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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아마츄어 역사학자도 아니다. 다만 현재의 모든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과거가 축적된 결과이고, 현재가 축적이 되면 미래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란 건 알고 있다.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와 흐름을 알아야 하고, 미래 예측 또한 이런 흐름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여기 정리한 유럽 역사는, 구경 삼아 몇번 다녀온 유럽여행을 실마리로, 관련 유튜브를 보면서 얼개를 잡았고,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은 가급적 배제하고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 중심으로 쓰려고 했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배경이 다른 유럽은 다소 생소하고 다른 세상 같았지만, 조금씩 이해하고 맥락을 잡아가면서 동서양은 결국 하나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이 좀 길어 5회에 걸쳐 내보낼 예정이다.
20개의 연대로 정리한 유럽역사
유럽여행을 가면 이곳저곳 역사적 관광지를 많이 방문한다.여행 가이드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감이 잘 잡히지 않고,맥락을 알 수 없었던 기억이 새롭다.이런 아쉬움과 궁금증 때문에 언젠가 한번 유럽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정리를 하고 싶었다.
《기원전 유럽》
유럽역사의 뿌리는 기원전 14세기 경, 그리스 지중해 남부의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의 서해안에서 일어난 에게문명으로 ,세계 최초의 해양 문명이자,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볼 수 있다. 크레타 섬은 지정학적으로 4대 문명 발산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중간에 위치하고 해상무역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에게문명이 탄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는 땅이 척박하고 농지가 부족해 일찍부터 가까운 이탈리아 남부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기원전 753년, 로물로스와 레무스에 의해 로마가 건국되고 제국으로 성장 되면서, 그리스문화는 자연스럽게 로마문화와 융합 되고, 여기에 기독교가 수혈되면서 찬란한 유럽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 AD30년, 예수사망
기원 후 30년, 예수가 사망 한다. 예수는 기원 원년에 태어나 30세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탄생연도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탄생을 원년으로 삼는 것을 보면, 유럽역사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짐작이 된다. 예수는 로마 총독 빌라도 치하에서,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다. 3세기의 로마제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235년에서 284년까지 49년 동안 무려 26명의 황제들이 제위에 올랐다. 당시 로마 군대는 제국 자체보다 자신의 군단장이나 지역 총독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풍조가 만연했다. 몇몇 군단이 힘을 합치면 로마로 진군해 황제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 가능했다. 새로 등극한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황제 근위대가 황제를 암살하고, 다른 황제를 세우기도 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계속되는 박해와 순교에도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자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도들이 로마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치적 내분을 일으켜, 당시 로마제국을 사등분해 다스리던 황제들이 서로 다투는 계기가 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이는 313년 2월에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타누스와 서로마 황제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혼인동맹을 맺고 발표한 칙령이다. 기독교 탄압에 종지부를 찍고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다. 가히 세상을 뒤집어 엎을 만큼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이로써 기독교인들은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획득했다. 그 동안 박해하고 금지해왔던 기독교를 누구나 믿을 수 있는 종교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박해 때 몰수당한 재산을 되돌려 받았다. 그리고 종교 재산과 성직자에 대한 세금 및 병역면제 등이 실시되었다. 교회에 대한 세금면제는 지금까지도 시행되고 있다.밀라노 칙령은 그간 3백 년 동안 갖은 박해를 당하며 숨어 지냈던 기독교도들한테는 무한한 기쁨이요 예수를 박해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 476년 ,서로마 멸망
476년에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의 용병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다. 건국후 1,200년 후의 일이다. 당시 로마는 국력이 약해지자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보충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훈족이 서유럽을 공격해오자 게르만족은 남하를 하게 되고, 이것이 로마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로마가 멸망한 후 서로마의 영토 안에는 여러 게르만 족들의 나라가 들어섰다. 그 가운데 프랑크 왕국만이 로마 교황의 지지를 받으며 발전하였다. 당시 서유럽에는 로마 교회의 주교가 교황이라 불리면서 로마 가톨릭교가 성립되어 있었다. 교황은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으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서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의 세 손자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다 프랑크왕국은 서프랑크,동프랑크,남프랑크왕국으로 나누어지고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뿌리가 된다. 세 나라로 나누어진 뒤 국왕의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은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지역을 지키려고 했다. 그 결과 제후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통치하는 봉건 영주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뒤 서유럽 사회는 10~12세기까지 봉건 제도와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안정된 사회를 이루게 된다.
