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글은
2018년 7월 2일 포스팅하였습니다.
매일 글을 포스팅하다가 그 동안 사극 투어에 홀릭되어
글을 쓰지 않은 지 2주일이 지나 새로운 메뉴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2주 동안 글을 쓰지 않았을 뿐인데
광음여시(光陰如矢), 그 세월의 흔적이 주마등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 동안 32부작의 사극 "짝패"와 36부작의 "계백"을 시청하였고
50부작의 "의적 장길산"을 시청하였으며 지금은 또 다시 51부작의 사극 "기황후"를 시청하고 있습니다.
사극의 창, 그 열린 소통과 공유의 세계는
세월의 고통을 담아내는 고인과 같은 역사를 만나는 인고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허접한 글이라도 쓰지 읺으면 칼이 녹슬듯
글의 감각이 무디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영적 감각이 소멸되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은혜의 서정이 메마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하루만 기도하지 않아도 '
하나님이 멀리만 느껴집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호흡으로 느끼는 영적 감각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씀을 이룰 것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루만 말씀을 묵상하지 않아도
인자와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사58:11)
다윗은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시119:173)
잠언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잠6:23)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삶의 등불과 빛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오늘 하루
죽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항상 선을 행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는 일에 날마대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지대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성서지대에 나타난 임마누엘의 은혜는
하나님의 정관이요, 그 은혜의 서정입니다.
성서지대 하나님의 나라, 그 역동성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꼐 하시고 동행하는 그 은혜는
성서지대의 구원을 이루는 생명의 서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꼐 동행하였으며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동행하는 은혜로 충만하였습니다.
하나님꼐서 함께 계셨으며 함께 계시며 함께 계시리라는 믿음은
성민 이스라엘 나라, 그 여수룬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14:2)
☞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신28:9)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는 말씀은
이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언약기 되었고 메시야 언약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성서지대 언약의 말씀으로 함께 하신 임마누엘의 은혜는
마침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은혜와 진리와 영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요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9-14)
이러한 메시야의 충만한 은혜를 편만히 담은 신약의 그 이름 시몬에 대하여
시몬, 너는 좋으냐?는 말씀의 묵상을 하였습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는
레미 드 구르몽의 시 "낙엽"이라는 싯구이지만
낙엽에 투영된 시몬의 낭만적 서정이 아닌 임마누엘의 충만한 은혜를 담은 시몬을 깨웠습니다.
신약지대의 "시몬"은 동명이인의 가장 많은 편만한 인물로 등장하며
그들에게 시몬 너는 좋으냐는 질문하였습니다.
신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몬의 이름은
낙엽의 빛깔과 모양의 낭만적 서정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은혜를 은총의 삶으로 가득 담았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의 이름인 시몬은
가나안의 셀롯인 시몬과 동명이인이며 가롯인 유다의 아버지 이름이 또한 시몬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형제 가운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함께 시몬이 있었습니다.
☞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6:3)
또한 베다니에 사는 문둥이 시몬이 있었고
사도행전에는 마술사 시몬과 피장 시몬이 있습니다.
이렇게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를 비롯하여 예수님의 공생애와 성령행전인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었으며
가나안인 인종과 문둥이 바리새인과 어부와 피장과 마술사의 다양한 직업을 가졌습니다.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의 뿌리를 가진 시몬의 이름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임마누엘의 은혜를 누리는 "시몬, 너는 좋으냐"는 임마누엘,
그 은혜의 서정을 이루었는지 묵상하였습니다.
같은 이름의 다양한 사람들
저마다 낙엽의 빛깔은 정답고 낙엽의 모양은 슬쓸한 것 같습니다.
작가 특유의 상상과 감각으로 부조된 시몬은
낙엽지는 숲의 초청을 받고 낙엽의 빛깔에 어린 정다운 숨결은
낙엽지는 모양의 색바랜 세월의 흔적 속으로 흩어집니다.
낙엽 밟는 소리의 낭만은 낙엽지는 날개 소리에 투영된 여자의 옷자락 소리요,
영혼을 깨우는 여성의 관능미를 밤 바람 좋은 소리로 듣습니다.
정다운 낙엽의 고운 모양에 투영된 시몬의 향기는
낭만적 서정의 애틋한 바람의 날개를 달고 이끼와 오솔길의 숲속을 덮었습니다.
성서지대 다양한 모양의 시몬을 찾은 임마누엘의 향기는
낭만적 서정의 고운 빛깔로 낙엽 지는 소리가 아닌 은혜와 진리와 영광의 충만한 영생의 삶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로 부름받아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고
베다니의 문둥이 바리새인 시몬은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리는 천국의 잔치를 베설하였습니다.
가나안 사람 셀롯인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나안, 그 저주받은 족속의 한을 풀어냈고
가롯인 유다의 아버지 시몬은 사단이 아들 유다에게 들어가기 전까지는
예수님 제자가 된 가문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마술사 시몬은 빌립의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도함을 듣고
믿고 따르며 표적과 능력을 목격하였고 베드로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돈을 드려 성령의 권능을 사려하였던 시몬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줄로 생각하였던 잘 못을 고침받고
훗날 성령 팔이의 종말론적 교훈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마술사 시몬의 변화는
성령의 권능, 그 하나님의 선물을 인본주의 신앙과 무속 신앙으로 사고 파는
혼탁한 세대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욥바의 피장 시몬은 베드로의 거처되었으며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한 베드로는 이방인의 백부장 고넬료를 전도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임마누엘의 은혜는 하나님의 정관, 그 생명의 서정이 되어
다양한 삶의 패턴을 가진 시몬을 찾아 "시몬, 너는 좋으냐"의 천국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의 싯구는
성서지대의 날개가 되어 생명의 향기를 가진 복음을 싣고
임마누엘의 은혜를 담은 성령의 바람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