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조선의 4대 명산 구월산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1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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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조선의 4대 명산 구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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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6. 09:23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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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조선의 4대 명산 구월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함경도의 칠보산, 평안도의 묘향산, 경상도 합천의 가야산과 봉화의 청량산이 백두대간에 자리한 여덟 산과 함께 나라 안에서 큰 명산이다”라고 하면서 구월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문화의 구월산도 또 한 줄기가 되돌아 원 줄기를 되돌아보는 회룡고조(回龍顧祖, 산의 지맥이 뺑 돌아서 본산과 서로 마주하는 지세)하는 지형이다. 서북쪽은 바다를 면하였고, 동남쪽으로는 평양과 재령 두 곳의 강물을 거슬러 받는데 두 강물에는 조수가 통하여 어염으로 얻는 황해도 전체의 이익을 모두 차지한다. 남쪽으로 5리 되는 지점에 또 기름진 100리 들판, 즉 재령평야와 안악평야가 있다.
수세(守勢) 및 지리(地理)의 험한 것과 논과 밭의 기름진 것은 계룡산보다 훨씬 낫고, 톱니 같은 돌산의 형상은 오관산ㆍ삼각산보다 못하지 않다. 온 산을 돌아가며 절이 10여 군데나 되며, 산 위에는 구월산성을 쌓아서 천연 요새지를 만들었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는 단군의 자손이 기자를 피해 이곳에다 도읍을 옮겼다고 하는데 이곳이 장장평(莊莊坪)이다. 아직도 단군 3대의 사당이 있고, 국가에서 봄가을마다 향(香)을 내려 제사한다. 그러나 단씨는 이 산의 한 편만 차지하여 이 지역의 훌륭함을 다 차지하지 못하였으니, 이곳이 언젠가 한번은 도읍지가 될 것이다.
판소리 「변강쇠타령」에 “동 금강 석산이라 나무 없어 살 수 없고, 북 향산 찬 곳이라 눈 쌓여 살 수 없고, 서 구월 좋다 하나 적굴(도적 소굴)이라 살 수 있나. 남 지리 토후하여 생리가 좋다 하니 그리로 살러 가세”라고 나오는 구월산은 우리나라 5대 명산 중의 하나다. 아사달산ㆍ궁흘산ㆍ백악ㆍ증산ㆍ삼위ㆍ서진산으로도 불린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구월산 기행』에서 구월산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신천, 안악을 거쳐 구월산에 다가가보라. 멀리서는 정다워 보이고 가까이 가면 은근하고 전체로 보면 듬직하고 부분으로 보면 상큼하니, 빼어나지 못하다고 했지만 옥으로 깎은 연꽃봉오리 같은 아사봉이 있고 웅장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일출봉, 광봉, 주토봉 등이 여기저기 주먹들을 부르쥐고 천만인이라도 덤벼라 하는 기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산이 구월산이다.
구월산의 최고봉인 사황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안악, 신천, 재령 등의 평야지대와 평안남도 남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 단군이 하늘에서 처음 내려온 곳은 묘향산이고 조선을 세운 단군이 도읍지로 정한 곳은 평양이었다는데, 단군은 다시 구월산 아래 당장경(唐藏京, 당장평ㆍ장장평ㆍ장재이벌은 그 지역 말이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당장경으로 나오고 현지에서는 장장평으로 불림)으로 도읍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후 마지막으로 구월산에 들어가 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군을 모시는 산도 묘향산에서 점차 산신이 된 구월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발 954미터인 이 산의 본래 이름은 궁홀산(弓忽山)이었으나, 후에 궐산(闕山) 또는 삼위산이라 하다가 다시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했는데, 단군이 도읍을 옮긴 후 은퇴한 아사달산이 바로 이 산이라는 설도 있다. 구월산이라는 이름은 단군이 아사달에서 9월 9일에 승천하여 신이 되었으므로 구월산이라고 일컫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그런 연유로 구월산에는 단군이 머물렀다는 장당경, 환인ㆍ환웅ㆍ단군을 모시는 삼성사, 단군이 올라가 나라의 지리를 살폈다는 단군대, 활 쏘는 데 사용했다는 사궁석 등이 있다.
이 산에는 고려 때 쌓은 구월산성이 있는데, 1920년 황해도 지방에서 활동했던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구월산대가 군자금 모금 활동을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고, 한국전쟁 때 반공 의용군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북한 공산군에 대항하여 유격전을 벌인 전적지도 있다.
