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출발 2시간 전 대회장에 도착했다. 희종형님과 경희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희종형님이야 타고난 준족이라 나보다 2시간은 앞질러 갈 테지만, 몇 번을 같이 뛰었던 경희친구가 걱정이다. 대개 14시간 완주를 목표로 달리는 경희친구에게 이번엔 혼자 가라고 한다. 대회가 끝나면 바로 제주로 가야 해서 아무리 늦어도 새벽 6시(13시간 완주)에는 들어와야 했다. 천안시외버스터미널에서 7시에 출발하는 청주공항행 시외버스를 놓치면 교통편이 무척 고약하다.
지금까지 여러차례 같이 뛰었지만 경희친구의 배낭이 내 것보다 두세 배가 될 정도로 무거운 것을 처음 알았다. 파워젤과 바람막이 등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러면서 내 배낭에 뭘 넣었는지 보여주라고 한다. 대부분의 울트라마라톤 대회가 10km 단위로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무겁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여기에 비타민C 몇개면 충분하다.
오후 5시 중간그룹에서 좁은 보행로를 따라 경희친구와 천천히 움직였다. 우회전하면서 업힐구간이 나타나자 일부러 속도를 낮춰 걷다시피 했다. 천천히 뛰다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워밍업이 되었다. 경희가 배낭이 무거워 바람막이 등을 10km CP에 맡기고 가야겠다고 했다. 5km 지점에서 경희와 결별하고 속도를 올렸다. 젊은 주자들이 많이 보인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울트라마라톤이 지속가능한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다.
15km쯤 지나자 주로는 어둠에 잠기지만 생각처럼 속도가 잘 나질 않는다. 피로가 덜 풀렸는지 어깨가 무겁다. 독립기념관으로 이르는 길은 넓기도 하고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 달리기 하기엔 매우 좋다. 그러나 가끔은 무섭게 질주하는 차량들이 눈에 띈다. 교통사고는 교통량이 많은 복잡한 도로보다 이런 곳에서 많이 발생한다. 몇년 전 교통사고 전문가였던 지인이 교통사고 조사하다가 이곳에서 사망했다. 주자가 도로를 가로지를 때는 무척 조심해야 한다.
26km 지점 독립기념관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길을 바꿨다. 30km 지점, 함께 달렸던 60km 주자들과 이별하자 주로는 더욱 한산해졌다. 주먹밥을 먹은 후 걸어가면서 카누커피를 물에 타서 마셨다. 준비한 물품은 10km 단위로 하나씩 사용했다. 결국은 골인지점에 이르게 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게 된다. 파워젤을 준비하지 않는 이유는 반환점에서 제공하는 식사나 CP에 놓여있는 먹거리를 단내 때문에 먹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북정맥 마루금인 부소령까지 걸어올라 간 다음 내리막을 질주했다. 신발끈을 제대로 묶지 않아 엄지발가락이 앞으로 쏠리며 자극을 줬다. 그렇다 하더라도 심하지만 않으면 피멍이 들진 않는다. 다시 한번 업힐 구간을 만나 걸어올라 간 후 내리막에서는 케이던스를 높여 빠르게 내려왔다. 46km 지점을 지나자 희종형님이 2등과는 큰 차이 없이 달리고 있었다. 나보다는 거의 8km를 앞서 달리고 있었다. 골인하면 2시간 정도의 갭은 불가피하다. 42km 지점은 4시간 52분에 통과했고 50km 지점엔 5시간 40분에 도착했다. 막걸리 한잔과 함께 10분간의 식사를 마쳤다. 나는 보통 두 그릇을 비우는데, 젊은 여성주자가 국물만 마시고 밥은 그대로다. 웃으면서 아직 울트라마라톤 경험이 짧은 것 같다면서 말을 건네자 이번이 두 번째란다. 먹는 만큼 달릴 수 있는 게 울트라마라톤이다.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을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보라며 한마디 건네고 일어섰다.