그러는 동안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은 나라 이름을 비잔틴 제국으로 바꾸고, 로마 황제이자 가독교의 지배자로 서로마 제국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도 이민족의 잦은 침입과 내부적인 갈등으로 인해 혼란이 계속 되었다. 서로마 멸망 당시 유럽에는 전지역에 걸쳐 켈트족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게르만족은 로마가, 북쪽에 사는 큰 키에 빨간머리를 하고 , 파란 눈을 가진, 싸움 잘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문화적으로 야만적인 사람들이란 느낌이 있는 호칭이었다. 게르만족은 본래 스칸디나반도와 덴마크 같은 북유럽에서 살던 민족으로 프랑크족, 앵글로족, 색슨족, 고트족, 반달족, 롬바르디족 등이 포함된다. 앵글로족과 색슨족은 훈족 침임 당시 ,바다 건너 영국으로 건너가 지금의 앵글로색슨족이 되었다.동일 언어구조를 사용하는 유럽 민족으로 보면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라틴족에 속하고, 러시아,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등 발칸반도 있는 나라는 슬라브족에 속한다. 슬라브는 슬레이브(노예)라는 어원에서 왔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부터 유럽은 중세시대로 들어간다.
# 1,096년 ,십자군전쟁
1,096년에 유럽의 기독교와 이슬람제국 세력간에 예루살렘 성지 주도권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슬람교는 622년에 아라비아반도 메디아에서 모하메드에 의해 탄생한 종교다. 이슬람은 빠른 속도로 중동,북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이슬람제국을 건설했다.이슬람인 셀주크튀르크가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막자 유럽에서는 교황이 중심이 되어 십자군을 조직하고 이슬람 원정길에 나서게 된다. 유럽 각 지방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계획했던 기사군이 조직되기도 전에 먼저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가는 동안 먹을 것이 떨어지자,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 식량을 빼앗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라인 강 근처에서는 유대인들을 학대하여 비난과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일부 부대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기도 전에 헝가리인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농민군(민중 십자군, 군중 십자군이라고도 함)도 목적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슬람군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 심한 더위와 질병, 굶주림 등으로 고생하던 십자군은 내부 세력의 갈등까지 겹치는 바람에 1099년 7월에서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십자군은 6주 동안 싸우면서 이슬람 군뿐 아니라 주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년)은 십자군 전쟁 사상 가장 비조직적이고 잔인했으며, 8차에 걸친 전쟁 중 기독교 세력이 승리한 유일한 전쟁이었다. 1144년 이슬람군이 에데사(예루살렘 동북방에 위치)를 점령하자, 다시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이 십자군전쟁은 200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결국 이슬람의 승리로 끝났다. 성지를 되찾기 위해 출전한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고, 봉건 영주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국왕들은 권력이 강해지고 영지를 확장하게 되었다. 결국 서유럽의 각 나라가 중앙 집권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또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 무역의 주축이 되었던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이 성장 발전하게 되었고, 지중해 무역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지중해 무역권은 뒤를 이은 북유럽, 내륙 무역권 형성과 함께 발전하여 농업 중심이었던 중세 봉건 사회의 기반을 무너트렸다.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비잔티움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접하게 된 서유럽 사회는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비잔티움 문화의 그리스·로마의 고전과 미술, 이슬람의 철학·의학·화학·수학·천문학 등이 전해지면서 서유럽 문화가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 1,320년 ,단테의 신곡 발표
