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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
승리 직후에 패배하는 이유 / 임현수 목사
공원에 노인 한 분이 매일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무엇이든지 수를 세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노인은 그 날도 공원에 있는 사람들의 수를 세었습니다. 공원에는 부모와 함께 놀러 나온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날 놀러온 사람들의 수가 서른 일곱 명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10개월이 된 어린아이를 팔에 안고 있는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왔습니다. 이 사람은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간신히 일어서는 아이의 옷깃을 잡고 아이를 걷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한 발짝을 떼고는 곧 넘어졌습니다.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다시 걸음마를 시켰지만, 아이는 두 발짝도 못 떼고 계속 넘어졌습니다.
이러기를 한시간 가까이 하였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지쳤는지 잠시 칭얼대더니 그 남자의 무릎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30여분쯤 지났을까 남자는 잠에서 깨어난 아이에게 또 다시 걸음마를 시켰습니다. 그러다 해질 무렵이 되자, 그 남자는 일어났습니다.
그때 옆 벤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노인을 의식한 남자는 노인에게 다가와서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아이가 걷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도와주지 않았는데도 오늘 제 아이가 세 걸음이나 걸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보니, 그 애는 오늘 서른 다섯번이나 넘어졌습니다. 그 남자는 놀랬습니다. 아! 그러세요. 저는 넘어지는 것을 몰랐는데… 남자는 팔에 안은 아기의 볼에 입을 맞추더니 노인을 향하여 웃으며 말을 하였습니다.
걸음마를 배우는데 서른 다섯 번쯤 넘어진게 뭐 대수입니까?
걷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렇습니다. 걷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보는 눈이 서로 다릅니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넘어지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일어나 걷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실패를 실패로만 보느냐 / 아니면 실패도 성공의 한 과정으로 보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믿음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공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공했다고 성공이 저절로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승리자가 가장 주의할 때는 성공 직후 승리 직후입니다. 물론 승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승리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승리 와 성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승리를 누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승리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한 번의 승리가 아닌 지속적인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장애가 되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불패의 신화를 이룬다고 장담했던 브라질의 삼바 축구가 결승전에서 프랑스에게 3:0으로 완패 당했던 이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지속적인 승리와 성공을 이룬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6장의 그 영광스러운 승리와 대조적으로 7장에서는 처참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고난의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하는 때가 형통의 때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공은 실패만큼 위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승리 직후에 있는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승리자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방심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 중에 하나는 방심(傍心)입니다. 방심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행동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행동했었지만 7장에 와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는 흔적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또한 방심할 때 과거의 승리를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과 승리는 하나님께로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방심할 때 작은 것에 소홀하게 됩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넘어집니다. 아이성의 패배는 아이성은 작은 성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방심한 까닭에 패하였습니다.
작은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 입니다.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아간의 탐욕 때문 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 가운데 누구도 전리품을 개인적으로 취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군대 장군 가운데 아간 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 아간 이라는 사람이 전리품을 보고 마음에 욕심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몰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아무도 모르게 전리품을 숨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는 아간이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 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심이 생겨서 그 물건을 취했다]고 했습니다.
이 물건을 보고 아간 이라는 사람이 탐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몰래 훔쳤습니다. 그리고 이 물건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장막 안에다가 땅을 파고 그 땅 밑에 숨겨 두었습니다. 장막 위는 카펫트로 살짝 덮어놓아서 아무도 알 수가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마 아간이 이런 짓을 할 때에는 [이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감쪽같지 않느냐? 누가 이 사실을 알겠는가? 나 밖에는 모르는 사실이다. 완전 범죄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탐욕에 한번 눈이 어두워지면 판단력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오직 자신의 목적 하나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눈에 콩깍지가 끼어서 결혼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탐욕의 친구가 되고 한번 욕심에 사로잡히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욕심하고 있는 바를 이루어야 겠다는 생각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莊子)가 하루는 활을 가지고 밤나무 숲 속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밤나무 숲 남쪽에서 날아온 까치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장자가 활을 겨냥하여 까치를 쏘려고 하는데, 까치는 정신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까치는 제 앞에 있는 큰 왕거미를 잡아먹으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미는 자기를 노리는 자가 있는 것도 모르고, 또 밤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열심히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장자는 겨누었던 활을 쏘지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올 때 밤나무 숲을 지키는 사람이 장자가 밤을 훔치려는 줄 알고 뒤에다 대고 [야! 이 도둑놈아!]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장자는 집에 돌아와 석달 동안 문 밖 출입을 하지 않고 밤나무 숲에서 생겼던 탐욕의 문제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우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욕심의 싹이 생기면 꼭 이번 주에 산 복권이 몇억 원으로 변해서 우리 집에 쏟아질 것 같이 느껴집니다.
