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늦가을은 / 박효찬
아버지는 대대로 내려오는 농부였다
무자년 늦은 가을
아버지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텃밭 웅덩이에 양식과 의복을 묻었다
그리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는 *동괴로 식구들을 데리고 가
어스름한 달빛을 따라 동굴을 봉했다 시대적 아픔으로
흔들리는 촛불 같은 자식들의 목숨을 건져내기 위해
토벌대라는 명분으로 무자비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하룻밤이 지나고
평화가 아닌 공포의 세상을 맞으며 동괴의 입구는
열리고, 공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달리던
열세 살 어린 조카의 발목이 잘렸다
군인은 백성들에게 처형의 고백을 알리고
훈장처럼 잘린 발목을 내놓았다
초목도 죽고 꽃들도 울었다
그러나
군인은 울지 않았다
공비도 울지 않았다
불을 내뿜는 총구와 몽둥이가 함께 춤을 추었다
시냇물처럼 널브러진 시체들을 건너다니며
그렇게
봉아름의 그해 늦가을 왕벗나무는 서럽게 울었다.
*동괴 : 제주의 자연 동굴. 제주시 서회천에서 약 700m 남쪽에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 굴 입구가 크게 뚫어져 있고 동북쪽으로는 한 사람 들어갈 정도의 굴 입구가 있다.
남쪽으로 뚫린 큰 입구는 바위틈으로 쌓아서 막았다. 제주 4.3 사건 당시 작은 입구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이 굴에서 생명을 부지한 곳이기도 하다.
이 작은 굴 입구는 바위틈으로, 한 사람이 들어갈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넓은 돌 하나로
덮어 막으면 어느 쪽이 굴 입구인지 사용했던 사람 외에는 아무나 알아차리기 어렵다.
(자료: 제주 4.3사건의 기록/고한구 씀)
형촌마을 / 박효찬
비가 내린다
잠든 사이 장대비가
우면산 위 진흙탕물이 쓰나미처럼
아기는 곤히 잠들었고
친흙더미의 울부짖는 소리로
늙으면 찾아가리라
몸이 사그라지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찾아든 형촌마을
사람 속 추억은
흔적도 기억도 진흙으로 채워지고
하늘도 땅도 비가 내린다
엄마는
흙 한 줌 움켜쥘 힘도 남아 있지 않다
진흙에 빠진 아기의 영혼을 건지려
빗물로 목을 축일 뿐
긴 여름밤
악어의 집을 닮은 우리는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발목이다
닦고 쓸고 추려도 기억은 없다
흠뻑 젖은 걸레의 시름만큼 그 무게로 짓누르며
밤사이
건너고 또 건너 돌아온 길목엔
아기의 울음소리만이 진동한다
*2011년 7월 27일 시간당 100mm 넘는 비가 내리며 우면산 산사태가 났다.
형촌마을 주민 16명이 사망, 아기 1명 실종.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추억(봉개국민학교) / 박효찬
제주시에서 중 산간 마을 입구
작은 오름 돌아서면
왕벚나무가 꽃비로 반겨준다
고깔모자 닮은 칠오름은
반쪽자리로 남아
풍금 소리로 흔적을 이야기 한다
운동장을 빙 둘러 앉은 나무 사이
가을 운동회가 열리고
세월의 목마름으로
아이스께키 장사꾼 목소리가 들린다
귤나무밭 웅덩이엔
가난의 배고픔을 웃음으로 채우며
작은 남자아이는 삽질을 한다
여름날 뙤약볕에
몽땅 연필 대신 낮을 휘두르고
고의규 선생 교육정신을 이어받아
쪽나무 교실 바닥
몽땅 양초를 바르고 미끄럼 타며
1936년 동보서당을 보존했다
나무그늘에 여자아이들 공기놀이
일제강점기를 지나 4.3사건의 풍금소리
해방의 노래, 조선역사의 노래
사라져버린 기억들이 삐쭉삐쭉 새싹 돋아
왕벚나무 그늘로 자라난다
우리동네사람들
<화려한 나들이> / 박효찬 시집 P36, P26, P90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