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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묵상글 들 ( 부활 5주 화요일-평화로운 고통과 심란한 고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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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5주 화요일-평화로운 고통과 심란한 고통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이 말씀은 제가 장례 미사를 주례할 때 자주 하는 말입니다.
고인은 유족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간 것이고,
그렇기에 유족은 고인을 위해서 슬퍼할 것 없다는 얘기지요.
지난주에는 저의 제자가 죽은 지 50일 되는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그때도 같은 취지로 미사에 참석한 남편에게 얘기했지요.
제가 그렇게 말했지만, 입관예절 할 때 정작 저는 그의 얼굴을 보고
터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어서 하염없이 울며 미사를 봉헌했는데
그것은 그의 일생을 생각하니 너무 서러웠기 때문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그의 이 세상 삶은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서러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세상 삶을 끝내는 것은 고통을 끝내는 것이고,
장례 미사 때 자주 듣게 되는 것처럼 이제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게 되는 것이니 잘된 것이지요.
그래서 생전 잘못해준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의 남편에게도
너무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 이제 고통이 끝났으니 잘된 거라고 얘기했지요.
그러나 고통이 끝난 것보다 더 잘된 것은 하느님께로 간 것이지요.
저의 제자도 아직 아이들이 다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더 살고 싶어 했지만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마지막에는 죽음을 잘 받아들이고 마무리도 잘하고 떠났는데 분명
하느님께로 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고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을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태어난 것이 단백질의 합성 작용으로 태어났거나
고아로 태어났거나 육신의 아비와 어미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분명히 믿는 우리라면 우리도 주님처럼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믿음도 확고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분들, 그중에서도 신앙인들은 분명 그럴 겁니다.
문제는 남아있는 사람들, 곧 우리인데 슬픔, 후회감, 죄책감,
허무감이 들고, 심지어 절망감까지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하고 그런 것이 없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없거나 없기를 바란다면 나쁜 놈이고 사랑치 않는다는 표시이니
그를 사랑한다면 그런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고통은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고
오늘 주님께서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고
하신 말씀에는 이런 뜻도 있을 것입니다.
감내하는 고통과 몸부림치는 고통,
평화로운 고통과 심란한 고통은 다릅니다.
감내하는 고통은 고통이 마음 한편에 있어도 마음 산란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옷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지 않고
옷장에 잘 개켜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그런 감정에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사랑이 고통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평화를 주고 가신다는 것은 이런 뜻만이 아닙니다.
다시 오신다고 하셨으니 버려두고 가시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은 가고 평화만 남겨두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평화, 곧 당신도 함께 계시는 평화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당신이 떠나도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의 성령입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남긴 그 영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기 전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그 뜻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하고, 그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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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남기고만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는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만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항상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하오니,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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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내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같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수난을 앞두고
당신의 평화를 제자들에게 남겨 주시는 강복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독서에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첫 복음선포를 행하여 커다란
성과와 호응을 얻은 바오로 일행을 시기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리스트라까지
쫓아와서 돌을 던지는 바람에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일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과 독서의 상황이 모두 그리스도 신앙이 유다교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형편을 보도한 것입니다.
인간 생명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도록 창조되었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과 혼의 소통으로 온전한 결합 상태에 이르기까지는
세속화된 문화에 의해서 방해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물질만능 문화라든지 생명과 성과 가정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반생명적 문화가 모두 생명의 문화에 대한 소극적 방해이거나
적극적 박해와도 같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은 것입니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을 마실 때는 이 물이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를 생각하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물질만능 문화와 반생명적 문화가 만연하여 생명의 문화를 위협하는 현상을 보면,
이는 하느님에게서 와야 할 생명의 빛이 희미해졌거나 가려져 있기 때문임을
알라는 뜻과 통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의 말씀을 선포하심으로써
이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신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여덟 가지 생명의 길을 제시해 주었는데, 이 안에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재화조차도 없어서 고통받는 이들과 나누기 위해서 검소하게
절약함으로써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릴 것, 이웃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것,
하느님께 대해 온유할 것과 본능이 끊임없이 부추키는 욕망에 대해 다스릴 것,
이 모든 것이 깨져서 평화가 위태로울 경우에 평화를 회복하는 데 투신할 것,
그러다가 그 과정에서 박해를 받더라도 참고 견디어 낼 것 등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생명의 길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은 이 생명의 길보다도 힘을 가진 자들이 억누르는 바람에 유지되는
거짓 평화가 가득합니다. 그리고는 이 거짓 평화를 위장하고 연장하기 위해서
힘센 자들이 늘 목소리를륽크게 내는 반면에,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은
목소리가 없거나 약해서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의 힘만 믿고 거짓 평화를 강요하는 자들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저들은 물질만능을 신봉하며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믿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가진 돈으로 온갖 특권을 누리며 마치 귀족처럼 행세하려는 자들입니다.