광활한 낮은 평야 지대에 우뚝 솟은 구월산에는 제일 높은 사황봉을 비롯하여 오봉ㆍ인황봉ㆍ구거봉ㆍ아사봉 등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톱날 같은 능선을 이루며 솟아 있다. 구월산은 황해남도의 서부 지역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우아한 산세를 자랑하는데, 대표적인 골짜기는 오봉골과 운계골 그리고 회장골ㆍ원명골이며 구월산성이 있는 산성골은 골짜기가 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월산성은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4386척이며 높이는 15척이다. 성의 모양이 큰 배 같고, 남쪽과 북쪽에는 길이 없으며 동쪽과 서쪽에만 나무다리 길이 있다. 성안에는 나무가 묶어세운 것같이 빽빽하며, 물이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한 시내를 이루고, 성 서쪽에 와서는 양쪽으로 산이 높이 솟아서 문 같으며, 물이 문 밖으로 나와서 폭포가 된다. 성안에는 좌우에 창고가 있는데, 문화ㆍ신천ㆍ안악은 좌청에 속하고, 은률ㆍ풍천ㆍ송화ㆍ장연ㆍ장련은 우창에 속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월산은 조선시대 3대 도적 중의 하나인 임꺽정의 주요 근거지였고, 기축옥사(1589년)의 주인공인 정여립이 휘하의 승려 의연ㆍ도참ㆍ설청 등과 자주 왕래를 했던 곳이라서 그는 이 지역의 승려들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구월산은 특히 유적과 전설과 꽃이 많아서 삼다(三多)의 산이라 불리며, 꽃 중에서도 장미와 두견화 그리고 나리꽃이 유명하다. 구월산의 풍취를 맛보려면 ‘아사봉 천궁에 귀 기울여보고, 단군대에 올라 천신의 유적도 더듬어보고, 월산폭포에 몸을 씻고, 덕바위 위에서 사슴고기를 구우며 구월산 영지술에 취해보면’ 된다고 한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구월산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간 해에도 구월에 구월산 구경하고
올해에도 구월에 구월산 구경하고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 구경하네
구월산 경치가 언제나 구월이네
단군의 유적이 많은 구월산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중심지로 부각되어 많은 절과 암자들이 들어섰다. 대표적인 절로는, 우리나라 31본산 중의 하나이며 황해도 내의 25개 사찰을 관장하는 절로 신라 애장왕 때 건립된 패엽사(貝葉寺)와 유서 깊은 월정사가 남아 있다. 그중 월정사는 한국전쟁 당시에도 불에 타지 않고 온전히 남았으며 월정사 들머리의 석장승은 앙증맞기 이를 데 없다. 조선시대의 정치가였던 허균은 구월산 상봉에서 흘러내린 이 폭포의 물을 바라보면서 “100길이나 되는 저 깊은 소용돌이 속에 많은 신룡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을는지”라고 하였는데, 절 입구의 오른쪽에는 세 필의 비단 폭을 걸쳐놓은 듯한 삼형제폭포와 함께 용연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한편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1994년에 발간한 『구월산 전설』에는 “구월산은 원래 아사달이라 일컬어졌다고 고기(古記)는 밝히고 있다. 아사는 아침이란 이두 말이고 달은 산이란 뜻이니 아사달이 바로 구월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월산이 마치 안악군을 휘감듯 둘러쳐져 안악이라는 지명은 구월산 안자락이란 뜻으로 아낙네라는 말이 이곳 구월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옛날 어떤 안악군수가 아내의 등쌀에 매사를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군정마저도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 벌였다는 데서 ‘안악네’라는 말이 나왔고, 그것이 오래 쓰이다 보니 ‘아낙네’가 되었다는 얘긴데, 그보다는 구월산의 품이라는 뜻으로 ‘안악’이 되었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다.
다산 정약용은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구월산에서 흐르는 물의 이동 경로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구월수는 문화현 구월산에서 발원한다. 구월산은 또 아사달산이라고 하는데 단군이 세상을 버린 곳이다. 구월수는 동남으로 흘러 (······) 구월수는 북으로 운계산수(雲溪山水)와 마명수(馬鳴水), 영진(迎津), 절양해(絶瀁海)의 우두주(牛頭州)를 합한다. 구월수는 동남으로 흘러 온정원을 지나 갈산에 이르러서는 정지수를 이루며, 또 문화현 북쪽을 지난다. 문화현은 본래 고구려의 궐구현인데, 고려 초기에는 유주라 했고, 후에 문화현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구월수는 북으로 운계산수와 합하여 마명수를 이루고, 오른쪽으로는 영진과 합류하며 또 북으로 흘러 절양해로 들어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4대 명산 구월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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