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동 입구에는 먹거리 노점들이 무성하게 진을 치고 있다. 행인들 누구나 그 노점에 눈길을 주고 간다. 김밥 한 줄하고 오뎅 몇 개 먹고 싶다. 벌건 떡볶이도 곁들여서.
남포동에 들어서면 바닥에 황동으로 만든 부조물이 있다. 처음 본다. 구둣방 골목이라는 글이 양각되어 있다. 예전에 여기는 구둣방이 많았다. 향수를 느끼게 하는 조각물이다.
오늘이 12월 23일이다. 연말이어서 길 옆에는 예나 지금이나 달력 노점이 있다. 그 옆에는 모자 노점이 한가하게 보인다. 썰렁한 삼류 뒷골목처럼 느껴진다.
오후 4시인데 행인들도 별로 없어 한산하다. 코로나의 영향도 클 것이다. 내일 모레가 크리스마스다. 옛날 같으면 이맘때는 오고가는 청춘남녀들로 북적였다. 마음도 들뜨고. 일 년 중 최고 시즌이었다.
남포동, 광복동, 이 원도심이 공동화, 도넛화 된 것은 아마 80년대에 지하철이 완공되고부터가 아닐까 한다. 그때부터 부산 상권의 무게중심은 서면으로 이동했다. 교통이 편리해지니까 외곽에 아파트 단지들도 많이 생겼다. 굳이 주차장도 없는 먼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었겠나. 자갈치, 국제시장도 도매금으로 내리막이었다.
서면 지하상가와 태화쇼핑은 엄청 장사가 잘 되었다. 내가 하던 인쇄소도 서면 지하상가 옆에 있었다. 점심도 태화쇼핑 지하상가에서 먹을 때도 자주 있었다. 나의 인쇄소도 엄청 잘 되었다.
나는 수영, 토곡, 해운대 이쪽에서만 살다보니 서면 밑으로는 내려갈 일이 없다. 올 때도 시간도 많이 걸리니까 가기가 꺼려진다. 자갈치, 광복동, 남포동 여기도 몇 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다.
구가 되기 위해서는 인구 5만 명이 넘어야 된다. 그런데 중구는 한때 5만 명이 못되었다. 동구와 합구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흐지부지되었다. 썩어도 준치다. 아마 왕년의 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쪽팔린다. 한때는 부산의 정치, 경제, 문화, 유통, 유흥의 중심이었는데. 지금도 5만이 되는지 모르겠다. 중구청 부구청장을 역임한 고한익 선생한테 물어보면 잘 알 거다. 하하.
광복동 저 번화가의 고급 건물에 국밥집을 하는 것을 보면 볼 때마다 신기하다. 비싼 임대료와 인건비도 감당할 수 있는 모양이다. 옛날 같으면 음악다방이 있었을 것이다.
원산면옥이다. 1953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육이오 직후다. 창업주는 피난민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집도 나이 70이 다 돼 간다. 우리 나이네.
빈 점포의 유리창에 임대라는 글이 붙어 있다. 이 광복동에 빈 점포가 나와 있다니. 서글프다. 창피하다. 부산의 창피다.
창선동 먹자골목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당면, 충무김밥, 찌짐 등의 구미 도는 먹거리 노점들이 많았다. 지금도 고소한 식용유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다. 주로 여자들이 땅바닥의 앉음뱅이 의자에 퍼질고 앉아서 먹었다. 도시 위생과 미관도 좋지 않고, 화재 등의 긴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도로로 만든 모양이다. 장사하던 아지매들한테는 안됐지만 시대의 흐름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 자리에는 악세사리 등의 노점들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다. 여기도 부산의 향수가 밴 골목인데. 먹지는 않지만 없으니 서운하다.
첫댓글 이 글을 보강하여 작품을 만들려고 daum에서 '남포동'을 클릭하니
여기로 들어온다. 허허.
별 생각 없이 이 마당에 글을 올렸다가 뒤에 손을 봐서
작품을 만들고 동창회보 원고를 만든 것이 여러 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