저들의 욕망이 분출되는 반생명적 문화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반생명적 문화가 강요하려는 죽음의 문화는 복잡하고 까다롭습니다.
심지어 진보의 가치를 표방하며 ‘차별금지’라는 이데올로기로 위장하기도 합니다.
축복과 저주는 생명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초래하는 결과입니다.
축복을 초래할 생명의 길은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이 제정하신 질서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비추어주시는 빛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이 내려주시는 영으로
우리네 혼이 소통하며, 노동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둠을 좋아하고 빛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걷는 이들을 박해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장면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바오로는 이스라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준으로 재해석하여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회당에 예배하러온 유다인들에게 전해 주었을 따름인데,
다행히 이 강론을 들은 유다인들이 잘 알아 들었고 그 결과로 더 많은 유다인들까지
호응하게 되자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군중을 막고 바오로 일행을 탄압하였습니다.
특히 바오로는 돌에 맞아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 체험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마치 잘 아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회상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까지 들려 올라가서 하느님의 환시를 보았다는 것입니다(2코린 12,1-10).
그 환시에서 들려온 메시지에 의하면, 그 일로 말미암아 바오로는 몸에 가시가
찌르는 듯한 증상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자만심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알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약해질 때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강해지실 수 있으므로, 그 자신은 그러한 증상이 주는
체력의 약함도 반대자들이 가하는 모욕도 다른 모든
재난이나 박해나 역경까지도 모두 달갑게 여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별과 영성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평화의 실체입니다.
겉으로는 옳은 일을 하다가 겪는 어려움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느님께 더 나아가는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입니다.
여기서 창조주 하느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하느님을 닮아가는 과정은 박해를 받지 않거나
고난을 피해 가는 데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악에 맞서고 그 박해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원인이 되었던 옳은 일과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일을 그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의로운 삶은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방으로 퍼져나가서 끈질긴 생명력을 드러냅니다.
밀알처럼 자신은 썩어도 더 많은 밀알로 세상에 나와서
풍요로운 생명력으로 세상을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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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27-31: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27절)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상속재산으로 주셨다. 그러기에 이 평화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하셨기 때문이다. 이 평화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에게서 온다. 그것은 당신의 현존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평화라고 우리가 믿을 때나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1요한 3,2) 때나 우리의 평화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유언형식으로 사도들에게 이 평화를 남기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28절)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하신다.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위대하시다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신이 인간으로서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시기에, 아들을 낳으신 분이므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스럽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므로, 아버지로서 위대한 분이시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께 근원을 두고 있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분께서 살아나시고 당신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30절) 세상의 우두머리는 유대인들이나 로마 민족만이 아니라,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권세와 권능들을 말한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그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분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말하는데,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의 뜻을 어긴 일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이 돌아가신 이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주님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파괴하실 것이며,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 될 것이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바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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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는 요즈음입니다. 일상적이고 편안한 옷과 같은 자연스러운 평화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느끼는 나날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걱정하고, 힘들어하고,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믿음을 두기보다, 세속적인 것에서 기쁨과 평화를 찾으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다툼이 없는 상태나 외적인 안락함은 결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평화를 얻고자 하느님께 나아가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느님 안에 고요히 머무릅니다. 이러한 머무름에서 우리는 참된 행복을 얻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시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며,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며, 자신의 잘못을 기워 갚음으로써(로마 5,6-11 참조) 얻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무덤으로 온 여인들에게 “평안하냐?”(마태 28,9) 하고 물으십니다.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신 그리스도’(콜로 3,11 참조)와 함께 있는 교우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이 흔한 인사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콜로 3,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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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이클 셀던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있습니다. 책에서 그는 ‘능력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고, 많은 부를 소유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가난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부익부와 빈익빈을 인정하는 논리입니다. 대부분의 재화를 상위의 소수의 사람이 독점해도 된다는 논리입니다. 2000년대를 풍미했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이클 셀던은 이와 같은 ‘능력주의’는 기독교 윤리에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기독교는 ‘상선벌악’의 신학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미국이 위대한 것은 미국이 선하고, 정의로운 편에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재난과 고통은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회정의가 없는 긍정의 신학, 번영의 신학에 근거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긍정과 번영의 신학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이 아픔을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라자로는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평생 부유하게 살다가 지옥에 가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를 도와주라는 가르침입니다. 라자로는 비록 가난하지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를 도우면서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능력주의를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해서 였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아들이고, 순교하였던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상선벌악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요구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욥처럼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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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평화’는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믿음으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그 순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큰 은총을 받은 일입니다.
