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스토트는 그의 저서 “복음전도”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것을 못 견딜 정도로 하나님의 성호를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삶 속에서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모든 것을 초월하는 충분조건이 되신다면, 성도된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장의 시작은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의 잔혹한 핍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희망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스데반을 죽일 때, 의외로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편에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랬기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더 적극적이고 철저하게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한 것 뿐 아니라, 유대교에 열심이 있는 열정적 유대인들도 함께 참여하는 양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이러한 핍박 속에서도 엄청난 성장을 했습니다. 매일 같이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성도의 수는 날마다 증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불안감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고 자신들을 지지하고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을 빼앗기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닥쳐온 핍박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른 도시나 다른 지역으로 다른 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핍박이 일어난 원인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데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대를 거쳐 사마리아와 전 세계로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교회가 이제는 흩어진 교회가 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하신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와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합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핍박은 교회 성장의 발판입니다.
본문에서, 스데반에 이어 그에 견줄만한 또 다른 복음의 증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7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입니다. 빌립은 본문 앞의 6장에서 스데반과 함께 뽑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성령에 충만했던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빌립이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 있는 “사마리아”입니다. 이 곳은,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사도행전의 전체 로드맵과 같은 1: 8에서 언급하는 지역입니다. 본문의 시작인 “그 흩어진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큰 박해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흩어짐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핍박을 피해 도망친 것처럼 생각되지만, 결과로 봤을 때는, 예수님의 방문으로 인해 복음이 전해진 이 후로, 한 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렇게, 흩어지지 않았다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도 더 이상 없이 오히려, 많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아 곳곳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어디서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난을 겪는 상황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던 겁니다. 실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흩어진 불꽃처럼 가는 곳곳마다 복음의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 대한 세상의 핍박은, 도리어 교회 성장의 동인이 된다는 겁니다.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에 미친 유대교의 핍박은, 현상적으로는 교회에 고난을 가져다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교회가 그리고 복음이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곳곳으로 흩어진 성도들 중에는, 당시 만국어로 통용되던 헬라어를 쓰는 헬라파 성도들이 많았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사마리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도시인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고, 그 곳에 처음으로 이방인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이방인 교회는 물질적으로 궁핍하던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습니다. 만약,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없었더라면, “여기가 좋사오니”라며 성도들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렀기에, 교회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매우 곤고한 상황에 놓였을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박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말로만 듣고, 어렴풋이 생각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교회가 직접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모르고, 그 고난에 동참하지 않은 교회는 미숙한 교회이며, 성도는 성도라기에 미숙한 면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이해하게 되면서, 성도들이 곳곳에 세우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며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수만 명의 성도들을 얻었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계로 눈과 발길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핍박이라는 섭리를 통하여, 성도들을 강압적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대한 세상의 핍박은 교회 성장의 발판이듯,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인 우리가 겪는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하며,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이 됨을 기억하여, 언제나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 - 6절을 보시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고 합니다. 성도의 전도는, 상황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민족적으로든 모든 것을 초월해서 전파됩니다.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러한 빌립의 전도가 독특한 이유는, 다른 성도들은 동족인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지만, 빌립은 동족이지만,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대인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겁니다. 즉, 성도된 우리의 전도는 상황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그 무엇이나 초월해서 전파되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때문에, 그 무엇도 장벽이 되어 복음 전파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갈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이 갈등의 뿌리는 가나안 정복 시절 유다가 다른 지파들과 분리되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을 때, 앗수르는 사마리아 지역에 인구혼합정책을 시행함으로, 타민족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함께 살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 본토인들과 이주민들 사이에 왕래가 있었고, 그러는 가운데, 생활문화가 혼합되었고, 종교도 유대교도 인정하고 다른 민족들이 가지고 온 이방종교도 인정하게 했습니다. 그랬기에,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돌아온 유대인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여 서로 협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했던 겁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심각한 갈등 상황에서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은 매우 담대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간 것은, 박해 때문이었지만, 그 결과는 역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광범위하게 전해지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에서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곧 비유대인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데 박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한마음으로 그 복음을 수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유대교가 배척하고 내버렸던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교가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닫아놓고 있을 때, 복음은 만민에게 생명의 문을 무제한적으로 개방하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런 지역으로, 서로 원수같이 등을 돌리고 사는 지역이었지만, 빌립은 그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복음을 전할 때, 이방인과 함께 했다가 유대인들이 들어오니까 재빨리 일어나서 피했던 일이 있잖습니까? 이로 인해 사도 바울이 베드로에게 외식을 행한다고 핀잔했습니다. 베드로도 유대인들로부터의 지적을 염려할 정도였고,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갈 때, 제자들이 사마리아를 피해서 가자고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한 곳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참으로 담대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복음 전파에는 그 무엇도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도 전도함에 있어서 이러한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라는 이유로 복음 전파에 한계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으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빌립과 같이 담대함을 가지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전파하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 - 8절을 보시면,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는 성도에게 커다란 기쁨입니다.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에는 반드시 사마리아의 회복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마치 사마리아 산에 포도나무를 심듯, 복음 전파와 함께 놀라운 기적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남으로,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차별과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옴으로 회복을 맛보며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넘지 못할 담장은 없습니다. 성도인 우리가 행하는 복음전파의 선교사역은 바로 이 생명의 복음을 들고 세상에 겹겹이 둘러 쳐져 있는 무수한 담장들을 과감하게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국가 방어 시스템인 “아이언 돔”과 같이 굳게 닫힌 장애물이라 할지라도 초월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본문 7절은 빌립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임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빌립의 전도사역으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있던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나고, 불치의 병이었던 중풍병자와 걷지 못하는 자가 치료되어 회복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 3: 16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유대 민족의 끝이었고, 선민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던 사마리아에서,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한계를 초월한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귀신을 물리칠 수 없고, 당시로서 중풍병과 걷지 못하는 병은 불치의 병이었는데, 이러한 한계상황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어두운 분위기를 가져오는 기독교는 거짓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있는 곳에는 커다란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인 우리가 있는 곳은, 그 어디든 하나님의 복음으로 인해, 큰 기쁨이 항상 머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가로등만 켜져 있어도 그 곳이 환했는데, 이제는, 가로등이 전구가 아니라, led등으로 바뀌어 더욱 눈부시게 환해졌습니다. 그야 말로,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led 가로등으로 말미암아 길바닥에 떨어진 바늘까지도 찾을 수 있는 낮과 같이 환한 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빌립의 사역으로 인해, 귀신에게 붙잡혔고, 중풍병으로 인해 또, 걷지 못하는 병으로 인해 그리고, 육체적으로 나약했던 어두운 사마리아가 이제는,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사람들은 빌립이 전한 복음으로 인하여, 커다란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기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르게 표현하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성탄절을 보내게 됩니다. 성탄절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그 날”이 될 수 있는 것은, “holy day”이기 때문이 아니며 또, 곳곳에 캐롤이 울리고,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기대되기 때문이 아니라, 사마리아에 커다란 기쁨을 안겨준 빌립이 전한 복음의 주인공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사렛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시인하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본문의 사마리아에서와 같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사람과 믿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기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기쁨으로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