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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진리의 빛을 나타낼 때
마가복음 16:14~18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오늘 우리에게 둘러쳐 있는 여러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무척 혼란스러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이 말을 하고 저기서는 저 말을 퍼부으면서 자신의 말이 옳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혼돈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진리에 목말라 합니다. 그러기에 누구든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의하여 바르게 살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도둑질하고 살인하여 악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자기처럼 살아서는 안 됨을 말하는 것도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진리를 바탕으로 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라고 판단하여 좇아갔더니 거기에 진리가 아닌 가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때의 당혹감은 무척 크게 와닿았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진리가 되심을 분명하게 보이시기 위하여 성경에 기록한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부활하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3년 반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이 정작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음이 완악한 것’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자기의 판단에 따라 마음을 닫아걸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완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믿음에 대하여 꾸짖으시고 부활의 사건을 전하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 모습에 마음이 완악하다고 지적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미리 약속하신 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에 대하여 여러 차례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하여 주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려고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증언하였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날 초저녁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예루살렘과 온 나라에 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처형에 이르도록 한 정치 지도자들과 로마의 군인들은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꾸며낸 가짜 뉴스가 온통 사람의 입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추려 보자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서 숨긴 후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으로 꾸며낸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빈 무덤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 예수의 무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진짜 죽지 않고, 기절했다가 무덤에서 깨어나서 어리론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짜 선동적인 괴담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제자들은 두 패로 나뉘었을 것입니다. 이런 거짓 선동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거나 그중에 소심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여 어정쩡한 모습을 띠고 있는 제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대단한 임무를 선언하시는 내용이 15절의 말씀입니다.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무척 혁명적인 명령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유대의 귀퉁이에 속한 갈릴리 지역에서 자라 어부 출신을 비롯한 학식이 뛰어나거나 오늘날처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식견과 학문의 깊이를 더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무엇 하나 변변하게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가당치도 않은 허황한 것처럼 보이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라는 말씀에 ‘천하’는 ‘코스모스, κόσμος’라고 하는데 이것은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세계, 우주, 땅'과 그 거민들 즉, 인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별 볼 일 없어 보였던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 전하라는 것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만한 내용임이 틀림없습니다.
이 놀라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과 하였습니다. ‘권능’이란 ‘뒤나미스,δύναμις’로 자연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신비한 힘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더위와 추위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식물들과 자연 요소들이 땅에서 싹을 내고 가지를 내어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이 내 것이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고 흔들지 않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두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제자들이 온 천하에 전하여야 할 내용이 바로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음’은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하는 데 이것은 ‘기쁜 소식, 승리의 소식’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을 말합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이 복음이 될까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내 모든 죄가 사라졌기에 그러합니다. 절대 죄의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죄의 왕 노릇하는 사망의 덫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은 나도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며 하나님 나라에 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대한 증거에 대하여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사명은 예수님의 제자와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처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도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은 영어로는 The Great Commission 또는 The Great Command라고 합니다. ‘가장 큰 명령’, ‘아주 위대한 위임’이라는 뜻입니다.공관복음서 모두가 끝부분에 빠짐없이 전하고 있고, 초대 교회의 시작을 담은 사도행전 1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 이 말씀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어떻게 빛으로 드러날까요?
사 60:1,2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네 빛이 이르렀고’ 라는 말씀은 ‘your light has come’ 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빛으로 세움을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빛이 우리에 임하였을 때 빛의 기능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반영체(反影體)이기 때문입니다. 영어로는 reflection이라고 합니다. 마치 거울에 나를 비추면 거울이 나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빛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반영체가 온전하게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거울은 청동을 곱게 연마하여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투명한 유리 뒤쪽에 아말감을 바르고 그 위에 습기를 막는 연단을 칠해서 만듭니다. 거울은 투명해야 합니다. 맑아야 제대로 비춰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광을 비춰주십니다. 그 영광이 제대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 영혼을 맑고 투명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영혼을 투명하게 할까요?