물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큰 은총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얻게 되는 평화는 그것보다 더 큰 은총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평화’가 무슨 물건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 누리려면 우리 쪽에서 잘 받아야 합니다.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믿음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누리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이 있어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잘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을 내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거나 흔들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믿음을 굳게 지켜서, 내가 주는 평화를 잘 받아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주시는
평화는 일시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영원하고 참된 평화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아무 일 없음, 몸의 편안함’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영혼의 평화’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이 말씀은,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는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몸의 편안함만 찾는 자들이 많다. 그들 때문에 마치 내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온 것처럼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얻으려면, 칼로 잘라내듯이
거짓 평화를 잘라 버려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때문에 로마 군대가 자기들을
짓밟을 것이라고 걱정하자(요한 11,47-48), 대사제 카야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이 말은, 민족의 평화를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시키자는 뜻인데,
그가 생각하는 평화는 ‘몸의 편안함,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을 죽이고, 거짓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28).”
예수님께는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제자들을 버려두고 떠나시는 일도 아닙니다.
부활로 가는 과정이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는다면 내 말을 알아들을 것이고,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이 아버지께 가는 일이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을 얻는 일이라는 것을(요한 17,1-5) 믿을 것입니다.
또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로 해석됩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29-31ㄱ).”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고하신 것은,
그 일이 ‘모르고’ 당하시는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하시는 일도 아니고,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일이며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즉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더라도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이 말씀은, 각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일을 모릅니다.
살다가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이 왜 생겼는지, 자기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하거나 두려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각 개인의 인생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섭리’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자신의 인생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쪽에서 스스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내주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신다는 말씀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신다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인류 구원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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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종양내과 전문의가 쓴 책을 보았습니다. 환자를 보며 체험하고 느낀 점을 적은 에세이 책이었습니다. 이 안에서 인상 깊은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폐암 말기 환자가 있었는데 가족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혼했고 또 자식이 없었으며, 같이 살던 동거인도 병세가 깊어지자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이제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라 호스피스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남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5년 전쯤 사업한다고 2억을 빌려 간 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돈을 갚지 못했고, 그 뒤로 서먹서먹해져서 연락이 끊긴 것입니다.
호스피스팀의 노력으로 동생과 연락이 되었고 드디어 동생과 형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형은 뼈와 가죽만 남은 몸으로 산소마스크에 의지한 채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동생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눈물을 펑펑 흘리며 형을 안았는데, 바로 그때 형이 동생을 보며 아주 힘들게 천천히 말했다고 합니다.
“내 돈 2억 갚아라!”
이 세상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동생을 향해 내뱉은 말은 ‘돈’이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형은 평소에 ‘돈’을 첫째 자리에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사랑을 말하지 못하고 돈을 말했다는 사실이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자신이 제일 크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과거의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에서 “예수, 마리아”를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외칠 것 같습니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분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평화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지요.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것이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 큰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이 반대편에 서서 주님을 향해 던지는 악의적인 말과 행동들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접지 않으십니다. 사랑을 지우는 이유가 그분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그 사랑을 가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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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받는 사람이 부를 수 있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우리 삶은 이것으로 충분하다(제임스 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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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잘 지냅니다.
누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누님의 지인이 갑곶성지 미사에 왔는데 제가 너무 살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님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사실 작년 12월 23일부터 오랫동안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계속되어서 가족 모임 자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몇 달을 보지 못했으니 살이 쪘는지 말랐는지 알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문득 들은 생각은 살찌는 것이 왜 문제일까 싶었습니다. 그만큼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증거인데요. 물론 비만이 좋을 리가 없으니 살찌는 것을 걱정하겠지만, 매일 유산소 운동과 근육 운동을 하는 저이기에 굳이 걱정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운동도 하는 사람과 운동만 하는 사람.
