떠납시다. 머리에 재를 얹고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홀가분하게 사랑의 길을 떠납시다.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신부-
오늘부터 은총의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제자리, 제정신을 잃고 들떠 방황하지 말고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와 단식과 자선에 대한 권고 말씀,
영성생활의 핵심이 담겨있습니다.
진정 믿는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하는 지 잘 보여줍니다.
영성의 진위를 분별하는 시금석 같은 말씀입니다.
허영이 아닌 진실한 삶을,
교만이 아닌 겸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 중심일 때는 저절로 허영과 교만의 위선적 삶이지만, 하느님 중심일 때는 저절로 진실하고 겸손한 삶입니다.
사람 중심일 때는 드러나는 삶을 좋아하지만, 하느님 중심일 때는 저절로 숨겨진 삶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비로소
각자 본래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안팎으로
청정하고 넉넉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먼저 영혼에 관계된 주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이런 기도를 맛들인 자가 진정 영적으로 부자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이기에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기도,
안팎의 공간만 가득 채우고 분위기만 오염 시킬 뿐
더 이상 받을 상이 없습니다.
다음 육신과 관련된 주님의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오직
숨어 계신 아버지만 보실 수 있게 단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역시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단식이요,
허영의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진 모습입니다.
이런 기도와 단식의 정신대로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진실과 겸손의 삶을 사는 이들
겉으로는 가난해 보여도
내적으로는 하느님으로 꽉 찬 부자들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기도와 육신의 단식의 자기 수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도와 단식의 열매를 이웃과 나누는 자선 있어,
비로소 개인 수행의 완성입니다.
단식을 통한 회개(메타노니아)와
기도를 통한 친교(코이노니아)는
자선을 통한 공동체내의 섬김(디아코니아)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자선의 영성 또한 똑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아버지만 보시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부자 된 제자들만이 할 수 있는 수행들입니다.
하느님만이 나의 모두가 될 때
비로소
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숨어 계신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 안에 숨겨진 삶을 좋아할 때
참으로 자연 그대로의 진실하고 겸손한 삶입니다.
주님의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한 복음 말씀
늘 들어도 신선한 충격이요 우리의 위선을 폭로합니다.
수행 자체보다는
수행의 정신인 진실과 겸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선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사람들 중심으로 사는 허영과 교만의 위선자들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삶을 추구하는 제자들입니다.
오늘부터 은총의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회개와 정화, 내적 쇄신의 시기입니다.
아무쪼록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 중에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사순시기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아멘.
죄를 용서받는 중요한 치료제 - 자선과 기도와 단식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요엘 2,12-18 (너희는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제 2독서 : 2코린 5,20-6,2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입니다.) 복 음 : 마태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첫날인 오늘을 교회는 특별히?재의 수요일?이라고 호칭합니다.?재의 수요일?이란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머리에 얹는 예식을 하는 데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오늘 미사의 시작 예식에는 참회 예식이 없었는데 이제 행하게 될 이마에 재를 얹는 예식 자체가 참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순 시기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하느님께로 되돌리기 위한 준비의 기간입니다. 하느님께서 본래 우리에게 주신 것을 되찾는데 필요한 정화의 시기인 것이지요.
사순절(四旬節)이라는 말 자체는 40일 동안을 준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성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준비를 하셨는데 대체로 그 기간이 40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을 준비하거나 특히 하느님의 뜻을 받들 때 40일간의 준비 기간을 거쳤던 것이지요.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후렴처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탄복을 여러 번 반복하고 계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으셨던 세상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로 죄가 넘쳐나고 썩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부패하여 곳곳에서 말할 수 없는 부패의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세상을 정화하기 위하여 40주야를 비가 쏟아져 내렸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정화의 기간이 필요했었던 것이지요.
또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이 새겨진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40일간을 준비하였으며, 예언자 엘리야도 천사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40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앞서 예수님 역시 광야에서 40일 동안 홀로 기도하시며 단식하셨습니다.
이렇게?40?이라는 숫자는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하는 한편, 모든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떨쳐버리고 다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준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사순 시기를 우리는 회개의 시기이며 은총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단지 부담스러운 회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위한 준비의 기간인 것이지요.