욕심이 앞서면 [이번에 주식을 사면 꼭 대박이 터질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납니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지금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 금새 돈방석에 앉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팀홀튼 커피를 내가 사면 꼭 자동차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매일 마시기 싫은 커피를 그것도 엑스트라 라지가 당첨 확율이 많다는 얘기를듣고 큰 것만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 보세요. 돈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 모르겠습니까? 욕심 때문에 눈이 머니까 집어먹을 것, 안 집어먹을 것 생각하지 않고 꿀꺽 꿀꺽 삼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욕심에 사로잡히면 신앙적인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저는 언젠가 무스코카 우드에서 우리 교회 여름 수양회 할 때 낮 시간에 강사 목사님과 잠시 낚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낚시 하다가 재미있는 것을 보았는데 큰 고기 한 마리가 죽어서 둥둥 떠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이 고기는 자기 입으로는 먹을 수 없는 큰 고기를 먹다가 그것을 삼키지 못하고 입이 막혀서 죽은 것 입니다. 탐욕은 자기를 죽이는 것 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마 우리시대에 가장 인기와 부를 누렸던 세 사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릴린 몬로와 영국의 다이애나 비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아마 20세기에 한 시대의 문화를, 온 세계를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열광케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은 56년부터 히트곡을 날렸는데 한 장에 50만 부 이상 팔려 나간 것만 80 몇 개가 나갔습니다. 음반만 6억 장이 팔려 나갔습니다.
5불씩만 잡아도 30억 달러입니다. 영화에도 33편이나 출연을 해서 그 수입도 몇 억불입니다. 별장도 초호화 별장입니다. 보화도 인기도 영광도 온 세계가 열광하고 온 세계가 만나기를 원하고 한 번 방송에 나가면 36개국이 동시에 몇 억이 프레슬리를 보고 열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1977년 42세로 7개월 동안 진통제만 5300알을 먹고 결국 그도 이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온 세계를 다 안았지만 내 갈 곳이 없고 내 평안을 찾지 못해서 그는 견딜 수 없는 인생의 허무함과 공허속에서 살다가 그냥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명한 마릴린 몬로, 비슷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한 세기에 이 두 사람같이 많은 민족과 세계를 이끌고 간 사람은 없습니다. 수억의 인류가 이 두 사람을 보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몬로도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수 천 만불 짜리 보석이 한도 없고, 수 천 불의 값비싼 옷들이 한도 없이 많고 어느 것도 시시한 것 하나 없이, 그리고 그 당시에 대통령이었던 케네디 대통령이 자기 생일 날 아무도 안 부르고 몬로만 아무도 모르게 불렀다고 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이였습니다. 미모도 뛰어나고, 부도 영광도 누렸고, 인기도 팬들도 권세도 많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이 사람도 역시 인생이 너무 싫고 허무하고 외롭고 몇 억의 인류가 열광해도 너무너무 외로워서 밤을 새우기가 너무 힘들어 33살에 결국 수면제를 한아름 먹고 자살해 죽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다이애나를 기억 하십니까? 이 분은 연예계에 있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예인 이상으로 이 분도 세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다 준 여인입니다. 스무 살에 찰스와 결혼을 했습니다. 영국 최고의 왕실에 들어가서 그래서 모두가 다 다이애나는 영국의 여왕의 대를 이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정도만 아닙니다.
점쟁이들이 다 말하기를 다이애나는 80세까지 살 것이다, 120세까지 살 것이다,
뭐가 될 것이다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실이 싫었습니다. 그 안이 좋은 줄로만 알고 모두가 한 번이라도 왕궁 밖에서라도 구경하고 사진 찍는 그 왕실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그는 그 안이 지긋지긋하고 괴롭고 싫어서, 찰스도 싫고 아들도 싫고 왕궁이 다 싫어요 모든 부귀 영광이 다 싫어요 그래서 되는대로 만나는 사람마다 좋아하고 승마하는 사람이면 승마하는 사람하고 좋아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염문을 뿌렸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에 가 보시면 런던에 제일 값비싼, 전 세계 부호들이 와서, 저 아라비아 왕자들이 항상 와서 쇼핑하는 그런 최고의 백화점이 있는데 그 백화점 주인하고 파리에서 둘이 지내다가 결국 교통사고로 역시 그도 짧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가져봤고 누려 봤지만 결국 허무귀신에게 사로 잡혀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다 해도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이 인생은 평안도, 기쁨도, 자유도 없는 것입니다.
프레슬리도 어렸을 때는 부모 따라 부흥회도 잘 참석하고 은혜도 많이 받고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지만 그 길을 한 번 놓치고 나니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요즘 한국의 모 가수와 같습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이라는 말은 한자어로 보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골짜기(谷)라는 뜻의 곡(谷)이라는 말과 또한 없다는 뜻의 결(缺)자와 마음 심(心)자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욕심이란 골짜기는 없고 온통 봉우리만 있다는 뜻입니다. 봉우리가 있으면 골짜기가 있게 마련인데 봉우리만 남아 있고 골짜기가 없는 상태가 욕심이란 말입니다.