먹기도 하는 사람과 먹기만 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건강할까요? 운동도 하고 먹기도 하고…. 그밖에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다양하게 하고 있으며, 또 규칙적으로 합니다(그래도 살이 찌는 것은 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 잘 지내십시오. 저는 이렇게 살찌면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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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 27)
우리의
삶은
평화를
지향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이다.
삶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는
우리관계의
참된
본질이다.
본질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참된 본질인
평화(平化)는
두려움이 아닌
삶의 의미를
되찾아주는
참된 관계
회복에 있다.
평화는
그래서
서로를
살린다.
욕망은 욕망을
만들어내지만
평화는 평화로
생명을 살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님께서
계셔야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평화가 있어야
한다.
주님 자체가
참된
평화이시기
때문이다.
삶을 대하는
모든 것이
평화이다.
삶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는
십자가의
평화이다.
평화는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으로
우리를
치유한다.
평화는
구원의
빛으로
우리를
비춘다.
진정한 관계가
구원의
관계이며
평화의 관계임을
믿는다.
평화의 완성은
은총의 완성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매순간의
은총이다.
평화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은총의
새날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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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평화와 기쁨
- 주님의 참 좋은 선물 -
참 많이도 가장 많이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린 말씀 처방전인 다음 바오로 사도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주변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기쁨, 항상 기도, 항상 감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 때 참 평화의 삶일 것입니다. 이런 평화는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얼마전 읽은 교황님에 관한 기사 제목이 재미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성 베드로 성전에서 거룩한 묵주기도로 기도의 마라톤을 시작하시다.”
‘기도의 마라톤(Marathon of Prayer)’이란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5월 성모성월 마침내 기도의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죽어야 끝나는 평생 장거리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그러니 5월 성모성월 한달뿐 아니라 평생 꾸준히 한결같이 끝까지 ‘삶의 마라톤’과 더불어 ‘기도의 마라톤’ 묵주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주변에서 보면 이런 훌륭한 한결같은 기도의 마라톤 선수들이 많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게 주님은 참 평화를 선사하시고 이런 분들은 주변을 평화롭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주님의 평화일 것입니다.
“교황 ‘북한, 준비되면 가겠다’”
는 5월2일자 가톨릭 신문 기사도 반가웠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높아지고 있는 중에 교황님은 다시 방북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셨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세계의 평화에 세기적 전환점이 될 교황님의 기적적 북한 방문이 꼭 성취되었으면 소원이겠고, 이를 위해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참 평화의 선물을 찾아 끊임없이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입니다. 수도원이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은 주님의 평화 하나뿐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피정집 한 곳의 명칭은 ‘평화의 집’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집인 수도원은 평화의 집, 기도의 집, 환대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참 제가 좋아하는 영성체 예식중 주님의 기도후 평화의 인사 나눔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선물인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강조하는 말마디는 ‘항상’입니다. 한 때는 부주의로 이 좋은 말마디를 빼놓고 지적후에는 명심하여 마음에 새기듯 힘주어 발음하는 ‘항상’입니다. 산상설교의 참 행복선언에도 나오는 평화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이 말씀을 고백성사중 말씀 처방전의 보속으로 써드렸을 때 기뻐하던 형제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참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참 평화를 갈망하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이요, 평화와 전쟁을 살아가는 참 모순적, 역설적 존재인 인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주님 현존 자체가 평화입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떠날 때도 평화를 선물하셨고 부활후 나타나셨을 때도 우선 선물한 것이 평화였습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선물하시는 평화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아무도 빼앗아 갈 수도 빼앗아 올 수도 없는, 우리가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내적평화입니다. 제 집무실 입구에도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분이 선물한 ‘샬롬SHALOM’이란 글씨가 새겨진 판이 걸려 있습니다. 고통중에도 함께 하는 평화입니다. 죽음도 박해도 그 무슨 고통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내면의 중심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평화입니다.