이 시는 단테가 1308년 이전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죽기 바로 전인 1321년에 완성했다. 인간의 속세 및 영원한 운명을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는 <신곡>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로도 볼 수 있다. 시의 구성은 단순하다. 단테 자신으로 추정되는 한 인간이 저승세계로 여행 할 수 있게 되어 지옥·연옥·천국에 사는 영혼들을 찾아가게 된다. 그에게는 안내자가 둘이 있는데, 한 명은 지옥·연옥을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이고, 또 한 명은 천국을 소개하는 베아트리체이다. 이 시는 100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크게 <지옥편>·<연옥편>·<천국편>의 3편으로 나뉘어져 각 부마다 33개의 곡이 있다. 단테의 신곡이 발포되면서 신중심의 중세 유럽문화가 인간중심으로 전환되는 르네상스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르네상스는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운동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학문과 지식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이 시기를 통해 고전 학문의 가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신대륙의 발견, 지동설의 등장, 봉건제의 몰락, 상업의 성장, 종이·인쇄술·항해술·화약과 같은 신기술의 발명이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정신의 시작은 인문주의 운동이었다. 인문주의가 처음 발생하고 열매를 맺은 곳은 이탈리아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인문주의 운동을 크게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르네상스 정신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미술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르네상스 시기는 1527년 로마의 몰락으로 끝났다. 그러나 르네상스 정신을 표현하는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북유럽에서 계속 탄생했다. 대표적인 미술가로는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켈란제로 ,라파엘 같은 거장들이 있었다.
# 1,453년 ,동로마의 멸망
1,453년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가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마지막 남은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초대형 대포였다. 이로써 800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줄기찬 공세를 물리친 난공불락의 성에 마침내 이슬람의 깃발이 꽂혔다. 2천년 로마제국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다.역사가들은 서로마의 멸망에서 동로마의 멸망까지 약 천년을 중세라고 하고 이후를 근세로 분류한다. 오스만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유목인이 세운나라로 셀주크 트루크를 멸망시킨 제국이다. 튀르크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것도 고조선시대에 중앙아시아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오스만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에 있다가 패전국이 되었다. 그 여파로 1,922년 멸망하게 되고, 국토가 크게 축소되어 현제의 튀르키에가 되었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유럽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후추 등 동양의 특산품을 들여오던 이탈리아 상인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유럽인들은 동방으로 통하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 시작하는데 이는 대항해 시대 개막의 한 요인이 된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메드 2세는 '정복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일약 이슬람 세계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그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이곳을 유럽 진출의 기지로 삼는다. 콘스탄티노플은 튀르크인들로부터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 명칭은 1930년 터키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굳어진다.
#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콜럼버스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스페인 왕의 지원을 받아 인도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항을 했다. 당시에도 지구가 둥글다는 건 알았고 콜럼버스는 지구를 반대로 항해하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 인도에서는 향료가 많이 났고 유럽으로 수입이 되고 있었으나 유럽의 끝에 있는 스페인까지 오면 가격이 많이 올랐다. 이 때문에 인도 항로의 개척이 절실했다. 콜럼버스는 어려운 항해 끝에 드디어 육지에 도달했는데, 당시 그는 인도를 발견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쿠바 북쪽 바하마군도였으며 당시 그는 그것을 몰랐다. 이 때문에 이곳의 원주민을 인도 사람으로 생각했고, 지금도 미국 원주민을 인디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귀국한 것은 1493년인데, 신대륙(아메리카)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도의 섬이라고 믿었던 콜럼버스 일행은 이를 스페인령, 서인도라고 불렀다. 포르투갈은 인도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브라질로 진출했고, 스페인은 서쪽으로 나아가 1533년에 잉카 제국을 정복했다. 중세 대항해시대에 스페인괴 포루투칼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많은 금과 은을 가져와 큰 국부를 누렸다. 또한 스페인은 이때 800년간 이슬람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1,492년에 이슬람을 밀어내고 유럽에서 이슬람제국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