봉우리만 남아 있는 마음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봉우리를 하나 정복하고 나면 또 다른 봉우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15절에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가지면 그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파멸 당하게 됩니다.
거울 자체는 먼지가 없어도 많은 먼지가 거울에 붙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거울같이 맑은 사람일지라도 먼지 닦아내는 작업을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욕심은 휴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욕심을 비운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간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정리한다면, 가장 먼저, 하나님은 죄를 아주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공동체 전체 유익을 위해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죄를 아간 한 사람의 죄로 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간주하십니다(수 7:11). 우리의 죄가 우리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하나님은 죄의 뿌리가 되는 탐욕의 정체를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것을 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습니다. 모든 죄는 작은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탐욕을 경계하십시오. 첫째 탐욕 앞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먼저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보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모든 죄는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셋째, 자족하는 삶을 살도록 하십시오. 자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누어주는 삶을 살도록 하십시오.
지혜로운 자는 탐욕을 부리지 않고 나누어주기를 힘씁니다. 마지막으로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면 즉시 돌이키십시오. 아간의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빨리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돌이키는데 망설일 시간은 없습니다. 빨리 돌이킬수록 좋습니다.
승리자의 장애물 두 가지는 방심과 탐욕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우리 안에 있는 적입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탐욕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섰다고 생각할 때 교만하고 나태해지며 무절제해지기 쉽다는 것 입니다.
우리는 성공 이후에도 여전히 연약한 존재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했기 때문임을 망각하기 때문에 방심하게 되고 탐욕에 빠지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히지 않으면 항상 넘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민족도 여리고의 대승리 이후 “내가 누군지” 점검 했으면 좋았겠는데…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자기를 잊어 버린 것 입니다. 그래서 방심과 탐욕에 빠진 것 입니다. 그렇게되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자아망상증이라는 현상입니다.
왜 자아망상대증에 걸릴까요?
1.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 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그들은 소수니”라고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믿음은 하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수가 소수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벌써 상황을 보기 시작한 것 입니다.
자신감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그들의 수는 소수고 우리의 수는 다수니 하면서 수를 자랑하면 이렇게 어이없이 패배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연약한지라 깨어있지 않으면 승리 이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에 따라 판단하는 경향이 많아 진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이겼지만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무너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런 상황에 많이 속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상황이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상황 같아도 상황 때문에 안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 받지 않으면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만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자아망상증에 걸립니까?
2.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수 7: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삼천 명쯤 올라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 정복 이전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났고, 온전히 순종했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잠잠히 기다릴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승리 이후 이러한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진정한 일류인생이란 큰일이나 작은 일에나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삼류인생이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리고 성이라는 큰 성 앞에서는 최선을 다하였으나 아이 성이라는 작은 성 앞에서는 최선 다하지 않았습니다.
패배 이후 8장 1절에 보면 “군사를 다 거느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최선 다하였을 때 다시 승리하게 됩니다.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선 다할 때 승리가 주어지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나 최선 다하던 모습 사라지면서 무너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진다고 한 것 입니다.
방심과 교만과 자아비대증과 자아망상증은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 자아망상증에 걸렸을가요?
3. 기도가 없었습니다.
아이성에서 싸울 때 기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깨지고 나서는 기도하였습니다.
신앙에는 수리형 신앙과 정비형 신앙이 있습니다. 수리형 신앙은 깨지고 나서 기도하는 신앙이며 정비형 신앙은 사전에 기도함으로서 승리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업으로 선물로 주신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사고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고치기 전 미리 기도해야 합니다. 엄청난 사건이 터진 후에 우리는 전도하지 못한 것, 기도하지 못한 것,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무엇을 하든지 항상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고,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시작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의 사람인 다윗이 자만하여 기도하지 않고 방심한 가운데 늦잠을 자다가 그는 생의 최대의 실수를 저르게 됩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매사에 기도하던 여호수아는 여리고 승리에 도취되어 기도하지 않고 아이성 공격을 결정 합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오점을 남기게 된 것 입니다.
박사이십니까?,
성공한 지도자이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유능한 프로패셔널입니까?
사업에 성공하셨습니까?
자식들이 모두 잘되어서 행복하십니까?
당신이 유능한 사람일수록 도리어 더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별빛처럼 당신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만이 여리고 성에서 뿐만 아니라 아이성에서도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도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의 용사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하는 목회자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하는 장로님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하는 권사님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하는 집사님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하는 목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하는 아이들로 자라기를 바라십니다.
기도는 매사에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 남아있는 과제는 전교회적으로 기도 하는 것 입니다.
방심과 탐욕을 경계 하십시오.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보다 성령보다 결코 앞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이러한 승리를 이루는 주의 친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