이런 평화는 단지 폭력의 부재라기 보다는 더 깊고 긍정적이 어떤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러니 주님이야말로 평화의 샘입니다. 바로 성인들의 특징도 이런 평화와 기쁨입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평생 휴식이 없었고, 늘 심신의 고통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죽어야 휴식인 성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끊임없는 고난과 병고, 노고의 와중에도 늘 샘솟는 사랑의 열정에 깊고 고요한 평화와 기쁨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살아 있는 성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주님 평화의 반사체反射體처럼 그 존재자체로 주님의 평화를 발산發散하면서 희망의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바쁜 분이 교황님일 것이나 교황님은 언제나 평화의 빛으로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제1차 선교 여정을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오기 까지의 지칠줄 모르는 끈기와 열정이 놀랍습니다. 다음 두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사도14,22).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사도14,27-28)
주님의 평화가 이런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열정의 선교를 가능하게 했음을 봅니다. 안티오키아 평화의 교회 공동체에서 오래 머물면서 주님 평화로 영육을 충전시키는 제자들입니다. 때때로 수도원을 영적 주유소, 영적 충전소라 부르며 찾는 교구 사제도 생각납니다. 바로 우리 수도 공동체가 끊임없이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바로 주님 평화의 발전소이자 평화의 샘임이요, 우리를 평화의 샘 공동체로 만들어 줌을 깨닫습니다.
정말 우리 마음이, 우리 공동체가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평화가 없다면, 기쁨이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감사가 없다면 얼마나 공허하고 삭막하겠는지요! 그러나 고맙게도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특히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공동체는 물론 우리 하나하나에게 평화와 기쁨, 감사와 희망을 가득 선물하십니다. 주님 평화의 성체를 모시면서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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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내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예수님께서 떠남을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가시지만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남기고 가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부재에 제자들이 분리불안으로 주저앉지 않도록 미리 준비시키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을 해 주시지요.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이 실현됨을 보면서 비로소 믿고 굳건히 설 수 있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무탈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상태가 세상의 평화라면, 예수님의 평화는 좀 다릅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소명이 자기 안에 충만한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모두가 자기다움을 누리며 존재하는 평화의 상태는 각자 이기심과 탐욕, 타인의 기대나 시선에 안주하지 않는 투쟁이 전제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자기다움이라는 평화에 도달하여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각자의 부르심, 소명, 목적에 맞갖게 존재할 때 비로소 온 누리에 평화가 공존하는 것이지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어쩌면 앞으로 제자들은 산란하고 겁날 일을 많이 겪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라 믿었던 스승의 체포와 수난, 죽음은 물론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가 겪게 될 박해까지 첩첩산중, 사실 갈수록 태산이지요.
그런 도전과 역경이 없을 때 누리는 심리적 감정적 안정감이 "세상이 주는 평화"라면, 그런 시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대하고 굳건히 하느님 자녀다움, 그리스도의 제자다움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요한 14,30)
세상의 우두머리, 어둠의 권세가 덮쳐도 예수님은 그 힘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 악의 힘인 어둠이 빛이신 예수님께 어떤 권한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일찌기 예수님은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8)라고 하신 바 있지요. 예수님이 맞이하시게 될 죽음은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스스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온전한 자유의지의 순종이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안티오키아에서 파견되었던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여러 상황을 겪고 무사히 파견받았던 곳으로 귀환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 14,22)
사도들은 신도들의 믿음과 성장에 기쁘고 감사하기도 하고 또 적대자들의 배척과 위협에 죽을 고비까지 넘기면서 그 일을 완수합니다. 좋은 일만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지도 않았지요. 꽃길만 걷지 않았고 가시밭길만 걷지도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스승의 길을 뒤따르면서 맞닥뜨린 모든 일을 평화 안에서 맞이하고 견디며 나갔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어낸 평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 자녀다움과 그리스도 제자다움, 주님의 신부다움을 잃지 않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믿나이다. 알렐루야"(영성체송)
우리의 죄와 낡은 인간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찬란히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 부활의 기쁨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의미지요. 죽음을 각오한 이는 이미 평화를 획득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존재하고 살아갈 때 평화롭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충족되어도 내면의 헛된 탐욕이나 남 눈치만 따라가다가는 진정한 존재적 평화에 도달하기 어렵지요.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존재적 평화, 소명을 충만히 살아가는 각자의 평화를 관상하고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평화의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힘을 북돋아 주시고 믿음을 충실히 하도록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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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
'참 평화!'
예수님께서 남기고 가신 평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평화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세상이 주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나, 내 뜻이 이루어졌을 때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219항)
세상이 주는 평화는 고통이 찾아왔을 때, 쉽게 깨지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고통이 찾아와도 쉽게 깨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오히려 고통을 뛰어넘어 가게 해 주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늘 독서(사도14,19-28)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14,22)
고통을 뛰어넘어 가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깨지지 않는 평화, 곧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간직하고 있어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평화 안에 머물러 있는가?