회개입니다. 죄는 우리 영혼을 더럽힙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에 염려와 근심 그리고 두려움 또는 자기연민 이런 것들은 내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은 외적인 여건에 의하여 주어지는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로 들자면 어느 날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당장 수입이 끊기면서 생활이 막막해졌습니다. 그때 두려움과 염려가 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죄라고 여긴다면 너무 한 것 아닌가 하는 반발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나타나는 죄임이 틀림없습니다. 믿음을 말미암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염려하지 말아야지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가 내 안에 깃든 감정의 죄들을 고백해보십시오!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나의 환경을 지배하시고 해결하여 주신다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수시로 마음에 들어오는 감정의 죄들을 회개하면 나의 말과 행위의 죄들은 수월하게 회개할 수 있습니다. 감정의 죄를 제대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가 멀리 느껴지고 회개할 수 없는 어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회개하므로 죄에서 벗어나고 어둠의 자리에 주님의 영광이 임하여 내 삶이 빛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강력하게 빛으로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사 60: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700년에 기록된 것으로 이 말씀이 선포될 때는 그들은 죄와 불법으로 가득하였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바벨론에게 침략당해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의 70년간 포로생활로 연단된 뒤에 고레스 왕 칙령으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때의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가치관의 혼돈 그리고 거짓이 판을 치며 정의가 사라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수많은 정치 협잡꾼들로 어둠이 짙게 배어있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경제적인 위기 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들에게는 빛으로 나타나십니다. 지금 이때 복음의 말씀을 듣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도에게 세상의 빛으로 세워 주십니다.
막 4: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옥은 대부분 돌이나 흙벽돌로 지은 건물로서 문 외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안은 낮에도 어두웠기에 등불로 어두움을 밝혔습니다. 여기에 언급되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등잔 가운데 하나입니다. 토기로 되었고 납작한 모양인데, 여기에 올리브유를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등불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사실 한글 성경만으로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등불’ 이란 헬라어 ‘뤼크노스λύχνος’ 앞에 ‘호 ὁ’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그 등불’ 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등불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특정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진리와 빛이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일을 설명합니다.
등불에 이어서 ‘말’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은 사람이 타고 달리는 말이 아니라 곡물의 양을 재는 ‘말’(μόδιος 모디오스)입니다. 공동번역 한글 성경은 이 단어를 ‘됫박’이라 번역했고, 누가복음 8장 16절에는 ‘그릇'이라고 하였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clay jar’라고 하여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곡식 같은 것을 담아서 보관하는 그릇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불을 켜지 않을 때는 등잔을 됫박, 혹은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평상, 즉 침상 아래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등경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라는 말씀으로 등불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죄의 어둠에 빠진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니고 있는 빛을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셔서 우리에게 그 빛인 나타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에게 주시는 표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는 무수히 많은 귀신이 우리의 영혼을 더럽게 하여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을 갉아 먹고 도둑질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소유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집에 어린 영의 피를 발라 죽음의 천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처럼 성령께서 예수님의 거룩한 피를 안팎에 발라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합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 방언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언어를 말합니다. 아무리 두렵고 떨리며 억압을 당하는 것 같은데 입에서 찬송이 흐르고 감사의 고백이 새 방언입니다.
막 16: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원수 사탄을 이기신 권세를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의 독이 절대로 사람을 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의 몸 관리를 잘해도 몸은 시들고 병들어 죽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무장한 사람은 육신으로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그뿐 아닙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였습니다. 나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죽음의 병에 걸려 있는 사람에게 동정의 마음 품고 그를 받아들이면 생명의 부활로 이끄심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둠으로 소망이 점차 사라지는 시대입니다. 이때 진리의 빛을 나타낼 때입니다. 이 진리의 빛이란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죽었음을 시인하는 사람은 세상의 영향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뒤떨어지거나 못 살아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그 새명이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언제나 화평을 유지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어둠의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을 진리의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빛으로 세상에 나타날 때 우리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진리가 빛을 발할 때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성령 충만을 경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