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원단체 및 개인 추도사 모음
■ [추도사] 1
이금주 회장님의 서거에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이금주 회장님과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변호단>과 <나고야 소송지원회>는 끈끈한 유대관계로 맺어져 회장님이 나고야 소송과 지원활동에 남긴 발자취는 일일이 셀 틈이 없습니다. 그 몇 가지 예를 소개하여 추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 등 9명이 연서해 재판에 싸우겠다는 뜻을 처음 전달한 사람은 이금주 회장님이었습니다. 이후 그 뜻이 나고야에도 전해져 제소 전년인 1998년 5월 8일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문제를 생각하는 회>는 이금주 회장님과 박해옥 할머니,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를 초청하여 <전후보상과 국가 기업의 책임> 강연을 개최했는데 이 회장님의 강력한 말씀이 제소의 기운을 높여주었습니다.
2001년 2월 24일, 고 김혜옥 할머니가 지진에 사망한 오길애씨의 학적부와 제적부를 산정초교에서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을 "있었다" "있었다"고 흥분하며 맨 처음 전해줬던 일 역시 이회장님으로 부터였습니다. 2001년 12월 9일, 「나고야소송지원회」가 개최한 「57년째의 진실, 새겨지는 본명」모임에 유족과 발견자 김혜옥 할머니를 동반하여 나고야에 오게 되었고, 이금주회장님은 극한의 이름인가, 뜨거운 결의를 말씀하셨습니다.
2002년 11월 28일 열린 나고야 지방법원 14회 구두변론에서 첫 증인신문에 나선 사람도 이금주 회장님이었습니다. 담당 변호사는 "저에게 있어서 이 회장님의 증언을 직접 언급한 감동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며 "이 회장님의 생생한 기백 앞에서 떨릴 정도의 감동을 잊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99년 3월 1일 제소 이후 원고와 변호단· 지원회 파이프 역할은 모두 이 회장님이 맡았습니다. 이 회장님에게 여러 번 팩스를 보낸 저는 이 회장님 댁의 팩스번호인 062-672-0027이라는 숫자를 외워버렸습니다.
금요행동 등 도쿄 행동에도 몇 번 참가하여 시나가와역이나 미쓰비시중공업 앞에서 마이크도 잡았습니다. 그러나 2009년 3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결성되면서 이 회장과의 연락이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내 부담이 줄어 마음이 편하고 젊은 세대가 물려받으니 기쁘다"고 생각하지만, 반면에 "섭섭하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광주에 방문했을 때는 공항에 건강하게 마중 나와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최근에는 몸이 점점 나빠져 의사소통이 힘들었지만 우리 가슴에 이 회장님은 계속 살아 있습니다.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 정세가 어려워진 지금이야말로 이 회장님의 의지와 기백을 가슴속에 품고 싸울 결심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님, 한일 대립의 원흉인 일본 국민으로서 "편안히 잠 드소서." 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를 대신하는 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한국 속담을 가슴에 새기고 근로정신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바위'에 맞설 결의를 전하며 추도의 말씀을 올립니다.
- 작성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
2021년 12월 13일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변호단 단장 우치카와 요시카즈(内河惠一)
사무국장 이와츠키 코지(岩月浩二)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하는 회 공동대표 다카하시 마코토(髙橋信)/
테라오 테루미(寺尾光身)/ 나카무라 노리코(中村紀子)/ 사무국장 고이데 유타카(小出裕)
■ [추도사] 2
그 생애를 일본의 전쟁 책임 추궁과 피해자 구제를 위해 진력하신 이금주님.
당신이 개척한 길에 이어, 젊은 세대가 확실히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침략의 역사를 묻는 투쟁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합니다. 오랫동안 저희를 이끌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후지코시 강제연행·강제노동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
사무국장 나카가와 미유키(中川美由紀)
■ [추도사] 3
존경하는 이금주 회장님의 가시는 길을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관부재판 원고들의 투쟁을 격려하며 지켜봐온 그녀의 의연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일본에 의한 수많은 전쟁 희생자들의 투쟁을 도와 인도한 일, 그리고 일본의 지원자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셨던 것에 우리는 깊은 경애의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당신을 만나 함께 싸울 수 있었던 것을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전후 책임을 묻는 관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하나후사 도시오(花房俊雄) · 하나후사 에미코(花房恵美子)
■ [추도사] 4
이금주님, 고이 잠드소서.