오늘도 지나치게 세상이 주는 평화만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참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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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말을 갈아탄 바오로 사도를 향한 유다인들의 증오와 분노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열성 유다교 신자요 촉망받던 미래 지도자감 청년 바오로였기에 유다인들이 느꼈던 상실감과 배신감은 대단했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 입장에서 배반자요 매국노인 바오로 사도를 절대로 그냥 놔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개종은 수많은 다른 유다인들의 개종으로 이어졌기에, 어떻게서든 신속히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향한 극에 달한 유다인들의 반감과 적개심이 오늘 첫번째 독서에 잘 소개되고 있는데,
참으로 끔찍한 광경입니다.
“그 무렵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사도행전 14장 19절)
몰려온 군중은 스테파노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바오로 사도에게 큼지막한 돌들을 인정사정없이 투척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돌세례에 바오로 사도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죽은 줄 알고 쾌재를 부르면서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습니다.
다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듯 속시원해 했습니다.
다행히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워낙 정신력과 의지가 강한 분이라 치명적인 돌팔매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비틀비틀 겨우 일어선 그는 피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죽었다 되살아난 상태에서 바오로 사도가 받은 정신적 충격이나 트라우마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복음 선포 여정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제가 바오로 사도 같았으면 우선 응급실로 갔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상처난 부위 치료도 받고, 뇌파 검사도 받고, 진단서도 끊고, 고소장도 접수하고, 충분히 회복될 때 까지 몇달이고 휴양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데르베로, 데르베에서 리스트라로, 리스트라에서 이코니온으로, 이코니온에서 안티오키아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박해 속에도 바오로 사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했고 의연했습니다.
언제나 제자들을 격려하고 고무(鼓舞)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주님의 복음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겪은 고통은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끔찍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신자들에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 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코린토 2서 11장 23~27절)
그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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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어머니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자녀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도 역시 요한복음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하는 이유를 최후의 만찬상에서 제자들에게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당신이 아버지께 가야만 성령을 받아 보내주실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 가는 방법이 비록 십자가의 죽음이기는 하나 오히려 성령을 받게 되니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잘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포도주가 없는 교회를 떠나 예수님께로 향하십니다.
포도주도 없는데 예수님께 가시는 성모님이 교회 처지에서는 섭섭하고 안타깝고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예수님께 믿음으로 포도주의 기적을 받아내십니다.
그렇게 교회가 성령의 포도주에 취해 다시 혼인 잔치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는 어머니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는 자녀에게 꼭 필요한 것을 받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젊은 부모들이 이 신비를 이해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내가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남편으로부터 사랑이 오지 않아 자녀는 매우 불안해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어떤 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지우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대인기피증과 불안장애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혼자는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서라도 남편에게 자신을 봉헌하고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자녀를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은 부모가 모두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봉헌하는 제대는 항상 십자가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면 자녀 또한 자신들이 창조한 것이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게 되고 그 믿음이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아프리카 동부의 어느 부족은 아이의 생일을 정하는 그들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날이나 잉태한 날이 아니라 아이가 어머니 마음에 들어온 날이 아이의 생일이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언제 어머니의 마음에 들어올까요?
이를 위해 어머니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 마음을 신에게 열기 위해 마을을 벗어나 숲의 나무 아래 가서 앉습니다.
앉아서 하늘에서 오는 노래를 기다립니다.
이 마을 부족은 모두 각자 자신의 노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로 말하면 태몽과도 같은 것입니다.
최소한의 물과 음식에 의지하며 며칠씩 기다리다 보면 특별한 멜로디와 가사가 떠오르는데 그러면 아이가 마음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날이 아이의 생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돌아와 남편에게 그 멜로디를 들려줍니다.
남편도 그 노래를 배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함께 부릅니다.
자녀를 맞아들이는 준비입니다.
그렇게 잉태하면 배 속에 있는 아기를 부를 때마다 그 노래를 불러줍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아기를 환영하는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부릅니다.
아기가 자랄 때도 결혼할 때도 그 노래를 불러줍니다.
심지어 잘못해서 꾸지람을 받아야 할 때도 온 마을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불러줍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님을 다시 깨닫고는 하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하게 됩니다.
물론 장례 때도 사람들은 그 노래를 부릅니다. 다시 신에게 그 영혼을 맡기는 것입니다.