돌아가는 길은 약한 오르막이 이어지지만 계속하여 달렸다. 앞서 나가던 주자들을 계속하여 추월하고 고개 하나를 넘었다. 60km CP에서 대학동기인 안장수를 만났다. 식사하면서 랜턴을 두고 왔다길래 불빛을 나누며 동반주하자고 했다. 워낙 힘과 스피드가 좋은 친구인데, 계속해서 뒤쳐진다. 오늘은 친구의 몸이 많이 무거운 것 같았다. 오늘 아침 제주에 가야 해서 서둘러야 한다고 하자, 먼저 가라고 했다. 이제부터는 혼자다. 65km 지점까지는 30대 젊은 주자와 두세 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것이 전부였고, 90km까지는 아무도 만나질 못했다. 마치 나 혼자 뛰는 대회 같았다. 이미 달렸던 길임에도 돌아가는 길은 생소했다. 랜턴도 희미해져서 노면에 표시된 주로 방향을 확인하지 못하고, 여러 번 그 자리에서 좌우로 불을 비추며 주로 방향을 확인해야 했다. 지금까지 처음 뛰는 주자와 동반주할 때마다 달리고 걷는 비율을 7:3이나 8:2로 했지만, 나 혼자 뛰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리고 업힐을 만나면 걸었다.
69km 지점, 70km CP가 아닌데 누군가 자봉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이 눈에 익다. 광주빛고을 울트라마라톤 대회 때 만났던 유규종씨다. 서로가 바로 알아봤다. 부부가 마라톤클럽 사람들 자봉 하러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왔다. 온갖 먹거리를 푸짐하게 대접하고 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찹쌀떡까지 챙겨준다. 부인한테는 나를 랜턴불을 비추며 자신을 도와줬던 분이라며 거창하게 소개했다. 인연은 이렇게 해서 연결이 되나 보다. 덕분에 70km CP는 그대로 통과했다.
80km CP에 이를 무렵 랜턴이 말썽이다. 그나마 가로등이 많은 마을을 지나가기 때문에 가로등이 없는 구간만 불을 켰다. 이때부터 12시간 완주가 가능할지 못할지 시간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하여 7분주 이내로 주행하면 가능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어려울 것 같았다. 90km CP에서 떡을 먹으려고 보니 딱딱하게 굳어버려 먹기가 불편했다. 마지막 남은 미숫가루를 물에 타먹으면서 걸어갔다. 준족인 전*열씨가 컨디션이 안 좋은지 쉬어 간다고 하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배*석씨가 간단하게 물 한잔만 걸치고 바로 나를 추월했다.
앞에 주자와 적당한 거리에 있으면 노면의 주로방향을 확인할 필요 없이 달리기에만 전념하면 된다. 배*석씨 경광등을 따라 3km쯤 달리다 그도 힘에 부친 지 걷기 시작했다. 배*석씨는 2km를 알바했다고 한다. 90km CP에서 갑자기 등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앞서 나가면서 이번엔 내가 등대지기가 되어야 했다. 4~5km 남기고 긴 오르막을 걷고 있을 때, 잠깐 나를 추월하더니 내리막으로 바뀌자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해서 네이버 지도를 켠 후 목적지를 검색하자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틀리지는 않았다.
아직 컴컴한 새벽 4시 56분에 대회를 마무리했다. 기록은 11시간 56분 27초다. 2019년 11월에 11시간 30분을 달린 후 11시간 대 복귀는 5년만이다. 작년 이 대회에 13시간 22분으로 골인했고, 3주 전 순천만 대회의 12시간 55분과 비교하더라도 시간단축을 꽤 한 셈이다. 300여 명이 참가하여 전체 14위다.
희종형님은 내가 12시간 안에는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는지 골인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종형님은 전체 2위로 10시간 3분에 골인했으니 짐작한대로 2시간 가까이 나를 기다린 셈이다.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짐을 챙겨 사우나로 향했다. 희종형님은 이번엔 경희친구를 기다려야 해서 그 자리에서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깨끗이 씻고 천안터미널에서 청주공항으로 이동한 후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쩌면 올해 마지막 생일이 될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암세포가 온몸에 전이되었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아들이 간다니 마냥 좋아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고향길이 슬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