이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는 자신을 정화하여 머리에 재를 얹게 됩니다. 지난 해 주님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운 재를 머리나 이마에 얹는 것이지요. 이 때 사제는 재를 얹어주며 동시에 이렇게 말합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이 세상의 어딘가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관심을 오로지 이 세상에만 집중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첫 날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을 다시 한번 성찰합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여 나와 세상만을 생각하고 살았다면 다시 하느님께로, 그리고 다시 이웃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머리에 재를 얹는 것이지요.
또한 재의 수요일인 오늘 우리는 단식을 합니다. 단식은 속죄의 한 표현이지요. 단식이란 말 자체가 우리에게는 낯선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단식?이라는 단어보다는 ?다이어트?라는 말에 더 익숙해진 우리들입니다. 생각해보면 다이어트라는 말처럼 가장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표현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최선의 가치를 두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몸 가꾸기에만 몰두하는 아주 비복음적이고 이기적인 가치가 담겨 있는 단어이지요.
이에 비해 단식은 가장 복음적이며 하느님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식은 나를 정화시키고 이기적인 나에서 이웃을 생각하는 나로, 그리고 창조주 하느님을 생각하며 정신과 영혼을 맑게 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다이어트가 아니라 단식을 하면서 나를 정화하고 나의 욕심을 절제하며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것, 이것이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머리에 재를 얹고 단식을 한 우리에게 복음은 계속 기도할 것을, 그리고 단식하며 자선할 것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것은 자선이라고 지혜서와 집회서는 수 차례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식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정신과 영혼을 맑게 하여 가난한 이웃과 나의 것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단식하는 것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웃과 나눌 때 그 때 비로소 단식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대로 살면서 나의 욕구를 자제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단식하고 정화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식하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해야지 단식할 수 있고, 기도함으로써 자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단식하고 또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고 또한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실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회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끗이 하고 부활을 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은총의 시기인 이 사순 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는 성실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재의 수요일인 오늘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참된 회개와 보속으로써 은총의 사순 시기를 잘 보내고 마침내 다가올 부활 대축일을 우리 모두 기쁨 중에 맞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선은 사랑을, 기도는 신뢰를, 단식은 겸손을...† -박상대 신부 -
오늘 미사전례 중에는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머리에 받는 예식에서 '재의 수요일'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 재는 지난 해 주님수난성지주일에 축복하여 십자가에 끼워 두었던 나뭇가지를 태워 얻은 것이다. 오늘부터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상징인 보라색 제의나 예절영대를 착용한다. 복음 후 강론이 끝나면 사제는 재를 축복하여 자신도 머리에 받고, 이어 신자들의 머리에 얹으면서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참조)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가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거늘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흙밖에 되지 않는 내가 이렇듯 살아있는 생명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날에 봉독되는 복음은 산상설교의 중반부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의 첫 부분을 통하여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의로움'을 조직적으로 선포하셨다.(6개의 대당명제: 5,21-48)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되었으며, 이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며, 구약의 가장 중요한 십계명의 범주 안에서 계명자체를 사로잡는 계명정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의로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요구는 하느님의 완전성(完全性)을 닮아 가는 것(48절)으로 요약되었다.
오늘 복음에는 자선(慈善)과 기도(祈禱)와 단식(斷食)이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인 모두의 성덕으로 제시된다. 그렇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유대교 안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덕목(德目)들이며, 예수님 당대에는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선행(善行)을 쌓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수단들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움은 무엇인가? 일단 이러한 선행(善行)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1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이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수행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상(償)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償)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 선행지침을 엄수(嚴守)해야 한다. 즉,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3절)이며,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할 것'(6절)이고, '단식할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할 것(17절)'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숨을 일까지 모두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답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내리시는 선행지침을 글자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모든 선행이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숨을 일도 다 보시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선행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줄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선을 통하여 사랑을, 기도를 통하여 신뢰심을, 단식을 통하여 겸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향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무엇보다도 속죄의 힘을 가진다.
부디 속죄와 보속으로 은혜로운 40일이 되도록 노력하자. 사순절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단순히 연구하고 사색하는 기간이 아니다. 동감하고 이에 동정을 표하는 기간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의 표양으로 삼고 그것을 사는 기간이다. 나의 잘못들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실제로 그 잘못으로부터 돌아서는 기간이다. 꾸준한 반복을 통하여 그 분의 법과 정신을 따라 사는 배움의 기간인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