[출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의 노래는’, 류시화, 더숲]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가톨릭교회에도 적용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분이 아기를 잉태했을 때 신구약 성경을 두 번을 통독했는데 정말 남들과 다른 착한 아기가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분명 아기는 부모의 마음과 감정과 믿음을 먹고 삽니다.
그러니 부모가 그 믿음을 지니기 위해 십자가의 봉헌을 먼저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 제자들에게 줄 성령을 받으려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아기를 위해 하늘로부터 받는 노래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자녀들을 믿음으로 지켜줄 것입니다.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아기에게 줄 성령을 먼저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가 부모의 자격이 될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 사춘기 이전에 성모님이 그러하셨듯이 주님께 아이를 봉헌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부모가 먼저 하느님께 봉헌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부모가 받은 성령으로 자녀를 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치 부모가 신에게 자신을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성령께서 오시고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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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요즘은 세상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팬데믹도 있고 하루가 멀다하고 비인륜적인 일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하기 때문입니다. 평화 하면 전쟁이 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종전이 선언되면 일단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전쟁 후에 찾아오는 평화는 어떤 평화일까요? 먼저 전쟁은 사람의 생명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평화가 있으면 무엇보다도 생명을 잃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도 올 것입니다. 전쟁에 참전하는 군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을 겁니다. 가정에 평화가 오면 사회도 안정이 됩니다. 평화로울 땐 평화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겪어봐야만이 평화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 예비군 훈련장에 간혹 방송이 나옵니다. 아니면 영상으로 교육을 합니다. 지금까지도 인상적인 문구 하나가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입니다. 그땐 지금처럼 깊이 생각하는 묵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무심코 듣고 만 것입니다. 좋은 말이다는 정도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하지 마라."고 하는 그런 말을 했더라면 좀 더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대비하라는 것은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그 말은 전쟁을 대비하게 되면 상대방 나라가 대비를 하니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결국 전쟁이 발생하지 않게 되는 고로 평화가 유지된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아마 이게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느냐고 하는 설문 조사를 하면, 예전에 보니 마음의 평화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을 봤습니다. 좋은 말이지만 그건 몰랐을 때입니다. 어떤 경우는 평화를 얻기 위해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데 평화는 고사하고 오히려 세상적인 표현을 하면, 신앙이 스트레스 아닌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걸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어떤 경우는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왜 그렇겠습니까? 저도 그렇지만 신앙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평화롭기만 하기 위해서 신앙을 가지는 게 아닐 겁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 전쟁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죄를 짓게 하는 유혹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고단한 싸움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처음엔 이런 걸 잘 모릅니다. 만약 예비자 교육을 하는데 예비자한테 처음부터 이런 걸 설명한다면 백이면 백 다 나오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미끼에 걸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미끼에 걸려야만이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 몸으로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미끼에 걸리면 죽은 목숨이 되지만 우린 다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던지신 미끼에 걸리지 않으면 그게 죽는 길입니다. 미끼에 물린 이상 미끼를 던진 분에게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안락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그게 세상이 주는 평화가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죄를 짓게 하는 악마의 유혹과 처절한 전쟁을 해서, 그 전쟁에서 승리를 해,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았을 때 찾아오는 평화를 주시겠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평화는 계시록에도 나오지만 눈물과 고통도 없고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가득한 천상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런 평화를 주시겠다는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평화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세상과 자신과 싸워서 승리한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입니다. 그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신앙의 밧줄을 잡고 천국을 향해 전진하는 늠름한 용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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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4.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14,19-28)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타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1~23)
데르베에서 사도 바오로는 큰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으며 또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사도 바오로가 핍박을 당했다거나 반대에 부딪혔다는 기사가 없고, 오직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가슴 벅찬 기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여기서 '제자로 삼고'로 번역된 '마테튜산테스'(matheteusantes)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마태28,19)이 원활하게 수행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는 '마테튜오'(matheteuo)의 명령형이 사용되었으며, 본문의 '마테튜산테스'는 분사형으로 같은 단어이다. 제자로 삼았다는 것은 데르베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오게 하였을뿐 아니라 세례를 주고 말씀대로 살게 하였다는 사실까지 포함한다.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22)
'힘을 북돋아 주고'로 번역된 '에피스테리존테스'(episterizontes)의 원형 '에피스테리조'(episterizo)는 더욱 굳게 하고 강화하며 확실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사도행전에서만 4회 쓰였는데(사도15,32.41; 18,23), 모든 사람의 마음과 교회의 신앙심을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이 복음을 전해 얻은 리스트라와 이코니온과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제자들의 신앙이 행여나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전 삶의 유혹으로 흔들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의 마음으로 그들의 믿는 바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일에는 몇 마디의 격려보다는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22)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환난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수받고 믿기 시작한 성도들에게도 닥쳤을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점점 증가하는 핍박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버릴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믿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따르며, 그러한 환난을 믿음과 인내로 극복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굳게 서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원수인 사탄과 그 졸개들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으며(에페2,1), 불신자들은 다 그러한 세력의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게 마련이고, 성도들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환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거나, 그로 말미암아 신앙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환난이 두려워 신앙을 버리면, 하느님의 나라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7). 또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과는 도무지 비교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8).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23)
사도 바오로 일행은 자신들이 떠난 후에도 복음을 받은 지역의 제자들이 신앙 생활을 원활히 하며, 복음이 더욱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그 기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세운 뒤 교회를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교회의 구심점이 될 원로들을 임명한 것이다.