이금주님의 부고를 접하고, 관부재판을 함께 투쟁한 히로시마의 우리들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언제나 등을 꼿꼿이 세우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던 이금주님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금주님과 우리의 인연은 20세기 마지막 해 히로시마에서 시작된 관부재판 2심 때부터였습니다. 원고인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에 오셔서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에 묵고, 그리고 히로시마현 내를 함께 이동하면서 원고들을 격려하고 지지해 주셨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히로시마 시내 교회 앞을 지나가다 "제 결혼식은요 교회에서 올렸어요. 남편은 턱시도에 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요. 당시만 해도 교회에서의 결혼식도 웨딩드레스도 드물었어요." 라고 말씀하시던 이금주님의 눈은 아득히 먼 곳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몇 년 전 병문안을 갔던 요양병원 머리맡에 십자가와 함께 그 결혼사진이 걸려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것이 이금주님에게 있어서 인생 최고의 때였겠지요. 그런 만큼 신혼생활 2년을 겨우 넘기고 일제에 남편을 빼앗겨 나락으로 떨어진 아쉬움은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합니다.
99년 겐보쿠 3차 사이젠지에서 열린 '고보댐 강제연행 희생자 추도식'에 참석했을 때 이금주 님은 흰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한일 시민연대의 유대를 맺는 동시에 의연하게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우리가 광주에 갔을 때는 '양심적인 일본인 환영' 이라고 벽에 벽보를 붙이고 환영을 해주셨습니다. 일본 사회에 있어서 미력한 저희들을 큰 품으로 맞아주셨던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금주님의 그 불굴의 투지와 너그러운 마음을 우리는 이어받아 일본사회가 아직 이루지 못한 숙제를 풀어 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수십 차례 바다를 건너며 맺은 한일 시민연대의 유대를 이어가겠습니다.
이금주님, 부디 편히 잠 드십시오. 그리고 79년 만에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남편 김도민씨와 이번에는 천천히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2021년 12월 13일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히로시마연락회' 전 대표 도이 게이코(土井桂子)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겐보쿠연락회' 전 대표 후쿠마사 야스오(福政康夫)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야마연락회' 전 대표 스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
■ [추도사] 5
이금주씨의 부보를 접하여 삼가 애도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품과 고상함에 늠름한 치마 저고리 차림이 눈에 선하게 남아 있습니다.
상냥한 행동, 따뜻한 배려와 때로는 부정의에 대해 격렬히 싸우는 자세가 심금을 울린 적도 있었습니다.
마음 편안하게 주무십시오.
후쿠오카시(福岡市) 쥬오쿠(中央区) 게이고 (警固)3-3-11
이 법률 사무소 변호사 이박성 올림
■ [추도사] 6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랫동안 항상 투쟁의 앞장에 서서 모두를 이끌고 온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는 전쟁터에 끌려 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남편과 함께 천국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은 둘이만의 영원한 행복한 시간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에서 이양수 올림
■ [추도사] 7
경애하는 이금주 회장님이 주님의 불림을 받고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에 심심한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험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초로서의 꿋꿋한 삶과 정열을 잊을 길 없습니다.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를 대표로 많은 수고를 하시고 규슈에 오셨을 때에는 고쿠라교회에서 하룻밤 쉬시고 가신 추억이 새롭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남은 동지들과 한일 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장례를 통하여서 조문객에게 위로와 한국사회에 정의로운 역사를 위한 행동을 생각하는 때가 되길 기도합니다.
2021.12.14.
재일대한기독교회고쿠라교회 목사 주문홍 · 신도 일동