여기서 '임명하고'로 번역된 '케이로토네산테스'(cheirotonesantes)의 원형 '케이로토네오'(cheirotoneo)는 '손을 뻗는'을 뜻하는 '케이로토노스' (cheiroton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본래 '손을 내뻗어 투표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과 코린토 후서 8장 19절에만 쓰였으며, 모두 '택하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한글 새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원로들을 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원어의 뜻에 의하면, 그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손을 들어 투표한 다음 사도 바오로나 바르나바가 뽑힌 그들을 원로로 세웠다는 의미가 된다.
그들이 '원로'에 해당하는 '프레스뷔테루스'(presbyterus)들을 세운 목적은 이방 지역의 한복판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적으로 잘 감독하고, 여러가지 환난과 핍박등 어려움 속에서도 신도들이 힘을 잃지 않고 든든히 서 가도록 위로와 격려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영적으로 암흑의 땅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에도 복음의 밝은 빛이 지속적으로 비치는 교회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들이 믿게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3ㄷ)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새로 세워진 교회와 원로들을 주님께 의탁했다는 것은 그곳을 떠나면서 하느님께 그 교회들과 성도들을 전적으로 맡겼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떠난 그곳 교회들은 외형적으로는 원로들을 통해 이끌어질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굳게 지켜 주실 것이다.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요한14,27~31ㄱ)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7)
요한복음 14장 27절과 28절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날 것이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들이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내는 일이 없어야 할 이유를 밝히신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기 때문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평화를 내가 너희에게 가게 한다'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즉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선물이다.
여기서 '남기고 간다'로 번역된 '아피에미'(aphiemi; I leave)는 '남기다', '가게 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누리는 평화를 주시는 주체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나 권력을 가진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이 세상이 줄 수 없고, 이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완전한 평화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상의 평화이며, 영적인 평화이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맛볼 수 없고, 막강한 정치 권력자나 군사력을 동원해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이다. '평화를'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 peace)은 '에이레네'(eirene)의 단수 목적격이다.
고전 희랍어에서는 이 단어가 전쟁과 대립적인 개념,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기인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다.
하지만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샬롬'(shalom)의 역어로 나오는데, '샬롬'은 전쟁에 반대되는 상태라기보다는, 불안이나 갈등이 없는 완전한 정의가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이같은 평화는 주님에게서만 나오며, 오로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두고, 기드온이 자신이 주님을 위해 쌓은 제단의 이름을 '예호와 샬롬'<yehowa shalom; '에이레네 퀴리우'(eirene kyriou); 판관6,24>이라고 한 것은 평화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잘 알게 한다.
말하자면, '예호와 샬롬'은 '주님의 평화'라는 뜻이며, 악(惡)이 득세하는 상황 가운데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소망의 의미가 있으며, 이 문제의 해답과 열쇠가 주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도 어떠한 분쟁이나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절대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믿는 이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동안에(2티모 2,3.4) 분쟁과 문제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 평화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도 많은 분쟁에 휩싸이셨고, 심각한 문제들을 만나셨다. 하지만 어떤 분쟁이나 문제들도 주님의 길을 막지 못했으며, 그분께서 하시려는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평화이며, 최악의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굳건한 믿음의 모습이다.
감옥 속의 베드로(사도12,6.7)나 바오로(사도16,25)가 보여 준 태도에서 이 평화의 실체가 잘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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